당신이 외우는 시 한 편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 열 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 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이미라의 만화에서였다. "바람의 노래, 달 그림자"라는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천년이나 연인을 기다려온 한 여인이 설움에 겨워 현세에 다시 태어난 정인을 보며 읊었던 시였다. 소재에 비해서 전개가 식상했지만, 이 시만은 참 인상 깊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복사를 했는데, 십년도 더 전에 300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먹물이 많이 쓰여서 복사비를 많이 청구했단다.)
그리고 나서 일년 뒤 문학 시간에 이 작품을 배웠다. 당시 우리 문학 선생님은 별명이 '백조'였는데, 정말 우아함의 극치를 달리셨던 분이다. 생김새는 왕비상이었고(사주보는 사람의 말이 그랬단다) 말씨도 나긋나긋, 행동도 너무나 품격이 있어보였던 그 선생님은, 자습서에나 나오는 그런 설명으로 문학작품을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당신의 해석으로 재탄생한 시들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이분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다 외우시는 분이었는데, 낭송하실 때 그 모습을 감상하는 게 나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고3 수업을 다 마치고 혼자 울기도 했는데, 이 명강의를 다시 못 듣는다 생각하니 억울해서였다.
이 시도 선생님께 배우면서 더 좋아졌었다. 조지훈 시인이 워낙 시를 잘 쓰기도 하셨고...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여기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긴 기다림이, 그 지극한 사랑이, 이제 원한으로 바뀌어버린... 시를 감상하는 사람에게도 그 절절함과 서러움이 전해진다.
테마참여 한 번도 못했는데, 좋은 테마가 보이길래 처음으로 참여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