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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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였을까.  난 이 작품의 배경이 1900년대 초중반, 그러니까 식민치하의 조선이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초반에 바리가 사는 곳 풍경과 시대 느낌이 왜 이렇게 낯설까 당황했었다.

착각에서 빠져나오자 읽는 속도가 제법 붙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바리는 7딸 중의 막내였고, 어려 신내림이 있은 후 말 못하는 언니의 속울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7번째 강아지 칠성이의 목소리도 알아듣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설화 바리공주에서 차용된 이름 바리.  내리 딸만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워 버려졌던 아이를 데려와 붙여준 이름 바리.  설화 속의 바리 공주는 자신을 딸이라고 버린 그 부모님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끝내 생명수를 구해 오는 인내의 여인이었다.  작품 속의 바리는 자신의 가족 누구도 구해내지 못한다.  굶주림이 온통 뒤덮어버린 북한 땅에서 그녀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함께 남은 몸 약한 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가족 찾으러 떠나셨지만 돌아오시지 못했고,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마저도 한 순간에 잃어버린다.

살아남기 위해 어디로든 가야했던 그녀의 정처 없던 발걸음은 힘겹기 그지 없었다.  중국 땅에서 발맛싸지 하는 법을 배워 취직도 했지만, 보호자 역할을 해준 샹 언니네 가족이 사기 사건에 연루되면서 중국 땅을 도망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인신매매 되다시피 해서 영국 땅에 밀입국한다.  산 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졌지만 이국 땅에서 이겨야 했던 삶의 신산함이 어디 가벼웠겠는가.

영국 땅에 정착한 바리는 건물 관리인 압둘 할아버지의 손자 알리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지만, 그녀에게 행복한 미래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걸어나가는 길목에서는 역사적으로 큰 획을 그었던 굵직한 사건들이 두루 지나가는데(이를테면 9.11테러), 그 모든 사건들은 그녀에게 '삶' 그 자체로 다가왔고 그래서 독자는 '소설'이 아닌 '사실'로서 작품을 만나게 된다.

놀랍게도, 커다란 비극과 맞닿아 부서지는 삶을 보여주는데, 작가는 한 번도 흥분하는 적이 없었고, 주인공 바리 역시 목놓아 우는 절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소리없는 흐느낌과 잔잔한 울음은 그러나 독자를 더 큰 슬픔 앞에 놓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대작가의 힘일런가 나는 잠시 숨을 멈추어 보기도 했다.

설화 속 바리 공주는 끝내 생명수를 얻어와 해피엔딩을 맞는다지만, 우리의 바리는 생이별이라는 슬픔만 만났을 뿐, 소생의 기적은 맛보지 못한다.  긴 인생을 살아내신 시할아버지 압둘은 그녀에게 말해준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 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희망, 가질 것이라고는 희망 밖에 없는 사람에게 희망의 상실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어쩌면 가질 게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주는 헛된 바람일 수도 있겠다. 설령 살아 다시 만나지 못하는 소망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그 희망에 매달려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한 발을 내딛으며 살아간다.

죽다가 살아 돌아온 알리와 재회한 그녀가, 뱃속에 아기를 가진 채 희망을 만들어갈 때에도 또 다른 테러가 런던을 덮치고, 그 사고 현장을 떠나는 바리와 알리의 두 눈은 온통 눈물로 젖은 채 작품은 끝을 맺는다. 

겨우 찾은 희망은 너무도 쉽게 절망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온 세상을 구원할 생명수 따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삶을 위협하는 고통과 직면할 우리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생존 자체의 위협을 받으며 절망의 삶을 살아내기도 할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오고 가며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고 산 자의 염원을 들을 수 있는 바리도 해낼 수 없는 금지된 영역. 

그러나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우리네 삶의 치열한 고백.  압둘 할아버지는 또 말씀하셨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다.  우리가 약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저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좀 더 나아질 거다.

힘센 자의 교만도, 힘없는 자의 절망도 모두 우리 것이 아니기를 소망하며, 세상의 모든 바리공주가 희망이라는 생명수를 꼭 찾아내기를 바라며 작품을 놓는다.  그리고 그 생명수가 단지 '희망'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보듬어줄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또한 간절히 소망한다. 

삽화와 함께 다시 만난다면 더 애틋할 수도 있겠으나, 표지는 작품과 너무 안 맞는 분위기다.  작품에 대한 그 어떤 편견을 갖지 않게 하려는 의도적 장치일까?  아무튼, 나로서는 황석영의 작품들을 더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긴 목울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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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7-09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아서 들렸습니다. 참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추천하고 갑니다.ㅎㅎ

마노아 2007-07-09 14: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결님~ 힘이 되는 메시지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