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세로 세계사 3 : 중동 - 화려한 이슬람 세계를 찾아서 가로세로 세계사 3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7년 3월
구판절판


이슬람은 현대 유럽문명의 어머니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야. 십자군 전쟁을 치루면서 기독교도들은 훨씬 앞서 있던 이슬람 문명을 배워 유럽에 전했고 이로써 유럽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접어들게 되지. 이슬람문화의 가장 큰 공로는 예술, 철학, 자연과학 등의 보존이었어.
서양 자연과학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도 아랍인들의 기록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망각의 세계에 묻혀버렸을 거야.
또 아랍인들이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항해에 나서지도 못했겠지.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머릿속으로만 우주를 다루던 데 비해 아랍인들은 모든 것을 실험, 실습을 통한 증거에 바탕을 두고 연구했어. 그들의 과학적 방법은 현대과학의 기틀이 되었단다.
그들은 상업과 공업, 건축에 뛰어났고, 수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겨서 기하, 대수, 삼각함수 등을 이미 사용해 현대수학의 기초를 이뤘어. 특히 복잡하고 불편한 로마의 숫자에 비해 아라비아 숫자는 대단히 간편하고 분명했지.
MCCXXXIII=1233
수많은 별들의 이름이 아랍어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또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지배했기에 지리와 측량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자랑했지. 그러나 무엇보다 이슬람세계가 단연 앞선 분야는 의학이었어. 유럽인들이 병을 악마의 장난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려 기도와 주술에 의존하고 있을 때 이슬람의 의사들은 이미 과학적인 치료제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세계를 휩쓴 흑사병이 세균에 의한 전염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유럽이 깊은 종교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을 때 이슬람 세계는 앞선 문명을 이루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 문명의 빛은 계속 서쪽으로 뻗어나갔지.

-82-84쪽

이슬람교는 알리 문제로 크게 두 파로 나뉘어 혈통과 정통성을 앞세워 알리가 칼리프가 돼야 한다는 무리와 알리가 아니더라도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르는 훌륭한 인물이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무리로 엄격하고 극단적인 알리 지지파를 시아파(이란), 보편성을 중요시하는 무리를 수니파(75% 이상 무슬림)라 하여 수니파와 시아파는 지금까지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는 거야.-93쪽

알리의 죽음은 이슬람교의 한 시대가 막을 내 리는 것이었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이 네 명의 칼리프들은 모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가족들로 최초의 무슬림들이며 무함마드를 통해 신의 계시를 직접 듣고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직접 받으며, 그의 언행을 본받은 최초이자 최후의 정통 무슬림으로 이 네 명의 후계자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해(632-661)-94쪽

옴미아드 왕가의 상징은 흰색 깃발이었어. 그런데 이란 북동쪽 호라산에서 일어난 아바스 가문이 검은 깃발을 내세우며 749년 허약해진 옴미아드 왕조를 공격해 쓰러뜨리지.
750년 아바스의 흑색군단은 옴미아드 일족을 모조리 색출해 살해했고 옴미아드 왕조는 채 90년도 안 되어 멸망해 아바스 왕조가 탄생한 거야.
모조리 살해당한 옴미아드 가문에서 단 한 사람의 왕자가 생명을 건져 도망쳤는데 그가 바로 아브드 알라흐만이었어. 그는 스페인 땅으로 피신하는데 성공. 이슬람 군대를 규합해 스페인 최강의 군대로 만들었는데 756년 수도 코르도바를 정복하고 전 스페인의 통치자가 되어 後 옴미아드 왕조를 열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란 칭호에 대항해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 드디어 동 칼리프, 서 에미르 시대의 막이 열렸던 거야.-99-100쪽

이슬람 세계가 아바스 왕조의 등장과 함께 둘로 나뉘어 동쪽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와 서쪽 아프리카와 스페인에 세워진 후옴미아드 왕조의 에미르는 대립하고 반목했어도 집안끼리의 원한 때문이지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어.(우리는 수니파!)
그런데 이 두 왕조 사이의 북부 아프리카 이집트 지방에서 알리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한 세력이 등장했으니 이들이 바로 시아파가 세운 파티마 왕조였지.-105쪽

재미있는 사실은 십자군전쟁이 유럽에서만 큰 사건이었다는 거야. 이슬람의 역사나 아랍의 역사에선 아주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당시의 서유럽은 이슬람세계에 비해 극히 뒤떨어진 후진세계였고 동로마제국보다 의미가 작은 야만적인 변방에 지나지 않았거든. 그래서 이슬람 역사에선 십자군 전쟁을 셀주크튀르크와 기독교도들의 싸움으로 작게 취급해. 그러나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에서 '가져온'(뺏어 온, 또는 훔쳐 온...;;;;)문화와 기록으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드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돼.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십자군전쟁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데 그건 서유럽 중심으로 본 세계사이기 때문이지. -117쪽

인도 북부는 일찍이 이슬람세력이 뻗어오긴 했으나 몽골계 티무르제국에 속했다가 1405년 티무르가 죽은 뒤 그 자손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갈라졌지. 거의 100년이 지난 뒤인 1496년 티무르의 손자를 자칭하는 바부르가 강력한 정복자로 떠오르는데,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힌두교도 연합군을 무찌르고 인도 땅에 이슬람제국을 건설하니 이것이 바로 19세기 중엽까지 북부 인도를 지배했던 무굴제국이야. 그의 손자가 악바르. 무굴제국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지.

악바르의 손자는 샤자한. 예술을 사랑하고 문화를 꽃피운 명군이지만 1631년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이 세상을 떠나자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어. 샤자한은 아내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묘지 건설을 명령했지. 뭄타즈 마할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묘지가 남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인도 이슬람 건축의 최고봉이라는 타지마할이야. -136-139쪽

샤자한의 두 왕자 다라시코와 아우랑제브는 왕위 계승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말아. 1658년 동생 아우랑제브가 승리하자 아버지인 샤자한을 체포해 가두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 르지. 아버지 샤자한은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뒀고, 형 다라시코도 끝까지 추격해 죽이고 말았어. 아우랑제브는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렸으며 음악을 금지시켰고 모든 역사 기록을 금지시켰지. 이때부터 무굴제국은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 1738년 멸망하고 말았어.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이슬람제국은 멸망했으나 인도인 무슬림은 인도 전 지역에 퍼져 힌두교도와 대립하게 됐어. 수억의 신을 지닌 대표적 다신교인 힌드교와 오직 하나의 신을 믿는 엄격한 유일신교인 이슬람교의 대립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하면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수천만 명씩 고향을 떠나 민족대이동을 한 끝에 동 서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되면서 끝나. 오늘날 서파키스탄은 파키스탄이 되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됐지. -139-141쪽

고향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디아스포라(분산)됐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고향 잃고 쫓겨 온 이들을 반겨주지 않았어. 특히 기독교 세계가 이들을 천시하고 박대하여 이들이 자기네 터전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하도록 절대 토지를 가질 수 없게 했고 직업도 못 갖게 해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한 거야. 자연히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이 기피하는 돈놀이, 즉 금융업을 주업으로 하게 됐고 금융업으로 돈을 번 유대인들이 늘어나면서 기독교도들의 미움은 더욱 커졌어. 유대인은 돈을 '상품'으로 본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최초의 민족으로 오늘날의 세계, 특히 초강대국 미국의 금융계,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들이지. -173쪽

영국 총리로 전쟁을 이끌던 처칠이 강력한 시오니즘의 지지자였고 유대인 지도자 차임 바이츠만에게 유대인 구 ㄱ가 건설 지원을 약속한 바 있었거든. 그러나 전후 1945년 7월, 영국의 총선거에서 처칠의 보수당이 패하고 애틀리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내각이 출범하면서 시오니즘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이 크게 달라졌어. 독립국이 된 아랍국가의 수가 많은 데다 석유의 힘이 막강했던 만큼 중동에서의 영국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외무장관 베빈이 아랍을 지지하며 유대인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거야.

그러나 유대인 국가 건설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돼.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바로 그였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세계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합중국의 대통령. 그의 영향력은 영국 외무장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어.

1945년 7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유대인 피난민에 대한 긴급 구호를 역설했어. 영국을 대신해 이제 유대인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된 거야. 이때부터 미국은 전 아랍세계와 적이 됐던 거지. -182-184쪽

UN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무런 문제 해결 없이 물러날 경우 유대인과 아랍국가들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1947년 4월 2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내놓았어. 팔레스타인을 3지역으로 나누어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를 세우되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국제 지역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로 1948년 5월 영국 철수 이전에 평화적 분할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였어. 유대인들은 당연히 대환영이었지. 그러나 아랍권은 결사반대했어. 영국과 미국 국무부도 반대했지만 미국의 경쟁자 옛 소련이 이 안에 찬성하자 미국 트루먼 대통령도 지지했어. 유대국가 건설에 미, 소 두 나라가 지지하자 아랍국가들은 긴장하여 아랍국가들의 동맹체 아랍연맹은 급격하게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했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947년 11월 29일 UN에서 가결됐어. -186-188쪽

1948년 5월 14일, 영국 국기가 내려가자 즉시 뒤를 이어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되고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지. 이로써 2,000년 만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탄생했고 미국의 국무장관 마셜은 석유와 아랍세계와의 외교관계를 우려해 이스라엘 인정을 반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즉각 주권국가로 인정했고 소련과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전쟁이었다.-190쪽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그 날, 이집트 전투기들이 즉각 텔아비브를 폭격하고 전 아랍은 전쟁 물자와 군대를 동원해 전시체제에 돌입했어. 이 전쟁이 '이스라엘 독립전쟁', 또는 제1차 중동전쟁이야.(1948.5.16-1949.2.24)

총 인구 1억 4천만 명에 달하는 5개 아랍국이 연합하여 고립된 65만 명의 유대인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영국식 교육을 받은 아랍 정규군에 비해 유대인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어. 처절한 전투가 20일 넘게 계속됐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텔아비브를 끝내 지켜냈고 전 세계는 크게 경악했어.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됐지. 잠시 휴전이 되자 이스라엘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무기와 군수품이 대거 유입. 이스라엘군은 단시간 내에 강력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모했어. 평화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선수를 쳐 카이로, 다마스쿠스, 암만(요르단 수도)을 폭격하고 육군은 탱크를 앞세워 아랍 영토를 정복해나가자 아랍권은 물론 전 세계가 크게 당황했고 7월 18일 두 번째 평화 협상이 영국의 주재로 다시 시작됐어. 1949년 2월 이집트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된 후 이스라엘은 세계 각국의 인준을 받았어. 이로써 UN이 인정해 팔레스타인 지방에 세워지기로 했던 아랍국가는 물거품이 되고 이 지역 주민은 하루아침에 옛 유대인처럼 난민으로 전락한 반면 오로지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모든 ㄴ영토를 차지하게 됐지. -191-193쪽

1952년 7월 이집트에 쿠데타가 발생해 청년 장교 나세르가 이집트의 통치자로 떠올랐어. 1954년 대통령이 된 그는 1970년까지 1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이스라엘을 돕는 미국에 앙심을 품고 중동 진출을 노리는 소련과 손잡아 아랍연맹의 통일을 꾀하자 미국과 영국은 아스완댐 건설 등 나세르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지. 이에 나세르는 이집트 영토에 있지만 소유권은 영국과 프랑스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어. 영국과 프랑스가 가만있었을 리 없었고 이 기회를 틈타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낭니 반도를 침공했어. 그리고 2일 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공군이 수에즈를 공격했어. 전세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유리했지만 자칫 이 전정은 세계대전으로까지 번져갈 조짐이 보였던 거라고. 당황한 미국이 이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소련도 위협하여 세계여론까지 이들에게 불리해지자 UN도 긴급총회를 소집해 철군안을 채택했어.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돼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했는데 이를 제2차 중동전쟁, 또는 시나이전쟁이라고 하지. -194-195쪽

세 번째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지. 이 전투에서 아랍권은 전투기 716대를 잃고 이스라엘은 26대를 잃었어. 공군이 무력화된 아랍권은 불과 이틀 만에 패색이 완연했어. 공중전에 이은 탱그전에서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군은 밀리기만 했고 결국은 이 전쟁은 6일 만에 아랍권의 패배로 끝나 제3차 중동전쟁을 '6일전쟁'이라고 불리지.

이 전쟁에서 아랍군 1만 5천 명이 죽거나 다친 반면, 이스라엘군 피해는 사망 777명, 부상 2,186명이었어. UN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정전안을 6월 9일 양측이 받아들여 중동엔 다시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지.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땅은 약 7만2천 km2였다.-197-198쪽

1973년 10월 5일, 이집트군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어. 이날은 이스라엘의 종교 축제일인 욤키푸르(속죄의 날)이었고 그래서 이 전쟁을 '욤키푸르 전쟁'이라 부르지(1973.10.6-1974.1.18).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1/3, 무기는 반도 되지 않았지. 패전에 패전을 거듭, 개전 48시간 만에 17개 여단이 전멸,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포위되어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다름이 없었어. 이 화급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대적인 이스라엘 지원에 나섰는데 욤키푸르 전쟁에 소련이 35억 달러, 미국이 22억 달러를 쏟아 부음으로써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으로 성격이 변하고 말았지.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어. 미국의 지원으로 전력을 정비한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서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군이 포진한 골란 고원을 집중 공격했지.

북부 전선에서 승리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와의 전선에 총력을 집결하여 이집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공세를 퍼부어 또다시 이집트는 패전의 피눈물을 삼켜야 했어. 결국 네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났어. 그러나 승리한 이스라엘도 상처투성이였지. 이스라엘군은 이 전쟁에서 점령한 골란 고원에서 철수를 거부하고 계속 점령지에 머물며 UN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니 세계 여론이 좋지 않았어. 또 날이 갈수록 석유의 중요성이 커져 이스라엘에 지지를 보내는 나라들이 줄어들어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은 국제적 동정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단다.

네 번에 걸친 중동전쟁에 모두 패한 아랍권은 1973년 10월 17일, 아랍 산유국 석유장관들이 모여 '석유의 무기화'를 결의했지. 유가는 폭등하고 세계경제는 대혼란에 빠져들었어. 이것이 1973-1974년에 터진 이른바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고 또 한 번 1978-1980년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석유 무기화가 얼마나 무서운가 절감케 했단다.-200-203쪽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의 분위기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어. 1977년 11월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에 이집트 비행기가 착륙했어. 그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바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여기에서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총리가 포옹을 한 거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순간이었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이집트 영토에서 물러나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조건이었어.

이들은 1978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캠프데이비드에서 만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이 두 나라 사이엔 평화가 정착됐으며 그해 노벨평화상의 수상자가 됐단다. -206쪽

유일한 해결책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이야. 그러자면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는 데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테고 주변 아랍국가 또한 새 아랍국가가 생기는 걸 반기는 분위기도 아니며 이스라엘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철수 거부도 또 하나의 걸림돌로 등장했어. 그러나 모든 문제의 실마리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아랍세계가 인정하느냐에 달렸어. 현재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아랍국가는 이집트와 요르단뿐.
(이집트 : 1967년 점령된 시나이 반도 반환조건/요르단 : 1967년 점령된 영토반환조건)-229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4-1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세계는 역시 '역사'라는 길고 긴 시간을 들여 서로 서로 인간들이 문화를
주고 받으며 진보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나라들의 선진 문화가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 후엔
반대로 현재의 영광을 누리는 나라가 선진 문화를 과거의 '선배'에게 되돌려 주고
있는 셈이랄까요. 또 미래의 영광은 어디에게로 향할지는 모릅니다만.
서로 이어달리기의 바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작업중"이란 제목에 처음엔 엉뚱하게, 두번째에는 '하드 고치는 중' 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습니다만. 완전히 예상 밖의 결과입니다. (웃음)

마노아 2007-04-16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쓰다가 하드 고치는 것 때문에 급하게 나가느라고 저장할 틈이 없었어요. 일부는 글 쓰던 게 날라갔고, 처음 것만 살린 건데 그래서 제목도 급히 '작업중'이 되어버렸죠. 그나저나 심각해요. 흑흑..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