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 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2월
구판절판


'무오사화'로 명명된 이 옥사의 승자는 누구일까? 외형적으론 상을 받은 훈구파들로 보인다.

주연이 유자광이었던 것은 맞지만,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다. 사건의 총감독, 바로 연산이다. -78쪽

취향에 관해서 연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그러나 둘의 기질은 결정적으로 달랐으니...

연산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
성종은 시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고, 신하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연산은 지어 올리게도 하고 지어 내리기도 했다.

성종은 좋아하는 매를 기르는 것도 대간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연산은 매에다 사냥개까지 맘껏 길렀다. 심지어 개들이 조회하는 내정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임금의 모든 것은 정치이고,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다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산은 정치와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려 했다. -90-91쪽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갑자사화의 임상홍에게선 무오사화의 유자광 같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갑자사화는 연산이 각본, 감독, 주연까지 겸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연산은 그 과격함과 갑자사화의 시작에 대한 <일기>의 오보로 인해 매우 충동적이란 인상을 주지만, 사실 꽤나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힘이 약할 땐 다른 힘을 빌릴 줄 알았고, 속내를 숨긴 채 때가 무르익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줄 알았다. -118-119쪽

연산은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비판했던 신하들을 생각나는 대로 잡아들였고 어머니의 추숭을 반대했던 이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감옥이 모자라 잡아온 이들을 바깥에 둘 수밖에 없을 정도였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 얼굴이 장대에 걸리었다. 대신도 대간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런 것뿐이었다.

"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상교가 참으로 지당하시옵니다."

모두들 제 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휴~오늘도 살아남았구나!"-134쪽

유교정치는 왕권의 지나친 확대를 견제하는 장치를 담고 있어서 유교정치가 자리잡을수록 군약신강의 양상이 나 타나게 된다.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이나 세조는 신하들의 견제장치를 크게 제한했다. 경연을 정지시키고 대간들의 활동도 위축시켰다. 하지만 태종조, 유교보다 불교를 더 숭상했던 세조도 대간 그 자체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대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국시를 거스르는 반체제적인 행위라 하겠다. 그러나 연산은 달랐다.

연산은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이 폐지되고 사헌부도 축소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기능만 남겨놓았으며 홍문관도 폐지되었다.

견제장치들을 제거한 연산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사실상 정지시켰으며, 과거도 경전 대신 율시로 대체했다.

연산은 유교식 장례나 제례도 못마땅했다. 어머니를 죽인 할머니 인수대비가 미워서 그녀의 장례절차를 대폭 축소해버리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일기>는 쓰고 있지만, 이보다 앞서 죽은 예종비 안순왕후(인혜대비)의 장례 또한 그랬다. 친모인 폐비 윤씨의 제삿날엔 후원에서 여럿이 보는 가운데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146-148쪽

연산은 폭압을 통하여 황제적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연산군보다도 더 가혹한 정치를 하고도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다. 그런 황제들의 공통점은 신하들에게 가혹했지만,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산에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다.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만이 지상목표였다. -150-151쪽

연산은 예술 방면이 발달한 사람이다. 시를 좋아했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특히 처용무를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모두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죽은 자의 우는 연기라도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통곡의 자리로 바뀌곤 했다. 그의 미의식은 웅장 화려함을 추구했다. 새롭게 짓는 이궁의 정전은 청기와를 덮도록 했으며, 규모도 크게 지었다. 기생들은 물론 궐 안의 노비들도 깨끗한 옷을 입도록 명했고, 서민들에게 넓은 소매를 권장했으며, 품계가 낮은 신하들에게도 흉배를 달게 하고 비단옷을 장려했다. -155-156쪽

연산의 최측근 인물은 바로 장녹수. 집안이 가난하여 여러 번 시집을 갔는데 마지막으로 결혼한 이는 제안대군 집의 가노였다. 가의 아들을 낳은 뒤에야 노래와 춤을 배워 창기가 되었다. 연산을 만났을 때의 그녀를 사관은 이렇게 묘사한다.

"나이는 서른, 얼굴은 보통!"

비천한 신분에다 이렇듯 내세울 것 없는 그녀가 어떻게 연산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열여섯으로 보였다고 할 만큼 피부가 고왔고, 동안이었던 모양. 그리고 견줄 이 없을 정도의 빼어난 교태가 그녀의 무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파악이지. 나는 주상의 기질, 취향, 버릇, 약점까지 다 꿰고 있걸랑.'

때론 어린아이 다루듯 조롱하고 반말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종 부리듯 하였다. 연산은 이에 대해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리 화가 났다가도 그녀만 보면 눈 녹듯 풀렸다. 연산은 때때로 그녀와 함께 그녀의 친정을 찾곤 했는데, 둘의 모습은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세도가 오죽했을까?-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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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3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치게 강한 카리스마는 스스로를 '혼자'라는 고독속에 갇히도록 하지.
그러니까, 세상 모두가 자신의 옷자락 밑에서 벌벌 떨기를 원하면서도 - 한편으론,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고, 자신을 자식처럼 편하게 대해 줄 '절대적인 누군가'를
원한 것은 천재적이지만 불쌍한 독재자들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장녹수'에게 꼼짝못했던 것은 당연한 심리 현상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웃음)

마노아 2007-03-3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그대로 같아요. 불쌍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가 광해군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은 열받아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