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가볍게 읽기 시작한 터라 아무 부담도 없었고, 기대도 실망도 없던 시작이었다.

작품은 간결했고 깨끗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처럼.

불의의 교통사고로 1975년에서 기억이 멈추어 있는 64세의 수학박사(1991년 시점으로).  그의 기억력은 80분을 지속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버리면 1975년 이후의 기억은 모두 '리셋'이다.

벌써 9차례의 파출부가 바뀌었고, 새로 바뀐 파출부인 '나'가 박사를 돕게 되었다.

미혼모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파출부'였던 나는, 열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박사는 아이를 혼자 방치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하는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오게 만든다.  아이의 머리가 평평해서 '루트'라는 이름을 쥐어준 박사는, 아이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스한 정을 쏟아주며 아이를 보살펴준다.

그 자신 늘 어눌하고 서툴렀음에도, 아이가 있는 순간에는 언제나 예의바르고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박사, 그러나 박사는 언제나 80분만큼만 기억하므로 이들의 관계는 매일 아침 새로운 관계로 시작된다.

박사는 양복 가득 클립으로 고정한 메모지에 자신이 기억해둬야 할 것들을 적어두었다. "새로온 파출부와 그녀의 아들"

"내 기억은 80분만 지속된다"라는 무섭고도 잔인한, 그러나 그의 혼란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 등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와 루트는 박사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똑같은 인삿말을 반복하여도 지루해하지도 않고 짜증내지도 않고 오히려 박사가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박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소수'와 그밖의 자연수와 유사수, 우애수... 기타 등등... 온갖 수학적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세상에... 그토록 싫어했던 수학이 이토록 경이롭게 느껴질 거라고는 이 책이 소설이라고는 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옮긴이의 역할이 꽤 크다고 보이는데 김난주씨 번역을 많이 접했지만, 이번 만큼 만족스러웠던 적은 또 없었을 만큼, 이 작품은 우리말로 쓰여진 문학만큼 자연스러웠다.

저자가 참고한 수학 책이 뒤에 나열되어 있는데, 생각보다는 적은 권수였다.  그 안에서 여기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찾아내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그 안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온갖 군상의 사람들이 다 모인 듯 꽉 찬 느낌이 든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나'의 성장배경에서 역시나 미혼모였던 어머니(루트의 외할머니)가 역시나 미혼모가 되어버린 딸로 인해 받은 상처라든가, '나'가 생존을 위해 파출부 일을 시작한 것, 혼자 자라다시피 하는 아이가 박사라는 존재의 든든함으로 얻게 되는 위로, 그리고 친구가 되어주는 모습, 아이를 최우선으로 놓으며 '칭찬'을 먼저 앞세우지만, 그 자신은 칭찬이란 것을 받을 줄 모르는 박사의 어리고도 성숙한 모습, 또 박사와 '나'의 관계에 질투를 앞세운 미망인의 모습...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아마도 조금은 슬픈 결말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뚜렷한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아름다운 결말이 아닐까 생각하며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만약 기적이 일어나 박사의 기억이 회복된다던지 했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감동이 줄어들었을까.

박사가 남겨준 유산(물질적 유산이 아니다)을 '나'와 루트가 어떤 식으로든 이어가는 모습에 내 마음도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들고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알려준 건데, 곧 영화로 개봉한다고... 오홋!  과연 극장에서 볼 수 있을 지 당장 자신은 없지만 어쨌든 기대된다.

진짜 요새는 일본문학이 대세인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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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18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마노아님 수학잘하시는 가보다. 저는 수학 잘 못했거든요. 아무튼 리뷰 잘보고 갑니다. 주말 잘보내세요.

마노아 2006-11-18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고, 그렇지 않아요. 수학 잘 못했답니다. 그치만 책에서 수학이 이렇게 멋진 거였구나... 하고 알았죠^^ 산타님도 멋진 주말 보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