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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ㅣ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존경하는 로렌초님께.
저 역시 당신께 '일 마니피코'라는 경칭을 붙이지는 않겠습니다. 굳이 붙이지 않더라도 당신의 40여년 생애와 지금까지의 500년 세월 동안 당신은 충분한 위대함과 화려함으로 채색되어 있으니까요. 사실 전 아직 그런 당신을 가까이서 모신 적이 없는, 당신의 미켈란젤로와는 격이 다른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아직도 제게 작은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미완성의 퍼즐입니다. 이 퍼즐의 완성은 영영 요원할 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 빈 조각 사이를 당신을 향한 제 흠모로 채우는 지금이 저에게 더 행복한 것만은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500년 전에도, 후에도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던 당신에게 던져진 삐딱한 시선을…… 그는 파치같이 당신의 행운을 시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모든 역량-행운과 재능-을 쏟아부어 당신 자신의 위대함과 피렌체의 번영을 이룩했음을 누구보다 장엄하게 칭송했지요. 그러나 그러한 당신의 치세 동안에 피렌체는 길들여졌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렌초 일 마니피코 아래서만 번영할 수 있는 도시로 말입니다. 설령 당신의 후계자가 피에로가 아닌 다른 이였더라도 떨어진 꽃을 다시 피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당신의 목표는 현 상태의 유지였습니다. 풍부하다 못해 한 때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던 피렌체의 재정을 이용한 군사 행동으로 소국의 병합 정도는 꿈꿀 수도 있었을 테지만 당신은 루도비코 일 모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끝을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피렌체 시민과 이탈리아의 피를 원치 않은 것입니다. 그 생명들이야말로 당신이 딛고 선 굳건한 대지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당신이셨으니까요. 설령 그 배경에 당신 이면의 정치적 책략이 있었더라도 저는 이 또한 사랑의 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이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야망'대신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이라는 '희망'을 선택함으로써 르네상스와 피렌체의 꽃은 비로소 활짝 핀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함으로 이미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당신의 조용한 현상유지는 안정을 원하던 피렌체 시민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삐딱한 사나이', 마키아벨리의 어떤 정치론에서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위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나선 시대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마키아벨리라는 사나이는 지난 시절을 자주 돌아볼 만큼의 여유는 없었지만, 그의 안목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의 시대에 이성(理性)의 지도자인 로렌초, 당신의 자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이미 때는 모든 이성을 집어삼킨 전쟁의 시대였고, 마키아벨리는 그 끝을 체사레에게서 찾았던 거지요. 그래도 전 지금 쉼없이 변하는 스릴이 있는 어둠의 마키아벨리보다 조용한 가운데 잔잔한 낭만이 있는 빛의 당신에게 가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 속에 저의 자리를 마련해주세요. 그곳에서 당신의 친구로서 사랑을 나누겠습니다. 미래가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저 역시 믿고 있으니까요. 안녕히 계십시오.
어두운 밤 기숙사에서
사랑의 통치자께 당신의 시민
(2000. 3. 15∼24, 2000. 3. 14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