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함락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0
시오노 나나미 지음, 최은석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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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 따위는 없었다. 이런 책을 읽는 데 있어서 이유란 것은 단지 쓸모없는 잡동사니에 다름 아니었다. 희대의 대작이 될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가 쓴 책이라는 것도, 아예 사관학교에서 전쟁사 강의를 하는 옮긴이도 어서 읽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기에 남고 또 남았다. 콘스탄티노플. 해가 뜨는 곳, '오리엔트'의 어딘가에 있을 듯한, 앞으로도 그 정도로만 알 뻔했던 이 도시는 시오노와 만나며 지는 노을이 더 없이 아름다운 황금의 도시로 화(化)하였다.

 1100년의 고도, 말 그대로 지중해의 보석인 이 도시에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외적의 침입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이 찬란한 보석은 그 모습만으로도 만인을 위압감에 전율케하는 삼중의 견고한 성채 안에서, 언제라도 부르면 모든 침입자를 물리쳤던 '신'의 위력으로 지켜지리라 믿었다.

 이런 도시에 다시금 손을 뻗친 갓 스물의 투르크 젊은이는 역시 달랐다. 그에게는 그만의 신이 있었으며, 그 신을 방패 삼고 8m의 포신에서 600㎏의 포탄을 쏘아대는 거포(巨砲)를 칼 삼아 밀려오는 '알라'의 이민족 앞에 신의 뜻을 찾는데 날밤을 지새던 비잔틴 인들은 애처로우리만치 약했다.

 그나마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상인의 근성이라고는 하지만 무너져가는 제국을 위해서 몸과 마음 모두를 기꺼이 바친, 베네치아의 트레비사노, 제노바의 주스티니아니와 이 둘의 화합을 위해서 고군분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덕이지, '신'의 덕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최후의 이면에서 추기경 이시도로스가 주도한 동 서 합동 미사로 인한 사상적 혼란, 바로 그 신에 의한 혼란이 가뜩이나 현실과 괴리된 철학 논쟁을 일삼는 비잔틴인을 분열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보석은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되었다. 그 광채를 먹고 자라난 서구 국가들에게는 뿌리가 끊어지는 아픔이었지만 이것으로써 세계에는 '무역 국가'가 아닌 '영토 국가'가 데뷔한 것이다. 황금 낙조에 물들어가는 콘스탄티노플은 내가 사랑하는 보석이다. (1998. 3. 21∼30, 1998. 3. 3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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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3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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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홀로 추궁에 시달릴 사랑스런 마르고를 염려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준비된 '미끼'인 카타리나의 수많은 시녀들을 아쉬워했을까?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도 아름다운 여인들과 화려한 사랑만은 소중히 간직하는 그야말로 프랑스의 영원한 연인이자 바람둥이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앞의 미래는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붉게 타오르는 증오와 붉게 물들어가는 피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푸른 물 같은 자유로움으로 파란 하늘을 내달리던 앙리에게는 괴로운 나날이었으리라. 자신의 푸르름을 검붉은 프랑스에 나눠주기 위한 통과의례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피를 원치않았던 것이다. 단지 발루아와 나바르, 기즈의 신이 제각각 피를 원했다. 그렇게 프랑스는 '세계의 지배자' 펠리페의 뜻대로 물들어갔다. 그에 저항하는 앙리에게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경건한 위그노와 방탕한 가톨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앙리에게는 성모의 또다른 모습으로 굳어진 어머니 잔느 여왕과 신에게 거부된 자신의 결혼, 그리고 신에게 미움받는 자신의 사랑들 사이에서. 이런 경박한 생활이야말로 루브르에 있을 때부터 그가 마음 깊은 곳의 웅대한 뜻에 걸맞지 않게 하찮은 어릿광대로 여겨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흔들거리는 나바르 왕의 길을 바로잡는 역할이 바로 모르네에게 부여되었다. 수많은 앙리의 친구들 중에서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덕(德)의 힘으로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앙리는 비롱 원수가 쌓아올린 증오와 복수의 철옹성을 깨뜨렸다. 이 결과 앙리에게는 귀하신 카타리나 태후께서 몸소 행차하는 영광까지 아낌없이 내린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 묘지를 가진 젊은 반란자에게 태후는 상으로 사랑에 굶주린 그의 영원한 반쪽인 마르고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로부터 시작된 마르고의 행복은, 구속의 사슬에 묶인 나에게는 너무도 부러운 것이었다. 유려하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곱게 차려입은 궁정인들과 나누는 고상한 대화. 이것이야말로 비록 기울어가는 왕실의 공주지만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꿈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주고 받는 지극한 사랑. 한 시골 소영주의 아내인 자신의 현실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공주는 더없이 만족했다. 비록 남편의 자유로움이 시작되는 날, 막이 내릴 행복일지라도. 고상하고 차분한 행복의 끝은 그녀의 '딸' 포쇠즈였다. 그녀의 안에 자리잡은 앙리의 고귀한 핏줄을 뒤로하고 앙리와 마르고는 상대방을 향한 복수의 불꽃을 키운다. 이제 앙리에게 그녀는 쓸모 없고, 귀찮은, 게다가 밉기까지 한 악마의 화신에 불과한 것일까? 새하얀 진주에 감싸인 코리상드여, 당신도 기억해야 하리라. 당신의 고귀한 진주들이 원망의 눈물로 맺히게 될 날을. 그렇다고 '미래의 배신자'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거둘 수는 없다. 짧지만 영원할 듯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그가 아닌 그녀일테니. 그 사랑의 힘으로 앙리는 가여운 프랑스 왕까지도 따뜻이 감싸주고 비로소 미래의 그 자리를 약속받는다. 기즈라고 불리던 이는 발루아의 모자(母子)와 함께 깊은 심연 속으로 잠기지만 주인 잃은 왕관만은 깊이 가라앉았던 피의 강물 속에서 떠오른다. 왕관을 푸른 하늘에 장식할 주인이 나왔으니......(2000. 3. 5∼14, 2000. 3. 14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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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2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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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웅장한 음성이 가녀린 여동생을 통해 흘러나왔을 때, 그것은 경고였다. 역사에 남을 피의 물결, 바르톨로메오의 밤, 신이 카타리나의 손으로 펼칠 분노의 무대에 앙리가 주연으로 서리라는, 원치 않는 미래를 부르짖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수없이 이어진 경고를 무시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려 했다면 앙리는 평생을 보내도 부족했으리라. 위그노의 절멸을 뜻하는 학살의 밤을 앞두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앙리에게는 카트린 외에도 수많은 경고와 기회가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자신을 천박한 가톨릭 왕실로부터 구하려는 이들의 목소리를 '자애로운' 마담 카타리나의 품에서 거부한 그에게는 3년의 포로 생활이 보장되었다. 언제나 자유로웠던 청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구속의 시간도 괴로웠겠지만, 혼자만의 외로움을 즐기지 않는 청년에게 어머니와 동격의 자리를 지키던 콜리니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즈 공작이 죽은 콜리니의 얼굴을 밟았을 때, 뭇 여성들이 흠모하는 그의 준수한 얼굴에 새겨진 칼자국을 보았다는 사실 뿐이다.

 성스러움과 고귀한 믿음으로 치장된 이면에 잠겨있던 광신성과, 자신이 수족이라는 사실도 잊은 '수족' 기즈를 아울러 이용한 카타리나의 목적은 체제의 안정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 체제의 '상징적' 지도자인 그녀의 아들 샤를까지도 '아버지' 콜리니의 망령과 함께 떠났으니 결국 이 학살의 밤을 온전히 보낸 사람은 이 뚱뚱한 이탈리아 여인밖에 없었다. 사실 이 여인은 발루아에 의한 프랑스의 평화는 총애하는 아들, 당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겼으리라. 당주뿐만 아니라, '마지막 카드'인 달랑송과 앙리의 사랑 마르고, 이미 없는 샤를도 나라의 가장 큰 악덕으로 자신을 꼽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녀가 자신을 위협하는 위그노들을 몰살시키면서까지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표는 과연 프랑스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위그노라는 불순물을 제거한 순수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를 다스리게 될 합스부르크의 돈 펠리페 아래서 전 프랑스의 '태수' 자리를 얻으려는 뜻에서였을까? 분명한 것은 이 불행한 미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와 기즈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기즈가 추종자들을 모아서 가톨릭 연맹까지 만든 이상에는 카타리나와 그는 프랑스의 태수 자리를 걸고 펠리페 앞에서 충성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럼 나의 앙리는? 그에게 있어 바르톨로메오의 학살을 막지 못한 대가로 받게 된 개종 요구는 그의 어머니가 생각한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앙리가 그 압력 앞에서 길길이 뛰던 콩데보다도 심사숙고했던 것은 다음 아니라 과연 무엇이 어머니와 콜리니 제독, 친구와 신민들을 순교자로 만들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자신까지도 순교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한 때는 동지였던 이들의 정벌에까지 참여한 그의 심중에는 다만 그 생각만이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미래의 대사상가' 몽테뉴와 나눈 대화를 그 생각을 굳히기에 충분했다. 결국 보석으로 치장된 페르시아 왕실에서도, 피로 물든 프랑스 왕실에서도 그는 어릿광대로 남았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알고 있었을까? 이 광대가 콜리니의 유령에게도 숨긴 은밀한 계획을...... (2000. 2. 11∼19, 2000. 2. 19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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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1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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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레네는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품고 있는 새파란 하늘, 나무들, 그리고 냇물 속에서 그 푸르름을 온 몸 가득 채운 소년이 자라고 있었음을...... 하지만 소년이 자리잡은 곳은 그 빛깔에 걸맞지 않은 음침한 속박 속이었다. 어미니의 종교적 야망과 카타리나 태후의 정치적 권모의 틈새가 유년 시절 그의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기 상반된 여인들에게 유효적절하게 이용당하던 그 시절부터 소년 앙리의 탈출구가 여인의 아름다움이었다는 데는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화려한 로맨스는 일찍부터 들어왔었지만 그 시작이 이렇게도 빨랐을 줄이야. 물론 앙리는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 한 과정으로 '종교의 화신'인 잔느의 아들인 앙리가 열렬한 믿음의 길이 아니라 카타리나 태후의 냉정한 현실의 길을 선택한 것은 결국에는 어머니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뜻이었으리라. '프랑스의 왕', 그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 제1의 군주를 자처하던 펠리페 2세의 스페인과 맞닿은 땅, 나바르의 왕위 계승자인 앙리는, 신의 계시를 받은 듯한 어머니와는 달리 자신이 프로테스탄트로서 프랑스의 옥좌에 오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피를 불러올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 모자(母子)가 가장 두려워하는 '음모의 화신' 카타리나 태후의 천적이자 그녀를 능가하는 이가 다름 아닌 펠리페 2세이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 가엾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따르는 신앙의 동지들과 신이 그들을 선택하시리란 믿음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믿음이 아니고서야 한 어머니의 모든 것을 지닌 어린 소년을 적의 소굴에 홀로 남길 수는 없었을 테니. '어린 소년' 앙리에게도 그 믿음이 있었을 지는 별문제일지라도 말이다. 

 앙리는 그 곳에서 카타리나 태후의 충실한 카드였다. 위대한 발르와 가문과 그녀의 아들 아래 전 프랑스가 무릎 꿇었다는 상징이 바로 갓 열 살의 앙리였으니 말이다. 이런 소년이기에 바다 건너 엘리자베스의 눈길까지도 받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나이 차이는 도버해협보다도 넓었다. '하나의 프랑스'는 이제 겨우 나라의 번영을 만끽하려는 그녀에겐 느닷없는 돌출변수였다고 해도 말이다. 과거, 미래를 불문하고 프랑스는 국내가 안정되면 '필연적으로' 영국과의 충돌을 겪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발르와의 사고뭉치 공주와 나바르의 양치기 국왕의 결혼만으로 종교를 넘어선 하나의 프랑스가 되리란 위대한 여왕의 걱정이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로 사랑하는 결혼 당사자들과 메디치 가의 카타리나 태후, 심지어는 나이 어린 누이 카트린과 끝없는 투쟁과 음모 속에서 눈감은 잔느 여왕까지도.

 이 '미완(未完)의 통일'은 두 왕족의 장엄하고 화려한 결혼식에서 절정을 이룬다. 앙리와 그가 대표하는 신교도들에게 이 의식의 뜻은 언제 붉은 피로 물들 샤를 국왕의 미래에 보다 가까워졌다는 것뿐이었지만, 앙리로써는 이 포동포동한 공주를 먼저 손에 넣은 기즈와의 인연을 잊을 수 없으리라. 이 결혼을 계기로 드높아질 왕실 속의 자신의 위상에 빠져드는 청년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악연과 음모의 2중주, 그리고 아스라이 들리는 피의 합창이. (2000∼1. 18∼31, 2000. 2. 3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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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에서의 7년 2
하인리히 하러 지음, 박계수 옮김 / 황금가지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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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한 자연의 벽을 뚫고 온 머나먼 나라 독일의 이방인과 관세음 보살의 화신이자 티베트의 최고 통치자인 달라이 라마와의 인간적인 유대는 점점 긴밀해졌다. 이 만남, 이 인연을 위해서 그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과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다시 그 고난의 소굴로 쫓겨날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던가 보다. 이렇듯 어렵사리 만난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문명에서 고립된 소국가의 짧은 안목이나 오직 종교만을 우선하는 신정국가의 독선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좁은 세상에서도 머지 않아 무력한 티베트에 닥칠 위기까지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이것은 지은이에게도 작지 않은 행운이었다. 신정국가인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외지에서 온 그의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의지할 곳 없는 지은이에게는 백만원군에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티베트에서 자주 열리는 종교 행사의 감상을 '미개한 동양인들의 유치한 의식' 따위의 서구 우월적인 심정으로 표현한 것은 그 역시 당시 서구인들의 편견의 한 예를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이런 종교의 맹신과 현실적인 문제에서의 도피가 오늘날 티베트를 몰락시켰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티베트를 바라보던 지은이에게 달라이 라마는 당시로써 최첨단 시설은 영화관의 건립을 요청했고 지은이는 이 오지에서 그 요청을 이뤄냈다. 수많은 영화의 상영과 함께 달라이 라마와 지은이 사이에서는 폭넓은 내용의 수업까지도 행해졌다. 어쩌면 달라이 라마가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영화관이 아니라 낯설지만 그가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 이방인 선생에게 배울 수 있는 '교실'이 아니었을까?
 
 따로 말이 없어도 이 순간들이 지은이의 생활 중 가장 행복한, 다시 찾기 힘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이런 순간은 어김없이 짧았다. 중공군이 침략한 것이다. 결국 달라이 라마와 그 일행은 피난길에 오르고 그런 상황에서도 길가에서 오직 달라이 라마의 축복만을 구하는 이들에게서 이들의 신심이 티베트의 흥(興)과 망(亡), 모두를 빚어냈다는 씁쓸함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오직 인간의 마음으로 유지되던 지구상 마지막 국가의 멸망이었기에 그 씁쓸함은 머지않아 아쉬움으로 변했다. (1997. 11. 14∼16, 1997. 11. 16 기록)

p. s 이 책의 저자인 하인리히 하러는 티베트를 떠난 이후에 독일에 돌아가서는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삶의 내력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역시나 이 책을 읽었던 그 어린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씁쓸한 뒷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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