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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 3
하인리히 만 지음, 김경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앙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홀로 추궁에 시달릴 사랑스런 마르고를 염려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위해 준비된 '미끼'인 카타리나의 수많은 시녀들을 아쉬워했을까?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도 아름다운 여인들과 화려한 사랑만은 소중히 간직하는 그야말로 프랑스의 영원한 연인이자 바람둥이로 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앞의 미래는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붉게 타오르는 증오와 붉게 물들어가는 피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푸른 물 같은 자유로움으로 파란 하늘을 내달리던 앙리에게는 괴로운 나날이었으리라. 자신의 푸르름을 검붉은 프랑스에 나눠주기 위한 통과의례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피를 원치않았던 것이다. 단지 발루아와 나바르, 기즈의 신이 제각각 피를 원했다. 그렇게 프랑스는 '세계의 지배자' 펠리페의 뜻대로 물들어갔다. 그에 저항하는 앙리에게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경건한 위그노와 방탕한 가톨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앙리에게는 성모의 또다른 모습으로 굳어진 어머니 잔느 여왕과 신에게 거부된 자신의 결혼, 그리고 신에게 미움받는 자신의 사랑들 사이에서. 이런 경박한 생활이야말로 루브르에 있을 때부터 그가 마음 깊은 곳의 웅대한 뜻에 걸맞지 않게 하찮은 어릿광대로 여겨진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로 흔들거리는 나바르 왕의 길을 바로잡는 역할이 바로 모르네에게 부여되었다. 수많은 앙리의 친구들 중에서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덕(德)의 힘으로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앙리는 비롱 원수가 쌓아올린 증오와 복수의 철옹성을 깨뜨렸다. 이 결과 앙리에게는 귀하신 카타리나 태후께서 몸소 행차하는 영광까지 아낌없이 내린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 묘지를 가진 젊은 반란자에게 태후는 상으로 사랑에 굶주린 그의 영원한 반쪽인 마르고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로부터 시작된 마르고의 행복은, 구속의 사슬에 묶인 나에게는 너무도 부러운 것이었다. 유려하게 흐르는 음악 속에서 곱게 차려입은 궁정인들과 나누는 고상한 대화. 이것이야말로 비록 기울어가는 왕실의 공주지만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꿈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주고 받는 지극한 사랑. 한 시골 소영주의 아내인 자신의 현실에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공주는 더없이 만족했다. 비록 남편의 자유로움이 시작되는 날, 막이 내릴 행복일지라도. 고상하고 차분한 행복의 끝은 그녀의 '딸' 포쇠즈였다. 그녀의 안에 자리잡은 앙리의 고귀한 핏줄을 뒤로하고 앙리와 마르고는 상대방을 향한 복수의 불꽃을 키운다. 이제 앙리에게 그녀는 쓸모 없고, 귀찮은, 게다가 밉기까지 한 악마의 화신에 불과한 것일까? 새하얀 진주에 감싸인 코리상드여, 당신도 기억해야 하리라. 당신의 고귀한 진주들이 원망의 눈물로 맺히게 될 날을. 그렇다고 '미래의 배신자'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거둘 수는 없다. 짧지만 영원할 듯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그가 아닌 그녀일테니. 그 사랑의 힘으로 앙리는 가여운 프랑스 왕까지도 따뜻이 감싸주고 비로소 미래의 그 자리를 약속받는다. 기즈라고 불리던 이는 발루아의 모자(母子)와 함께 깊은 심연 속으로 잠기지만 주인 잃은 왕관만은 깊이 가라앉았던 피의 강물 속에서 떠오른다. 왕관을 푸른 하늘에 장식할 주인이 나왔으니......(2000. 3. 5∼14, 2000. 3. 14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