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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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운명>은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1년만에 살아서 귀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태인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지위때문에 영화나 책으로도 많이 소개되고 있지만 최근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에서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작태를 보면 유태인들이 과연 과거 유태인 대학살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었는지, 오히려 과거의 경험을 잘못 되새기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냉소적인 반응을 얻기가 쉽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운명>은 참으로 독특한 소설이다. 읽으면서 누구나 느끼겠지만 그렇게 끔직한 상황을 겪으면서도 주인공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운명'이라는 듯이.

옆에서 누가 죽거나 자신이 구타를 당해도 주인공은 이를 다큐멘터리 촬영하듯 간결하게 서술할 뿐이다. 아버지가 끌려가도 자신의 몸이 망가져 거의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지나치게 담담한 문체로 소설은 진행되지만 주인공은 그것이 결코 글로 쓰듯이 쉽고 견딜만한 일은 아니었음을 실토한다. 감정적인 면이 완전히 배제되었음에도 독자에게 주인공이 겪는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의 놀라운 면이다. 마치 화선지에 먹물이 서서히 스며드는 것과 같이 주인공의 처지를 서서히, 그러나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결국 살아남는다. 수용소에서의 1년여간의 경험이 그의 일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그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키며 운명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을 이겨낸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가 '운명없음(?)'이라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그것도 결국 이러한 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은 수용소에서 나온 뒤 모든 순간순간이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자신은 그 단계에 따라 생활해 갔다는 말을 한다. 어찌 들으면 실성한 사람의 말처럼 들리는 그 말은 결국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의 각 단계에서 그 상황을 부정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인정하되 가능한 최선을 다혀면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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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가 사랑한 만큼 아름답다
박범신 외 지음 / 고려문화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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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여유를 갖고 있고 무엇이 소중한 지 알고 있으며 적어도 그에 때라 살려고 노력하는 문인들의 글을 모아 놓은 모음집이다. 책 디자인도 무척 이쁘고 글 중간중간에 섞에 있는 멋진 사진들도 글의 내용과 잘 부합한다.

이 책에 실린 모든 글에 공감이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체험에서 나온 지혜와 신념에서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인간은 편안함 가운데에서는 '업그레이드'될 가능성이 적다는 말이나 너무나도 하찮은 일들로 인해 상처받고 신경을 써서 정작 소중한 것들을 경시한 데 대한 후회 등은 정말 공감이 갔다. 그런 감정을 마음 속 깊이 어렴풋하게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이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을 때리는 글로 표현하는 것은 역시 문인들의 탁월한 재주 덕분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싶은 책의 한 귀절을 인용해 본다.
'바쁘게 달려가는 일상의 관성에 눌려 있는 본질적인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이게 아닌데...' 라고 말하는 무의식 속의 그가 바로 본질적인 우리 자신이다. (중략)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본래의 나, 본래의 내 그리움, 본래의 내 사랑이 썩어간다면 무엇으로 우리가 행복해 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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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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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생모를 사형시키게 만드는 무취의 그루누이. 주인공의 탄생장면도 신기하지만 소설의 소재자체가 너무나도 새롭고 충격적이었다. 모두가 반할 만한 외모를 지닌 주인공이 아니라 모든 냄새를 구분해 내고 천상의 향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냄새의 악마가 주인공이라니.

어렸을 때 세상 누가 맡아도 바로 행복해지는 그런 향기가 존재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향수를 만들어 내는 능력 - 세상의 모든 향기를 구분해내고 그 냄새를 기억하며 수 KM 떨어진 곳에서 풍겨오는 미세한 향기의 조각만으로도 그진원지를 찾아갈 수 있는 능력 - 을 이처럼 자세하게 묘사하고 그러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소녀들을 죽여 완벽하게 그녀들의 체취를 빼앗아 낸다는 발상을 하며, 그런 체취를 빼앗는 기술을 습득하고 직접 이를 실행하는 과정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정말 내 상상 밖이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과 이를 글로 표현해 내는 작가의 능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이름을 붙이자면 향기변태 랄까. 하지만 완벽한 체취의 소유자는 왜 항상 아름다운 소녀여야만 하는지 - 물론 나도 그런 완벽한 향기가 있다면 그 체취를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소녀일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 소년이나 중년의 사람은 악취만 풍기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작가의 변태적 상상력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아름다운 소녀를 벌거벗겨 냄새를 빼앗는 것이 소설적인 호과를 내는 데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냄새에 관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해 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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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플레이
강준만 / 풀빛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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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김대중 죽이기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강준만 교수가 소위 말하는 좌파에 속하는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갖게 되었다. 이념적인 문제나 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것을 꺼리낌없이 들추어낼 수 있는 그의 용기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에서 강준만 교수는 소제목 하에 2-3쪽 분량으로 언론의 허와 실, 다양한 언론플레이의 예, 언론의 속성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론, 더 나아가 한국 언론의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기자들의 행태가 이 책을 읽으면 상당한 정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는 단순히 한국 언론의 치부만 들추어내는 데 멈추지 않고 나름대로의 대안이나 언론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들에게 효율적인 언론플레이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기업 총수들이 언론에 비추어지는 모습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치밀하게 조작된 언론플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모든 것을 삐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생길 정도이다. 아무튼 순진하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물론 언론플레이라는 개념을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강준만 교수가 들고 있는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언론에 드러나는 이미지 이면에 숨어 있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강준만 교수가 비판하는 대상 세력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지난 국민의 정부와 지금의 참여정부는 어느정도 강준만 교수가 지지하는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정부나 현정부의 언론플레이에 대해서도 강준만 교수가 날카롭게 그 치부를 드러낼 수 있을 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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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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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노교수가 루게릭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자신의 애제자에게 마지막 수업의 형식으로 삶에 대한 여러 지혜를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루게릭 병에 걸려 숨을 쉬기도 힘들어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뒤마저 다른 사람이 닦아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모리 교수는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그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최대한 가치있게 보내고자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모리교수는 제자인 미치에게 우리의 사람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의미없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정작 가장 소중한 것에는 마음을 많이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책을 읽으면서 모리교수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뒤흔드는 것을 느꼈다. 대표적으로 기억에 남는 말로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일들을 하라구. 그런 일들을 하게 되면 절대 실망하지 않아.'는 말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인생에 달관한 듯한 모리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크게 공감하고 있었다. 내가 왜 힘들어 하고 마음이 편치 못했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모리교수가 새로운 진리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죽음을 앞둔 사람으로서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성찰을 소박하게 자신의 제자에게 이야기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실을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고 그렇게 행하는 것은 다르다. 모리교수의 말에 공감을 하고 감명을 받는 것도 그가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는 무엇이 소중한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 많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자신이 진정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물론 말처럼 쉽진 않지만, 결국 각자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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