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길을 잃다
서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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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름을 경배하고, 변화를 당연시하는 시대. 그렇다. 모든 것은 떠나게 되어 있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 모든 변화를 우리는 감내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빠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일까. 모든 것은 하나둘 떠났다. 그 옛날, 우리가, 시대가 품고 있던 어떤 유적 같은 것들. 발길에 걷어 채일 수도 없을 만큼, 과거는 빠르게 잊혀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복고의 힘은 ‘세다’. 추억의 힘도 ‘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변해서, 그 속도와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느린’ 사람들에겐, 과거가 발길에 채인다. 한편으로, 잊혀짐이 두려워서일까. 지난 유적들이 때론 우리를 불러낸다. 망각이 마냥 온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 물론 그것이 철저히 상업성에 기인한 부름일 수도 있지만.

서숙은 그래서 책머리부터 이야기한다. 레트로스펙티브. 깨달음은 더딘 발걸음으로 올 것이라고. 늦된 자신을 위무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변해도, 이에 쉽게 적응 못해도) 괜찮아, 괜찮아. 너무도 빠른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괜찮아’라는 나지막한 속삭임은 하나의 주술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탱할 수 있다. 낙오해도, 밀려나도, 뒤떨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었다. ‘길 잃기’의 주체성.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는 그것을 ‘길을 잃었다’로 표현하겠지만, 당사자는 또 다른 이정표를 찾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서숙은, <하와유? 컴퓨터>에서 외친다. “가상현실이 그치고 현실이 있게 하라.” 가상현실에 적응 못한 세대의 볼멘소리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차피 각 세대가 조응하는 접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사이버에 적응 못한 구세대의 푸념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 아닌 각자의 삶의 방식. 일부러 택하는 ‘길 잃기’의 행위. 그러하기에, “인간의 참모습은 그 정신에 있지 않고 그 현존에 있습니다. 진실은 역사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넘어 약동하는 생명력은 더욱 고귀합니다.”(<안녕하세요, 까뮈씨>) 무중력의 매력도 분명 있겠지만, ‘살아있음’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은 역시나, 현실 속 현존에 있다는 사실을 서숙은 분명히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런 한편으로, 서숙은 <휴대폰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그 길을 감식한다. 이해와 거리감을 표현하면서. 서숙은 “휴대폰 하나씩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이 도시를 헤매는 우리의 젊은이들도 나름으로 유목민화하고 있는 셈”이라며, 디지털 시대의 코드(노마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서숙은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빗겨나진 않는다. 자신을 ‘안티 노마드’라 칭하면서 “자유로우나 고독한 영혼들은 마치 섬처럼 외롭게 떠있는 존재들 같다”거나 “그들이 쉼 없이 휴대폰을 통해 토해내는 것은 혹시 외로움의 비명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내던진다. 그럼에도 딸로부터 버림받은 휴대폰을 주워든 자신의 뒤쳐진 걸음걸이. 레트로, 레트로. 산 보듯 강 보듯 어슬렁거리는 서숙의 길 잃기. 

주체적인 길 잃기는 어쩌면, 자의식의 발로다. 앞선 누군가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나섰던, 길을 의심하는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케세라 세라’의 포기이거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칠 지어다. 진짜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막막한 감정을 떠올려보라. ‘일부러’ 잃은 길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의 황당함을 생각해보라. ‘나, 길을 잃어보련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나, 돌아갈래’하고 번복할 때의 심정이란. 그렇다고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 한번 길 잃어볼래?”라는 말 속에는, 호기심과 두려움, 반항심 등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길을 잃는 행위가 가져올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서숙의 세계(수필)은 그러나, 일탈은 꿈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이다. 그의 글에는 중산층의 안온함이 여과 없이 묻어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공세적으로 거스르는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운동)과 같은 과격함이나 전복은 없다. TV 아침드라마와 신문을 통해 즐거운 세상사 걱정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규모 있는 살림살이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여사를 만나 그림전시회를 가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결핍은 아니겠지만. 서숙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세계에서 모든 소재를 뽑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뿐,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간혹 길을 잃고자하는 의지도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그친다. 길 잃기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생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진 않는다. 그저 숭실대학교 뒷마당에 당도하고야 마는 싱거운 모험.

물론 가끔은 서숙의 세계도,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다. “매양 떠나고 싶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자리에 머물고자하는 우리. 한사코 홀로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대화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품을 그리워하는 우리. 인연의 고리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한편, 떨쳐내지 못할 집착에 연연하여 한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리.”(<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들 부부의 은혼식(25년)과 친정 부모님의 금혼식(50년)을 맞아서도, 결혼을 의심한다. “책임감이나 의무감 또는 자식이나 집안을 위한다는 명분 그런 것 말고 뭐 좀 보다 절박하게, 하필이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 사람과 내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혼을 했는데, 이미 감정이 시들해져 버린 후에도 이 제도라고 할지 관습 속에 그저 안주해야 하는 당위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 사치는>을 읽으면서, 이전부터 혐의를 가지긴 했는데, 나에겐 ‘글쓰기’가 진짜, 사치라는 생각을 굳혔다. 채워지지도, 영글지도, 그렇다고 콘텐츠가 절박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종의 배설구. 군더더기와 중언부언, 불확실한 세계. 그러나, 서숙은 단호했다. 이 사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여느 세계를 다룰 때와는 다르게 단호했다. 글쓰기가 서숙에게 주는 희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티븐 킹의 말이 떠올랐다. “글쓰기는 마술과도, 생명수와도 같”아서 “마음껏 실컷 마시면서 허전한 속을 채우라”던.(<유혹하는 글쓰기>)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를 덮고서, 과연 궁금하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길을 잃었을 때, 그 결과를 생각했을까, 아니 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바랐을까.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고, 태어날 때 죽을 것을 고려하지 않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음’이 전제돼 있다. 과연 내가 ‘일부러’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길의 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일탈의 결과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마음이여, 정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 서숙의 주체적인 길 잃기의 끝에는 어떤 ‘황홀경’이 자리매김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장착한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에 그은 밑줄을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리곤 속삭인다. ‘다시 못 돌아가면 어떠랴, 괜찮아, 괜찮아...’ 시대의 흐름과 빠른 속도에 낙오된 나는, 이왕 늦어진 것, '달팽이의 속도'를 택하련다. 무한성장, '암세포의 논리'가 아닌. 나는, 변명처럼 일부러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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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대꿘'(대선)의 계절이야. '대꿘 is All Around'지. 물론, 재미 없다. 감동도 없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촉각은 그곳으로 향하기 마련이지. 과연. 그래서 대꿘 함 쥐어보려고 저 지랄들인가보군. 대꿘이 '남아대장부'의 로망? 남자라면, 힐러리처럼? 하하, 농담이야. '남아대장부' 따위의 근엄한 코멘트엔 코웃음 픽픽. 그래, 난 남아소장부다.^^; 대꿘은 언감생심. 취꿘이 어울릴 남아. 남아당자약!
 
명함이 무릅팍팍 늘어나. OO위원회, OO본부니, 알지? 대꿘용! 알던 양반들이 그렇게 새 명함을 돌려대. 타이틀 늘어난게지. 어제도 그랬어. 송년회 자리에 빠지면 안되지. 홍보홍보. 뭐 굳이 필요없는디, 새 명함을 건네 주시더군. 넙죽 받았지. 뭐 글타고 크게 거부감도 없어. 개의치 않는게지. 줄테면 주라지~ 걍 받고 말지~ 쨌든 퉁~

근데 그 대꿘. 크긴 크다. 그래서 소외 받고 있지. 바로, '인권'. 사실 한끗 차이인데. 어쩌다보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네. 완전히 묻힌 거 같애. 잘난 '대꿘' 덕분이지. 그래, 오늘 12일. 조영래 변호사의 17주기야. 그 이름이 낯설다면, <<전태일 평전>>. 알겠지? 수배생활 중 집필했던 이 책.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첫 제목. 조영래 변호사는 알려준거야. 넓혀준거야. 이 세계의 어떤 작동원리를.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어. 어른들도 알려주지 않았어. 전태일을. 그리고 노동자들의 핍박과 억압을. 그것이 또한 이 세계가 돌아가는 한 축임을. 몰랐었지. 그리고 놀랐지. 조영래 변호사는 그렇게 빨간약을 준거야. 나처럼 누군가는, 안게야. 조영래 변호사를 통해 전태일을, 혹은 세상의 한 단면을. 양심의 흔들림도 느끼기도 했겠지.
☞ 전태일,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은 그 사람...



맞아. 조영래 변호사는 이른바 '인권변호사'야. 근데, 웃기지 않아? 원래 변호사는 인권을 수호하는 직업군이었던거 아냐? 그게 우리가 어릴 때 배운 거 아니었어? 그런 변호사 앞에 왜 '인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돼? 허허. 인권은 어느 때부터인가 변호사 몸뚱아리에서 빠져나왔나봐. 영혼이 빠진게지. '인권아~ 빠이빠이'했나봐. 인권이 라이프~ 얼마전 실형을 선고받은 우리 전인권 형은 잘 있으려나.^^;

그만큼 그는 독특한 위치였었지. 오늘날보다는 덜 자본과 몸을 섞었을 당시의 변호사 바닥에서도 말이야. 조영래 변호사는 약자 역시 인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려줬어. 쉽지 않았을거야. 그 당시 분위기로선. 그리고 약자를 위해 자신을 모든 것을 바치고 투쟁했던. 부천서 성고문 사건도 알지? 조영래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도 치받았어. 공권력의 타락상을 폭로하고. 부도덕한 정권과도 정면승부를 택했던 검객.

12월1일부터 12일까지. 혼자 정해본 인권기간. 1일 세계에이즈의 날(감염인 인권의 날), 우리의 편견에 메스를 들이대고. 8일, 평화와 공존의 사절단, 존 레논이 구름의 저편에 다다른 날. 반전과 인권을 부르짖던 로맨티스트, 존의 'imagine'. 나도 바라고 있어. 천국도, 지옥도, 국가도, 종교분쟁도, 소유도, 배고픔도 없는. 오로지 우리 위에 하늘만 있어서, 모든 사람이 '오늘'을 위해 사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며, 오직 인간에 대한 사랑만 존재하는 그런 세상. 바로, 존 레논이 'imagine'하던. 그 세상에선 전혀 인권이를 부를 필요가 없을테지. 그냥 녹아있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10일. 세계인권선언일. 올해 59주년. UN에서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날. 내년이면 환갑인데, 너무 기력이 딸려. 그러면서 점점 빨라져. 노화가. 더구나 올해는 이가 빠졌어. 그것도 앞니가. 바로, '인권 콘서트'. 지난해까지 열여덟번째 행사를 가졌던. 그러면 드뎌 이 땅에 인권이 완성된 것? 이 행사가 열렸다는 건, 이 땅의 인권현실이 열악함을 방증했으니까. 그러나 그것일리는 없고. 무슨 일일까. 아픈 걸까. 이젠 중병으로 진화된 걸까. 응급실에 나자빠진 것?

음 아마, 대꿘이 탓도 약간은 있겠지. 1989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으로 시작됐던 인권콘설. 12월10일 즈음이면 꼬박 찾아왔었는데. 행사를 주최하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홈페이지에 가도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자유게시판의 짧은 글 하나가, 아프다. "아직 소식이 없네요. 올해 인권콘서트 언제 하나요? 인권...아직 멀었는데... " 인권 현실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소통의 장이 증발한 것일까. 혹시 유괴? <세븐 데이즈>의 김윤진을 불러라. 무죄를 만들어라. 정신없이 소중한 우리 박희순 오빠도 도와줘~

나는 작년에 이 행사가 없어졌음 좋겠다고 했어. 그러나 이런 식은 아냐아냐. 인권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이 일상화되지 않은 사회라면,이라는 전제가 있었는데. 제길 어케 된거야. 콘설 앞에 '인권'이라는 말을 붙여야할만큼 우리는 너무 많은 인권침해와 박탈 속에 살아가고 있었던건데... 아예, 포기한걸까, 인권. 후, 자신의 인권현실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인데. 인권이도 지칠만해.

그날, 그러니까 그저께. 우연찮게 난 폭격을 맞았지. "나 사실은 에이즈야"라는 결정적 한마디. 그건,  연극 <뷰티풀 선데이>의 대사. 외로운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 그들의 아름다운 일요일. '세계인권선언일'과는 전혀 상관없었어. 의도하지 않은 관람이었다규.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아름다운 일요일에 감동먹었어. 재미까지. 너에게 추천해줄께.
☞ 맞잡은 손이, AIDS를 예방한다

그건 그렇고. 대꿘이 삼켜버린 인권은 어디서 건져내야지? 수렁에서 내 딸은 건졌는데, 인권이는 도대체 어디서. 지금의 세밑 풍경은 그래서 우울해. 좀더 이 세계의 현실을 생각케 만들지 못해. 대꿘이의 방해공작 때문이겠지. 오늘, 우리만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자. 이랜드-뉴코아 조합원들, 몸을 불사른 동지를 잃었음에도 달라진 것 없다던 전기공 노동자들, 지자체의 폭력적 단속에 내몰린 노점상인, 2년여 거리 투쟁을 하고 있는 KTX의 씩씩한 언니들, 자꾸만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이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의 신분, 비정규직, 그리고 모든 약자와 소수자들...

그건 곧 우리야. 울림은 때론 흐느낌. 계속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할텐데. 소수자와 약자들의 인권을 향한 노래를, 우리의 양심에 호소하는 이야기에. 나도 때론 두려워. 휙~하고 휩쓸릴까봐. 그래서 이런 발악이라도 하는지도 모르지. 그래, 당신이나 나나, 약간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세계의 인권과 약자들을 생각해보자규. 인간으로서의 내 권리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도.

인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 그 인권.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님에도 세계는 점점 더 엄혹해져.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계급성을 배반하고. '대꿘'이 불알만 만져대. '대꿘'이는 밀접해야 할 인권이와 그닥 친하질 않아. 어쩌다 이름이 불려도 찬바람 휘잉~ 지금 대꿘이는 경제, 아니 정확하게는 '자본'과 아삼육인거 같애. 계는 없고, 색만 있어.ㅋ

마흔 셋의 나이에 눈을 감은 조영래 변호사. 과거 인권탄압을 고발했던 그는,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이야길 들려줄까. 문득 궁금해지는 하루.

사실, 몸이 힘드네. 헥헥. 머리도 안 돌아. 역시 한해를 보내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아.^^; 뭐긴 뭐겠어. 술술. 역시, 환락의 밤은 짧고 숙취의 낮은 길어. 역시 난 취꿘이 어울려. ^^;;;;;;;;;;;;;;;;;;
  
글고, 아직 술독이 남아있는 것을 빌어,
대꿘, 특히 인권과 가장 거리가 먼 작자에게 한마디.
                   
조까라마이싱!
캠프에서 엉뚱한 전화질 하지 마라. 짱난다, 이 계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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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의) '매혹'은, 치명적이다.
빠지면, 도리가 없다. 있는 것, 없는 것, 줄 것, 안 줄 것, 그런 것, 가릴 게재가 없다. '진짜 매혹'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벌거숭이가 돼야 한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아 호림'이라는 '매혹'의 정의를 따르자면, 매혹은 곧, 권력과도 통한다. 사로잡는 자와 사로잡히는 자의 관계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관계와 다를 바 없다. 매혹은 그렇다. 마음을 사로잡혔는데, 어찌하란 말이냐. 어쩌면, 마음은 감옥으로 향한다. 이른바, '마음의 감옥'. 매혹은, 그렇게 우리를 옥죈다. 매혹을 뿜는 자, 세계를 가질지니. 매혹을 당한 자, 무릎을 꿇어야 하나니. 경배하고, 추앙하라. 매혹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매혹이, 때론 나를 지탱한다.
나는, '매혹'을 원한다. 매혹 없는 생은, 많이 끔찍하다.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 하나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쭈그렁한가. 그 무엇이건, 매혹은, 전 생을 걸쳐 꾸준하게 있어줘야겠다. 그건 감성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무릇 신산한 생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나에게 오라, 팜므파탈. 제발 와줘, 팜므파탈.^^; 나는, 그러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매혹'이 덤비면 어찌하나, 노심초사하는 왕소심한 마초다. 그렇기에, 나의 매혹은, 얼쭈 '스크린'에서 이뤄진다. 알다시피, 스크린 속의 '매혹'은 어떤 치명상이나 내상을 부여하지 않는다. 즉, 안전하다. 소심한 작자는, 스크린을 통해 뇌살을 당하고, 매혹에 한없이 빠져든다. 매혹신의 강령.

탕웨이, 나의 새로운 매혹, 하악~
나의 스크린 속, 첫 번째 매혹은, 우리 (장)만옥 누님이었다. 좋아하는, 아름다운 배우들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화양연화>를 보면서, 허거거걱...꺼윽꺼윽... 만옥 누님은, 매혹 그 자체였다. 무엇으로 그 아름다움과 뇌쇄를 설명할 것이오. 그 쪽진 머리와 실루엣은, 나를 매혹으로 물들여놨다. 뱀처럼 내 마음을 휘감는, 늪으로 내 마음을 유도하는, 그럼에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또 다른 매혹은, 스칼렛 요한슨. 나는, 그 입술을 보면, 그것에 풍덩 빠지고 싶다. 그리고 약간 물 건너 지나갔지만, 나카야마 미호. 그런데, 얼마전, 그 유명한 <색, 계>(色,戒, 2007)를 보고, '포스트 장만옥'으로 덜컥, '탕웨이'를 임명하고 말았다. 만옥 누님이 아직 정정하심에도, 나는 탕웨이의 뱀같은 유혹에 넘어갔다. 아흑. 넘어간다~는 말도 안하고 그냥 넘어가더라, 털썩. 바야흐로, 탕웨이가 내게로 왔다.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이런, 이 미친 놈의 매혹!


아아, 탕웨이.
코는 낮고, 입술은 작았으며, 젓살까지 찰랑. 얼굴은 또 어찌나 작던지. 나도 모르겠다. 이건, 평소 내가 넘어가던 매혹의 '조건'이 아니다. 어찌 이런 일이. 허나, 따지고 보자. 매혹에, 조건이 있을 수가 있나. 이러이러하니, 난 매혹당하련다, 이런 건 없다. 마음을 사로잡는 건, 순간이다. 어떤 순간이 확, 마음을 낚아채는 것이다. 나는, 낚였다. 탕웨이에. 숨도 쉬지 못할만큼의 격렬한, 그 쎅스 씬이 아니었다(나는, <색, 계>의 그 유명한 쎅스 씬들보다, 이대장(양조위)와 막부인(탕웨이)가 처음 나눴던, 전화통화 씬이 더욱 섹시하고, 관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쎅스 씬은 너무 슬퍼서.ㅠ.ㅠ 그 형형한 눈빛, 내 마음을 불을 지른 탕웨이의 눈빛.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의 몸짓에 나는, 홀딱 넘어간건가. 포스트 장만옥, 탕웨이. 다음 작품을 보고선, 앞의 수식어를 탈착여부를 결정하겠지만, 기냥 이참에, 선언할까보다. "나는, '탕닥후'(탕웨이 오타쿠)~" 탕웨이는, 마음을 사로잡은 눈부신 색,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계. 스물 여덟, 이제 막 농익기 시작한 여신. 하악.

나를, 매혹시키는 또 다른 것.
물론 나도 이 영화, 지나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나 여성을 탈색시킬만큼 과도하게 감상을 덕지덕지 발라놨다. 지나치게 감상적인 신파극 맞긴한데, 매혹에 빠진 내가 제대로 그런 것이 보였겠어.^^; 뭐, <색, 계>는 많은 컨텍스트도 품고 있지만, 여기서 그런 것은 언급않고. 그저 매혹, 그 하나에만. 하악. <색, 계>를 보면서 2년 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던, 관금붕 감독의 영화, <장한가>를 떠올렸다. 당시 나는, <장한가>에 '매혹'됐었다. 개거품을 물었다,면 거짓말이고, 그해 나의 최고의 영화로 꼽았을 정도니까. 당나라 백거이의 장편 서사시 제목인 <장한가>에서 정수문이 분한 '왕치아오'에 나는, 뻑갔다. 그 일생도 일생이지만, 40년대 상하이의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고보니, <색, 계>도 40년대 상하이. 나는, 어쩌면 40년대에 약간은 매혹됐는지도 모르겠다. 경성의 40년대 또한 나를 사로잡곤 했으니까. 상하이와 경성의 고혹적인 풍경이, 이들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내겐, 어떤 매혹의 요소가 됐을 수도 있겠다. 이보다 약간 앞선, <완령옥>(그러고보니, 만옥누님이 완령옥 역할을 했었다!)도 그렇고.

아, 매혹이여, 절정이여~
<색, 계>에서 탕웨이는 말한다. "뭘로 사로잡아요? 내 몸으로? 당신은 그를 몰라요.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맘을 얻어내죠.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만 그제서야 절정에 올라요.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죠. 이러다 사로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어흑, 내가 치고싶은 대사였다. 탕웨이는,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매혹시킬 것인가. 한편으로, <색, 계>가 혹시 탕웨이의 절정은 아닐까, 화양연화가 아닐까, 때이른 걱정도 한다. 별걸 다 걱정하는군. 쯧. 탕웨이는, 이제 시작인 것을. ☞ [탕웨이] 말로 할수 없는 것을 연기하다

아 어쩌면, 나는 당신이, 빠져든다... 나, 빠져나오기 싫어....

 
그리고, 알고보면 더 재밌는, <색, 계>의 실제 사건. ☞ 영화 '색, 계'의 실제 모델 띵무춘과 쩡핀루


뱀발. <색, 계>. 다시 보고 싶지만, 탕웨이 아닌 다른 것을 볼 수 있을까. 저리도 슬픈 섹스는, 대체 마음이 어떤 시츄에이션일 때 가능한거야. <색, 계>의 양조위에 대한, 이야기는 불필요하겠지만, 마지막 장면은 정말 침대가, 우는 것 같았다. 막부인(혹은 왕치아즈)이 총살 당하던 그날, 이(양조위)가 막부인의 빈 침대에 앉아 글썽이던 눈물. 이가 일어난 뒤 보여지는 구겨진 침대시트. 그리고 그것을 뒤돌아보는 이의 그림자. 흑. 어찌, 침대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울리오. 징하다, 이안. 가만보니, 그 침대. 알고보니, 침대는 과학도 아니었소. 침대는 눈물이더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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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은퇴는, 슬퍼. 좆나 슬퍼. 눈물이 잠시지만, 그렁했어.

'주형광 은퇴.'
이, 다섯자가 주는 단상이, 어떤 것인지 넌, 알 수 없을거야. ㅠ.ㅠ
☞ '조기 은퇴'주형광, '형광등'처럼 빛난 에이스

솔직히, 올 시즌, 형광이 나올 때, 욕한 적 있다.
중요한 승부처에서,
원포인트 릴리프로 나와서 안타를 두들겨 맞거나, 점수 내줬을 때,
괜히, 광분하면서 형광이 왜 나왔냐고 내뱉은 적 있음을 고백한다.

미안하다. 형광아.
은퇴 소식을 받아들이자니, 울컥해진다.
어쩌란 말이냐. 언젠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도 알았지만,
이제 31살. 우리 뽈록이, 형광이는 아직 마운드에서 씽씽 투구를 날릴 때 아닌가.

14년이라고 했다.
앳띠고 뽀얀, 형광이가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다닌 해가.
그래, 1994년 형광이는 신성이었다. 92년 종석이의 원맨쇼이후, 새롭게 등장한.
비록, 그해 나는 군대에 끌려가서, 그 활약상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들리는 풍월에, 그는 자이언츠의, 우리네 야구인생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제대하고 보니,
형광이는 완전, 날았다. 미친 듯이 마운드에 나와서 공을 뿌려댔고,
승리 보증수표! 다 나오라 그래!! 18승7패. 비록, 늦여름부터 떠나있던 탓에, 오래 못만났지만,
바다 건너온 소식에, 그는 자이언츠의 유일신이었다. 민한신 이전의, 형광신.

자이언츠의 마지막 가을야구 시즌까지,
형광이는 고군분투했다. 한마디로 혹사,당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만개한 탓이었을까. 형광이는 조로했다.
팔꿈치는 망가졌고, 반짝반짝 빛나던 에이스는 원포인트 릴리프로 전락했다.

반전을 꾀했을 것이다.
나도 바랐다.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하면서 툭툭 털고, 우뚝 마운드에 선, 형광이를.
야구는 없고, 선수만 있는 자이언츠의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결국 31세의 형광이는 은퇴를 선언했다. 코치 연수를 받는댄다. 어흑.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가 형광이의 그 깊은 슬픔을, 알 수 있을까. 도저한 슬픔을.
나 역시도, 형광이의 그 슬픔을 알겠는가마는, 나는 형광이가, 아프다. 마이 아프다.
아마도, 형광이는 울고 또 울 것이다. 은퇴는, 그렇다. 알면서도.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맞다. 미친넘, 괜히 지랄하고 있다.
누구나 은퇴를 한다. 시간을 이겨낼 재간은 누구도, 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속도로 시간 속을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너와 나의 시간은, 너와 나의 간극만큼이나, 또 다른 갭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나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조기은퇴라고 우겨봤자, 형광이는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 같다.
형광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오라, 외치는 건,
당연 전혀 상관없지만, 어떤 사람들처럼, 은퇴한 정치인을 대선 출마하라고 우기는 격 아닌가.
지난 시절, 내 소중한, 행복과 즐거움을 안겨다 준 선수들의 은퇴 소식을 듣자면, 괜히 몽클해지는 내 가슴.

역시나, 이제는 안녕을 고할 때.
안녕, 주형광...

아, 이럴 땐, 쓰끼다시 내 인생.
역시나 이런 날엔, '쓰끼다시 내 인생'이 좋아. 좆나 좋아. 은퇴는 슬프지만, 쓰끼다시 내 인생은 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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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배가 보낸 계절 정보 업데이트 메일. 선배는, 어제(18일)부로 '진짜' 겨울이라고 했다.

그냥 보면서 징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 계절 인식에 착오가 없어야 한다.
 
선배가 '진짜' 겨울을 들먹인건, 첫눈 때문이리라. 그래, 첫눈이 내렸다.
나는 몸살 기운으로 골골거렸지만, 첫눈이 그렇게 들이닥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몸 아프니, 첫눈이고 뭐고. 여느때 같으면 그 눈을 맞고 한없이 감상에 빠져들었겠지만. 쯧.

첫눈은, 약속이다. 첫눈 오면 뭐하자, 어디가자, 친구건 연인이건, 첫눈은 어떤 약속과 함께한다.
물론 올해 첫눈, 딱히 뭔가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이렇게 보내버리니 아쉬운 감도 있네.
그땐, 그런 약속들이 있었는데... 첫눈에 씻기울 그런 감정들도 있었는데...

물론 아파서 그랬겠지만, 벌써 나는 첫눈에도 시큼해진, 감성 노화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웅.

첫눈과 어떤 맥락도 없이 지껄이는 것이지만, 선배 말 마따나 역시나 한국은, 서글퍼.
오직 한 사람의 입에만 매달린 형국하곤. 대선도 결국 그 입에 좌우되겠고, 우린 그 입의 향배에 따라 대통령을 만나겠지. 어떤 정책도, 비전도 없고, 창의성이라곤 눈귀코 씻고 찾아봐도 없는.

첫눈.
그 언젠가 나도 첫눈 오는 날,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리.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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