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길을 잃다
서숙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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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름을 경배하고, 변화를 당연시하는 시대. 그렇다. 모든 것은 떠나게 되어 있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 모든 변화를 우리는 감내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빠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일까. 모든 것은 하나둘 떠났다. 그 옛날, 우리가, 시대가 품고 있던 어떤 유적 같은 것들. 발길에 걷어 채일 수도 없을 만큼, 과거는 빠르게 잊혀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어떤 복고의 힘은 ‘세다’. 추억의 힘도 ‘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변해서, 그 속도와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느린’ 사람들에겐, 과거가 발길에 채인다. 한편으로, 잊혀짐이 두려워서일까. 지난 유적들이 때론 우리를 불러낸다. 망각이 마냥 온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 물론 그것이 철저히 상업성에 기인한 부름일 수도 있지만.

서숙은 그래서 책머리부터 이야기한다. 레트로스펙티브. 깨달음은 더딘 발걸음으로 올 것이라고. 늦된 자신을 위무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변해도, 이에 쉽게 적응 못해도) 괜찮아, 괜찮아. 너무도 빠른 속도와 변화의 시대에, ‘괜찮아’라는 나지막한 속삭임은 하나의 주술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탱할 수 있다. 낙오해도, 밀려나도, 뒤떨어져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의 텍스트를 그렇게 읽었다. ‘길 잃기’의 주체성.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가 아니라, ‘이 길이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는 그것을 ‘길을 잃었다’로 표현하겠지만, 당사자는 또 다른 이정표를 찾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래서 서숙은, <하와유? 컴퓨터>에서 외친다. “가상현실이 그치고 현실이 있게 하라.” 가상현실에 적응 못한 세대의 볼멘소리로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어차피 각 세대가 조응하는 접점의 ‘차이’일 뿐이다. 그것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사이버에 적응 못한 구세대의 푸념이 아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가 아닌 각자의 삶의 방식. 일부러 택하는 ‘길 잃기’의 행위. 그러하기에, “인간의 참모습은 그 정신에 있지 않고 그 현존에 있습니다. 진실은 역사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선악의 기준을 넘어 약동하는 생명력은 더욱 고귀합니다.”(<안녕하세요, 까뮈씨>) 무중력의 매력도 분명 있겠지만, ‘살아있음’의 심장박동을 느끼는 것은 역시나, 현실 속 현존에 있다는 사실을 서숙은 분명히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런 한편으로, 서숙은 <휴대폰 이야기>를 통해, 서로 다른 그 길을 감식한다. 이해와 거리감을 표현하면서. 서숙은 “휴대폰 하나씩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이 도시를 헤매는 우리의 젊은이들도 나름으로 유목민화하고 있는 셈”이라며, 디지털 시대의 코드(노마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서숙은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빗겨나진 않는다. 자신을 ‘안티 노마드’라 칭하면서 “자유로우나 고독한 영혼들은 마치 섬처럼 외롭게 떠있는 존재들 같다”거나 “그들이 쉼 없이 휴대폰을 통해 토해내는 것은 혹시 외로움의 비명은 아닐까”라고 의문을 내던진다. 그럼에도 딸로부터 버림받은 휴대폰을 주워든 자신의 뒤쳐진 걸음걸이. 레트로, 레트로. 산 보듯 강 보듯 어슬렁거리는 서숙의 길 잃기. 

주체적인 길 잃기는 어쩌면, 자의식의 발로다. 앞선 누군가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나섰던, 길을 의심하는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아니면 ‘케세라 세라’의 포기이거나.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칠 지어다. 진짜 길을 잃고 헤맬 때의 막막한 감정을 떠올려보라. ‘일부러’ 잃은 길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의 황당함을 생각해보라. ‘나, 길을 잃어보련다’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나, 돌아갈래’하고 번복할 때의 심정이란. 그렇다고 마음의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 한번 길 잃어볼래?”라는 말 속에는, 호기심과 두려움, 반항심 등등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길을 잃는 행위가 가져올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서숙의 세계(수필)은 그러나, 일탈은 꿈꾸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수세적이다. 그의 글에는 중산층의 안온함이 여과 없이 묻어난다. 빠르고 변화무쌍한 시대를 공세적으로 거스르는 ‘러다이트운동’(기계파괴운동)과 같은 과격함이나 전복은 없다. TV 아침드라마와 신문을 통해 즐거운 세상사 걱정을 하고, 친구를 만나 규모 있는 살림살이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여사를 만나 그림전시회를 가는. 물론 그것이 나쁘다거나, 결핍은 아니겠지만. 서숙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세계에서 모든 소재를 뽑으면서 세상과 소통할 뿐,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간혹 길을 잃고자하는 의지도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그친다. 길 잃기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거나 생의 틀을 바꾸는 계기가 되진 않는다. 그저 숭실대학교 뒷마당에 당도하고야 마는 싱거운 모험.

물론 가끔은 서숙의 세계도, 마음도 흔들리는 것 같다. “매양 떠나고 싶어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자리에 머물고자하는 우리. 한사코 홀로 있게 되기를 소망하는 반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대화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품을 그리워하는 우리. 인연의 고리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한편, 떨쳐내지 못할 집착에 연연하여 한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리.”(<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들 부부의 은혼식(25년)과 친정 부모님의 금혼식(50년)을 맞아서도, 결혼을 의심한다. “책임감이나 의무감 또는 자식이나 집안을 위한다는 명분 그런 것 말고 뭐 좀 보다 절박하게, 하필이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저 사람과 내가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혼을 했는데, 이미 감정이 시들해져 버린 후에도 이 제도라고 할지 관습 속에 그저 안주해야 하는 당위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 사치는>을 읽으면서, 이전부터 혐의를 가지긴 했는데, 나에겐 ‘글쓰기’가 진짜, 사치라는 생각을 굳혔다. 채워지지도, 영글지도, 그렇다고 콘텐츠가 절박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종의 배설구. 군더더기와 중언부언, 불확실한 세계. 그러나, 서숙은 단호했다. 이 사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여느 세계를 다룰 때와는 다르게 단호했다. 글쓰기가 서숙에게 주는 희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스티븐 킹의 말이 떠올랐다. “글쓰기는 마술과도, 생명수와도 같”아서 “마음껏 실컷 마시면서 허전한 속을 채우라”던.(<유혹하는 글쓰기>)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를 덮고서, 과연 궁금하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길을 잃었을 때, 그 결과를 생각했을까, 아니 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바랐을까. 꽃은 필 때 질 것을 염려하지 않고, 태어날 때 죽을 것을 고려하지 않지만, 그것은 ‘의도하지 않음’이 전제돼 있다. 과연 내가 ‘일부러’ 길을 잃었을 때, 그것을 선택했을 때, 나는 그 길의 끝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일탈의 결과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마음이여, 정착하지 말 것’을 주문한 서숙의 주체적인 길 잃기의 끝에는 어떤 ‘황홀경’이 자리매김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을 장착한 나는, <일부러 길을 잃다>에 그은 밑줄을 다시 한번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그리곤 속삭인다. ‘다시 못 돌아가면 어떠랴, 괜찮아, 괜찮아...’ 시대의 흐름과 빠른 속도에 낙오된 나는, 이왕 늦어진 것, '달팽이의 속도'를 택하련다. 무한성장, '암세포의 논리'가 아닌. 나는, 변명처럼 일부러 길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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