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배가 보낸 계절 정보 업데이트 메일. 선배는, 어제(18일)부로 '진짜' 겨울이라고 했다.
그냥 보면서 징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 계절 인식에 착오가 없어야 한다.
선배가 '진짜' 겨울을 들먹인건, 첫눈 때문이리라. 그래, 첫눈이 내렸다.
나는 몸살 기운으로 골골거렸지만, 첫눈이 그렇게 들이닥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몸 아프니, 첫눈이고 뭐고. 여느때 같으면 그 눈을 맞고 한없이 감상에 빠져들었겠지만. 쯧.
첫눈은, 약속이다. 첫눈 오면 뭐하자, 어디가자, 친구건 연인이건, 첫눈은 어떤 약속과 함께한다.
물론 올해 첫눈, 딱히 뭔가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지만, 이렇게 보내버리니 아쉬운 감도 있네.
그땐, 그런 약속들이 있었는데... 첫눈에 씻기울 그런 감정들도 있었는데...
물론 아파서 그랬겠지만, 벌써 나는 첫눈에도 시큼해진, 감성 노화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웅.
첫눈과 어떤 맥락도 없이 지껄이는 것이지만, 선배 말 마따나 역시나 한국은, 서글퍼.
오직 한 사람의 입에만 매달린 형국하곤. 대선도 결국 그 입에 좌우되겠고, 우린 그 입의 향배에 따라 대통령을 만나겠지. 어떤 정책도, 비전도 없고, 창의성이라곤 눈귀코 씻고 찾아봐도 없는.
첫눈.
그 언젠가 나도 첫눈 오는 날,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리.
|
|
|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