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마을학교 전성시대

봄날이 갑니다. 봄답지 않게 후끈 더운 이 계절, '마을학교' 전성시대입니다. 서울 여기저기서 마을 주민들을 위한 각종 마을학교가 쑥쑥 자라고 있어요.

광진구는 30일부터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마을공동체만들기 마을리터 워크숍'을 가집니다. 기초와 심화로 나눠 마을리더들의 즐거운 상상이 펼쳐지고요. 구로구는 '마을에서 사회적경제 네트워크 만들기'라는 테마로 협동조합학교를 엽니다. 5월31일부터 6월28일까지. 성북도 5월31일부터 7월5일까지 매주 목요일 '성북협동조합 마을학교'를 개교하네요. 양천구도 꿈틀대고 있습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마을학교를 열거든요. 6월12일부터 7월5일까지 매주 화, 목, 즐거운 마을학교 종을 울립니다. 강북에선 5월29일부터 9월4일까지, 미디어교육을 갖네요.

자, 자신의 서식지에서 골라서 마을학교를 만나세요. 혹시 지금 없더라도 분명 준비중일 테니 낙심하지 마시고요. 담은 점점 낮아지고 마을은 서울살이 안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이라는 詩로 널리 알려진 그의 또 다른 詩, [담을 고치며]에는 이런 시구가 나옵니다.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

직역하자면, 좋은 담(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 담을 잘 쌓아야 좋은 이웃이 된다는 말이겠죠. 지금, 우리가 너무 높이 쌓아버린 담을 조금씩 허물 때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 각자 자신의 담을 한 번 뒤돌아보아요.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마을학교에서도 담 쌓지 마시고 우등생 되세요! 물론 꼴찌라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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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후의 우리 사회의 문학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서 술을 훨씬 안 먹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으로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한다면 별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고 술을 안 마신다면 큰일입니다. 밀턴은 서사시를 쓰려면 술 대신에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1963. 2)

 

사촌동생 윤수의 결혼(식). 신부는 익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애가 맞다. 두 사람,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는 얘기다. 사촌형 노릇하느라, 축의금을 받고 식권을 나눠줬다.(노총각 사촌형 둘, 즉 나와 내 동생이 그 노릇을 했다.ㅋ)

 

가만 지켜보니, 한 사람이 돈봉투 뭉텅이로 내놓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른바 '(축의금) 배달부' 노릇을 하는 경우. 한 사람이 그렇게 배달부 노릇 하면서 '독박'을 쓴다. 결혼식에 오지 않은 이들, 그렇게해서라도 면죄부(?)를 받는다. 거칠고 야박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 '나, 돈 냈다, 됐지?'

 

뭐, 그게 나쁘다거나 이런 걸 말하는 것, No! 그렇게라도 결혼식 참석 못 한 걸 미안해 한다면, 그 마음, 갸륵할쏘. 나도 누군가의 결혼식에 갈 때, 오지 못한 녀석들의 축의금 청탁(축의금을 대신 내 달라는)을 꽤 많이 받았다. 나는야, 배달부! 

 

결혼식 참석이든 축의금이든, 그것이 '축하'보다는 '의무' 혹은 '반대급부'처럼 너무 관성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축의금 리스트에 이름과 돈 액수를 쓰는데, 여기 이름을 쓰지 않고 액수를 적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잠시 상상. 각자의 이름을 쓴 봉투도 싸그리 없애버리고 말이지.

 

뭐, 사촌동생한테 쿠사리 먹을 것 같아서 실행에는 못 옮겼다만.ㅋㅋ   

 

6월16일의 결혼식. 내겐 6월16일이 더 중요했다. 사촌동생 부부는 김수영(시인)을 모른다. 그들이 이날을 결혼식 날짜로 잡은 건 그야말로 우연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걸 말해줄 이유도 없고. 그들에게 김수영은 세상에 없는 존재다. 모르기도 하고,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원한다면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 한 잔이라도 내려주고 싶었지만, 세상의 여느 정형화된 결혼식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웨딩홀의 주어진 스케줄과 프로그램에 따라야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의 슬픈 비극.

 

 

다시 6월16일.

도저한 자유를 향한 열망을 품은 '자유의 시인', 김수영 시인의 44주기.  

요절했지만, 김수영, 지금 여전히 유효한 이름이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런 날, 값싼 술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도 결혼식에 그런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면, 아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결혼식으로 기억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없는, 이미 박제된 풍경. 그런 풍경, 내 결혼식에서 꿈꾼다. 그날엔, 오직 하객들 당신들만을 위해 특별히 내가 준비한 커피를 내려 드리리다. 물론 그 하객, 날 안다고 될 순 없다. 특별히 초청된 소수 정예의 사람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축의금 같은 건 갖고 오지 마시라. 나, 속물이라서 100만원 정도 갖고 오면 넙죽 받을 의향은 있지만.ㅋ

 

원로시인 김시철의 산문집 《격랑과 낭만》에 의하면, 김수영.

그는 詩와 커피를 맞바꾸던 시인이었다. 고로, 커피는 詩와 동격이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詩를 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수영도 명동다방촌 죽돌이였다. 

'명동멋쟁이'라 불린 시인의 단골 다방은 '휘가로'.

해방과 함께 다방들, 명동 언저리에 하나둘씩 문을 열었다. 다방은 해방의 감격이 흘러넘치는 공간이었다. 예술가들이 가만 있을 턱이 있나. 식민지 시대의 상처는 이제 안녕. 부흥이 필요했다. 새로운 기운을 찾고자 하는 예술적 포스가 흘러넘치는 공간, 그것이 다방이었다. (휘가로를 찾아보시라!)

 

 

 

 

김수영, 박인환, 김규동 시인이 그린 소공동 플라워다방의 모습도 엿보자.

 

 

다방은 예술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목적 종합문화생활공간이었다.

룸펜들의 무위도식처였고, 실업자들이 죽치는 온상이었다.
룸펜들, 커피 한 잔에 네댓시간을 죽치고 앉아보냈다. 

룸펜은 다방을 사랑했고, 다방은 그런 룸펜을 품었다. 다방은 해방 공간이었다. 
다방, 쑥쑥 생겼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정당들에 빗대어 이들을 '커피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문화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전후 환경.

다방은 각종 만남의 장소로 물론이요, 전시회, 출판기념회, 영화상영회, 문학낭독회, 독립투사추모회, 동창회, 송별회 등 온갖 모임을 수용했다. 지금 카페를 문화공간으로 꾸미고자 하는 시도는 그러니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커피하우스, 카페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됐었다.

 

헌데, 밥 사먹을 돈도 없었던 가난한 시절, 예술가라고 자처하던 이들은 명동으로 몰려들어 하루종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퍼부어댔을까?

 

'명동백작'이라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 그것을 말해준다.

"그래, 그들은 너무도 가난한 나라에 그마저 예술가가 할 일도 없던 시절에 태어난 것이다. 할 일을 찾아 예술인들이 많은 명동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고, 그곳에서 시를 쓰고 원고를 청탁받고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 다닌 것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택한 것이 바로 술이었다."

 

참고로, 김수영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꼽은 열 개는,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향이 죽인다는 어머니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었고, 김수영과 사촌동생 부부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라는 속물을 위한 커피 한 잔. 

 

커피를 마시는 시간, <이 거룩한 속물들>을 펴고, 다시 읽는다.

좋다. 이맛이 커피다. 이맛이 김수영이다. 이맛이 삶이다. 

나는 그렇게, 밤9시의 커피다.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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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 Work - 열심히 일하면 어디까지 올라갈까?
CrimethInc 지음, 박준호 옮김 / 마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온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하거나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의무 따위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자유롭지요. 어찌 보면 저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불가능한 것의 가능성》(pp.269~270)-   

 

《워크 WORK》. 이 책, 심장을 뛰게 한다.

‘노동자 공동체’라는 ‘CrimethInc.’. 즉, 이 책의 저자, 다양한 주제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도 않는다. 생생한 노동의 현장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주제어를 선택하고, 맞춤형 이야기를 풀어낸다. 뭐랄까.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속이 후련하다. 이런 세상,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 역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중)노동을 작파하라.

저자가 말하는 핵심 중 하나다. 그건 곧 자유다. 맞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에) 철저히 착취당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그것을 교묘히 감춘다. 인민들은 착취당함에도 착취당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저자는 그것을 조목조목 파헤쳐준다. 일(Work)을 작파하면 우리는좀 더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교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를 작파하라는 주술이다. 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세상. 상상만 해도, 좋다! 어쨌거나, 지금의 세계. 대다수 인민들이 원하던 그런 세상은 아니다. 소수의 자본가들, 요즘 그들을 1%로 부른다지. 그네들이 조작하고 착취하는 세상. 속된 말로, 좆같은 세상.


우리,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이 책이 건네는 말 중의 하나다. 기존의 관점이나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기. 그것은 지금 세상에 대한 의심이며 저항이다. 가령, 내가 몇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회의 혹은 의문. 한 치의 의심 없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것. 기업은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 이윤 없이 기업 없다. 와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업=이윤’이라는 공식을 들이대는 폭력에 대한 고찰. 그 이윤은 과연 무엇일까. 계속 고민 중이다.

 

책이 권하는 다른 생각, 다른 사유, 이런 것들이다.


복지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대개의 불만이라면, 무임승차다. 즉,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자(세금을 내지 않는 자)에 대한 혐오. 그러나 책은 되레 부자들이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가난한 모든 이의 노동이 부자들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복지정책은 피 흘려 얻은 투쟁의 결과로, 지금 복지정책의 문제점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수치심과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미국식 복지의 허점이자, 자본이 원하는 구도다. 복지정책 역시 인민에 대한 통제 도구로 사용되면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복지’라는 말 자체가 이 사회의 맥락에서 갖고 있는 개념에 반대하는 나는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난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에게 자원을 되돌려 주는 길 뿐이다.”(p.173)


법. 

우리는 법을 곧잘 ‘정의’와 연관 짓는 로망을 아직 갖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것을 체화했든, 관념을 통해서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법이 정의를 수호할 것이라는 순수를 마음 한 칸에 품고 있다. 책은 법체제의 진짜 역할이, “권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률 시스템은 개인에겐 행동을 결정할 자유가 없다는 의식을 심는다. 그렇지 않나?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준법의식’을 강조하는 사회를 보라. 그것,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준법의식이 없어서 이따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준법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총질만을 해댈까? 과연 그럴 것이라고 당신은 믿나? 전문가가 아니라는, 고시 패스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법률서비스업자에게 우리를 맡기는 이 통탄할 현실. 과연,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다. 법을 자본에게 공탁(!)한 법률서비스업자들! 지금 우리에게 법의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규범에 관계없이 우리 가슴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잊게 된다는 것이다.”(p.295)


감옥. 

감옥, 범죄자를 수용하고 교화하는 곳. 그리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간. 그러나 《워크》, 이리 말한다. “감옥이 필요한 까닭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야기한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다.”(p.161) 감옥이 행하는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곧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선결조건이라는 것. 더 나아가 감옥은 단지 사유재산권(있는 자들의 재산 보호)과 국경(이주민에 대한 차별) 같은 논리를 극단적으로 명시한 것일 뿐이란다. 그러니 감옥의 탄생과 역사는 자본주의와 패키지다.


“감옥은 범죄자 계급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한 단면으로, 산업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현대적 감옥구조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p.162)


‘절도’라고 불리는 어떤 행위.

우리는 절도는 무조건 나쁜 짓이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책은 역시 딴죽을 건다. “종업원이 동료의 도둑질을 고발하면, 이 금지는 축적된 부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공통의 이익에 반하는 몇몇 자본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p.306) 회사의 이익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자. 간단하다. 제공한 노동력에 대해 합당한 가치를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실제 가치 이상을 지불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그것의 합이다. 착취에 착취. 오로지 착취로 기업은 연명한다. 그런데도 기업(회사)은 무조건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고? 세상에, 그런 것을 누가 정하고 주입했겠는가? 그러니 절도라고 불리는 동료의 행위는 ‘자본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분노’라고 책은 주장한다. 재밌는 관점. 뭔가를 훔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니! 그리고 공적인 일로 만들자고 요구한다. 꼭 기억해야 할 이것.


“노동은 노동자에게서 나오고,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돌려받을 세상이 있다.”(p.308)


까놓고 말해보자.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삶. 진정 원하는가? 탑에 오르면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걸 안 해도 될 것 같은가? 그것이 진짜 우리가 꿈꾸는 것인가? 경쟁을 거부하면 다른 세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태되면 끝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공포를 주입시켜야 사는 존재들이 있다. 자본(지배계층)이다. 그들은 공포를 먹고 산다. 그래야 인민들이 순순히 자신들이 짜놓은 구조와 기획 안에서 움직인다. 가두리 양식.  


일을 해야 한다는 거짓말.

‘먹고사니즘’을 일과 연동시킨 것이 그들의 계략이었다. 일을 쪼갰고, 전문가라는 이름을 단 그들의 보좌관을 뒀다. 가족주의를 통해 인민들을 일일이 쪼개 놨다. 기술의 진보는 허울 좋은 개살구였다. 따져보라. 기술(의 진보)이 인간을 일로부터 해방시키고 여유를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줄었다. 비용이 준 것은 오로지 자본(고용주)였다. 인민에게 기술진보는 함정이었다. 컴퓨터가 나오고, 인터넷이 보급됐으며, 스마트폰이 등장했지만, 과연 우리의 일은 줄었는가? 문서작성을 해야 할 것은 더 많아졌고, 집에까지 일을 들고 가야 했다. 심지어, 이젠 이동하면서도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스마트해졌냐고? 글쎄, 나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당신은 답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기술의 진화와 함께 점점 더 소외되는 것 같다. 배제 당하고 있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은 실업자,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한다. 일을 죽어라 하는데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스마트워크’니, ‘굿워크’니 시부렁거리는데, 그거 말짱 거짓말이다. ‘(딴소리 지껄이지 말고) 일 더하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런 단어를 쓴 책들도 빤하다. 그런 책을 쓴 사람, 필히 (회사) 대표나 본부장(임원)일 것이다. 인민을 부려먹기 위한 자본의 대리인.


“자본주의는 부를 만들어내지만, 더 많은 가난도 만들어 낸다. 한 사람이 축적할 수 있는 부에는 한계가 없지만, 한 사람이 착취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몇몇 억만장자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가난해져야 하는 이유다.”(pp.169~17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반란, 혁신, 변혁, 분노!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가. 역시 책은 그것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실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것을 조작한다. 즉, 사회구조의 문제다. 고로 혁신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구조인 셈이다. 더불어 진짜 변혁에 대해 책은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변화. 지금과는 다른 세상.

  

“다른 방법은 없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사유재산제를 부수어야 한다. 경제적․정치적 변혁일 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변혁이기도 하다. 그러한 변화는 위에서부터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비판적 대중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p.383)


책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제시한다. “소외된 자들에게 가능한 전략은 개선보다는 반란이다.”(p.174) 특히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싸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자리에서 경험한 분노가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지배당하고 사는 이상, 우리에게 역할이 주어진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p.389) 그리하여, 자경단, 도둑패,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 같은 다양한 방식을 시험할 것을 권한다. 상상해보니 재밌다. 나도, 오션스 일레븐(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이 안 따라줘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는 안 되겠지만 ㅠ.ㅠ) 덧붙여, 특정 장소를 점령해 대중 행사 개최하기, 고급 행사장에 입장료 내지 않고 대거 들어가기, 백화점에 쳐들어가 계산 안 하고 나오기.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남의 것이 아닌 내 인생. 내가 만드는 나의 자유. 책은 그런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바이러스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 바이러스가 세상을 망하게 만든다고? 나쁘지 않다. 그렇게 망한 세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열심히 중노동을 하게 만드는 구조가 없는 세상. 언제부터 우리가 자유를 잃었었는지 따져볼 때다. 그리고 자유를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나서야 할 때다. 《워크 WORK》는 그것을 도울 것이다. 이런 질문, 얼마나 멋진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그토록 멋진 일이라면, 부자들은 왜 하지 않을까?” 이건희. 그 자는 1년에 몇 번의 출근만 하는데도 왜 천문학적인 연봉을 주나? 경영을 잘 한다고? 개뿔. 통제와 억압, 착취를 잘해서겠지. 자본은 인민의 자유를 억압할 줄 아는 그런 자들에게 공치사를 하는 법이니까.

 

마크 트웨인의 말, 되씹을수록 쫄깃하다. 자유라는 말, 얼마나 좋은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재산인 자유, 자유 없이 인간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금, 다이아몬드, 현금, 채권이든 뭐든 자유의 값을 매길 수 있는 ‘공정 시장 가격’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마크 트웨인)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오타가 몇몇 눈에 띤다. 다음 쇄에선 꼭 고쳤으면 한다.

p.177. 공동체조자도 → 공동체조차도

p.188. 데모테이프을 → 데모테이프를

p.196. 실직적인 → 실질적인

p.392. 중요한다 →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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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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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갱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대한민국(주류 지배층). 그리고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 무슨 상관인가 싶겠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적 주거양식인 아파트. 지배층은 그 아파트(경기)에만 잔뜩 신경을 쓰고 계시지. 헌데 그것 알까?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그것은 사회주의와도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편적 평등 차원에서 인민들이 한 공간에 주거할 수 있도록 만든 아파트, 사회주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토록 싫어하시는 빨갱이의 공동주택 양식을 자유 대한민국에 널리 퍼트리고자 애를 쓰시다니. 물론 그 아파트, 그들 식으로 철저히 자본화해서 노예 양산에 적합하게끔 만들었지만.


#2. 지금 서울광장 전의 서울시청 앞. 연식이 오래된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분수가 있었다. 지금 아이들 노닐게 하는 그런 분수 말고. 한국은행 본점 앞에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산물로서, 식민통치의 상징이다. 로마 제국에서 비롯됐단다. ‘물의 나라’로 불릴 만큼 로마는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로마를 여행하다가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분수, 다 그것의 산물이다. 로마는 시내뿐 아니라 식민지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분수를 설치했다. 제국의 힘을 자랑함과 동시에 점령지라는 표시였다. 일본도 그것을 따라했다. 따라쟁이 같으니!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이야기》의 저자, 후지모리 데루노부에 의하면, 제대로 된 집은 신석기에 출현했다. 집의 출현은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일상의 평온함과 실용은 물론, 마음과 정신에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지모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했고(여행 등으로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를 상상해보란다!), 집의 출현이 자기 확인 작업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집’을 말하는 맥락에서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우선 집에 대한 인간과 다른 생물의 비교. 이 책을 보고 알았는데, 포유류와 영장류, 집을 짓지 않는단다. 그러나 인간만은 다르다. 집을 짓는다. 이유는, 양육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인간, 참 까다롭고 성가신 존재다. 생후 3년 집중 관리, 10년 이상 양육 지원. 엄마 되기, 아빠 되기가 고달픈 이유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집, 꼭 필요하다.


“인간은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남성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기간이 모두 끝난 후에도 파트너십을 평생토록 지속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과 출산의 시기에 집을 가장 필요로 한다.”(p.16)


생각해 보자.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가장 깊이 생각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집이다.(결혼 안 한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뭐!) 집을 어디에 얻을 것이냐. 주변에서도 묻는다.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집은 어디에 얻었어? 집은 인간과 동일 시 되곤 한다. 자기 확인 혹은 타인을 읽기 위한 중요한 기제다. 지금 시대는 더욱 그렇다. 신분제가 사라진 자본주의의 창궐과 함께 집은 신분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 집(의 사회성)을 이해하는 정도는 낮은 것 같다. 재벌 계열 건설회사의 광고카피는 그런 우리의 이해를 대변한다.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가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천박함의 극치이자 인간을 무시한 폭력이지만, 그것은 또한 지금-여기가 품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현 사회에서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어떻게 되십니까, 자본의 크기는 얼마입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대신 ‘어디 사세요’라고 에둘러 묻는다.”(p.69)


어릴 때, 어른들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런 줄 알았다. 크면서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달리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어디 사느냐”고 먼저 물었다. 모순. 이율배반. 뭘 그 정도 갖고 발끈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다. 아 그럼, 철딱서니 없는 이 글, 더 이상 읽기를 멈추시라. 난 당신이 사는 곳, 궁금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참 좋은 책이다.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닌 ‘사는(buying)’ 것으로 아는 사람에겐 당최 상종 못할 종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재테크, 부동산테크 하시는 분들, 부동산 시세와 집의 평수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랴. 집이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 인간과 집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집의 평수(시세)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 이 책 보면 참 좋다.


장담하건대, 집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면 집이 달라 보인다. 내가 사는 집부터 내가 발길을 디디는 동선 곳곳에 놓인 건축물까지. 건축이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건축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건축을 본다는 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 담론을 읽어낸다는 것과 동의어다.


건축은 또한 기존 사회질서와 철저히 조응한다. 바로크, 로코코, 고딕 등 건축양식으로 시대를 호명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지배계층의 의도와 질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아파트. 지배계층과 토건업자의 강력한 의도와 지배욕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로, 집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과연 인민에게 아파트가 반드시 필요했을까? 지배계층의 숨은 의도가 이 책에 잘 나온다. 우선 ‘내 집 마련의 신화’부터. 왜 ‘신화’라는 말로 언어의 인플레가 가미돼야 했을까. 지배계층, 주택을 소유하도록 부추겼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가난한 노동자가 아닌, 당당한 도시민’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부추겼다. 노동자들을 부려먹기 위해, 자본가에게 그건 필수였다.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잊게 만들기. 노동 환경의 개선보다 도시 중산층의 모방 소비로 관심 돌리기.

 

그러니, 평생을 두고 집을 갖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과연 집을 소유한다는 게 왜 필요한가 말이다. 그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내게 댈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형님’ 혹은 ‘누님’ 하고 무릎 꿇겠다.


그 방법, 점점 더 교묘해졌다. 덕분에 ‘내 집 마련’,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등의 금융기법까지 동원됐다. 노동자들은 더욱 온순해졌다. 이 빌어먹을 사회에 진짜 필요한 저항과 반항, 혁명의 기운 모두를 야금야금 빼 먹었다.

 

지배층은 노동자들의 일치단결에 늘 노심초사하는데, 내 집 마련, 아파트라는 신화는 가족주의의 안온한 소파에 묻히도록 만들기에 딱! 그것으로 노동자계층의 자발적인 분열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 책은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왜 고작 아파트 한 채 마련한다고 모든 등골을 빨아 먹혀야 하는 것일까?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공급함으로써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안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은 사회주의자나 박애주의자 모두 같았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아파트 내에 공용공간을 강조하여 노동자들이 단결하도록 하였다면, 박애주의자들은 공용공간을 최소화하고 각 주호 내에 안락함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주의를 심화시키고자 하였다.”(pp.249~250)


말머리에 언급했지만, 아파트,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제공해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목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우리의 아파트는 그것과 무관하게, 아니 정반대로 작동했다. 1970~80년대 그저 잘 살아보는 것이 모든 것에 앞섰던 시절, 지배계층은 노동자 인민들이 아파트를 장만하는 성취감을 갖도록 부추겼다. 아파트는 중산층의 좌경화와 단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기득권 세력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건축의 역사는 곧 체제 순응의 역사”라는 저자 서윤영의 언급은 그래서 확 와 닿는다. 인민의 일상을 기존의 사회제체 안에 순응시키려는 노력이 건축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건축은 돈(자본)과 권력(제도 혹은 법)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재에 대한 사유도 다시 하게 됐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서재다. TV나 영화를 볼라치면 서재는 매혹적으로 비친다. 혹은 명망가 혹은 셀러브리티들의 서재를 보여주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OOO의 서재’. 서재에 대한 로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봤던 <돈의 맛>.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거대한 서재가 등장했다. 모든 것이 꽉 찬 서재.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 알려주는 서재에 대한 팁. 서재는 사회적 욕망의 산실이다. ‘서재 갖기 유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흥미롭다.

 

“엄밀히 말해 가장의 사실私室인 그곳을 굳이 서재라 부르는 것은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곧 권력인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소유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까닭에, 서재가 아닌 방마저 서재라고 부르는 것이다.”(p.153)


<돈의 맛>에서 윤 회장(백윤식)이 집을 나가기 전, 돈이 준 모욕에 대해 언급하는 곳이 서재이다. 이층 서재를 정리하면서 일층에 있는 비서와 딸에게 고해성사 혹은 자기 토로를 한다. 그리고 그 꽉 찬 서재에서 윤 회장 자신의 것이라곤 몇 권의 책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의 앞선 언급은 그토록 으리으리한 서재를 갖춰놓은 이유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집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를 닮은, 혹은 나를 담은 집을 짓고 싶은 이유가 더욱 강해졌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솔직히 말하건대, 사람이 집(아파트)을 닮았다. 그것은 지배계층의 교묘한 상징 조작에 휘둘린 까닭이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과 자유가 있다. 사람이 집을 닮아선 안 된다. 집이 사람을 닮아야 한다.

 

우리, 다시 집을 돌아보고 들여다보자. 

집을 ‘소유’한다는 것, 과연 우리의 진짜 욕망이었을까? 주입된 것은 아니었을까?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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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문경새재에서 '봄날은 갔'고. 굿바이, 봄.

 



오늘, 창원 대신 서울에서 아쉬움 묻은 무더위 속에서, 여름이 오는 소리.


에피톤 프로젝트가 내 무더위를 달래주다. 


 

내게 다시 다가온 여름밤의 아스라한 선율.


좋다! 계절이 스쳐가도, 노래는 스쳐가질 않아.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호우시(好雨時節). 좋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를 기다리는 마음.


때를 알고 울려퍼지는 좋은 선율, 에피톤 프로젝트.

그렇게, 호가시절(好歌時節).


그렇게 에피톤 프로젝트가 노래를 들고 찾아온 여름.

나의 2012년 여름의 시작. 굿하이, 여름. :)


곧, 이 여름 안,

당신에게 편지를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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