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 Work - 열심히 일하면 어디까지 올라갈까?
CrimethInc 지음, 박준호 옮김 / 마티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무엇보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온하게 일을 하는 겁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하거나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의무 따위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자유롭지요. 어찌 보면 저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불가능한 것의 가능성》(pp.269~270)-   

 

《워크 WORK》. 이 책, 심장을 뛰게 한다.

‘노동자 공동체’라는 ‘CrimethInc.’. 즉, 이 책의 저자, 다양한 주제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도 않는다. 생생한 노동의 현장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주제어를 선택하고, 맞춤형 이야기를 풀어낸다. 뭐랄까.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속이 후련하다. 이런 세상,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 역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한다.


(중)노동을 작파하라.

저자가 말하는 핵심 중 하나다. 그건 곧 자유다. 맞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에) 철저히 착취당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은 그것을 교묘히 감춘다. 인민들은 착취당함에도 착취당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저자는 그것을 조목조목 파헤쳐준다. 일(Work)을 작파하면 우리는좀 더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교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를 작파하라는 주술이다. 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세상. 상상만 해도, 좋다! 어쨌거나, 지금의 세계. 대다수 인민들이 원하던 그런 세상은 아니다. 소수의 자본가들, 요즘 그들을 1%로 부른다지. 그네들이 조작하고 착취하는 세상. 속된 말로, 좆같은 세상.


우리,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이 책이 건네는 말 중의 하나다. 기존의 관점이나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기. 그것은 지금 세상에 대한 의심이며 저항이다. 가령, 내가 몇 년 전부터 가지고 있던 어떤 회의 혹은 의문. 한 치의 의심 없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것. 기업은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 이윤 없이 기업 없다. 와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업=이윤’이라는 공식을 들이대는 폭력에 대한 고찰. 그 이윤은 과연 무엇일까. 계속 고민 중이다.

 

책이 권하는 다른 생각, 다른 사유, 이런 것들이다.


복지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대개의 불만이라면, 무임승차다. 즉, 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자(세금을 내지 않는 자)에 대한 혐오. 그러나 책은 되레 부자들이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가난한 모든 이의 노동이 부자들에게 무임승차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복지정책은 피 흘려 얻은 투쟁의 결과로, 지금 복지정책의 문제점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수치심과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미국식 복지의 허점이자, 자본이 원하는 구도다. 복지정책 역시 인민에 대한 통제 도구로 사용되면서 정해진 길에서 벗어난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 ‘복지’라는 말 자체가 이 사회의 맥락에서 갖고 있는 개념에 반대하는 나는 이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난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들에게 자원을 되돌려 주는 길 뿐이다.”(p.173)


법. 

우리는 법을 곧잘 ‘정의’와 연관 짓는 로망을 아직 갖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것을 체화했든, 관념을 통해서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법이 정의를 수호할 것이라는 순수를 마음 한 칸에 품고 있다. 책은 법체제의 진짜 역할이, “권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률 시스템은 개인에겐 행동을 결정할 자유가 없다는 의식을 심는다. 그렇지 않나?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준법의식’을 강조하는 사회를 보라. 그것,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과연 우리는 준법의식이 없어서 이따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준법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총질만을 해댈까? 과연 그럴 것이라고 당신은 믿나? 전문가가 아니라는, 고시 패스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법률서비스업자에게 우리를 맡기는 이 통탄할 현실. 과연, 이런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다. 법을 자본에게 공탁(!)한 법률서비스업자들! 지금 우리에게 법의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런 규범에 관계없이 우리 가슴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잊게 된다는 것이다.”(p.295)


감옥. 

감옥, 범죄자를 수용하고 교화하는 곳. 그리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공간. 그러나 《워크》, 이리 말한다. “감옥이 필요한 까닭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야기한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다.”(p.161) 감옥이 행하는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곧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선결조건이라는 것. 더 나아가 감옥은 단지 사유재산권(있는 자들의 재산 보호)과 국경(이주민에 대한 차별) 같은 논리를 극단적으로 명시한 것일 뿐이란다. 그러니 감옥의 탄생과 역사는 자본주의와 패키지다.


“감옥은 범죄자 계급을 만들기 위한 계획의 한 단면으로, 산업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현대적 감옥구조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p.162)


‘절도’라고 불리는 어떤 행위.

우리는 절도는 무조건 나쁜 짓이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책은 역시 딴죽을 건다. “종업원이 동료의 도둑질을 고발하면, 이 금지는 축적된 부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공통의 이익에 반하는 몇몇 자본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p.306) 회사의 이익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자. 간단하다. 제공한 노동력에 대해 합당한 가치를 보상받지 못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실제 가치 이상을 지불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그것의 합이다. 착취에 착취. 오로지 착취로 기업은 연명한다. 그런데도 기업(회사)은 무조건 이윤극대화를 해야 한다고? 세상에, 그런 것을 누가 정하고 주입했겠는가? 그러니 절도라고 불리는 동료의 행위는 ‘자본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분노’라고 책은 주장한다. 재밌는 관점. 뭔가를 훔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니! 그리고 공적인 일로 만들자고 요구한다. 꼭 기억해야 할 이것.


“노동은 노동자에게서 나오고, 노동자는 노동으로부터 돌려받을 세상이 있다.”(p.308)


까놓고 말해보자.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하는 삶. 진정 원하는가? 탑에 오르면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그걸 안 해도 될 것 같은가? 그것이 진짜 우리가 꿈꾸는 것인가? 경쟁을 거부하면 다른 세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태되면 끝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공포를 주입시켜야 사는 존재들이 있다. 자본(지배계층)이다. 그들은 공포를 먹고 산다. 그래야 인민들이 순순히 자신들이 짜놓은 구조와 기획 안에서 움직인다. 가두리 양식.  


일을 해야 한다는 거짓말.

‘먹고사니즘’을 일과 연동시킨 것이 그들의 계략이었다. 일을 쪼갰고, 전문가라는 이름을 단 그들의 보좌관을 뒀다. 가족주의를 통해 인민들을 일일이 쪼개 놨다. 기술의 진보는 허울 좋은 개살구였다. 따져보라. 기술(의 진보)이 인간을 일로부터 해방시키고 여유를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줄었다. 비용이 준 것은 오로지 자본(고용주)였다. 인민에게 기술진보는 함정이었다. 컴퓨터가 나오고, 인터넷이 보급됐으며, 스마트폰이 등장했지만, 과연 우리의 일은 줄었는가? 문서작성을 해야 할 것은 더 많아졌고, 집에까지 일을 들고 가야 했다. 심지어, 이젠 이동하면서도 일을 해야 한다. 인간이 스마트해졌냐고? 글쎄, 나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당신은 답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기술의 진화와 함께 점점 더 소외되는 것 같다. 배제 당하고 있다.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장은 실업자,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한다. 일을 죽어라 하는데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스마트워크’니, ‘굿워크’니 시부렁거리는데, 그거 말짱 거짓말이다. ‘(딴소리 지껄이지 말고) 일 더하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그런 단어를 쓴 책들도 빤하다. 그런 책을 쓴 사람, 필히 (회사) 대표나 본부장(임원)일 것이다. 인민을 부려먹기 위한 자본의 대리인.


“자본주의는 부를 만들어내지만, 더 많은 가난도 만들어 낸다. 한 사람이 축적할 수 있는 부에는 한계가 없지만, 한 사람이 착취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것이 몇몇 억만장자를 만들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가난해져야 하는 이유다.”(pp.169~170)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반란, 혁신, 변혁, 분노!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없는가. 역시 책은 그것에 대해 활발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실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것을 조작한다. 즉, 사회구조의 문제다. 고로 혁신이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회구조인 셈이다. 더불어 진짜 변혁에 대해 책은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변화. 지금과는 다른 세상.

  

“다른 방법은 없다.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사유재산제를 부수어야 한다. 경제적․정치적 변혁일 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변혁이기도 하다. 그러한 변화는 위에서부터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비판적 대중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p.383)


책은 그러기 위해 필요한 전략을 제시한다. “소외된 자들에게 가능한 전략은 개선보다는 반란이다.”(p.174) 특히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싸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 자리에서 경험한 분노가 ‘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지배당하고 사는 이상, 우리에게 역할이 주어진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p.389) 그리하여, 자경단, 도둑패,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 같은 다양한 방식을 시험할 것을 권한다. 상상해보니 재밌다. 나도, 오션스 일레븐(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이 안 따라줘서 조지 클루니나 브래드 피트는 안 되겠지만 ㅠ.ㅠ) 덧붙여, 특정 장소를 점령해 대중 행사 개최하기, 고급 행사장에 입장료 내지 않고 대거 들어가기, 백화점에 쳐들어가 계산 안 하고 나오기.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남의 것이 아닌 내 인생. 내가 만드는 나의 자유. 책은 그런 것을 상상하게 만든다. 바이러스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 바이러스가 세상을 망하게 만든다고? 나쁘지 않다. 그렇게 망한 세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열심히 중노동을 하게 만드는 구조가 없는 세상. 언제부터 우리가 자유를 잃었었는지 따져볼 때다. 그리고 자유를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나서야 할 때다. 《워크 WORK》는 그것을 도울 것이다. 이런 질문, 얼마나 멋진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그토록 멋진 일이라면, 부자들은 왜 하지 않을까?” 이건희. 그 자는 1년에 몇 번의 출근만 하는데도 왜 천문학적인 연봉을 주나? 경영을 잘 한다고? 개뿔. 통제와 억압, 착취를 잘해서겠지. 자본은 인민의 자유를 억압할 줄 아는 그런 자들에게 공치사를 하는 법이니까.

 

마크 트웨인의 말, 되씹을수록 쫄깃하다. 자유라는 말, 얼마나 좋은가.


“인간이 지닌 최고의 재산인 자유, 자유 없이 인간의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금, 다이아몬드, 현금, 채권이든 뭐든 자유의 값을 매길 수 있는 ‘공정 시장 가격’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마크 트웨인)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오타가 몇몇 눈에 띤다. 다음 쇄에선 꼭 고쳤으면 한다.

p.177. 공동체조자도 → 공동체조차도

p.188. 데모테이프을 → 데모테이프를

p.196. 실직적인 → 실질적인

p.392. 중요한다 →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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