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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 사회를 비추는 거울, 집의 역사를 말하다
서윤영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평점 :
#1. ‘빨갱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대한민국(주류 지배층). 그리고 아파트공화국 대한민국. 무슨 상관인가 싶겠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적 주거양식인 아파트. 지배층은 그 아파트(경기)에만 잔뜩 신경을 쓰고 계시지. 헌데 그것 알까?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그것은 사회주의와도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편적 평등 차원에서 인민들이 한 공간에 주거할 수 있도록 만든 아파트, 사회주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토록 싫어하시는 빨갱이의 공동주택 양식을 자유 대한민국에 널리 퍼트리고자 애를 쓰시다니. 물론 그 아파트, 그들 식으로 철저히 자본화해서 노예 양산에 적합하게끔 만들었지만.
#2. 지금 서울광장 전의 서울시청 앞. 연식이 오래된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분수가 있었다. 지금 아이들 노닐게 하는 그런 분수 말고. 한국은행 본점 앞에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의 산물로서, 식민통치의 상징이다. 로마 제국에서 비롯됐단다. ‘물의 나라’로 불릴 만큼 로마는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로마를 여행하다가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분수, 다 그것의 산물이다. 로마는 시내뿐 아니라 식민지를 점령하면 가장 먼저 분수를 설치했다. 제국의 힘을 자랑함과 동시에 점령지라는 표시였다. 일본도 그것을 따라했다. 따라쟁이 같으니!
《인문학으로 읽는 건축이야기》의 저자, 후지모리 데루노부에 의하면, 제대로 된 집은 신석기에 출현했다. 집의 출현은 인류에게 큰 영향을 줬다. 일상의 평온함과 실용은 물론, 마음과 정신에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지모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는 말로도 표현했고(여행 등으로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를 상상해보란다!), 집의 출현이 자기 확인 작업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집’을 말하는 맥락에서도 그것은 다르지 않다. 우선 집에 대한 인간과 다른 생물의 비교. 이 책을 보고 알았는데, 포유류와 영장류, 집을 짓지 않는단다. 그러나 인간만은 다르다. 집을 짓는다. 이유는, 양육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인간, 참 까다롭고 성가신 존재다. 생후 3년 집중 관리, 10년 이상 양육 지원. 엄마 되기, 아빠 되기가 고달픈 이유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집, 꼭 필요하다.
“인간은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남성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기간이 모두 끝난 후에도 파트너십을 평생토록 지속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과 출산의 시기에 집을 가장 필요로 한다.”(p.16)
생각해 보자. 결혼이라도 할라치면 가장 깊이 생각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집이다.(결혼 안 한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뭐!) 집을 어디에 얻을 것이냐. 주변에서도 묻는다.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집은 어디에 얻었어? 집은 인간과 동일 시 되곤 한다. 자기 확인 혹은 타인을 읽기 위한 중요한 기제다. 지금 시대는 더욱 그렇다. 신분제가 사라진 자본주의의 창궐과 함께 집은 신분을 드러낸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 집(의 사회성)을 이해하는 정도는 낮은 것 같다. 재벌 계열 건설회사의 광고카피는 그런 우리의 이해를 대변한다. “`비교할 수 없는 당신의 가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천박함의 극치이자 인간을 무시한 폭력이지만, 그것은 또한 지금-여기가 품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현 사회에서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어떻게 되십니까, 자본의 크기는 얼마입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기 때문에 대신 ‘어디 사세요’라고 에둘러 묻는다.”(p.69)
어릴 때, 어른들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런 줄 알았다. 크면서 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달리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어디 사느냐”고 먼저 물었다. 모순. 이율배반. 뭘 그 정도 갖고 발끈하느냐고, 말할 수 있겠다. 아 그럼, 철딱서니 없는 이 글, 더 이상 읽기를 멈추시라. 난 당신이 사는 곳, 궁금하지 않으니까.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 참 좋은 책이다.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닌 ‘사는(buying)’ 것으로 아는 사람에겐 당최 상종 못할 종이에 지나지 않겠지만. 재테크, 부동산테크 하시는 분들, 부동산 시세와 집의 평수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랴. 집이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 인간과 집이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집의 평수(시세)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 이 책 보면 참 좋다.
장담하건대, 집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보면 집이 달라 보인다. 내가 사는 집부터 내가 발길을 디디는 동선 곳곳에 놓인 건축물까지. 건축이 그래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건축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건축을 본다는 것은 한 시대의 지배적 담론을 읽어낸다는 것과 동의어다.
건축은 또한 기존 사회질서와 철저히 조응한다. 바로크, 로코코, 고딕 등 건축양식으로 시대를 호명하는 것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지배계층의 의도와 질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아파트. 지배계층과 토건업자의 강력한 의도와 지배욕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로, 집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과연 인민에게 아파트가 반드시 필요했을까? 지배계층의 숨은 의도가 이 책에 잘 나온다. 우선 ‘내 집 마련의 신화’부터. 왜 ‘신화’라는 말로 언어의 인플레가 가미돼야 했을까. 지배계층, 주택을 소유하도록 부추겼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가난한 노동자가 아닌, 당당한 도시민’이라는 의식을 갖도록 부추겼다. 노동자들을 부려먹기 위해, 자본가에게 그건 필수였다.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잊게 만들기. 노동 환경의 개선보다 도시 중산층의 모방 소비로 관심 돌리기.
그러니, 평생을 두고 집을 갖는 데만 온 힘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과연 집을 소유한다는 게 왜 필요한가 말이다. 그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내게 댈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형님’ 혹은 ‘누님’ 하고 무릎 꿇겠다.
그 방법, 점점 더 교묘해졌다. 덕분에 ‘내 집 마련’, ‘등골 브레이커’가 됐다. 주택담보대출, 모기지론 등의 금융기법까지 동원됐다. 노동자들은 더욱 온순해졌다. 이 빌어먹을 사회에 진짜 필요한 저항과 반항, 혁명의 기운 모두를 야금야금 빼 먹었다.
지배층은 노동자들의 일치단결에 늘 노심초사하는데, 내 집 마련, 아파트라는 신화는 가족주의의 안온한 소파에 묻히도록 만들기에 딱! 그것으로 노동자계층의 자발적인 분열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 책은 생각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왜 고작 아파트 한 채 마련한다고 모든 등골을 빨아 먹혀야 하는 것일까?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공급함으로써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안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기본 입장은 사회주의자나 박애주의자 모두 같았지만, 그 방법론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이 아파트 내에 공용공간을 강조하여 노동자들이 단결하도록 하였다면, 박애주의자들은 공용공간을 최소화하고 각 주호 내에 안락함을 제공함으로써 가족주의를 심화시키고자 하였다.”(pp.249~250)
말머리에 언급했지만, 아파트, 노동자에게 공동주거를 제공해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목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우리의 아파트는 그것과 무관하게, 아니 정반대로 작동했다. 1970~80년대 그저 잘 살아보는 것이 모든 것에 앞섰던 시절, 지배계층은 노동자 인민들이 아파트를 장만하는 성취감을 갖도록 부추겼다. 아파트는 중산층의 좌경화와 단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기득권 세력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건축의 역사는 곧 체제 순응의 역사”라는 저자 서윤영의 언급은 그래서 확 와 닿는다. 인민의 일상을 기존의 사회제체 안에 순응시키려는 노력이 건축에 투영될 수밖에 없다. 건축은 돈(자본)과 권력(제도 혹은 법)이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재에 대한 사유도 다시 하게 됐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서재다. TV나 영화를 볼라치면 서재는 매혹적으로 비친다. 혹은 명망가 혹은 셀러브리티들의 서재를 보여주면서 흔히 접할 수 있는 ‘OOO의 서재’. 서재에 대한 로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봤던 <돈의 맛>. 웅장하고 으리으리한 거대한 서재가 등장했다. 모든 것이 꽉 찬 서재.
《사람을 닮은 집, 세상을 담은 집》이 알려주는 서재에 대한 팁. 서재는 사회적 욕망의 산실이다. ‘서재 갖기 유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흥미롭다.
“엄밀히 말해 가장의 사실私室인 그곳을 굳이 서재라 부르는 것은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곧 권력인 사회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정보와 지식이 권력과 경제자본으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서재를 소유했다는 것은 권력과 경제력을 소유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는 까닭에, 서재가 아닌 방마저 서재라고 부르는 것이다.”(p.153)
<돈의 맛>에서 윤 회장(백윤식)이 집을 나가기 전, 돈이 준 모욕에 대해 언급하는 곳이 서재이다. 이층 서재를 정리하면서 일층에 있는 비서와 딸에게 고해성사 혹은 자기 토로를 한다. 그리고 그 꽉 찬 서재에서 윤 회장 자신의 것이라곤 몇 권의 책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의 앞선 언급은 그토록 으리으리한 서재를 갖춰놓은 이유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집을 ‘다시’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를 닮은, 혹은 나를 담은 집을 짓고 싶은 이유가 더욱 강해졌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솔직히 말하건대, 사람이 집(아파트)을 닮았다. 그것은 지배계층의 교묘한 상징 조작에 휘둘린 까닭이었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과 자유가 있다. 사람이 집을 닮아선 안 된다. 집이 사람을 닮아야 한다.
우리, 다시 집을 돌아보고 들여다보자.
집을 ‘소유’한다는 것, 과연 우리의 진짜 욕망이었을까? 주입된 것은 아니었을까?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