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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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었다. 은밀한 욕망이었으니까. 벌건 대낮, 그 욕망을 들춰내기에 나는 용기가 없었다. 아니, 밤이 적당했다고 해야 하겠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지닌 욕망 때문에. 인생의 황혼에 다다른 일흔. 하루의 시간에 대입하자면 밤이 적당하겠다. 그 일흔이 은밀하게 욕망하는 시간은 열여덟. 밤은 낮을 원하고 있었다. 달은 해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 일흔의 은밀한 욕망을 만나는 시간은 밤이어야 했다.

은교. 그 이름이 그렇게 은밀한 것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이적요는 은교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괴테가 떠올랐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팔십을 넘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 했다. 여든 둘, 그는 《파우스트》2부를 탈고했다. 60년 이상, 괴테의 창작의 샘에선 물이 솟은 셈이다.

섣부르게도 나는 그 창작의 근원 중 하나로, ‘사랑’을 놓는다. 아니 ‘욕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것. 그러니까, 사랑은 욕망의 다른 형태!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괴테 연애사의 한 정점은 1823년. 그의 나이 일흔 넷, 굳이 순서를 붙이자면 여덟 번째 여인,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났다.

범인의 시선에서 놀라운 건, 당시 울리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누군가는 (더러운)스캔들, 노망, 주책, 추문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글쎄.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일흔 넷과 열아홉. 제 아무리 대문호이자 예술가였던 괴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힘들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괴테, 당시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통해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라고 읊기도 했다. 《은교》에 나와 있다. A. 앙드레가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읊조린 시구.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이적요의 마음이리라.

 

어쨌든 괴테와 울리케,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괴테는 여든 셋에 생을 마감했다. 이후 더 놀라운 건, 울리케. 그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글쎄, 괴테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열아홉에 받은 일흔 넷의 사랑이 어떻게든 그녀의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괴테의 이런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내게, 열여덟 은교를 향한 일흔 이적요의 욕망을 추하다고 덮을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은밀하다고 혼자서만 펼칠 것도 아니었다. 그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적요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그것이 국민시인의 옹색한 변명이자 자기 옹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적요가 말했듯, 사랑은 갇힐 수 없는 무엇이고, 본래 미친 감정이다. 동의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회의 시선 운운하는 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단정한다.

다만 은교와 이적요의 문제는, 각자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넘을 수 없는 벽은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이 짧은 고해성사는 가슴을 덜거덕거리게 만든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지만, 나는 그 시궁창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꽃이 핀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이른바 도덕 등의 사회적 잣대를 들어 삿대질하거나 뒷담화를 구시렁거릴 것이다. 비루한 그들만의 잣대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아니다. 사랑은 오롯이 당사자의 것이거늘. 오지라퍼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흥분하고 있었나 보다. 책에는 그 어떤 농익은 연애보다 더 은밀하게 내 몸을 휘감는 관능(혹은 욕망)이 있었다. 늙는 것은 죄가 아니고, 그 욕망은 자연이었다. 사회주의운동을 한 혁명 전사,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연이 아니다. 꿈이요, 목표다. 그러나 사랑은, 생피처럼 더운 욕망은 자연 그 자체! 이적요의 몸 깊은 곳에서 솟은 샘물. 이적요가 지닌 자연. 그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지닌 자연이다.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젊음이 지닌 아름다움이 자연이듯, 늙음도 자연이요, 사랑이라는 욕망도 자연이다. 은교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 시인의 욕망이 꿈틀댄 것도 자연이다. 그것이 지옥일지라도 자연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함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이므로 어찌할 수가 없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갈망에 감정이입을 한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은교는 곧 나의 연인이었다. 나는 이적요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은교를 향한 욕망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건 이적요마냥, 은교가 로리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도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소모적이고 쓸쓸하며 슬픈 동물인 남자였기 때문일까. 영원에 가까운 여자를 향한 갈망이었던 걸까.


밤은 그것을 꿈꾸게 하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나라고 다를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짐승(욕망)은 꼬리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이적요는 그것을 말했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빌리지도 않고, 자연 그대로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파괴하거나 해악을 미치게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찾았다.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었던 자신의 거짓 인생을 내팽겨 쳤다.

『은교』는 단순히 은밀한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은교도 단순히 열여덟 소녀가 아니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불온한 상상을 불러오면서 예민한 감각의 촉을 세우게 한다. 직접적인 섹스(장면)보다 더 끈적끈적하다. 불가능한 꿈을 향한 우리 깊은 곳의 은밀한 욕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한다.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고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김훈이 그랬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의 날선 진실이 가진 욕망보다 대담한 노출을 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안고 활보하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다고. 그래서 성적 매력이 거리를 활보할 때라야 나라의 힘과 겨레의 기쁨이 드러난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볕이 뜨거워지는 시간이 좋다. 음란하다고, 변태같다고 찌푸려도 어쩔 수 없다.

 

은교가 없는 이적요의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을 것 같다. 힘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은교의 모습, 그것이 자연이요, 생의 활력이다. 싱싱한 행복이다.


이 책, 관능적이다. 그래서, 밤에만 읽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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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만 명을 어떻게 죽일까? -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실이 중요한 이유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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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속는 것이 거짓말이라지만, 사람들은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으면 믿는다. 세월 먹으면서 뼈저리게 절감한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건 ‘사실’ 여부와 상관없더라. 객관적 사실을 들이댄다고 사람들이 바로 마음을 바꾸는 건 아니다.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호소해봐야 그건 넋두리일 뿐이다. ‘쇠귀에 경 읽기’는 그래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사실은 늘 변함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삶이 반드시 사실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신봉하는 건, 삶의 근거는 (자신의) 믿음이다. 즉, 가치(관), 지각, 생각, 관념 등이다. 사실을 폄하하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은 현실을 이루는 날 것의 질료에 불과하다. 현실 자체가 아닌 셈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접하고 난 뒤 그것을 해석할 따름이다.


거짓말을 ‘잘’ 하는 것이 정치인(꾼)의 미덕이 됐다. 어쩌다 그리 됐을까? 표절 안 했다고 우기던 자식이나 제수씨를 추행 의혹이 있던 놈 모두 국회의원 당선자가 됐다. 그리고선 탈당을 했다. 탈당의 변(명)이 우습다. ‘박근혜’라는 거짓말 고수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란다. 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란다. 아니, 대체 그 당에게 부담이 될 것은 무엇이며, 박근혜라는 작자에게 폐가 될 것은 무어란 말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탈당이 아니라,(혹은 출당 여부가 아니라) 국회의원 당선자 직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 당은 그런 수준의 작자들이 버글버글한 오합지졸들 아니던가. 초록동색이 탈당이니 출당을 거론하는 걸 보니 우습고 화가 난다. 그리고 궁금했다. 대체 우리는 왜 자꾸만 거짓말에 속는 것일까?


《How do you kill 11 million people?(1,100만 명을 어떻게 죽일까?)》는 그 이유를 알려준다. 제목의 1,100만 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숫자)이다. 정확한 숫자는 11,283,000명.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죽은 이들. 이 기간 희생된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전사자 5,2000,000명은 여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 숫자, 지금의 서울시민 숫자다.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당시 히틀러는 측근들에게 이리 말했단다. “사람들은 생각이란 걸 안 해. 그러니까 뻥을 크게 치라고. 쉽고 간단하게 말해. 계속 말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은 그걸 믿는단 말이지.”(p.53) 별 볼일 없던 우익청년 히틀러가 가진 핵심적인 무기였나 보다. 거짓말! 그는 자서전을 통해서도 이리 언급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중들은 아주 작은 것보다는 거대한 거짓말의 희생자가 되기 쉽다.”


저자 앤디 앤드루스는 책의 제목으로 드러난 질문의 답을 단순 명쾌하게 지른다. Lie to them(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몰랐었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가 독가스를 마셨다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아우슈비츠 등에서 독가스로 죽은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그리 믿고 싶었던 건가보다.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러나 그들, 수용소로 강제 이주된 것이 아니었다.


‘악의 평범성’으로 알려진, 일명 ‘마스터(Master)’로 불렸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그는 1941년 12월 ‘최종 솔루션’을 실행하라는 지시문을 하달 받고, 다국적 기업의 총수처럼 과업을 수행했다. 웅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열정적인 스태프들을 고용했으며, 전체 프로세스를 면밀히 모니터링 했다. 목표를 위해 회심의 일구로 던진 전략은 거짓말이었다. 이런 말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유태인 여러분! 러시아 군이 동부 전선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보호 조치를 이렇게 급박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점 사과드립니다. 불행히도, 설명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안녕만을 원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직업을 갖게 될 것이며, 부인들은 살림을 하고 자녀들은 학교에 가게 될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p.45)


많은 유태인은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뗐다. 수용소로 향했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곤 아주 극소수를 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저 말. 어디선가 많이 접한 말 같지 않나? 기시감 말이다. 특히나 저 풍요로운 삶. 747공약을 들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는 감언이설이 ‘오버 랩’ 된다.


아니나 다를까. 히틀러는 더 나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다른 것을 약속했다. 이른바 ‘더 밝은 미래’다. 2007년 대선, 이명박 후보의 가장 강력한 선동(?)은 이것이었다. “경제! 확실히 살리겠습니다.” 당시의 홍보물은 그것을 ‘사실’로 적시하고 있다. 구호는 ‘전 국민 성공시대’. 단 한 명의 실패나 낙오도 없는 성공이 일상화된 꿈같은 유토피아.


유권자들은 대체 무엇에 혹했던 것일까? 경제가 죽기라도 했다고 믿었던 것일까? 국민 모두가 성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었던 것일까? 4년이 넘게 흘렀다. 살리겠다던 경제, 어떻게 살렸는지 궁금하다. 전 국민은 성공은커녕 한숨만 늘고 불행해졌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거짓말 덕분에 덕을 본 아주 극소수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4년 전 경제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명박은 좀 더 윤택하고 풍요로워지고 싶은 사람들의 강력한 욕망과 딱 맞아떨어졌다. 부자가 되고 싶은, 돈만 많으면 언제든 행복해질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감언이설을 곁들여. 평범한 우리는 거의 홀라당 넘어갔다.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권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여겼다. 믿음으로, 생각으로, 관념으로.


그러니까, 이명박도 알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이란 걸 안 한다는 것을. 큰 뻥을 치면 된다는 것을. 쉽고 간단하게, 계속 말했다. 사람들, 그냥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꼭 이명박과 당시 한나라당의 지지자가 아니라도 말이다. 히틀러도 그랬다. 당시 열성적인 히틀러 지지자들은 독일 국민(7970만)의 10% 가량인 850만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평범한 독일 국민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히틀러에 철저히 놀아났다.


지금-여기라고 다를까. 우리는 이명박에게 희롱(!)당하고 추행(!)당했다. 거짓말에 속았다. 거짓말쟁이 권력자와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목소리를 닫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식자층에 속하는 대다수의 주류들은 임금만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만족했다. 이제껏 향유했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만 급급해, 그 뒤에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던 뱀과 같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했다.”(p.55)


나치 독일의 이야기인지, 지금 우리의 이야기인지, 똑같다. 방관과 침묵. 거짓말쟁이 권력자들은 그런 순간을 파고든다. 다시 말하지만 악의 평범성. 기존 질서에 의해 피 흘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질서에 순응하는 건, 그 질서와 체제가 행하는 살인에 동참하는 일이다.


우리가 부른 업보다. 그렇다고 눈물만 훔치고 후회로 땅만 치고 있을 순 없다. 생각을 해야 한다. 믿고 싶어 믿기보단 진실만을 말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앤디 앤드루스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통치를 맡기는 자들이 기초적으로 갖춰야 할 판단기준이라고 일깨운다. 우리 모두에게 효과적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정치가 되는 풍토. 그것을 바꾸는 것. 무엇보다 권력의 주체가 아닌 세상을 진짜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는 보여줍니다. 자기의 이익이 충족되는 한 온순한 양처럼 지도자의 뒤를 따라 걷는 국민들, 그들이 어느 순간 화들짝 깨어났을 때 도착한 그곳이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곳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p.85)


꿈에서 깨어나니 우린 망망대해에 있다. 힘들게 만회하고 있던 민주주의를 잃어버렸고, 자유는 가출했다. 누군가의 자유를 심대하게 침해할 정도로 한 국가가 변질되는 데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지난 4년, 충분히 알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유를 되찾고 집 나간 민주주의를 되돌아오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똑똑한 CEO가 필요하지 않다. 지능이 아닌 인격. 모든 것은 인격이 바탕이 돼야 한다. 법조계, 의료계, 교육계 모두 마찬가지다. 리더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지능 아닌 인격!


저자는 인격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에게 권력을 줘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인격파탄자에게 권력을 줘봤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왔는지 이젠 안다. 머슴이고 일꾼이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이들의 키치적 거짓말에, 그 무섭고 지속적인 뻥카에 더 이상 속지 말 것. 도덕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작자의 말장난에 휘둘리지 말 것.  

 

책은 1,100만 명을 죽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려주는 한편으로 1,100만 명을 죽이는 질서에 평범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침서다.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그건 12월을 향한 것만이 아니다. 계속 우리는 묻고 요구해야 한다. 알고 속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다. 복지, 경제민주화, 일자리. 새빨간 누리내 나는 당의 거짓말이다. 물론 민주당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고! 


“이제는 리더들에게 더 높은 가치기준을 요구해야 할 때이며, 설령 그것이 그들의 처지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진실만을 말하도록 요구해야 할 때입니다.”(p.103)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작성됐다. 그러나 그런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느끼는 바 그대로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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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이웃, 함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서울

봄은 고양이로다 : 당신을 향한 봄편지

아이에게 묻습니다. 눈(雪)이 녹으면 뭐가 되지? 아이, 답하네요. 봄이 돼요. 아하, 대부분 어른들은 "물"이라고 답할 텐데, 역시 아이(들)는 시인(詩人)입니다. 눈이 녹았어요(당신 마음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마을공동체(꽃)도 꽃망울을 틔우려고 준비가 한창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다양한 꽃에 대한 소개로 봄을 이야기할게요. 우선 국내외의 다양한 마을공동체 사례, 사업, 활동 등을 모으고 있어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마을공동체 사례가 공유되고 관계가 형성되면, 마을공동체 지원도 맞춤형으로 접근할 수 있을 거예요. 이를 위해 오픈 문서(마을공동체 사례 디렉토리)를 만들었으니, 누구나 글 올리고 수정해주세요. 우리 함께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재미, 느껴보아요. (Click Click) ^.~

또 하나의 꽃. 마을지원센터 준비단이 월요초청강좌를 개설합니다. "마을을 말하다" 오는 26일 '스마트환경과 마을만들기(강사 전명산 스마트앱개발 전문가)'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오전 9시~10시 마을공동체 활동과 관련한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받고 말하는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에요. 경우에 따라 외부 개방 여부가 다르나 뉴스레터 일정 공지 등을 통해 알려드릴게요.

아울러 꽃 하나 더. 서울지역 마을공동체 순회방문 프로그램 "마을에 가다"를 31일(토)부터 진행할 계획입니다. 함께 모여서 마을공동체를 방문해 사례도 공유하고, 관계도 맺으며, 네트워크도 강화하는, 일타삼피! 격주 토요일, 선착순으로 30명을 모집해서 룰루랄라~하려고요. '서울마을공동체풀뿌리모임'카페 혹은 서유기를 계속 주목해 주세요. 첫 마을은 강북의 '재미난마을'로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봄이라서 그래요. 고양이 같은 봄이야옹~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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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궁금한 거죠. 그 환멸, 지독한 환멸.

 

새누린내당(새누리당)이 과반수 1당 됐다는 것 따위의 때문이 아니라,

(민주통합당이 1당에 하지 못했다는 것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그토록 혐오하던 빨갱이(?)가 되고 말았다는 그런 환멸!

오오 놀라운 지고. 단 한 큐에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야 마는 마성!!

 

 

 

이런 것들, 대체 어떻게 참고 견디고 계신가요???

(다락방님의 질문을 내 식으로 약간 바꿔서~)

 

샛노랗게 꽃망울을 터트린 개나리들

봄밤의 알싸한 내음

별 큰 기대도 않았는데도 선거 결과 때문에 뜬금없이 흘렀던 눈물과 탄식

대책 없이 텅텅 비어버린 뇌

살랑살랑 불어대는 봄바람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이민 하소연 

이젠 정치적으로 꿈조차 꿀 수 없다는 지독한 현실

꿈꾸려는 의지조차 상실한 무기력함

자꾸만 길어지는 낮

반면 점점 짧아지는 밤

이빨 조금 부러진 것 때문에 자꾸 가야 하는 치과

마취 때문에 신경이 마비된 입(과 입술)

서울시 일부 공무원의 무개념과 네(사)가지 없음

정당 지지율 1.13%

정당 등록 취소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정당법의 가혹한 규정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슬퍼지는 세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국가 맞아?)

 

무엇보다 새누린내가 뿜어내는 냄새가 야기하는 지독한 환멸

 

쉬파, 어떻게들 견디냐고요!

 

나?

커피로, 사랑보다 더 독하고 찐한 커피로 견딘다! 된장~

아울러, 24만2995명 한 명이라는 사실로도!! 자랑할 것 없는 내가 자랑스러운 이유!

 

근데, 이 나라에선 왜 언제나 늘 참고 견뎌야만 하는 걸까?ㅠㅠ  

쉬파, 대한민국 좆 같은 나라. 새누린내만 조낸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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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4-1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걸 일컬어 적화통일이라고 하죠...T.T

책을품은삶 2012-04-18 00:04   좋아요 0 | URL
어릴 적 그 공포의 '적화통일'을 이렇게 보다니요.
공포 그 자체 맞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