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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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었다. 은밀한 욕망이었으니까. 벌건 대낮, 그 욕망을 들춰내기에 나는 용기가 없었다. 아니, 밤이 적당했다고 해야 하겠다. 일흔이라는 나이가 지닌 욕망 때문에. 인생의 황혼에 다다른 일흔. 하루의 시간에 대입하자면 밤이 적당하겠다. 그 일흔이 은밀하게 욕망하는 시간은 열여덟. 밤은 낮을 원하고 있었다. 달은 해를 꿈꾸고 있다. 그러니, 일흔의 은밀한 욕망을 만나는 시간은 밤이어야 했다.

은교. 그 이름이 그렇게 은밀한 것인지, 나는 처음 알았다. 불멸의 내 젊은 신부, 내 영원한 처녀. 이적요는 은교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괴테가 떠올랐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팔십을 넘어서도 창작활동을 계속 했다. 여든 둘, 그는 《파우스트》2부를 탈고했다. 60년 이상, 괴테의 창작의 샘에선 물이 솟은 셈이다.

섣부르게도 나는 그 창작의 근원 중 하나로, ‘사랑’을 놓는다. 아니 ‘욕망’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것. 그러니까, 사랑은 욕망의 다른 형태!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했던 괴테 연애사의 한 정점은 1823년. 그의 나이 일흔 넷, 굳이 순서를 붙이자면 여덟 번째 여인,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났다.

범인의 시선에서 놀라운 건, 당시 울리케의 나이. 열아홉이었다. 괴테의 마지막 사랑이었다. 누군가는 (더러운)스캔들, 노망, 주책, 추문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글쎄.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랑은 당사자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일흔 넷과 열아홉. 제 아무리 대문호이자 예술가였던 괴테지만, 모르긴 몰라도 힘들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괴테, 당시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통해 “꽃이 모두 져버린 이날 / 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라고 읊기도 했다. 《은교》에 나와 있다. A. 앙드레가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에서 읊조린 시구. “자기를 괴롭혀서 시를 짓는 것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 이적요의 마음이리라.

 

어쨌든 괴테와 울리케,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괴테는 여든 셋에 생을 마감했다. 이후 더 놀라운 건, 울리케. 그녀는 아흔다섯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글쎄, 괴테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열아홉에 받은 일흔 넷의 사랑이 어떻게든 그녀의 생애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괴테의 이런 사랑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내게, 열여덟 은교를 향한 일흔 이적요의 욕망을 추하다고 덮을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은밀하다고 혼자서만 펼칠 것도 아니었다. 그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적요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그것이 국민시인의 옹색한 변명이자 자기 옹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적요가 말했듯, 사랑은 갇힐 수 없는 무엇이고, 본래 미친 감정이다. 동의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사회의 시선 운운하는 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단정한다.

다만 은교와 이적요의 문제는, 각자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 넘을 수 없는 벽은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적요의 이 짧은 고해성사는 가슴을 덜거덕거리게 만든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p.11) 

‘본시창(본능은 시궁창)’이라지만, 나는 그 시궁창에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꽃이 핀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이른바 도덕 등의 사회적 잣대를 들어 삿대질하거나 뒷담화를 구시렁거릴 것이다. 비루한 그들만의 잣대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아니다. 사랑은 오롯이 당사자의 것이거늘. 오지라퍼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입방아를 찧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흥분하고 있었나 보다. 책에는 그 어떤 농익은 연애보다 더 은밀하게 내 몸을 휘감는 관능(혹은 욕망)이 있었다. 늙는 것은 죄가 아니고, 그 욕망은 자연이었다. 사회주의운동을 한 혁명 전사,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자연이 아니다. 꿈이요, 목표다. 그러나 사랑은, 생피처럼 더운 욕망은 자연 그 자체! 이적요의 몸 깊은 곳에서 솟은 샘물. 이적요가 지닌 자연. 그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지닌 자연이다.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젊음이 지닌 아름다움이 자연이듯, 늙음도 자연이요, 사랑이라는 욕망도 자연이다. 은교의 옴씬한 발목 인대에 시인의 욕망이 꿈틀댄 것도 자연이다. 그것이 지옥일지라도 자연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멈추지 못함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연이므로 어찌할 수가 없다.

 

은교를 향한 이적요의 갈망에 감정이입을 한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은교는 곧 나의 연인이었다. 나는 이적요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은교를 향한 욕망은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건 이적요마냥, 은교가 로리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나도 영원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소모적이고 쓸쓸하며 슬픈 동물인 남자였기 때문일까. 영원에 가까운 여자를 향한 갈망이었던 걸까.


밤은 그것을 꿈꾸게 하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나라고 다를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우리 각자의 짐승(욕망)은 꼬리를 내리고 있을 뿐이다. 이적요는 그것을 말했다.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빌리지도 않고, 자연 그대로를 드러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파괴하거나 해악을 미치게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찾았다. 욕망과 본능을 무시한 죄인이었던 자신의 거짓 인생을 내팽겨 쳤다.

『은교』는 단순히 은밀한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은교도 단순히 열여덟 소녀가 아니었다. 이 소설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불온한 상상을 불러오면서 예민한 감각의 촉을 세우게 한다. 직접적인 섹스(장면)보다 더 끈적끈적하다. 불가능한 꿈을 향한 우리 깊은 곳의 은밀한 욕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하기도 한다. 목표를 꿈으로 착각하고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김훈이 그랬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의 날선 진실이 가진 욕망보다 대담한 노출을 한 여자가 애인의 허리를 안고 활보하는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낀다고. 그래서 성적 매력이 거리를 활보할 때라야 나라의 힘과 겨레의 기쁨이 드러난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볕이 뜨거워지는 시간이 좋다. 음란하다고, 변태같다고 찌푸려도 어쩔 수 없다.

 

은교가 없는 이적요의 하늘, 혼란도 없고, 즐거움도 없을 것 같다. 힘도 기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할 수가 없다. 숏팬츠와 레드룩으로 무장한 은교의 모습, 그것이 자연이요, 생의 활력이다. 싱싱한 행복이다.


이 책, 관능적이다. 그래서, 밤에만 읽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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