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실 때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너무도 짧게 끝나버린 그 시절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또한 커피는 단순히 하나의 음료로만 간주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수많은 사건들의 일부로서 존재했다. 

- 셰릴 더들리 


어떤 일은 느닷없이 다가오고, 바람처럼 떠난다.


당신의 전화. 그렇게 다시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한 어느 여름밤. 당신은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일을 당했다고 했다. 멘붕.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신. 그 목소리는 그런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렇게, 나도 멘붕. 그렇다고 멘붕에 멘붕으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

당신 목소리, 잊었다고 아니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었는데, 순간 떨리는 가슴. 

아, 맞아. 당신도 작은 방 하나를 세놓고 살았었던 게지. 

점점 줄어든 방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갑자기 커져서 내 심장을 자극하고. 


당신의 멘붕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 

어느 순간, 당신의 처지에 공감하고야 마는 태도. 

아무렴, 한때 당신은 내가 품고 싶은 세계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당신 이외의 세계는 없었고, 더 있다손 내겐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처한 멘붕에 그닥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

당신의 멘붕 상황을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


그래도, 순간적으로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다.

이 얼굴을 닮았던 당신의 모습. 동티모르의 별과 함께 쏟아지던 당신.



맞아. 순전히 나의 오만이지만,

나만큼 당신을 사랑해주고 아껴줄 사람, 없을 거라는 것.

그럼에도 날 선택하지 않은 당신의 선택은 늘 옳다는 것.  


부디, 당신 아프지 않길.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와 오래도록 함께 하길.

곧 새로 여는 당신의 커피하우스가 멘붕 액땜을 통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길. 

여전히 당신의 심장을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오늘. 그러니까, 멘붕. 


여름밤 바람. 어머니는 이 계절의 밤에 부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하신다.

나도 오늘만큼은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시원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섞인 바람. 


그렇게 바람결에 다시 날아간 당신 목소리. 안녕. 

다시 한 번, 

아파도 싸워 이기려하지 말고 다독거리며 공존하길. 

그래서 당신의 生이 그날 밤 동티모르의 별처럼 반짝거리길.


실토하건대, 

당신을 만나서, 커피를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렇게 그 시절, 당신을 사랑했었나 보다. 

당신 덕분에 행복했었다. 그때만큼은, 정말로.

당신의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그러진 못하겠지만. 

그 커피는 영원히 숙제로 남아 있을 것 같네.    


그러니까, 오늘은 멘붕 투데이. 

원전의 안전기준을 완화한다는 미친 소식부터 옛 동료의 노조활동에 따른 해고, 수원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 여의도에서 옛 직장동료를 죽인 칼부림. 그리고 멘붕 멘붕 멘붕. 


MB시절의 자화상, 멘붕(MB).

커피가 없었다면 나는 이 시절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혹시 당신은 알아? 

커피는 때론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사랑도, 미움도, 멘붕도, 나에겐 그랬다...


늦었지만, 

커피와 함께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 당신.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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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바꾸는 것보다 종교를 바꾸는 것이 더 쉽다. 

세상 사람들을 카페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 중 카페에 가는 사람 사람들의 정신세계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 조르주 쿠트린- 


우리 마을엔, 그리고 우리 커피하우스 단골 중엔 무명의 소설가가 있다. 아니, 무명(無明)이 아니지. 이름이 없다는 말, 내가 싫어하는 표현이니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가 있다. 그럼 어떤 소설을 펴냈느냐? 없다. 그의 가슴과 머리에, 그리고 이른바 '습작품'만 있다. 


굳이 따지고 들면, 소설가 지망생일 텐데, 나는 그런 것 패스. 등단이나 책을 내지 않았다고 '지망생'으로 규정하는 풍토, 별로다. 그는 내게 이미 문학가이자 소설가다. 그의 단편소설 몇 편은 그의 호의에 힘입어 읽은 적이 있다. 어땠냐고? 뭐, 내가 평론이나 비평을 할 처지는 아니다만, 실은 그저 그랬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는 에스프레소를 즐겨한다. 그것도 리스트레또로. 한 번 더 나아가, 리스트레또를 아메리카노 잔에 마신다. 한 번 오면 죽치고 앉아 대여섯 시간을 노트북과 씨름하다가 간다. 아마도 또 어떤 소설을 쓰고 있으리라. 물론 중간중간 딴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그를 위해 두세 번 정도 리필을 해 준다. 그는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 한 달에 자신이 먹을 만치의 계산을 한다. 늘 그보다 더 주긴 하지만.



오늘(8월18일). 그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그를 위한 커피 메뉴다. 커피를 건네면서 메뉴 이름을 말해줬더니, 눈치를 챘는지, 그가 말한다. 


"이거, 발자크 맞죠?" 


하하. 들켰다. 

"역시 소설 쓰는 사람이라 다르네요. 조심하세요. 독해요." 

"전 심장 발작은 일으키지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하하." 


8월18일, DJ의 3주기이기도 하지만, 커피 만드는 내겐 발자크가 우선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Honore de Balzac). 1850년 죽었으니 올해 162주기. 그는 '소설의 교과서'로 불린다. 발자크의 소설이 보여준 섬세한 구조와 사실적 묘사, 인물에 대한 탐구 때문인데, 그의 걸작 《고리오 영감》이 그것을 대변한다.  


아는 사람은 안다. 발자크, '커피 애호'를 넘어 '커피 개중독'이었다. 독일엔 'BALZAC COFFEE'라는 커피 프랜차이즈(1988년 시작)가 있을 정도인데, 프랑스 아닌 독일에서 그의 이름을 딴 커피 프랜차이즈가 있을 정도니, 의아하면서도 말 다했다. (캐나다 토론토에도 있다고 한다.) 



발자크는 커피에 죽고 살았다. 하루에 30잔(50~60잔에 달했다는 속설도 있다). 평생 3만 잔을 마셨다고 추정되는데, 그는 커피 없이 못 살았다. 그는 이른바 '소설 노동자'로 불렸다. 하루의 태반을 소설 쓰는데 썼다고 한다. 14~15시간을 소설 쓰는데 투여했다는 그는 그만큼 다산(多産)했다. 74편의 장편소설을 비롯해 숱하게 많은 단편을 내놨다. 


물론 그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빚을 갚아야 했다. 이른바 '생계형 소설노동자'. 여러 사업에 손을 댔으나 하나 같이 망했다. 사업가적 기질은 꽝이었으나 글쓰기만큼은 잘 했나보다. 미친 듯이 '이야기하기'를 써댔다. 그것을 위해 '커피'는 반드시 필요했다. 대체 얼마나 써대고 마셔댔는지, 이 기록을 보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이렇게 묘사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여섯 자루의 촛불을 켜고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시작이 반.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4시간에서 6시간 정도가 훌쩍 지나간다. 체력에 한계가 온다. 그러면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를 탄다. 하지만 실은 이 한 잔도 계속 글쓰기에 박차를 가하기 위함이다. 아침 8시에 간단한 식사. 곧 다시 써내려간다. 점심시간 때까지. 식사, 커피. 1시부터 6시까지 또 쓴다. 도중에 커피." 


도대체, 이 남자는 뭔가. 잠자고, 생리현상 처리하고, 식사 준비를 포함해 식사 시간과 커피를 제조하는 시간을 제하고 하루 15시간을 글쓰기. 그것도 매일. 미친 거 아냐? 소설을 쓰기 위해 그가 커피를 마셨다지만, 커피 만드는 내 입장에서 보면, 반대다. 


"제가 보기엔, 발자크는 커피를 마시려고 소설을 쓴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게 말이 돼요? 커피가 소설인 이유죠. 죽음보다 지독한 서정이었고요. 하하. 이 정도면 덕후죠, 덕후. 커피 덕후. 커피 오타쿠."


"발자크에겐 커피라는 존재는 '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창작의 동력. 뇌 주름을 깨우고 상상력을 발동하고 생각의 엔진을 돌리기 위한 심장의 검은 석유죠. 근데, 전 아직도 궁금해요. 커피 때문에 정말 죽었을까요?" 


글쎄, 나도 모른다. 그는 심장질환으로 죽었다. 너~무 지나치고 과도한 커피로 인해 심장병을 얻었다는 얘기도 있다. 말하자면, 커피가 '발작'을 일으킨 셈인가? 


"그럼 행복했을까요? 커피를 그렇게 좋아하고 애찬하던 사람이 커피 때문에 죽었으니. 어떤 사람은 커피 애호가다운 죽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발자크가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커피도 너~무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그 지나침은 물론 보통의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한 방에 80잔을 들이키면 훅~ 간다.얼마 전 탈학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커피 강의를 하면서 이걸 알려줬더니, 묻는다. "선생님, 그렇게 마신 사람 있어요?" 글쎄, 나도 그건 모른다. 


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라는 책이 있던데,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저자인 엘리엇 부는 커피가 자살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카페인의 분자식은 'C8H1ON402'이다. 이것 10그램을 한 방에 먹으면 황천길이다. 카페인 10그램은 그럼 커피 몇 잔 정도냐! 일반 커피 잔으로 80잔 정도다. 그래서 80잔 얘길 한 거다. 조금씩 천천히 한평생에 걸쳐 죽여주는 독약이 될 수는 있겠다. 커피 때문이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최승자는 죽음 대신 '네게로' 간다고 썼다.(「네게로」라는 詩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균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김갑수 선생은 한 술 더 뜬다. 《지구 위의 작업실》, '커피는 한 잔의 문학'이라고 했다. 

"250밀리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 10퍼센트 정도의 사람에게서 불안, 초조감, 안절부절못함, 홍조, 다한증, 손발의 따가운 느낌, 구역, 구토증 등이 나타난다. 1그램 이상의 카페인을 먹었을 때는 극도의 불안, 초조감, 정신착란증, 환청과 부정맥이 있을 수 있다. 10그램 이상에서는 전신발작, 호흡부전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영혼의 상처 없이 문학은 가능하지 않다. 말하자면 커피는 한잔의 문학이다." 



"커피 하는 입장에선 어때요? '커피질'도 발자크만 하면 정말 쩔지 않아요?"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덕후질도 저 정도면 확실히 쩐다.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이 특별히 주장했다는데,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 그것이 바로 커피." 커피가 서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가 없다. 발자크에게도 그랬으리라. 


"커피, 정말 지독해요. 커피가 없었다면 발자크가 소설을 저렇게 쓸 수 있었을까요? 빚 때문에 죽으려고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 죽음보다 더 지독한 액체죠."


커피는 한편으로 불행을 극복하는 액체다. 그러니, 만날 빚더미에 눌린 발자크가 이렇게 읊어댔겠지. "불행을 새로운 출발점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되라. 어떠한 지혜로도 불행을 미리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우리에게 있다."


홍대 부근의 한 카페, '무슈발자크'라는 커피가 있다. 무슈는 프랑스 사람, 파리라는 뜻이기도 하고, 아저씨라는 뜻도 있다는데, '발자크 아저씨'라는 그 커피 역시 진한 에스프레소가 아메리카노만큼 담긴다. 이 커피 주인장 역시 뭔가를 아는 사람인지라, 무슈발자크라는 메뉴 이름 옆에 '심장 주의'라는 경고(?)를 달았다. 이 커피를 100잔 마시면 소설가가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까지 말해준다고 한다.


나는 바란다. 부디, 이 소설가에게 나의 커피가 동력이 되길. 

발자크에게처럼 커피가 발작을 일으키는 대신, '심장이 건너뛴 박동'으로 그만의 소설을 완성하길. 

나의 커피가 그의 서정과 서사를 온전하게 결합하는데 도움이 되길.


소설가의 표정이 오늘 따라 밝다. 심장이 건너뛴 박동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밤9시의 커피는 오직 당신만을 위해 커피를 만들고 내린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커피가 위 속으로 미끄러지듯 흘러 들어가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전쟁터의 대부대처럼 몰려오고 전투가 시작된다. 추억은 행군의 기수처럼 돌격해 들어온다. 기병대 군인들이 멋지게 달려 나간다. 논리의 보병부대가 보급품과 탄약을 들고 그 뒤를 바짝 따라간다. 재기 발랄한 착상들이 명사수가 되어 싸움에 끼어든다. 등장인물들이 옷을 입고 살아 움직인다. 종이가 잉크로 뒤덮인다. 전투가 시작되고, 검은 물결로 뒤덮이면서 끝난다. 진짜 전투가 시커먼 포연 속에서 가라앉듯이" (발자크, ‘커피송가’ 중에서)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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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08-19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없이는 못살아도 또 밤 9시 이후의 커피는 못먹지만 ㅠㅠ 한 번 가보고 싶네요. ㅎㅎ

책을품은삶 2012-08-23 01:24   좋아요 0 | URL
네, 커피라이프는 언제나 자신에게 맞게 즐기시면 돼요~^^
즐커~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 & 발렌틴 투른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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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것을 고르는) 행위가 왜 정치적인가에 대한 이야기, 종종 했다. ( 왜 먹는 것이 정치인가 : 식량 선택의 정치학 ,  당신도 자본에 의해 조작된 먹거리에 오염돼 있지 않은가!) 그러나 '넌 왜 먹는 것 갖고 그러냐'는 너의 타박(?) 받았다. 실실 웃으면서 생깠다. 그야말로 무식의 극치니까. 혹은 넌 거대식품자본에 포박된 노예니까. '무식한 노예'에게 무슨 말을 덧붙여 설득하겠는가. 그래, 니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그러나 실은 자본에 의해 길들여진 니 주디에 달콤한 것), 실컷 처먹어라. 속으로 그렇게 말해주셨다.  


물론, 나는 '네(사)가지'가 없어서 그리 했다만(설득력도 부족하고, 설득하느라 힘빼기도 귀찮고), 다시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이 책, 너에게 다시 권한다. 내가 권한다고 색안경부터 끼고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연상될 수도 있겠다. 맞다. 두 책은 다르지 않다. 거칠게 말해서, 장 지글러의 책이 세계에 만연한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을 국제정치(의 허술함)에서 찾았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는 일상의 정치(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준다.


그래, 두말할 것도 없다. 소비는 정치적인 행동이다. 낭비도 정치적인 행동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고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버리는 행위.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도 쉽게 행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에서 왜 또 '정치'를 끄집어 내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 것이나 먹게 만드는 것, 너무도 쉽게 식량(식품)을 버리도록 만드는 것. 그것 자체가 거대자본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현실 정치에서나 일상의 정치에서나 아주 폭넓게 개입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든다. 자본이 만든 룰에 포박된 채, 그 울타리안에서만 (선택의) 자유를 느끼도록 만든다.


책은 그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말이다. 가치와 가격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맹(價盲)의 상태. 그들은 유통망을 장악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선택을 좌지우지했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감별할 수 있는 우리의 '촉'도 무뎌졌다. 앞뒤를 다 장악하고, 화학으로 값싼(그러나 나쁜) 물질을 처넣었다. (로비를 통해) 법도 장악했으니, 두려울 게 무어냐.  


우리는 착각에 빠졌다. 우리가 먹어야 사는 생물(동식물)에 대한 고마움은 차츰 잊었다. 값싼 음식을 원했고, 이런 음식이 충분히 생산되기를 원했다. 자연히 형편없는 음식이 몰려왔고, 입은 싸구려로 전락했다. 후각과 미각은 좋고나쁨이 아닌, 자극에만 길들여졌다. 음식? 더 이상 존중의 대상이 아니었다. 식품의 품질이 떨어져도 누구도 불평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음식은 의미를 상실했다. 이로써 사람은 물론 자연과의 연계도 끊겼다. 


결국 이런 참사가 벌어졌다. "음식은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낭비할 수 있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p.6) 


너도 정말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먹는 것의 문제는 결국 그것의 처리 문제와도 직결된다는 점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분배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식량의 생산부터 유통, 소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엄청나게 쏟아지는 '쓰레기'의 문제에 카메라를 돌렸다. 


아참, 참고로 이 책은 공저자이기도 한 발렌틴 투른의 '음식 낭비'에 대한 다큐 영화 <쓰레기 맛을 봐(Taste The Waste)>과 관련돼 있다.


어쨌든 음식 낭비를 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나를 살리고 나를 지탱하는 음식을 존중하지 아니하므로! 음식을 향유하는 법도 잊었다. 다시 말해, 제대로 음식을 향유한다면 낭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음식에 진정한 가치를 되돌려주는 태도이다. 음식(요리)는 경이로운 일이다. 음식을 먹는 우리 입에서 詩와 노래가 나오는 것을 봐라. 


책은 말한다. 우리가 먹는 양만큼 버린다고.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모든 식품의 '3분의 1'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미국과 같은 나라에선 식품의 절반이 입이 아닌 쓰레기통을 향한다. 미친 짓이다. 이렇게 버려지는 수치의 절반만 건져도, 아니 3분의 1만 건져도 굶주림은 해결가능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식량 낭비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적인 조치를 통해서 가능하다. 물론 너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해 음식물 쓰레기만 500만톤에 이르며, 18조~20조원에 달한다는 것. 이때 탄소배출량도 885만톤이나 된다. 우리나라 전체 승용차의 18%가 내뿜는 탄소량이다. 소나무 18억 그루가 흡수해야 하는 양이고. 이래저래 엄청난 수치다. 그럼에도 우리는 둔감하다. 맛과 음식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역시 미친 짓이다.


대형마트나 슈퍼마켓은 그런 면에서 '심리적인 기아 상태'의 장소이다. 음식 멘붕. 빽빽하게 들어선 수많은 제품들로 인해 무엇이 맛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탈감각화를 유도한다. 자본의 수작이다. 진열장은 무조건 비면 안 되고(다른 마트에 손님을 뺐기니까), '유통기한'에 경도된 사람들은 닥친 날짜에만 급급하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먹을 수 있음에도, 마트는 유통기한이 다다르면 무조건 버린다. 버려야 수요가 일고, 버리는 것에도 이미 가격이 포함돼 있다. 그 사실,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음식 낭비, 너 역시 분개하지 않아? 분개한다면, 우리가 음식을 다루는 행태에도 분개해야 한다. 이 말을 되씹어보자. "낭비는 기아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수십 억 지구인들을 고려할 때 단지 윤리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 문제이자 생태 문제이기도 하다."(p.6)


그렇다면 이토록 엄청난 과잉생산과 식량 파괴에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누구일까. 책은 친절하게 꼽아주신다. 소수의 농업과 화학 분야의 기업연합 수장들, 은행과 주식 투기꾼들. 뭉뚱그려 말하자면, 자본이다. 이 탐욕덩어리의 수작과 협잡은 인류의 계몽과 이성마저도 무력화시킨다. 즉, 우리는 계속 너무 많은, 지방도 너무 많고, 너무 달고, 화학물질 범벅인 식품을 입으로 넣기만 한다. 무의식적으로 형편없이 먹는다. 다시 말하지만, 음식에 대한 존중이 소멸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나의 말이 이번엔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 모르겠지만, 내 말에 조금이라도 꿈틀대는 지점이 있다면,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를 읽고 다시 이야기하자. 음식이 차고 넘치는데, 누군가, 그것도 숱하게 많은 인류가 굶어 죽는 명백한 사실, 그 배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정치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해야 하는 정치.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도 거대자본이 획책한 정치력이었다.  

 

책이 말한 바를 나도 강조하고 싶다. "지구는 기분 날 때마다 마음껏 이용하는 할인매장이 아니다." 지극히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너나 나나 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은 건강한 환경, 깨끗한 음료수, 충분히 건강에 좋은 식량 그리고 교육과 공정한 삶의 기회를 누릴 권리가 있다. 충분히 너도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행동이다. 장을 보러갈 때, 음식을 대할 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우리는 정치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낭비를 줄이고, 누군가 굶어 죽지 않게 하는 정치적인 힘이 된다. 


책은 쓰리알(RRR)을 요구한다. 줄이기(Reduce) 재분배하기(Redistribute) 재생하기(Recycle). 그렇지 않아도 먹는 것에 약간 까칠하다는 평을 듣는 나는, 이 책을 읽고 좀 더 까다로워지기로 했다. 니가 나랑 만날 때는 충분히 감안해주길 바란다. 너도 이 책을 제대로 읽는다면, 우린 '투 까칠'이 될 거다. 


'슬로푸드'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슬로푸드 인터내셔널 회장 카를로 페트리니의 말씀으로 끝맺을게. 너와 더불어 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음식을 진짜 향유하면서 말이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버리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즉 우리가 먹는 음식의 배후에 뭣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하면, 삶은 더 아름다워지고 의미 있게 될 것이다."(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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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름밤 사이로 쏙 숨어버린 별이 아쉬웠다.

 

그래서 스스로 별을 하나둘 띄워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이다.

 

내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돋게 해준,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던 그녀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그녀들을 호출해 준, 그녀들의 총합인 이 얼굴. 

 


그 아름답고 좋은 감정을 품게 해줘서, 그 존재만으로 나라는 세계를 변화시켜준 대단한 그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추억이 있다.

 

그녀들의 얼굴로 별 안 보이는 내 여름 밤하늘을 채웠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 건넸다.

작년 이맘때 비처럼 쏟아지던 동티모르의 별처럼, 그녀들이 반짝인다.  

 

별을 띄운 건,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때문이다.

 


물론 저 얼굴,

딱 남자로망판타지를 돋게 한다는 말, 부인하지 않겠다.

 

영화 또한 남성의 시각만 주로 있을 뿐,

여성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의 지점, 나올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나는 저 얼굴이 주는 내 추억의 한켠에 울고 웃었다.

영화 카피로 내세운 <건축학개론>보다 성숙한 시선도 돋보인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글거리겠지만, 내겐 이토록 사랑스러운 영화라니!!! 

 

진연희, 마지막 장면때문에 나, 훅~갔다. 홀렸다. 별이 하나 떴다.

엔딩 크래딧 뜬다고 절대 나가지 마시라.

이번주 중 이 영화, 다시 언급하자.

(이런 언급 당최 않지만, 아주 예외적으로, 이 영화 흥행가도 탄탄대로! 이른바 '초대박' 안 나면 이 얼굴, 당장 지우겠다!ㅋ)

 


나는 한동안, 진연희(첸옌시), 이 얼굴 때문에 사는 걸로~

<소울 오브 브레드> 역시 기대!  

꺄아~ You're the Apple of my eye(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

 

극중 커징텅처럼 나도 철들기는 글렀다.ㅠㅠ

그냥 계속 유치하게 사는 수밖에!

 

어쩌면 이 영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내겐 '올해의 영화'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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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시시한 대한민국 중년남자.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중년남자의 얼굴에 홀렸다. 


미중년도 아니요. 꽃중년도 아니다. 


더 이상 나아질 것 없는 삶의 한 기슭에서 오로지 환자 하나만 생각하는, 지치고 고단한 이 중년의사의 얼굴. 한 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저 표정. 



이토록 뜨거운 여름, 나는 꼼짝 없이 생포됐고, 포박당했다. 

이 얼굴에 단단히 데였도다. 


지금 내게 여름이 뜨거운 건,

올림픽도, 독도도 아닌 이 중년남자 때문이다.ㅠ.ㅠ 

내 피를 여름의 태양처럼 끓게 만드는 이 중년의 표정. 


곧 '국민의사'로 등극할 이 얼굴. 

그러나 '국민'이라는 수식어는 곧, '세상에 없는'이라는 뜻이므로,

현실에서 이 얼굴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 것. 인혁 대세.


물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품을 수 없는 얼굴이자 표정.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야 만 중년.


사랑합니다, 최 교수님!

저도, 교수님과 쐬주 한 잔 들이키고 싶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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