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EBS 교육대기획 초대형 교육 프로젝트
EBS <학교란 무엇인가> 제작팀 엮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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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구시렁거림부터.

이른바 (경제적으로) '쫌' 사는 나라들의 계모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뭔 국제적인 통계만 나온다 싶으면, 들먹이는 게 'OECD 중 몇 위', 이런 거다. 최근 몇 년 간, 우린 줄기차게 들었다. 또 듣고 있다. 인구 10만명 당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자살 사망률) 1위. 불명예뿐이랴, 슬프고 아프다. 겉으로 드러나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실체적 진실은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경우가 훨씬 많으리라. 아마도.

 

OECD의 저주(?)는 계속된다.

최근 보도를 보면, 한국 사람들, 여전하다. 죽어라 일'만' 한다. 놀 줄 몰라서, 놀면 죽으니까,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다. 이 사회가 가진 심약한 지점. OECD 나라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한다.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무려 2193시간(2010년). 1등 좋아하는 나라라고 티내고 싶은지, 10년째 1위란다. 참고로, OECD 평균은 1749시간이다. 25% 가량 더 일한다. 미친 거다. 대형마트는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설날에도 '정상'영업한다고. 이걸 떳떳하게 자랑질하듯 붙여놓은 '비정상'의 나라. 쉬파, 이땅엔 개미들만 사나?

 

뭐, 그게 끝이 아니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도 최하위권이다. 2009년 기준, 우리나라 공공의료비 기준은 58.2%. 칠레 47.4%, 미국 47.7%, 멕시코 48.3% 등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OECD 평균은 71.5%. 쉬파, 아프면 죽으라는 거지? 비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도록 일한다. 병을 얻는다. 건강보험 혜택도 별 못 받는다. 뒤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나 더 들까?  

곧,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주역(?)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느끼는 행복수준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란다. 앞서 얘기한 것만 봐도, 그래, 아플만 하다. 미안하다, 아이들아. 아무리 '세상이 빅엿' 같아도 행복해야 할 아이들마저 이렇다는 건, 이 나라가 미쳤다는 거다. 전체가 병적인 불행감에 싸여 있고,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다는 징표다.

 

이 집단 우울증의 근원은 무엇일까.

물론 하나의 이유로 귀결하고 싶진 않다. 허나, 이것 하나는, 걸고 넘어져야 하겠다. 지금의 교육(이라 쓰고, 사육이라 읽는다). 그것을 대변하는 학교. 학교,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오로지 입시 위주로 세팅돼 돌아가는 그 시스템.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불행에 몰아넣는 구렁텅이.

 

누군가가 그러더라.

지금의 한국 교육 시스템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고진감래'라고. 빙고. 당신도 생각해 봐라. 중고등학교, 지금은 초등까지 포함해야 할 텐데, '대학만 가면 넌 자유야'라는 감언이설. 대학을 위해 '쫌만 죽도록' 고생하란다. 그러면 세상을 얻을 것인양 꼬드긴다. 그렇게 대학을 가면? 이젠 취업이다. 취업을 위해 또 죽도록 고생하란다. 어딜가도 낙원은 없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데 어디 낙원이 있단 말인가. 

 

이 말도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신분 상승이나 계층 업그레이드가 비교적 쉬웠던 과거엔 틀린 말,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바꿔야 한다. 고생 끝에 병이 온다. 시대에 맞춰 제대로 알려줘야 아이들, 착각하지 않는다. '고통 없이 무엇도 얻을 수 없다(No Pain, No Gain)'. 지금, 이건 나쁜 이데올로기다. 학부모나 교사, 학생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길들여졌고, 지금도 그리 길들인다. 그러니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즐기란다. 지겹도록 들었던 이 말.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개뿔. 고통이라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놀지 말고 공부하라.

대수롭지 않게 부모가 아이에게 툭 던지는 이 말.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고, 이 말이 그렇다. 왜냐! 노는 것과 공부하는 것, 그것을 대립으로 놓는다. 잘못된 인식을 박아놓는다. 노는 것은 즐거운 것, 공부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그러니 이 말, 되레 위험하다. 즉, 아이에게 공부는 재미없고 괴롭지만 나중을 위해 참아 내야 하는 고통이 된다. '공부=고통'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 아울러, 가학적인 취향까지 곁들인다. 그 고통, 누가누가 잘 견디나 게임을 한다. 집단적으로 고문 게임에 빠졌다. 이 땅의 교육은, 미.쳤.다!

 

그래, 학교를 다시 생각해보자.   

학교는 근대의 유산이다. 큰 건물 하나에 벌집처럼 똑같이 생긴 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아이들을 모아놓는다. 교사가 있다. 교육이 이뤄진다. 그리고 거기,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개입한다. 그 교육의 진짜 목적은, 임금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국가가 개입하고 주도한 의무교육의 요체였다. 그것은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이 다른 과목보다 서열상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와 수리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임금 노동자로서 요구되는 자질이다. 이른바 '문명'국들에선 하나 같이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자질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학교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학교는 곧, 관계(망)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해관계가 철저히 얽힌 장소이기도 하다. 학교에 대한 고민,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학생, 교사, 부모 등 그 이해관계자의 고민을 담았다. 교육이 불가능해진 시대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놓을 수는 없다. 임금노동자가 세상의 99%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EBS의 시도.

1년 2개월. 국내외 교육 현장 취재. 학생 200명 심리 실험. 현직 교사 혁신 프로그램 도입. 초·중·고를 포함한 4,000명 학생들의 설문 참여와 다양한 교육 실험. 늦었지만, 당연히 했어야 할 시도다. 우리에게 학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교육현장에서 길어낸 이야기들은 그동안 자본(기업)과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학교에 대한) 관성에 금을 가게 한다. 다큐로도 방영된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는 진즉에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교육이 불가능해지도록 우리는 무력했다.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만당했다. 끌려다녔다. 학교(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면서도, 우리에겐 우리의 시선이 없었다. 책은 그것을 다시 조명한다. 학생, 교사, 학부모, 각자의 관점에서 학교를 고찰한다. 재조명한다. 교육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점수에 목 매단 지금의 교육은 잘못됐다! 

 

사교육은 '배움'이 아니다.

지금의 학교를 무너뜨린 장본인 중의 하나, 사교육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교육'이라고 일컬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건, '사육'이다. 국가에 의해 주도된 학교가 그나마 임금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자본이 은밀하게 주도한 사교육은 '노예'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다. 배움(의 즐거움)? 사(교)육에 그런 항목은 없다. 사육하면서, 사육당하는 것들의 권리와 입장을 생각하는 것 봤나? '배움의 역주행'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적절하다.

 

뭐어? 선행학습? 

개뿔이다. '선행'이라는 레떼르를 붙인 것은 앞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자극하기 위함이다. 그저 남들보다 앞서고, 남들을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가치관에 오염된 이들을 현혹하는. 내일을 위한답시고, 오늘을 지운다. 희망? 그전에 절망이 올 뿐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까닭이다. 불안을 심어주는 것이 권력자들의 간교한 계략이었다. 책은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학생들과 부모들의 실태가 드러난다. 불안한 부모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교육과 선행학습!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하라. 책은 그 당연한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되면, 사교육을 지금처럼 거대한 괴물 아닌 한갓 액세서리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학교란 무엇인가》의 미덕, 이것으로 일단 충분하다.

사교육의 무쓸모를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학교를 말하면서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분명하다. 악화가 구축한 양화. 그것에 금을 가게한다는 것. 나쁘지 않다. 물론, 칭찬의 역효과를 보여줘 양육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부모와 자녀의 끈끈한 스킨십과 관계맺기(사랑)가 영재를 만든다는 것 등을 보여준 것도 미덕이다. 책을 통해 배움의 즐거움을 알고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항목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책 읽기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더 넓은 세계를 항해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 또한 좋다. 무엇보다 알아서 훌쩍 크는 아이들. 교육이, 학교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 남의 욕망이나 타인의 삶이 아닌, 나로서,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교육이어야 한다. 학교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에게 의문을!

자꾸 물어야 한다. 학교야, 넌 무엇이니? 지금의 학교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니? 산업혁명으로 임금 노동자가 탄생하고, 이어 등장한 근대교육, 특히 20세기 이후, 학교는 대인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잘못이다. 고대와 중세, 지금의 학교 형태는 아녔으나, 그것을 빼먹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그것은 이어지고, 그것을 핵심에 뒀다. 관계맺기. 즉, 대인관계를 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후세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했다. 그것은 또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학교, 그것을 잊었다.

회피일까, 망각일까. 글쎄, 그건 모르겠다.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을 상실한 지금의 학교는 폭력이 자연스럽게 고착화됐고, 분리하고 구획 짓는 것이 일상화됐다. 관계맺기의 파편화. 학교는 미쳤고, 서로 미워하고 무시한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지옥도, 그것이 학교에서 아이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뭔가 부족하고 답답한 느낌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땅히 배웠어야 할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기술에 대한 배움이 없었으니까. 대인관계 능력, 떨어질 수밖에!

 

나는 늘 이 생각을 한다.

교과 과목 바꾸기. 서열 뒤집기. 임금 노동자 양성을 위해 강조된 근대 교육의 핵심인 수리와 언어 관련 과목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이 아닌, 내가 원하는 과목은 이런 것이다. 사랑, 우정, 이별, 가족 등과 같은 관계맺기를 위한 과목과 더불어, 음악, 미술, 문학, 낭만, 아름다움 등과 같은 인생의 목적을 다룬 과목 앞세우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詩와 현재의 중요성(카르페 디엠)을 알려준 키팅 선생님은 극중에서 그랬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詩와 미美,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야." 영국의 교육학자 켄 로빈슨, 무용이나 미술이 주요 과목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 인생의 목적인 무용이나 미술이 수학이나 영어만큼 강조되지 않는지. 그것은 과학으로도 설명된다. 다중지능이론에 의하면, 음악지능이나 신체운동지능, 시각지능 등 모두 다 독립된 인간 고유의 지능이며 동등하게 가치 있는 본성이다. 《학교란 무엇인가》는 말했다. "교육의 목표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삶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런 지능과 본성 모두를 훈련시키고 개발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 모두가 의사와 검사·변호사가 돼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학교에 의문을 제기하자. 그리고, 학교는 그 물음에 답해야 한다. 왜 지금 학교는 희망이 아닌 절망의 본거지가 돼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학교가, 아프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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