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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종말 - 여성의 지배가 시작된다
해나 로진 지음, 배현 외 옮김 / 민음인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소설가 김훈, 뼛속깊이 마초인 남자. 이렇게 말했다.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마초수컷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리라. 아무렴. 그것은 여전히, 대한민국 남자의 목을 죈다.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한다면, 수컷의 자격은 없다. 그래서 외친다. 남자는 괴로워. 한국뿐이랴. 일본에도 동명의 영화가 있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유효했다. 괴로운 수컷의 입지, 가부장제라도 주어져야지. 수컷들, 일자리를 더 많이 가져야지. 그래야, 먹여 살리지. 숭고한 길인데, 아무렴.
그러나 그것, 균열이 왔다. 증거는 곳곳에서 나온다. 요즘 ‘핫’한 법무부도 가세한다. 지난 21일, 제54회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 506명 가운데 여성 합격자 비율이 41.7%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사상 최고치. 여성 합격자 비율이 40%를 넘어선 것은 2010년(41.5%) 이후 역대 두 번째. 손쉬운 말로 ‘여풍(女風)’. ‘월드컵 저주’라는 남자들의 변명이 따라붙는다. 6월 말, 사시 2차 시험이 월드컵 기간과 겹쳐 남자 고시생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린단다. 비겁한 변명. 얼마나 못났으면 월드컵에 책임을 돌리나.
여자들의 득세,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 똑똑하니까! 나는 그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체험한다. 각종 강연을 가면, 여자들이 훨씬 많다. 모든 공부의 장, 여성들 숫자가 압도적이다. 남자? 희귀동물이다. 과거, 지성의 영역은 남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본디 지성의 영역은 여성의 몫이었던 양. 상대적으로 수컷, 공부를 멀리 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디지털문명이 여성의 음기를 사회적으로 순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나는 남자들의 뻣뻣함이 사회의 유동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여성의 유연함에 밀려서라고 해석한다. 수컷은 점점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있다.
미국 통계에서도 그것은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노동력의 추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다. 역사상 처음 그렇게 여성 노동력이 남성을 능가한 뒤, 여성은 계속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남자의 종말』은 그것을 조목조목 확인해준다. 저널리스트답게 통계와 취재를 바탕으로 남자들이 왜 종말의 상황에 도달했는지를 증명해준다. 사실, 현실에서도 느낄 것이다. 남자다움의 낡은 구조는 설 곳을 잃고 있다. 거기서 수컷의 딜레마가 생긴다. 그것을 대체할만한 새롭고 명확한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남자들, 설 곳이 없다. 그러니, 이런 말, 고개를 끄덕인다. “남은 것은 액세서리뿐, 말하자면 ‘맨세서리(mancessory)’들뿐이다.”(p.19)
고개를 끄덕인다. 이 책, 일리가 있다. 새로운 남자의 정의가 필요한 시대가 왔음도 자각할 수 있다. 명백하다. ‘남자다움’이라는 말로 표현했던 마초적 위상은 점점 약발이 딸린다. 요즘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 과도기에 놓일 만하다. 더 이상 아버지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른다. 배운 적이 없다. 그렇다고 유연하지 않은 남자들, 어찌하오리까. 저자 해나 로진은 ‘남자의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수사를 쓰면서 남자들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의 처방전은 이렇다. “새로운 역할,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하려면 일정한 자질이 필요하다. 유연성, 재빠름,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감각 등이 그것이다.” (p.27)
그러니까, '남자의 종말'은 '남자의 몰락'을 얘기하는 것, 아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몰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다!) 관성과 관습에 얽매여 어떻게든 거부해 온 여성성을 온 몸과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추자는 것이다. 남성 우월주의의 틀인 가부장제를 주장하는 것, 능사가 아니라는 것. 해나 로진은 그것을 ‘가모장제’라는 표현으로도 대신한다.
이 책은 달라진 섹스의 주도권부터 언급함으로써 충분한 주의를 끈다. 여성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남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시절이 왔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아직 시차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바람직한 변화다. ‘성 혁명’으로 명명된 이것은 여성의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세상의 공고한 질서를 흔들었다. 문제는 남자들의 자세다. 그것은 성 혁명이 남성을 바꿔놓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기보다 남자들이 저항을 한 것이다. 뭔가 뺏긴 것 같고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잘난 남자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자들은 전통적인 ‘부양자’ 역할에 발을 들이고 있으며, 고개 숙인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복종이다. 남자들의 의기양양함을 부추겼던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 엔진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건 남자다움으로 돌파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미 “전 지구적 경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성공하는 곳이 되었”(p.167)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잡는 흐름이 되어 가고 있다.”(p.170) 대학을 장악한 여성의 수도 그렇고, 온갖 시험에서 수석이나 다수를 차지하고야 마는 여성들도 그렇다.
이 사회에서도 피부로 느낄 만큼 극적인 것이 있다. 바로 ‘딸’에 대한 선호.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남아선호는 쉬이 바뀌지 않을 단단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르다. 아들은, 과격하게 말해서 별로 쓸모없는 애물단지처럼 낙인 찍혔다. 반면 딸은 가정의 중요한 자산이다. 딸딸이 부모라고 구박 당하지 않는 집도 상당히 늘었다. 아들 더 낳겠다며 용을 쓰는 집도 보기 힘들어졌다. (물론, 아이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 시대이기도 하다!)
남성성, 참으로 버거운 것이었다. 남자들에게도 그랬다. 강한 척, 센 척, 용감한 척, 삼척으로 겹겹이 둘러싸야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했던 현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던 남자들(최소한 이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 허장성세요, 자존감 없는 자의 비애였다.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한 바에 따르면, 남성성이란 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서, 여러 세대를 거쳐 남자들이 착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전투용 가면이나 갑옷의 일종이다. 이는 가면이나 갑옷이 벗겨지면 자신의 부드러움이 발각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p.354)
그래서 이 책은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 생존하기 위해 남성은 결혼이 필요하단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건 타당한 주장 같다. 남자들은 홀로 서는데 익숙하지 않다. 취약하다. 유연하지도 않다. 가부장제의 관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지적한대로,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듯한데, 요즘 혼인 시장의 문제는 여성의 약함이 아닌 여성의 새로운 지배 때문에 초래되는 것 같다. 여자가 남자보다 교육을 잘 받고, 똑똑하여 결혼은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 높은 지적 수준의 여성이 이른바 ‘골드 미스’로 남는 경우다.
여성의 위치 상향이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만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성 역할의 반전은 이전과 또 다른 현상도 야기함을 책은 지적한다. 여성의 폭력성이나 공격성에 대한 사례가 그것이다. 저자는 영악하고 잔인한 여성 살인자 등을 예로 든다. 그녀가 인터뷰한 베스트셀러 범죄 소설 작가 패트리샤 콘웰은 그것에 대해 이리 분석한다. “여성이 적절한 힘을 가질수록 여성의 행동은 다른 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아 갈 겁니다.”
저자가 ‘남자의 종말, 여자의 부상’에 대해 다각도로 조사했음을 증명하는 건, 여성 지배가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며, 여성의 부상엔 자본의 요구와 같은 요인이 있었음을 밝힌 대목이다. 여성이 지배하면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환상은 외려 위험할 수 있다.
“여성적 유토피아의 상상 뒤에는 늘 우월감이 숨어 있었다. 더 친절하거나 부드럽다거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반드시 여성의 가장 큰 특성은 아니다. 트웬지 교수가 알게 되었듯이, 여성은 사회적 신호에 반응하여 시대의 허용치에 맞추기 위해서 인성을 바꾸는 성향이 있다.”(p.258)
더구나 우리는 지금, 물론 예단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며 언어유희를 펼치는 대선후보를 알고 있다. 저자도 이에 긍정적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점만 인지할뿐,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는 것 같다. 박근혜,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이 아니다. 더구나 그는 지금까지의 정치적 행보에서 여성으로서의 장점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 외려, 남성적이거나 퇴행에 가까웠다. 정상의 위치에 여성이 올라가야 하는 명제에는 동의하나, ‘어떤’ 여성인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울러, 십 수 년 전부터 유리천장 운운하며 여성 임원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분석. 경제학자 조던 시겔을 필두로 한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연구팀이 한국의 사례를 살펴본 뒤, 이리 종결 짓는다. “여성 임원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의 원동력은 공평성이나 형평성의 추구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경쟁력을 찾는 예리한 시각이었다.”(p.331)
이렇게 또한 연결된다.
“세상은 여성이 강력한 힘을 갖출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못해 의식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전환점에 서 있다. 시겔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 임원을 채용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들은 결실을 누린다. 시겔은 기업이 여성 관리자들을 늘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수익성이 개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332)
물론 그것,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가능성과 역량을 발굴한 것이 기업(자본)이었다는 점은, 좋은 말로 기업의 센스가 돋보였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성장에 매달렸던 까닭이었겠지. 그것이 또한 다른 주체와 사회를 추동한 원동력이 됐을 수도 있다. 여성 임원의 탄생과 고위직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이 책을 읽는 여성들의 자존감을 높여줌과 동시에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건 뭐랄까. 이른바 ‘잘난 여자’들의 경우에 국한된 한계가 있다. 그렇지 못한 여성들의 경우는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의 울타리에서 신음하고 있다. 계급의 문제가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 책의 한계다. 다국적 기업 등의 여성 경영자나 임원은 여성 중에서도 소수다. 숱하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지배'와는 먼 세계에 살고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소외돼 있다. 육체노동의 약화가 여성 노동력의 증대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남성 대신 여성을 택한 자본의 꼼수도 있다. 똑똑한 여성의 도약과는 명백히 다른 지점이다.
특히, 여성이 왜 주부양자가 되는지 심층 있는 고찰은 부족해 뵌다. 단순히 여성 노동력이 지배적이 됐고, 그 증가를 확인하는 것에 끝날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현상과 요인이 자리잡고 있는지 좀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 여성이 노동시장에 나가는 다양한 이유를 캐고, 잘 나가면 결혼을 왜 하지 않으려 하는지, 좀 더 알고 싶다. 자아성취가 아닌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그닥 달갑지 않은 상황도 분명 있을 테니까. 성과 함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풍성하게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쨌든, 세상은 하룻밤 새 뒤집어지지 않으나, 물방울 하나하나가 바위를 갈라지게 한다. 4만 년의 남성 지배에 금이 가게 한 여성들의 도약은 불과 40년 전부터다. 여전히 지뢰밭이요, 장애물이 포진해 있다. 이 책은 여성들의 보다 굳건한 지배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자의 몰락을 당연한 것으로 조롱하는 책도 아니다. 변화의 양상, 지배 질서의 흔들림을 잘 보면서 여남(女男)이 서로에게 삼투할 것을 권한다.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두 성(性)의 깨달음과 성찰, 그리고 현상에 대한 직시와 이해를 돕는다.
한국 엄마의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저자의 저널리스트적 자세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 아들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가르치고, 분홍색 봉제인형을 사 주고, 태권도 대신에 요리와 발레 학원에 보내는 엄마의 이 말. “저는 새로운 시대에는 마초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들이 잘 살기를 바란다면, 아들에게도 여성적인 면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 여성은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후대까지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구나. 여성은 유연하고 민첩하게 자신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 뻣뻣한 남성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힌트다.
처음으로 돌아가, 소설가 김훈이 정한 남자의 정의. “먹고사는 일보다 더 숭고한 남자의 길은 없다.” 뼛속 깊이 보수임을 자처한 김훈의 삶과 생활에서 우러나온 보수성을 타파할 수는 없다. 다만, 보다 젊은 남자에게 필요한 새로운 남자의 정의는 이런 것, 아닐까.
“남자는 여자처럼 생각할 줄 알아야 남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민감하고, 동정적이며, 자기 기분을 잘 아는, 그러니까 언제 웃고 울 지를 아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이다.”(p.357)
나라는 수컷, 이런 남자가 돼야 할텐데. 관념과 생각으로 그칠 게 아니라, 감수성을 좀 더 연마하고 닦아서 몸과 삶에서 이런 기운이 퍼져나와야 할 일이다. 쉽진 않겠지만, 인생에서 꼭 해봄직한 것이 아닐까. 진짜 남자라는 것.
참고로, 여자들이 수컷들을 만날 때 꼭 챙겨봐야 할 것이 있다. 삶의 미시성이다. 겉으로 진보나 보수를 언명하는 것, 그건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더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부엌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부엌에서의 행태, 진짜 남자와 수컷을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