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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뼈 그리고 버터
개브리엘 해밀턴 지음, 이시아.승영조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요리(사) 이야기라기에, 솔깃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먹는 문제라면 신경이 발딱 선다. 그것이 ‘살아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펼치면서, 다른 사전 정보 따윈 거의 없었다. 약간 유명한 셰프가 음식이야기를 펼친다는 정도?
그래서 어떤 먹을거리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나를 사유하게 만들까. 식품에 대한 어떤 세계와 철학이 펼쳐질까. 궁금했다. 책 두께(528페이지)도 만만치 않지만(심지어 사진 한 장도 없다!), 먹을거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 정돈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아뿔싸!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 식품이 아니었다. 요리가 아니었다. 거기엔 구체적인 개별의 인간이 있었다. 개브리엘 해밀턴. 뉴욕 이스트빌리지 프룬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 한 인간이 세계와 긴장을 이루면서 살아낸 삶이 팔팔 끓고 있었다. 앗, 뜨거 뜨거!!!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이 여자, 아니 사람, 여자사람에 반했다. 책만 놓고 보면 그렇다. 직접 만나면 무서울 것 같다. 섣불리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에 나는 찍소리 못하고, 음식만 먹을 것이다. 아마도. 먼발치에서 그녀를 힐긋 바라보면서. 흠모의 마음을 품고. 저런 멋진 셰프 작가를 눈앞에서 보다니, 오오.
《피와 뼈 그리고 버터》는, 유기농, 친환경, 자연산 등의 수식어 따윈 저버리고, 그저 자신의 마당에서 막 자란 채소와 근처 농장에서 갓 잡아와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를 적당히 구워 자신이 만든 소스를 버무려 만든, 개성 뚝뚝 떨어지는 개브리엘표 요리다. 글은 생생하게 팔딱거리며, 자신만의 생명을 갖고 움직인다. 스트레이트로 쭉쭉 뻗어나가는데다 한 번씩 날리는 잽은 맞으면 기분이 좋다. 내 눈앞에서 ‘쌩’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만큼 현장감 있고, 돌직구처럼 달려든다. 번역한 사람도 꽤나 공을 들인 것 같다. 어지간하면 이런 생각 들지 않는데, 원서로 읽고 싶어졌다. 아마 평생을 가도 다 읽진 못하겠지만.ㅋ
책은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하다. 자주 웃었고, 종종 뭉클했으며, 가끔 눈물이 찔끔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생각은, 이 책, 식품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로웠던 한 사람의 ‘가족 예찬사’다. 평소의 나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로 이를 다뤘겠지만, 이 책,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복선처럼 깔린 그녀의 분투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요리에 대한 멋지고 풍성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책을 지배하는 기조는 ‘가족’이다. 특히 가족(시월드), 그중에서도 저자가 시어머니와 함께 요리를 하고 그것을 나누는 장면, 압권이다. 그 장면만으로도 그림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녀, 어릴 때부터 어른이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하는 아이들이 있다. 개브리엘이 그랬다. 부모의 이혼이 계기였고, 십대의 나이, 주급 74달러 11센트의 주급이 쥐어진 순간부터 그녀, 어른이 됐다. ‘나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그녀를 지켜줄 혹은 옭아맬 신념이 아로새겨졌다. “내가 몸소 벌어서 살아간다면, 나는 내 맘대로 살 거야.”(p.71)
열세 살, 초보 요리사가 된 그녀, 공장노동이나 다름없는 케이터링 업체의 요리기계를 거치고, 작가의 길로 잠시 들어섰다가 우연찮게 오너 셰프로 레스토랑을 꾸려간다. 지지고 볶고 고달프게 버텨나가는 그 전쟁 같은 요리사 생활 가운데서도 그녀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시종일관 가족이다. 스쳐지나갈지라도 따뜻하게 던져진 말 한마디, 남자보다 욕을 잘 하는 그녀지만 그 안에 있는 소녀를 단 한 순간이라도 보듬어줄 수 있는 손길 하나. 그녀는 꽤나 많이 터프하고 와일드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녀를 관통하는 건 소녀다. 가족을 배경으로 둔 소녀. 채워질 수 없는 소녀의 아픔이나 외로움이 그 터프함을 뚫고 나온다.
그런 그녀에게 ‘알다’는 유사 어머니이자 가족이다. 남편이라는 것을 소유하게 된 그녀가 덩달아 만나게 된 사람, 시월드에서 만난 놀라운 인물. 알다와 그녀는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알다의 아들이자 개브리엘의 남편을 매개로 하지 않고, ‘요리’라는 언어를 매개로 맺어진다. 그것이 인상적이다. 개브리엘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요리는 워낙 단순하고 순식간에 끝나서 조리법을 말하고 자시고 할 건더기도 없을 정도다. 그녀에게서 조리법을 알아내는 것은 교육적이라기보다 시적인 경험이다.”(p.302)
레즈비언이었으나 어쩌다 이탈리아 출신 의사이자 박사 남편을 소유하게 된 그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이지만,(책 곳곳에 그녀는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진정 ‘멘탈갑’이다. 괴롭고 힘들고 슬프고 외롭고 지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견뎌낸다. 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털어내는 장면, 오빠의 죽음, 남편과의 심난한 결혼생활. 요리 덕분에 견딘 것도 같지만, 일찍 어른이 된 그녀의 멘탈은 충분히 단련이 된 듯하다. 죽음(자살) 대신 또 다른 죽음이라며 ‘실종’을 선택하고 여행을 떠난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세계와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 삶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견뎌냈다.
개브리엘의 이야기를 통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자연스레 떠올린 이유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7월의 이탈리아 휴가길, 이젠 더 이상 시월드와 관계를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앞에 그녀는 시월드 별장의 가지를 치고 바다를 바라본다. 시어머니 알다와 함께. 그 장면, 시적이다.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나, 불안하지 않다. 다만, 가족. 그토록 갈망하던 가족이라는 배후. 7월의 이탈리아 3주 여행. 그녀는 지금도 시월드를 방문하면서 알다와 요리를 하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까. 살짝 궁금하다.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있는 이탈리아 대가족의 그림은 정말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그러나 그건 내 가족이 아니고, 나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아들을 낳아주고, 저녁을 차려주고, 낙엽을 치워주고, 정원을 가꿔주고, 비행기 요금을 대주어도 그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p.511)
(책만 보고 단정해버렸지만) 개브리엘 같은 이 멋진 여자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녀만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남자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켈레(개브리엘의 남편) 같은 남자는 아니고 싶다. 슬픔 품은 이토록 매력적인 여자를 외롭게 만들다니. 끙. 개브리엘이 완벽한 식당의 본보기로 여긴다는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의 작은 섬 세리포스의 작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야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물고기를 잡고, 그물로 무엇을 얼마나 잡든 그것이 저녁 요리로 나오는. 오후 8시에라도 물고기가 떨어지면 그걸로 요리는 끝인 식당. 손님이 양고기를 원하면 양념만 해서 아무런 야채도 없이 달랑 양고기만 내주고, 콩과 감자를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하는. 그곳에.
대부분 사람은 그렇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많고, 조화로운 날은 좀처럼 없다. 누구나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생기고, 누구나 상처를 받고’ 그래도, 개브리엘에게도 그렇고, 우리에겐 그렇다. 요리가 있다. 2013년 신년 첫 책 덕분에, 나는 실컷 웃고 뭉클했으며 찔끔했다. 요리도 잘하고(먹어보진 못하였으나), 글도 잘 쓰는 이 사람. 부럽다. 나는 커피라도 잘 내렸으면 좋겠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내 커피는, 내 요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밤9시, 문을 열고 들어오시라. 당신만을 위한 만찬의 시간이다. 개브리엘, 라 브라바(La Brava).
“요리는 나로 하여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게 하는 것이고, 내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p.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