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2 -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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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시작된다!

2001년이었다. 그 유명했던 해리 포터는 시작을 그렇게 알렸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땐 20대였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잉이었던듯도 싶다. 일도 그랬고, 술도 그랬으며, 사랑도 그랬다. 쿨한 척했으나, '척'이었다. (불완전연소가 되고 말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때.

해리 포터의 시작, 그녀와 함께였다. 아이처럼 좋아했던 그녀였다. 지금은 없어진 정동 스타식스 였던 것 같다. 그녀와 나, 우리 한 쌍의 바퀴벌레 머글은 마법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서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가 가장 놀라웠다. 우리, 머글인 것이 안타까웠을정도? 그 플랫폼에 가면, 나도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심술궂은 이모 부부와 못된 사촌, 그 머글들에게 구박 받는 해리 포터가 어찌나 애처롭던지. 그런 그에게 날아온 마법세계의 초대장. 더구나 그는 마법세계를 구원할 전설적인 영웅이라니. 응원했다. 해리, 널 응원해. 우리가!
 
꺄르르르르, 10년 전 그 사랑과 나는 그렇게 마법행 특급열차를 탔다. 마법의 세계를 몰래 훔쳐본 머글들은 당최 앞을 내다볼 재간이 없다. 머글에겐 마법의 기운이 없으니까.

그 마법세계, 해리 포터(와 그의 친구들인 헤르미온느와 론)에게 롤러코스터였을 뿐 아니라, 내게도 그랬다. 살짝 좌충우돌, 생은 다이내믹했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작고 사소하게 성공하는 대부분 청춘의 시간에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청춘은 어쩌면 마법의 연속이니까. 

음울한 다락방을 빠져나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타고 마법의 세계에 도달한 해리 포터를 만나는 머글의 마술기행은 계속 됐다. 다만 그것을 함께 즐기는 상대가 바뀌거나 혼자였다. 

시리즈는 흘렀고, 지날수록 희한했다. 마법세계와 현실은 왜 그리 닮은 거야! 그러다 결국 소리쳤다. 이게 뭬야! 우리 사는 곳이 마법세계인 거야, 마법세계가 너무 현실화 된 거야?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것도 점차 풀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해리 포터가 친구들과 함께 마법세계를 지키기 위해 펼치는 모험과 분투는, 우리의 것을 닮았다.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 주변의 가족, 친구들과 소소하게 나누는 이야기와 작당. 마법세계는 머글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악은 번번이 이기고, 해리는 소심하게 헐떡거리며 똥침을 찌른다. 그래도 좋아! 



 

시리즈의 마지막이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7편 시리즈를 끝내는 10년의 내달림. 한마디로, 뭉클하고 멋지다. 뜨거운 안녕이었다. 거의 마지막 개봉 극장의 마지막 편에서 만난 해리 포터. 

볼드모트와 마지막 대전에 다다른 해리 포터의 결사항전은 스펙터클로 가득했고, 롤러코스터처럼 박진감이 넘쳤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심장에 박힌 것은 스네이프였다. 해리 포터보다 더. 10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뺏아간 신 스틸러. 심장이 터질 뻔했다. 그 미친 놈의 사랑, 때문이었다. 스네이프의 아픈 과거와 사랑,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 압축은 10년을 모두 집어삼켰다. 재배열시켰다. 해리 엄마인 릴리에게서 파생된 해리와의 관계 또한.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외전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겼다.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랑이 아프고 또 아팠다. 물론 스네이프는 그 아픈 사랑 때문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버텼을지도 모르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작과 끝.

해리 포터의 영원한 선생님, 덤블도어도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금지된 숲속에서 만난 해리에게 이런 말을 던진 것, 아닐까.   

"해리, 죽은 자들을 비통하게 여기지 마라(Do not grieve to the dead, Harry). 산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렴(grieve to living). 그 중에서도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거라(And above all.. all those who live without love)."

이런 뜨거운 안녕이라니. 눈물은 주룩주룩, 심장은 벌렁벌렁. 아쉬운 점이라면, 이 마지막을 함께 한 여자는 그런 날 이해 못했다. <해리 포터>시리즈를 처음 봤는데, 그것이 하필 뜨거운 안녕을 고하는 마지막이었던 까닭이었다. 그녀의 10년에는 '해리 포터'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문득 궁금했다. 10년 전 나와 해리 포터의 처음을 보고 꺄르르르르했던 그녀는 마지막을 봤을까. 혹은 해리 포터의 성장 과정에 함께 한 다른 그녀들은? 

 

 

사랑이 지나가면, 훌쩍 중년의 어른이 된 해리가  런던 킹스크로스역 9와 3/4 플랫폼에 다시 나타난다. 지니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호그와트행 특급열차를 탈 요량이다. 론과 헤르미온느도 맺어졌는지, 그들의 아이도 함께다. 마법세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아이에까지 관심을 두기에 나라는 머글은 글러먹었다. 

장영엽 씨네21 기자의 말따마다, 가짜가 아닌 한 시절이 끝났으므로.  
"소년 마법사는 조앤 롤링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지만 영화 현장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세명의 소년소녀와 시리즈와 함께 ‘성장한’ 팬들은 가짜가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모두의 한 시절이다." 

한 시절을 끝낸 머글은, 이제 어떤 한 시절을 맞이할까. 아니 맞이하고 있구나. 사랑없이 사는 사람들을 슬퍼하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만,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매조지한다.

마법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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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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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는 강용석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딴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다(내 나라는 아녔음 하는 바람도 있음!). 작년에 학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낑겨서 모이를 주워먹다가 주둥이를 나불댔나보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학생에게,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 지랄입방정을 떤 것이다. 으응? 줘? 대체 뭘 줘?

(강)용석이는 구케으원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하긴 그 지랄맞게 달콤한 그 자릴 왜 스스로 마다해? 떡하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버텼다. 그래도 가시방석이었을텐데, 똥꼬 아프지 않았는지나 모르겠다. 


짜잔, 이런 와중에 8월31일 더 웃긴 쇼가 펼쳐졌다. 용석이 제명안을 놓고 국회에서 표 대결이 펼쳐졌다. 명색이 공인인데, 주둥이 잘못 놀린 죄로 당연 처단될 줄 알았다. 어라? 재석의원 259명 중, 용석이 자르자 111표, 용석이 그냥 두자 134표, 용석이? 난 몰러! 8표로, 용석이 안 잘렸다. 씨뱅 미친 거 아냐?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나으리께서는 한 마디 더 지껄여주신다. "우리 용석이는 지성 교양 예의 갖춘 정의롭고 호감가는 반듯한 후배"란다. 참, 좋은 후배 두셨다, 그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컷들의 소아병적인 연대다.

더 좆 같은 건, 한 신문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반응이었다. "두렵다"고 했다. "사회가, 정치가 이럴 줄 정말 몰랐다.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강 의원)이 했는데, 그런 잘못이 국회에서 용인된다면 그게 정의이고 공정사회인가? 곧 사회에 나가는 우리가 거꾸로 불이익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아마, 그녀에겐 세상이 공포로 채색됐을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것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사회라니.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벌건 여름에 펼쳐지는 공포잔혹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건, 혁명이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시저의 단호한 얼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뺏아 탄 시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껌뻑 죽었다. 그것은 김혜리 기자(씨네21)의 말처럼, '지성적 위엄'이었다. 시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 우두머리였고, 나는 그의 손짓과 몸짓에 전율했다. 나는 그를 따르고 싶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그것도 할리우드의 것에서 혁명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토록 짜릿한 순간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떤 혁명이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공장이니, 그게 신기할 건 없다만, 이 영화가 주는 혁명적 쾌감의 일부는 시저의 표정과 몸짓에 빚지고 있다.


맞다. 나는 시저에 반했다. 이런 혁명적 우두머리의 등장이 그만큼 필요한 시대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과 지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시저라는 혁명적 별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대수로울 게 없다. 걸작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그러고 보니, '68'이라는 제작연도가 의미심장해 뵌다!)의 프리퀄로 기획됐다는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시저의 표정과 지성적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으로, <킹콩>에선 킹콩으로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선보인 앤디 서키스에 온전히 빚지고 있다. 다른 실제 배우들은 시저의 뛰어난 표정과 몸짓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시저 찬양 도우미라고나 할까.




 

시저라고 처음엔 다른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애완동물이었다. 실험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이 여느 동물원 침팬지와는 다른 지점이었고, 지성의 진화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 정도. 덕분에 시저는 점점 자라면서 지성과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수화로 얘기하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묻고 태생을 고민하는 순간의 그 눈빛부터 나는 흔들렸다. 아, 혁명은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그도 허나 야생의 힘과 본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로드만의 아버지이자 시저를 사랑해준 사람이 타인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유인원 보호감호소(우리)에 갇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의실종된 상태로 줄곧 빨간 셔츠만 입고 다니던 시저가 혁명적 단초를 찾게 된 장소다. 앞서 자신은 다른 줄 알았다. 인간과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그런 유인원으로.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부속물로서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무엇이 자신들의 적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번 깨어난다. 지성이 또 한 번 점프를 하면서 그는 현실을 깨닫는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눈빛, 나는 또 흔들렸다.

압권은 이후였다. 수화만 가능했던 시저가 우리에서 가해지는 핍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No~"라고 외친다. 그리고 일어선다. 언어와 직립보행을 획득하는 순간. 아, 자유를 만나는 순간이다. 노예임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혁명적 기운이 스크린을 감싼다. 나도 함께 외치고 싶었다. No. 어떤 영화나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No"를 만난 적이 없다. 지성과 자유가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 혁명적 쾌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급적 본능에 의해 그들의 봉기에 이입했다. 레알 혁명이 돋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시저와 그 투사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 "No"라고 말하고 일어서기. 그들은 전진한다. 우리를 뚫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의 활엽 가로수를 타고 이동하고 마침내 금문교에 도달한다. 약간 과장해서 이 금문교 장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의 2011년 여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 유인원들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전진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금문교 교각을 긴 팔로 이동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진경은 아까도 언급했던, 시저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광포하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시저가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등 리더의 다섯가지 덕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저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미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 이토록 풍부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하게 한 기술에 대한 탄성도 탄성이거니와,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연기에 아카데미건 어디건,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용석 병'을 겪은 2011년의 한국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이다. 청년이고 장노년이고 없다. 청년들은 청년대로, 장노년들은 장노년대로 절망을 품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른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어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우두머리 다운 우두머리 없이 오합지졸들만 창궐하는 시대. 나는 시저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추천한다. 지구탈출을 권하는 바다. 혁명의 시작은 시저를 옹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터다. 나는 시저를 따르겠다. 인간보다는 시저다. 일단 영화부터 보고 더 이야기하자.



 

아 참, 뭣보다 시저처럼 제대로 분노(분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분노하라》, p.26) 


용석이나 형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 그런 동물들에게 눌리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살아있다면 시저처럼, "No"라고 외치고, 직립보행을 해야 한다. 노예 아닌 주인의, 핍박이 아닌 자유를 찾는 길이다. 침팬지보다 못한 용석·형오 개새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레알 혁명 돋아야 할 사소하고 소소한 이유다. 그 동물들이 우리에게 도덕적 수치심을 안겨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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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Requiem for a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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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스완>의 히로인은 나탈리 포트만이지만,
숨겨진 히어로는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아닐까.
지금은 없는, 종로의 코아 아트홀에서 내가 본 그의 첫 영화, <레퀴엠>.
그 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다. 흔들리는 스크린은 충격에 휘둘린 내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제니퍼 코넬리는 뭘 어찌해도 치명적이고, 아름답다. 여신, 맞다. 
'치명적 지성미'라는 그녀를 수식하는 말에 나도 한 표 보탠다.
 

중독된 당신에게 고함, 꿈은 죽었다!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참함을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영상을 대면하는 동안 먹먹해지는 가슴은 감독의 의도인 듯하지만,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감정을 피할 수 없다. 피폐함이 밀려오고 갈증도 수반된다. 데뷔작, <파이>로 미국 독립영화계의 앙팡테리블이 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두 번째 장편인 <레퀴엠>의 원제는 <Requiem for a Dream (꿈을 위한 진혼곡)>.

중독된 자들의 추락사

<레퀴엠>은 중독된 인간들의 비극과 같은 꿈을 다룬다. 현대사회의 ‘중독’에 대한 가감 없는 표정과 뜨악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절망에 대한 보고서다. 중독이란 ‘늪’에 한발씩 다가서면서 파멸로 향하는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사회의 빛과 어둠사이 간극을 접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중독의 이면에 존재하는 ‘결핍’까지.

<레퀴엠>은 도입부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신경전을 통해 각자가 집착하는 -내면적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서- 중독을 한 꺼풀씩 드러낸다. TV다이어트쇼 시청이 유일한 낙인 어머니와 그 TV를 팔아 마약비용을 마련하는 아들간의 허무맹랑한 핑퐁식 공방은 차츰 외연을 확대하는 모양새다.

어머니, 사라(엘렌 버스틴)는 TV다이어트쇼와 다이어트약에 빠져들면서 환상에 빠진다.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 여자친구, 마리온(제니퍼 코넬리)과 친구 타이론은 마약과 본격적인 거래를 튼다. 그들에게 마약은 정신적인 만족뿐 아니라 폼나는 삶을 꿈꾸게끔 만드는 ‘무기’다. 그들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중독의 확장성은 놀랍다. 차츰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게끔 유도한다. 그 과정은 계절의 바뀜을 통해 드러난다.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은 중독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그들의 경쾌한 발걸음처럼 빠르고 희망적으로 채색되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을 지나 겨울에 도달하면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결국 그들에게 ‘봄날’은 오지 않는다. 만물의 소생을 알리는 봄은 결코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계절로 망각되고 만다.

그 절망의 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희망, 꿈은 바로 여기에 있어’라고 간드러진 울림으로 그들 삶의 구심점이 됐던 중독은 단숨에 갈라진 목소리로 ‘카운트 블로’를 날린다. ‘이건 현실이 아냐’라고 거부하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산산조각난다. 누구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다. 환멸로 가득한 시선만이 배회할 뿐이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남은 건? 맞다. 결핍’밖에 없다. 사라에겐 좋았던 시절의 가족에 대한 공허함이, 해리는 꺾어져 버린 지난 꿈에 대한 상실감이 둥지를 틀었다. 마리온에겐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애정이 결핍돼 있다.

한편으로 영화는 중독과 결핍, 파멸의 수순을 숨 가쁜 영상으로 표현한다. 관객이 흡사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강렬한 영상 메시지를 전파한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반쪽으로 조각내고 하얀 가루, 동공의 숨 가쁜 움직임, 덜거덕거리는 이를 빠르게 교차 편집한 몽타주(감독은 이를 ‘힙합 몽타주’라고 명명했다). 편집은 정교하고 빠르다.

그러나 이 같은 현란한 스타일과 테크닉을 담은 화면이 영상의 기교로서만 존재하진 않는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인간 내면의 풍경을 극한으로 끌고 가면서 관객을 화면에 부착시킨다.

중독은 자기 증식한다



사라는 중독의 자기 증식과정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TV부터 다이어트, 약물로 이어지는 중독의 확대 재생산. 냉장고는 ‘변신괴물’이 되어 사라를 집어삼킬 듯 덤벼들고, TV다이어트쇼의 환영들은 스멀스멀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와 사라뿐 아니라 관객을 혼비백산하게끔 만든다. 중독의 심화로 치닫는 계단을 통해 현대인이 맞닥뜨린 현실이 섬뜩하게 드러난다.


중독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산물이다. “소비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행복해질 것이다”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자본의 횡포는 이미 일상을 주무르고 있다. 일례로 자동차와 핸드폰으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의 문명화는 인간 영혼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준족의 발전(?)을 이룬 상태다.

헤로인, 코카인, 엑스터시 등 마약에 대해 ‘중독’이란 단어를 우선 떠올리지만 기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TV, 음식, 과자, 섹스, 다이어트, 게임 등 버라이어티한 상품이 진열된 자본의 백화점은 일상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 중독이라고 느끼지도 못할 만큼! 무언가에 미쳐야 한다고 강요하고 자본은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낙오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즐기는 것을 넘어 집착과 의존의 단계로 점프하는 순간, 삶은 다름 아닌 중독과 마주대하게 되는 셈이다.

<레퀴엠>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를 쓴 허버트 셀비 주니어는 “그러한 판타지의 뒤를 좇을 때 마음속에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돼간다”라고 일갈했다. 구멍은 곧 결핍을 뜻하고 중독은 자연스레 결핍과 공존을 꾀하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일지도 모른다.

꿈이라고 자위하면서 더욱 집착하는 중독은 상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대통령병’이라는 치유 불가능한 중독 증세를 보인 사람들을 보아왔고 ‘신용카드’란 이름의 병폐를 겪고 있다. 미디어를 가장한 중독성 전파는 여전히 횡행하고 인터넷도 자칫 잘못하는 순간 중독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셈이다.





알게 모르게 어딘가에 중독돼 있을지 모르는 우리네 모습. 그 사실을 확인하려면 중독된 영상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2004년 국정브리핑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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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 오브 락 - School of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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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 Wanted : 잭 블랙 (Jack Black)

Crime : 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2003),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High Fidelity, 2000) etc... 

 

못생긴 얼굴에 작은 키로 어쩜 넌 그 애를 좋아하니.
끌리는 마음 이해하겠지만 넌 안 돼 안 돼...

...나처럼 괜찮은 남자 세상에 없는데 없어
하지만 난 착하고 겸손한데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정말 잘 났어
나도, 나 역시, 나만...

- 푸른하늘의 노래, <자아도취> 중에서 - 


 
그래, 내 팔뚝 굵다! 
 

<파리의 연인>에서 기주(박신양)가 태영(김정은)을 구박하는 방식은 한결같다. “넌 거울도 안 보냐” “너희 집에는 거울도 없냐?” 그런데 그 말할 때 기주는 알고 있었을까? 거울은 태영에게 강력한 무기이자 ‘나에게 힘을 주는 노래’라는 것을.

캔디렐라(캔디+신데렐라) 태영은 사실 나르시시스트다. 거울을 갖다 대주면 더 안하무인, 기고만장, 후안무치해지는 존재. 기주의 구박은 외려 태영의 나르시시즘을 더욱 공고히 해주는 ‘피박’이다. 겉으로 안 드러내서 그렇지 태영의 대답은 뻔하지 않나. “그래 (거울) 봤다, 어쩔래. 진짜 이쁘구만, 뭐~”

팔뚝 굵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자, 유죄다! 난치병을 넘어 불치병 수준인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경배를!!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해,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솔직히 태영은 약과다. 캔디에서 신데렐라로 신분상승을 하는 과정에서의 귀여운 공주병 증세 정도라고나 할까. 그 정도는 애교지. 진정한 나르시시즘의 경지는 멀고도 험하다. 어디 하찮은 공주, 왕자 정도 갖고 명함을 내밀려고 하나. 덱끼. 혼나요. 강호의 나르시시즘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 진정한 고수가 있다. 이 남자. 못생긴 얼굴에 작은 키, 라고 다들 생각하는 이 남자, 잭 블랙. 더구나 허리 주변부를 감싸고 있는 배둘레햄까지. 그런데도 그의 나르시시즘은 경악 그 자체다. 통제 불능, 제어 포기의 몽환적 나르시시스트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는 <스쿨 오브 락>을 보라. 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천만에 그건 록보다는 ‘자기애’에 빠져 주체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스스로가 대책없이 사랑스러워 그걸 분출하지 않으면 미치는 거다. 그 ‘잘남’은 당최 측정 불가능한 심해와도 같다. 행여 고두심 아줌마처럼 “잘났어, 정말~”하고 입 밖에 꺼내지도 마라. 그랬다간 뼈도 못 추스른다. 조심해야 한다.


꺄아~ 이 남자, 멋있다
 

사람들은 그를 루저(looser)라고 불러댔다. <스쿨 오브 락>에서는 자신이 결성한 밴드임에도 다른 팀원들에게 왕따 당하기 일쑤고 그마저 여의치 않자 빈둥빈둥 뒹굴 거린다. 친구한테 신세까지 지는 주제에 말이다. 다른 영화라고 별 수 있나.



 

<내게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도 잘난 것 쥐뿔도 없으면서 심심하면 여자에게 집적거리고 작업에 열중할 뿐이다. 이 험한 세상에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서 온갖 술수와 불굴의 투지를 짬뽕해서 이 풍진 세파를 넘어설 의지가 도무지 없다. 오로지 관심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나는 그에게 ‘루저’ 대신 ‘나르시시스트’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오버’를 넘어 ‘엽기’ 혹은 ‘광기’처럼 보이는 잭 블랙의 모습은 대체재를 찾을 수가 없다. 바로 거기 뽀인트가 있다. 그 수억 개의 신경세포가 동시에 작동되는 기상천외한 표정과 열성인자로 치부될만한 몸뚱이의 과감한 노출. 잭 블랙이 아닌 누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으랴. 원맨밴드 마냥 생쑈를 부리는데도 어색하거나 역겹지 않다. 오히려 열광이다. ‘잭 블랙 만만세~!’하고 부르짖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 나르시시즘을 위하여 *
 

무엇보다 잭의 표정은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간의 전형이다. 짝퉁 교사 주제에 초딩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록’의 개요와 역사를 설파하고 밴드까지 결성하면서 “세상은 man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그것을 타파하려고 록이 존재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이라니. 공연에 앞서 “록의 신”에게 기도하자는 오버의 극치까지. 그 색깔은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그 절체절명의 나르시시즘은 강호의 비기(秘技)로 우뚝 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런 면에서 잭 블랙은 마음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으면서도 겉으론 냉정하기 그지없는 나르시시스트를 보여준 <스캔들>의 배용준이나 고급 대중주의를 아젠다로 삼은 김윤아의 나르시시즘과는 분명 다르다.

“내가 좋아서 한다”는 자기애에 철저히 기반 해서 행동하고 마는 잭은 그만한 신념과 열정의 장작불을 어디서든 산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잭은 왕자들과 공주들의 가면무도회 같은 점잖 빼고 내숭 덕지덕지 붙은 자리는 사양이다. 이유는 별 것 아니다. 급이 맞지 않으니까!


모든 시험에는 답이 있듯 뻔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이 세계에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것도 하나의 탈출구이리라. 물론 그 경지까지의 수행도 만만찮을 터이지만. 그런 잭에 대해 열광하고 그러는 당신은 어디 급수냐고? 물론 나는, 당근 황태자다. 왕자나 공주 따위와 놀 수는 없지. 나도 언젠가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빠져 죽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돌 던지지 마시라. 황태자에게 돌을 던진 자, 역시 유죄다!





여하튼,
잭 블랙, 이 남자, 참 매력적이다. 멋있다.
미친 존재감? 맞다!

헌데, <걸리버 여행기>는 그렇다치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함께 지난 2010년,
<스쿨 오브 락2 : 아메리칸 락>을 연주(!)했다던데, 국내 개봉 안 해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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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 - Glov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야구하자.”
지금은 야구 비시즌. 야구팬들에겐 고역인 계절이다. 겨울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야구가 없는 건 참 싫다. 그래서 영화 보는 도중 나는 벌떡 일어났다... 고 하면 뻥이지만, 그러고 싶었다. 가슴이 울렁거렸거든.

김상남(정재영)이 청각장애인 야구소년 차명재(장기범)에게 스케치북에 써서 건네는 말. “야구하자!” 아, 나도 저 말, 진짜로 하고 싶거든. 봄을 기다리는 이유. 야구. 야구하자! 이 영화 <글러브>는 그러니까, 염장(지르는) 영화다. 아니, 비시즌의 오아시스?


“야구는 마약이잖습니까.”
우리 돈 잘 버는 주원이 아니, 야구 잘했던 김상남의 친구이자 매니저 찰스(조진웅)는 안다. 비록 홈에 들어오다 다리가 부러져 야구를 그만둬야했지만, 그놈(김상남)을 통해 알게 됐다. 야구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뿔싸. 정부는 대마초를 금할 것이 아니라, 야구를 금해야 하는 거 아냐? 야구가 마약이라잖아! 대마초가 무슨 마약이니, 쯧. 담배도 차라리 금해라. 인민 건강에 더 악영향을 주잖아!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H2》 중에서)
청각장애인 들로 구성된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는 타구 소리를 듣지 못해 낙구지점 포착에도 큰 애로가 있다. 타구와 함께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야구인데, 그들은 그러질 못한다. 전국대회 1승은 그래서 ‘꿈’이다. 어떡하든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은. 야구계의 말썽꾼 김 선수가 처음, 그들의 꿈을 비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이다. 야구부에 열성인 음악 선생님 나 선생(유선)에게 아이들을 그냥 즐기게 하라고 툴툴대는 것도 야구를 알 만큼 알기 때문이다.

허나, 이기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즐기기 위해선 이겨야 한다. 김 선수도 결국 토하듯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야망’없는 야구선수이지만 야구를 즐기는 히로(《H2》의 주인공). 그는 “뭐, 야구야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할 거지만. 난 동네야구든 뭐든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동네야구든 뭐든, 이기려고 던진다. 야구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소년에게, 야구를 즐기기 위한 방법은 이기는 것이다. 명재도 즐기고 싶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지. “여기서 뭐가 자꾸 올라와요. 1승하고 싶어요.”

‘야구는 즐기는 것’이라고 자꾸 세뇌했다. 워낙 지는데 익숙한 내 야구팀(노떼 자얀츠)이니 그리 했을지도 모른다. 내 팀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대범한 척, 대인배인양 포장(?)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털어놓겠다. 진짜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면 속상하고, 짜증난다. 이기면 세상을 다 가지는 거다. 정말로 이기고 싶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의 1승에, 그들의 야구 경기 승리에 목을 쭉 뺀 이유다.

히까리의 어머니는 히로에게 말했다. “정말로 이기고 싶은 거야? 히데오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속 시원해지려는 거 아냐? 히데오에겐 비밀이지만, 아줌만 히로 편이야.” 히로 편이기에, 우리 히로가 이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안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이겨야 한다. 1승, 거둬야 한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불쌍하게 보고 봐준다면 더욱 용납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는 도저히 이기기 힘든 강팀이 아니다. 바로 우리를 불쌍하게 보는 팀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 뻔한 것임에도, 임팩트 빠바방이다. 자존감. 김 선수는 그것을 안다. 무엇이 그들을 야구하게 하는지. 세상의 불쌍한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것. 아마도 그들은 김 선수를 통해 세상을 한 번 더 배웠을 것이다. 속에 담아두지 말고, 요구하고 권리를 내세워야 한다. 터트려야 한다. 그건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비장애인은 물론 장애인들도 요구해야 한다. 야구도 함께 하듯, 세상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김 선수의 이 불호령도 마찬가지다. “밟는 건 상관없는데, 일어설 힘마저 뺐으면 안 되잖아!”

“벙어리라뇨, 청각 장애인입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영역이겠다. 영화는 자주 지적한다. 심각하지 않게, 웃음을 통해.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언어, 영화는 자연스럽게 추방하자고 권고한다. 더불어, 일반인, 정상인 따위의 말도 조심해야 하겠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장애인을 일반이 아닌,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구획 짓게 돼 버리니까. 비장애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왔다!”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선수들은 정말 열심히 한다. 야구의 재미를 알아차린 소년들의 땀과 노력이 빛난다. 유명 야구선수인 김 선수의 눈빛 하나에도 그들은 온갖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만큼 그들은 야구를 하고 싶은 거다. 모두 잠든 새벽 시간에 볼을 던지고, 사인을 맞추고, 견제 연습을 하는 아이들. 그들은 소리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가 왔다! 너희를 짓밟아 주겠다. 꼭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나는 눈물을 꾹꾹 누르지 않았다. 그저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뒀다. 자연스러운 내 감정이었으니까. 나도 파이팅을 보탰다. <글러브>는 마냥 눈부시지만은 않지만, 그들의 소리없는 함성에 한 목소리 보태고 싶은 영화다. 누군가에겐 야구는 그렇게 새벽녘에 몸이 부서져라 던지는 공이다.



 

“가끔은 필요하지 않니? 얻어맞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으니까” (《H2》)
물론,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은 매번 얻어맞고 진다. 그렇다고 지기 때문에 야구를 포기해야 할 까닭은 아닌 게다. 얻어맞고, 또 얻어맞아도, 아까와 지금은 다르다. 야구는 멘탈 게임이며, 일구일구, 모든 것이 다르다. 야구공 하나에 실린 마음부터 모든 것이. 그들은 배우고 있는 거다. 야구를 통해. 지는 것을 통해. 또한 이기기 위해. 나의 영웅, 히로도 말했다. “대체로 스포츠란 이긴 시합보다 진 시합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법이니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 그들은 이미 야구를 시작했고 하고 있다. 상처는 이미 예견된 바다. 상처 입은 날들이 많아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보호만 받고, 동정만 받을 순 없다. 대개의 어른들은 위해주는 척 하지만, 실은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자신의 이익과 마음을 위해서다.

‘GLOVE에서 G를 빼고, LOVE’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글러브>는 우직하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내용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김 선수와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원들이 맺는 관계가 그렇고, 김 선수와 찰스가 맺는 관계도 그렇다. 변화구 구사하지 않고 직구로만 승부한다. 아무렴, 그건 스트라이크다.

원장 수녀(물론 나중에는 바뀌게 되지만)를 비롯해 학교 운영위원회 어른들을 묘사한 것도 그렇다. 과장하자면, 지금 한국 교육계를 향한 일갈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배제된, 일선 교사가 배제된, 교장 등 교육 정책가(정치꾼)들의 책상머리에서만 결정된. 그들의 나쁜 머리에서 나오는. 김 선수, 일선에서 애들 가르치다보니 잘 알게 되잖나. 그의 일갈이 유쾌통쾌상쾌했던 이유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의 의지보다 다른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꿈을 포기해야 된다는 거, 아직 모르는 애들입니다. 이런 게 교육이면 뽕이고, 우리가 그런 어른이면 니 뽕이고, 학교가 그런 거라면 니미 뽕입니다.” 아, 정말 아쌀했다. 니미 뽕들.

야구는 그러니까, 사랑. 야구 안에 사랑있다. 뭔, <파리의 연인>인가 싶지만, 그만큼 뻔한 설정이지만, 고개를 끄덕댈 수밖에 없다. ‘GLOVE’에서 ‘G’를 빼자. ‘LOVE’. 야구 없는 시즌. 야구 없이 못살겠다는 아우성을 강우석 감독은 잘 캐치해줬다. 내 평가? 단순하다. 야구를 다뤘다. 그것이 다다. 나는 <글러브>를 강우석 최고의 작품으로 뽑는 아주 편파적인 판정을 내린다.



 

극중 김 선수의 스케치북 대사를 재인용하겠다.
“야구하자. 야구, 혼자 볼 때보다 같이 볼 때가 더 재미있다. 너, 알지?”

봄이 와야 하는 이유, 단순하다. 야구해야 하니까. 야구봐야 하니까.


참, 나는 가린다.
여자. 거칠게 말해, 세상에 여자는 딱 두 부류다. 야구 좋아하는 여자와 야구 안 좋아하는 여자. 야구 좋아하는 여자가, 진짜 여자다. 나는 그렇게 가린다. 니미 뽕이라고? 맞다. 나는, 니미 뽕이다. 니미 유치 뽕이다.^^;; 우헤헤~ 야구, 빨리 하자! 야구는 사랑을 싣고, 사랑은 야구를 싣고. 봄은 야구와 함께 온다. 봄은 야구로 시작된다. (남하당의 박영진 풍으로, 준수의 야구사랑을 매도하지 마아아~)




거듭 촉구한다.
야구하자!

1승도 하자,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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