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지구에는 강용석이라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딴에는 변호사 출신으로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다(내 나라는 아녔음 하는 바람도 있음!). 작년에 학생들이 식사하는 자리에 낑겨서 모이를 주워먹다가 주둥이를 나불댔나보다. 아나운서를 지망하는 한 학생에게, "다 줄 생각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 지랄입방정을 떤 것이다. 으응? 줘? 대체 뭘 줘?

(강)용석이는 구케으원을 알아서 그만두지 않았다. 하긴 그 지랄맞게 달콤한 그 자릴 왜 스스로 마다해? 떡하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버텼다. 그래도 가시방석이었을텐데, 똥꼬 아프지 않았는지나 모르겠다. 


짜잔, 이런 와중에 8월31일 더 웃긴 쇼가 펼쳐졌다. 용석이 제명안을 놓고 국회에서 표 대결이 펼쳐졌다. 명색이 공인인데, 주둥이 잘못 놀린 죄로 당연 처단될 줄 알았다. 어라? 재석의원 259명 중, 용석이 자르자 111표, 용석이 그냥 두자 134표, 용석이? 난 몰러! 8표로, 용석이 안 잘렸다. 씨뱅 미친 거 아냐?


김형오 전 국회의장 나으리께서는 한 마디 더 지껄여주신다. "우리 용석이는 지성 교양 예의 갖춘 정의롭고 호감가는 반듯한 후배"란다. 참, 좋은 후배 두셨다, 그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수컷들의 소아병적인 연대다.

더 좆 같은 건, 한 신문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반응이었다. "두렵다"고 했다. "사회가, 정치가 이럴 줄 정말 몰랐다. 잘못은 우리가 아니라 그쪽(강 의원)이 했는데, 그런 잘못이 국회에서 용인된다면 그게 정의이고 공정사회인가? 곧 사회에 나가는 우리가 거꾸로 불이익 받게 되는 건 아닌가?"


아마, 그녀에겐 세상이 공포로 채색됐을 것이다. 충격과 공포. 그것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사회라니.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벌건 여름에 펼쳐지는 공포잔혹극.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필요한 건, 혁명이다. 이 소식을 듣고 떠올린 건, 시저의 단호한 얼굴이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뺏아 탄 시저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그 장면. 나는 그 장면에서 껌뻑 죽었다. 그것은 김혜리 기자(씨네21)의 말처럼, '지성적 위엄'이었다. 시저가 침팬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 우두머리였고, 나는 그의 손짓과 몸짓에 전율했다. 나는 그를 따르고 싶었다. 

여름 블록버스터, 그것도 할리우드의 것에서 혁명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토록 짜릿한 순간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물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어떤 혁명이든 상품으로 팔 수 있는 공장이니, 그게 신기할 건 없다만, 이 영화가 주는 혁명적 쾌감의 일부는 시저의 표정과 몸짓에 빚지고 있다.


맞다. 나는 시저에 반했다. 이런 혁명적 우두머리의 등장이 그만큼 필요한 시대여서일지도 모르겠다. 치매 예방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과 지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시저라는 혁명적 별종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대수로울 게 없다. 걸작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그러고 보니, '68'이라는 제작연도가 의미심장해 뵌다!)의 프리퀄로 기획됐다는 배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시저의 표정과 지성적 변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으로, <킹콩>에선 킹콩으로 퍼포먼스 캡처 연기를 선보인 앤디 서키스에 온전히 빚지고 있다. 다른 실제 배우들은 시저의 뛰어난 표정과 몸짓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불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시저 찬양 도우미라고나 할까.




 

시저라고 처음엔 다른 침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애완동물이었다. 실험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수 있었던 환경이 여느 동물원 침팬지와는 다른 지점이었고, 지성의 진화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 정도. 덕분에 시저는 점점 자라면서 지성과 사유하는 힘을 기른다. 수화로 얘기하던 그가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묻고 태생을 고민하는 순간의 그 눈빛부터 나는 흔들렸다. 아, 혁명은 사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구나.



 

그도 허나 야생의 힘과 본능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로드만의 아버지이자 시저를 사랑해준 사람이 타인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는 공격성을 드러내고, 결국 유인원 보호감호소(우리)에 갇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의실종된 상태로 줄곧 빨간 셔츠만 입고 다니던 시저가 혁명적 단초를 찾게 된 장소다. 앞서 자신은 다른 줄 알았다. 인간과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그런 유인원으로.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각이었다고나 할까. 인간의 부속물로서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자각과 아울러, 무엇이 자신들의 적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번 깨어난다. 지성이 또 한 번 점프를 하면서 그는 현실을 깨닫는다. 생각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의 눈빛, 나는 또 흔들렸다.

압권은 이후였다. 수화만 가능했던 시저가 우리에서 가해지는 핍박을 더 이상 참지 않고, "No~"라고 외친다. 그리고 일어선다. 언어와 직립보행을 획득하는 순간. 아, 자유를 만나는 순간이다. 노예임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혁명적 기운이 스크린을 감싼다. 나도 함께 외치고 싶었다. No. 어떤 영화나 현실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고 인상적인 "No"를 만난 적이 없다. 지성과 자유가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그 혁명적 쾌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계급적 본능에 의해 그들의 봉기에 이입했다. 레알 혁명이 돋는 과정에 동참하고 싶었다.

시저와 그 투사들은 자유를 획득하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것을 알려준다. "No"라고 말하고 일어서기. 그들은 전진한다. 우리를 뚫고 나가, 샌프란시스코의 활엽 가로수를 타고 이동하고 마침내 금문교에 도달한다. 약간 과장해서 이 금문교 장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당신의 2011년 여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등 유인원들이 긴 팔을 늘어트리고 전진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금문교 교각을 긴 팔로 이동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진경은 아까도 언급했던, 시저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다. 이 광포하면서도 짜릿한 카리스마는 올해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이탈리아의 역사 교과서에는 시저가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등 리더의 다섯가지 덕목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시저라는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 미세하면서도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 이토록 풍부한 감정적 표현이 가능하게 한 기술에 대한 탄성도 탄성이거니와, 앤디 서키스의 디지털 연기에 아카데미건 어디건,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강용석 병'을 겪은 2011년의 한국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지금이다. 청년이고 장노년이고 없다. 청년들은 청년대로, 장노년들은 장노년대로 절망을 품고 있다. 아이들이라고 다른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어른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우두머리 다운 우두머리 없이 오합지졸들만 창궐하는 시대. 나는 시저를 우리의 우두머리로 추천한다. 지구탈출을 권하는 바다. 혁명의 시작은 시저를 옹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터다. 나는 시저를 따르겠다. 인간보다는 시저다. 일단 영화부터 보고 더 이야기하자.



 

아 참, 뭣보다 시저처럼 제대로 분노(분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93세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 -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 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분노하라》, p.26) 


용석이나 형오,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한편, 그런 동물들에게 눌리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살아있다면 시저처럼, "No"라고 외치고, 직립보행을 해야 한다. 노예 아닌 주인의, 핍박이 아닌 자유를 찾는 길이다. 침팬지보다 못한 용석·형오 개새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레알 혁명 돋아야 할 사소하고 소소한 이유다. 그 동물들이 우리에게 도덕적 수치심을 안겨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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