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한정판 - 일반판 + 싸인액자(동판+아크릴) + 스페셜북 + 엽서6종 + 양장본케이스 (3Disc)
강우석 감독, 설경구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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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국가를 내세운다. "이모냥 이꼬라지"인 나라를 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힌다. 구국의 신념이다. 자신만이 탁류에 휘말린 나라를 구할 수 있단다. 그 표정 또한 얼마나 진중한지. 나는 그만 그들의 진정성(?)에 감동해 눈물을 뚝뚝 흘리고야 말 것 같다. 눈빛엔 불꽃이 팍팍 튀고, 얼굴 주변 표정은 파르라니 떨린다. 아, 이토록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들이 많은데, 이 나라의 미래가 어찌 어두울쏜가! 

 

백의종마(?), 김무성이 잔뜩 비장미를 품고 '감수성'을 연출하는 뉴스를 봤다. 내용인즉슨, 구국의 대오로 감수성을 흔들어대는 오랑캐를 무찌르자는 결연한 의지였다. 이런 것이다.

 

"급진진보는 연대해서 후보를 단일화하는데 우파는 왜 단일화하지 못하는가. 새누리당 후보 중에 다른 우파 정당 후보보다 지지율이 낮은 후보는 사퇴하고 다른 우파 정당 후보를 지원해서 나라를 구하자!" 요약하면 이렇다. "우파 단일화로 나라구하자."  

 

사실, 모를 소리다. 급진진보는 뉴규? 진짜 우파는 또 어데? 행여 지금의 야권연대(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를 '급진진보'라고 표현했다면, 똥오줌 못가리는 얼라의 칭얼댐이고, 새누리당과 일련의 비슷한 무리를 '우파'로 뭉뚱그렸다면, 꼴통 주제에 육갑 떠는 꼬라지다. 우파보다 '돈파' 혹은 '꼴통'에 훨씬 가까운 주제에 지랄 옆차기 하고 있다.

 

그건, <실미도>의 영악 혹은 발광과 닮은 꼴이다. 관객 1000만 넘은 국가주의 옹호 영화말이다. 기실 이 영화, 참으로 영악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국가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도발적인 언사를 구사하면서 홍보했었다. 결과는 대성공. 연기한 배우들이나 고생한 스탭들은 고생하고 애썼다는 얘길 들을 만하겠으나 영화에 대해선 결코 동조할 수가 없다. 마케팅은 속임수를 썼다.

 

특히 이 영화, "국가주의를 끝장내라"는 식으로 언뜻 국가주의에 '메스'를 들이댄 듯하지만 그것, '할리우드 보이스 액션'이었다. 오히려 국가주의를 은폐, 아니 옹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자기기만'에 '관객 모독'.


자, 그 이유를 따져보자. 국가주의에 희생당한 이들의 비극. 그것이 <실미도>를 관통하는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카메라는 '왜 그들이 희생당했고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다루지 않는다. 당시 남북한 관계에서의 역사적 정치적인 의미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없다. 아니, 못한다. 애당초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실화'라는 외피로 둘러싼 면피 외에는 네버!


그 지점이다. 국가주의에 대해 정면 도전한다던 영화가 그 이면과 맥락에 대한 해석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 뭐 하자는 플레이? '스텝 바이 스텝'도 아니고 영화는 스타트라인에만 섰다가 오히려 역주행한 결과만 낳고 말았다.


그걸 얼버무리기 위해 선택한 것이 감정의 과잉이었다. 김일성 목을 따기 위해 급조된 684부대원들이 내몰리게 되는 죽음. '무장공비'로 오인된 채 자폭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실미도>는 중앙정보부로 대변되는 국가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할 수밖에 없던 시대 상황을 차용해 눈물을 짜내는 방식을 택한다. 참으로 빈곤하고 빈약하다. 눈물을 짜내야 한다는 사실에만 집착해 과도하고 비인간적인 훈련장면과 '북파'가 좌절된 상황의 기술에만 역점을 둔 것이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따져보질 않아서 그 의도를 명확히 추론할 수는 없지만 편집된 영화만 놓고 보자면 <실미도>의 국가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은 느슨하기 짝이 없다. 개인과 국가, 그리고 역사까지 범벅된 이야기는 비장하거나 무겁기 마련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를 정면 돌파했다고 했지만 '개인은 국가나 역사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마초들의 영웅주의와 연대감을 강조하는 것이 다다. 그래서 어쨌다고? 그들을 불쌍해하라고?


국가와 맞장을 뜨면 희생은 늘 개인의 몫임은 누구나 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결과의 빤함을 신파극으로 만들어낸 솜씨는 일품이지만 시대를, 역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결과는 한쪽으로 너무 기운다. 외려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소지를 남겨놓는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대통령이라는 가카 개인에 대한 충성이 강조된 시대를 넘어 진짜 국가다운 국가를 만들어보라는 메시지냐 뭐냐? 국가를 형성하는 새로운 틀을 조성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교육대장의 자살도 한편으로 뜬금없다. 애초 그는 국가에 의해 684부대의 책임자로 임명됐고 국가의도에 맞춰 그들을 사육했다. 그의 판단과 행동의 근간은 국가라 일컬어지는 상부의 명령이었고 철저하게 군대식으로 길들어진 인간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갑자기 인간적으로 변신했다고? 그것도 자기 부하들이 몰살을 당하도록 하는 선택을 하면서? 무슨 연유로? 어떤 계기로? 그럴 바엔 진즉 684부대의 책임자로 임명되기 전에 자결해 버리지 그랬는가 말이다.(강우석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실화 속의 교육대장은 망치로 맞아죽었다고 했다. 영화 속 자살은 감독의 '선택'이라고 했다.)


<실미도>는 거짓 눈물을 짜내는, 투박함을 가장한 기교에 불과하다. '이슈'에는 성공했지만 역사를 불러오는 데는 실패한 영화. 차라리 국가와 개인 간의 제대로 된 역사 인식과 영화사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업은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씨를 다룬 <선택>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 <실미도>의 카피는 너무 위선적이다. "32년을 숨겨온 진실... 이제는 말한다!" 이는 자신만이 그 진실에 접근했다는 오만함이다(자신감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 결론은 <실미도>, 국가주의에 반항을 하기는커녕 투항하고 응석을 부린 영화. 토할 뻔했다.  

 

다시 돌아가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내 이권을 지켜달라'는 외침을 그렇게 포장하는 것도 기술이다만. 너무 뻔뻔하지 않아? 평소엔 나라 말아먹기에 여념 없는, 아니 나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작자(들)가 저리 외치다니. 하긴 원래 그들은 빤빤했지. 그래, 알면서 괜히 내가 앙탈부렸다. 하도 꼬라지가 개무성하여. 김무성, 보고 있나? 나라보다 비정규직부터 구해다오. 비정규직 구하는 것이 곧 나라를 구하는 것일지니. 나는 나라 구하는 것 따윈 관심 없지만 비정규직을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임을 안다.

 

김무성이 속한 당은 물론, 당연히 민주통합당이 그 일을 해 줄 것이라고 믿으면 바보고. 그놈들은 정권 교체, 가카 심판만 알지, 세상을 바꾸는 세력도, 99%를 위한 세력이 아니니까.   

 

내가 꿈꾸는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탈핵, 탈FTA, 탈학벌, 탈비정규직... 그러한 것이 내가 바라는, 진짜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 정치적 커밍아웃을 한 셈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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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니쉬 아파트먼트 - 할인행사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로맹 뒤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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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맞이했던 설날, 생각해보자. (싫다고? 동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명절’을 명분삼아 ‘고향’ 가는 길. 찾아갈 고향이 있건, 그렇지 않건 온 나라가 들썩들썩. 솔직히 고향 가는 길이 때론 ‘고역’이라는 사실, 가본 사람은 안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 ‘고향’을 갈구한다. 어떤 ‘이끌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무감’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안식처보다 전쟁터가 되는 고향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 고향, 지긋지긋하다. 가느니 안 가느니만 못하다. 고향이 때론 지옥이 되는 풍경. 안식처 아닌 전쟁터가 되는 풍경. 뭐,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얘기다.

  

“일년에 두 번 있는 민족대이동으로 사람들은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TV뉴스 앵커의 멘트,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그냥 듣기 좋으라는 덕담이다. 물론, 내가 ‘시티 키드’로 살아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 솔직하게 말하자. 설날은 내게 그냥 ‘긴 휴일’일 뿐이다. 그것이 다다. 다른 건 없다. 물론 ‘고향을 다녀왔기 때문’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나와 달라서 그렇지, 인정한다. 


좀 더 외연을 넓혀보자. 고향에서 조국으로. “대~한민국”. 익숙하고 입이 기억하는 외침. 그건 일종의 이벤트다. 조국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나 애국심의 발로? 천만에. 그건 그저 (응원)구호다. 굳이 그 안에서 조국을 찾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란 말이 아직 유효하다지만(나는 아니라서 뭐!), 요즘은 “이민가고 싶다”는 쪽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박)그네가 이리저리 설치는 것 보면 짱나는 사람 참 많더라.)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국적이기에 안고 살아갈 뿐, 전통적 의미의 ‘국가’(nation)는 구닥다리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국가’라는 개념이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선 유럽의 풍경을 다룬다. ‘어느 나라의 나’보다 ‘개인으로서의 나’에 비중을 두는 시대. 유럽은 또 하나의 시대적 징후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화두다. 과연 유럽인들에게 국적은 무엇이며 ‘유럽’이라는 한 몸뚱이는 개인의 삶과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멀리서 바라본 유럽은 ‘국적’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립했다. 물론 아직도 과거의 국적 개념도 살아 있다. 1953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6개 나라에서 시작된 유럽통합체의 시발은 1999년 유로화라는 통화통합을 거쳐 2004년 5월 1일, 25개국 4억5000만명의 ‘한’ 유럽으로 확대됐다. 유럽연합, EU의 탄생. 철강과 석탄 시장의 통합을 근간으로 한 경제통합체는 어느덧 국경을 없애고 사회와 문화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물론 문제, 많다. 통화만 통합하고 국경 개념만 희석시켜서! 유럽의 재정위기가 이를 방증한다.) 


어쨌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는 이런 시대를 포착한다. 제목은 프랑스 속어다.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 그 뜻에 맞춰 한 공간에 동거하는 이들의 국적, 하나같이 다르다. 각 나라의 스테레오 타입이 그대로 드러난 등장인물은 국제 정세의 메타포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프랑스인 자비에가 유럽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실행되는 ‘에라스무스’를 통해 스페인에서 6명의 (다른 국적의) 학생들과 ‘동거’하는 것, 유럽의 현 상황과 다르지 않다. 키 높이가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우산에 들어간 모습이라고 할까. 그 모습, 생각해봐라. 좀 우습지 않나? 냉장고에 각자의 구획을 나누고, 전화기 앞에는 각국의 언어로 “지금 학교 가고 없다”는 말이 붙어있다. 각자의 방도 마찬가지다. 스테레오 타입화된 형태의 정리정돈과 방식이 좁은 숙소에 함께 둥지를 틀고 있다.

 

 

 

자비에는 이런 동거 숙소를 ‘문화의 용광로’라 부르지만 실상 ‘샐러드’에 가깝다. 녹아서 하나로 융합되는 용광로보다 각자의 모습대로 뒤섞이면서 맛을 내는 샐러드가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들은 억지로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때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지만 샐러드 맛이 변질되도록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지혜’다. 그곳이 공동체 공간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단결보다는 느슨한 연대를 택하는 이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들에게는 ‘단일민족’이라는 허황된 구호가 없다. 그들의 공간이나 구성원이 위험에 처할 찰나, 머리를 짜내고 함께 움직인다. 집 주인이 월세를 올리자 그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방이 없음에도 룸메이트를 뽑는다. 그리고 방이 아닌 침대를 나눠 쓰는 놀라운(!) 생활력을 발휘한다.

 

또 이런 예도 있다. 영국인 깍쟁이 웬디가 미국인 악사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 때 웬디의 남자 친구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파국을 막기 위해 똘똘 뭉치는 나머지 하우스 메이트들. 예기치 못한 해결책은 폭소를 유발하는 한편 빗나간 엇박자들도 앙상블을 이룬다. 흥미롭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하우스 메이트, 국적은 달라도 마음은 통한다.  


자신의 경험과 여동생의 유학생활을 잠시 엿본 기억을 버무려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 유럽의 정체성을 굳이 한마디로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유럽화’라는 이름으로 어느 하나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혼란을 방치한 채 그들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모습을 솎아낸다. (물론, 지금의 유럽은 경제 위기 앞에 조화를 이루지 않고, 형제국의 위기를 나 몰라라, 외면한다!)


감독은 은근히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를 비꼰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하나의 규범을 강조한 미국의 세계화는 곳곳에서 파국을 불러왔다. 주주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불렀다. 자본주의의 위기. 결과는? 반세계화의 움직임! 극중, 카탈루냐어로 수업하는 교수에게 불평하는 동료에게 한 학생,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는 공동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거야.” 이것은 감독이 말하고 싶은, 유럽이 지향하는 한 우산 속의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이리라.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극 정성으로 조잘거린 한국 사회, 반성해야 한다. 세계화랍시고 뭘 했나 봐라. 고작 영어 잘 하는 것이 세계화? 미국식 아니 월 스트리트의 표준을 전세계의 표준인양 강조하는 사대주의!

  

 

2명 이상의 조직(혹은 사회), 아니 한 개인 안에서도 혼란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1년 동안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과 동거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자비에,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자신을 성찰한다.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을 합한 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혼란에 빠진 유럽인일 뿐이다.” 그는 한 뼘 성장했다. (물론 자비에가 은행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는 모습은 작위적이고 끼워 맞춘 혐의가 짙다! 그 정도는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지만.)


나는 혼란이라는 단어를 억지춘향식으로 갖다붙여 대동단결을 외치는 일련의 구호를 이해할 수 없다. 때론 역겹다. 토할 것 같다.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짓누르거나 통합하려는 의도에도 동의할 수 없다. ‘국론 분열’이니 ‘국민 혼란’이니 하는 레토릭으로 하나의 노선만이 살 길 인양 호도하는 세력들, 에라이 침도 뱉아주마. 퉷. 개인의 지향성이나 신념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내 나라 맞아?


국적에서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각자의 정체성을 간직하면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통합 혹은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날. ‘한국인’보다 ‘세계인’이라는 단어가 더욱 자연스러운 그런 날. 국적을 묻는 질문에 세계 시민이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날. 스페니쉬 아파트먼트에 묵고 싶은 그런 날. 여러 문화가 섞인 채 모든 법은 무시되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장소에서 사는 그런 날. 나는 그런 날들의 세계에 사는 자취생.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아니. 나는 대한민국민 아닌 세계시민으로 살고 싶다!

내가 공정무역 커피를 다루는 것은 그런 세계시민으로서의 활동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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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2disc) - 청각장애인용 자막 삽입
황동혁 감독, 공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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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러더라. 살아서 지옥을 맛보는 것, 그게 바로 배우자의 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배우자 없는 나로선, 끔찍할 것이라는 상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도가니>를 보곤, 하나 덧붙였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살아서 지옥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보는데도 그것은 생지옥. 

내가 직접 당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아프고 아팠다. 

성폭행. 강간과 폭행. 그것도 권력과 위계에 의해 저항조차 불가능하게 이뤄진.

더구나 그 권력은 타인의 장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발판으로 삼았다. 개새끼, 아니 개새끼보다 더 못한. 

 

나는 꽤나 극장을 찾는 편인데,

극장에서 그렇게 많은 탄식과 한숨이 흘러나온 것을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살아서 겪어야 하는 지옥에 대한 공감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도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을 후벼팠다.  
과연 우리는 그것을 진짜 모르고 있었던가. 

<도가니> 개봉 직후 이른바 '여론'이 들끓었다. 그것은 공분.

실재 사건에 대해서도 그랬지만, 그 지옥을 방조·방치한 것은 물론 지옥을 조장한 세력과 협잡 아닌 협잡을 한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그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진짜 벌어지고 있냐며 미친듯이 들끓는데, 나는 그것이 더 불편했다.

삐딱한 성정 때문이겠지만 씨바, 지들이 사는 곳은 다 천국이가 사는 곳인가? 

진짜 몰랐단 말인가?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것은 아니고? 내 것만 후비느라 제쳐놓은 건 아니고? 

 

<도가니>. 단순 장애인 성폭행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과 구조, 그것이 어떻게 약자에게 지옥을 조장하는지 보여준다. 

교육청과 시청은 사건이 벌어진 시간 등을 거론하며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책임을 미룬다. 당장 내게 닥칠 비판과 책임이 두렵다. 그러니, 그들에겐 은폐가 유일한 능사다. 

경찰은 교장(교사)와 짜웅하고, 돈독(이 오를대로 오른 끈적)한 관계를 유지한다.

주민들은 그것이 무언지도 모르고 실체도 없는 '지역사회 발전'을 들먹이며 가해자를 두둔한다.

교회라고 다른가. 사탄의 무리 운운하면서 진실을 파헤치는 강인호(공유)와 아이들에게 돌을 던진다. 돈이라는 신종 예수에게 죄를 씻은 죄 없는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

변호사? 그가 변호하는 건, 지옥이다. 물론 있는 자들에겐 천국. 

 

동물농장이요, 동물의 왕국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동물들의 리더는 동지 운운하지만 실은 그 동지 동무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권이요, 내게 돌아와야 할 이득이다.

<도가니>의 그 어이 없음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기제다.

학교장, 교사라는 권위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사랑의 매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법과 질서의 유지는 또 어떤가. 경찰, 검찰, 판사, 변호사는 그저 이름을 달리한 자웅동체다.

이른바 '뿜빠이(N분의 1)'의 논리가 물밑에 흐른다.

힘 없는 99%의 약자가 대면해야 하는 것, 결국 지옥이다.

 

들끓는 여론에서 또한 불편한 것은 처벌('도가니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 왜 그것에는 처벌만큼 비중을 두지 않는가.

 

당연히 도가니법의 제정(장애인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대책)은 <도가니>가 가져온 성취이자 긍정적인 영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처벌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양 착각한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왜 그렇게 치유에는 인색한가. 

향후 사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 당한 사람은 치유가 되는가? 지옥을 맛본 것이 희석되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서 지옥을 맛본 사람, 개인에 대한 치유 아닌가. 사회적인 치유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예방을 위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선적인 치유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회적 시스템의 구멍과 불합리로 지옥을 맛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치유이며,

그것이 가능해야 정상적인 사회다.

그들이 맛봐야 했던 지옥은 혼자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옥이요, 우리의 수수방관이 빚어낸 무간지옥이다.

 

치유부터 신경쓰자.

용서는 지옥을 맛본 아이들의 부모도, 할머니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는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트라우마, 그들이 겪은 지옥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

정혜신·이명수 선생님의 '와락'이 아름다운 이유다.

물론 당연하게 그것은 개인들의 몫이 아닌 국가와 공동체의 몫이어야 한다.

개인이 그렇게 나서도록 하는 것, 역시 이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공분이 제대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표적을 향해 제대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 가해자들에게만 향해선 안 된다.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은 본디 시스템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단순히 선거에서의 승리로 끝낼 게 아니다. 시스템과 세계를 갈아 엎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래봤자 기득세력, 민주통합당도 아니다. 처벌도 신통찮지만 치유는 그들이 할 수 있는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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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o & Rita O.S.T.
버드 파웰 (Bud Powell) 외 노래 / 소니뮤직(SonyMusic)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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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
사랑의 ‘신화’를 완성하기 위한 전제다. <첨밀밀>이 그랬다. 처음으로 가슴 짠하게 알려준 명제. 만남과 헤어짐, 그 엇갈림과 반복. 한숨을 쉬었다 뱉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발끝에만 매달렸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렇게 흔들리는 내 마음에 <첨밀밀>은 속살거렸다. “운명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유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운명이잖아. 운명. 사랑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다.


나는 얼마 전, 또 하나의 운명을 접했다. 더 운명 같은 건, ‘쿠바’였다. 아직 발 딛지 못한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꼭 디뎌할 그곳. 혁명이 있었고, 커피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함이 상존하는 곳. 누군가 그랬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이 쿠바라고. 그는 일체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양,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내겐 로망이었던 쿠바는, 이젠 지상의 천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치코와 리타>, 쿠바에서 시작한다.
1948년의 쿠바 아바나. 피아니스트 치코. 보컬리스트 리타. 그들이 만난 밤, 음악이 꿀처럼 흐르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끌림’이었으리라. 끌림은 곧,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것. 사랑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리듬은 음악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때, 운명은 그들에게 속삭였으리라. 치코에겐 리타의 목소리가, 리타에겐 치코의 연주가 그랬을 것이다. 리타의 ‘베사메무쵸’에 혹했던 치코는, 그녀를 위해 ‘리타(릴리)’를 작곡하고, 리타는 그런 치코에 반한다.

그러나 그것. 운명이라는 속삭임. 늘 정교하고 오차가 없는 것, 아니다. 운명도 수명이 있다. 차가운 유혹으로 끝나버릴 운명이 있는 한편, 그리움을 평생을 품을 운명도 있다. 운명이라는 속삭임, 마음은 쉽게 속는다. 그만큼 강한 끌림이 있을까. 영원하고픈 숙제, 사랑. 사랑의 시작도 언제나 운명에서 비롯되니까. “당신을 잘 모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느낌”이라며 리타에게 처음 건넸던 말, 오글거렸지만 진심 같았다. 그때 카바레(살롱) 분위기가 그랬다.

어쨌거나 치코와 리타의 (음악적) 조건(?)은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씨줄과 날줄의 조화. 음악이 매개로 작용하는 순간, 사랑은 더 큰 열정을 동반한다.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그들은 처음 만난 그날, 서로를 탐닉한다.

 

 

애니메이션이라지만, 리타의 몸은 팽팽한 활시위마냥 관능적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관능미를 느끼다니, 처음 한 경험이다. 치코가 앞뒤 재지 않고 빠질만하다는 생각. 두 사람, 몸을 섞는다. 선율과 리듬의 합치처럼 두 사람은 합한다. 맥락 없이 그들을 봤다면, ‘원 나잇 스탠드’라고 애써 무시할 것처럼.

원 나잇 스탠드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은 시작됐다. 허나, 사랑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는 법인가보다. <첨밀밀>에서 이미 확인한 바, <치코와 리타>도 엇갈림을 동반한다. 관능의 볼레로처럼 터질 것 같은 그들의 관계에도 질투와 오해가 틈입한다. 사랑의 가장 큰 적이 질투와 오해라고 했던가. 수시로, 그들은 시험에 든다. 세상의 모든 운명적인 사랑이 그러하듯.

전반부, 나는 치코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는 뭔가 망설이고 주저한다. 첫 밤부터 그랬다. 당신이 걷는 땅에 키스라고 하고 싶었던 남자의 태도치고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니, 리타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는 치코를 믿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대범하고 마음이 넓은 양, 우리는 착각한다. 살아보니 마냥 그렇진 않다. 질투와 오해가 여성만의 것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착각이다. 리타는 그런 여자다. 한 남자를 품기에 더 없이 넓은 여자다.


주변 환경 또한 그들의 사랑을 질투한다. 아바나,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공간이 뉴욕으로 바뀐다. 그들의 사랑도 바뀔 것임을 예고한다. 헤어짐이 당연하면서도 나는 안타까웠다. 결말을 알면서도 발을 굴러야 하는 상황 같은 것이니까.


뉴욕은 아바나와 다르다. 체제가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사람이 다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랑. 모든 것을 얻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타가 된 리타가 그랬다. 자신을 찾아 뉴욕에 온 치코에게 더 이상 아바나의 순진한 여자가 아니라고 쏘아붙이지만, 사랑은 운명을 거역하지 않았다. 맨해튼의 키스. 질투와 오해는 키스 한 번으로도 충분히 가실 수 있는 것임을.

 


부러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 뉴욕, 그들의 사랑은 더욱 힘에 겹다. 사랑을 온전하게 그들만의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자본이 개입하니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 거듭 어긋났지만, 영원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과거에 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나는 운명의 향기.

나는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리타가 마침내 자신을 돌고 돌아 찾아온 치코에게 건넨 이 말. “47년 동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 문을 두드려주기를.” 그녀의 목소리는 과거의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향기는 여전했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었던 세월.


문을 열어주는 것은 결국 운명이다. 사랑이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고야 만다는 <첨밀밀>의 향기는 쿠바에서도 여전했다. 한창훈은 《향연》에서 그랬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기다림, 그것은 때론 사랑의 다른 말이다.


<치코와 리타>.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 리타의 노래와 춤, 치코의 연주, 그들의 사랑과 인생, 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그들은 음악을 통해 채운다. 마음이 교감한다. 그들의 사랑과 음악에 당신의 몸과 마음이 들썩이지 않는다면, 병원이 필요하다. 마음이 앓고 있다는 증거니까.

 


오늘, 눈이 펄펄 내린다. 눈이 쌓인다. 그들의 사랑이 눈과 함께 아른거린다. 오늘의 노래는, 베사메무쵸. 아, 관능적이다. 이 음악, 만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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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레이지 - Outrag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의 근간은 폭력이다.

자, 스크린을 지켜보자. 주먹을 휘두른다. 손가락을 자른다. 칼로 얼굴을 긋는다. 치과용 드릴로 입 안을 휘젓는다. 젓가락으로 귀를 쑤신다. 몸에 칼을 넣는다. 총을 쏜다. 좀 더 나가볼까?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길가의 기둥에 줄을 매달아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 죽게 한다. 
 


상상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이보다 더한 폭력(의 기술)이 난무하니까.

악(惡)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저건 조직폭력배(갱, 야쿠자)의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믿고 싶을 수도 있겠다. 지금-여기를 보라. 가카의 통치 아래 세상이 얼마나 평화롭고 안온하냔 말이다. 뭔 일이 터지든, 가카는 그러실 분이 아니다! 광화문에 산성을 쌓고, 용산에 불을 지르며, 쌍용차나 부산 영도(한진중공업)에 경찰폭력배들을 투입하는 일 따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분이 하실 일이 아니다.

강력한 위계에 따른 명령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있다. 조직폭력배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군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어디든, 겉으론 그렇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리적 행위만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그런 곳엔 '의리'가 있지 않냐고? 왜 이러시나. 그건 이미 박물관에 박제된 유적이다. 의리 대신 탐욕과 배신, 협박이 난무한다. 이권 때문이다. 그것이 폭력과 악을 때론 혹은 수시로 추동한다.

김훈은 악과 폭력의 바탕 위에 세계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것에 나는 '이권' 하나 덧붙이고 싶다. 아니, 지금은 이권 때문에 악과 폭력이 발생하는 것 아닐까? 국가마저도 '국익'으로 포장한 '이권'에 몰두하는 세상. 돈이든 권력이든 있는 놈들은 더 많은 이권을 삼키지 못해 안달이다.  

장담컨대, 지금 세상에 순수한 악이나 온전한 폭력은 거의 없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아웃레이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혹은 선언한다. 악의 순정한 결정체로서, 마초적 폭력의 완성체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여느 갱스터 영화와 다르다. 멋있게 죽는 법이 없다. 하나같이 동정 없이 죽어간다. 죽음과 죽음 사이엔 냉혹함만 흐른다.


참, 많이도 죽는다. 영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죽임과 죽음을 보여준다. 감정을 동반하지도 않는다. 건조하다. 더구나 죽임과 죽음 사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협박을 밥 먹듯 하고 폭력은 몸에 배인 행위다. 배신은 일상다반사다. 이권을 향한 생존본능만 번뜩이는 수컷들 앞에 다른 명분이나 정서의 흔들림은 사치다. 

그 모든 것은 이권 때문이다. 서열 파괴, 의리 박멸, 양심 증발, 모두가 이권이 추동한다.
     

<아웃레이지>의 원제(일본)는 ‘全員惡人(전원악인)’이란다. 글쎄, 순정한 악인조차 될 수없는 이들에게 그런 타이틀, 한편으로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그저 장삼이사 아닌가? 어쩌면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정서적으로 피폐한 건가?

모르겠다. 일상에서 나는 늘 폭력(물리적이진 않아도)을 목격하고, 협잡을 목도한다. 분칠한 협박은 표백제를 뒤집어 쓸 정도고, 악의 평범성은 이제 식상하다. 나라고 거기서 자유롭진 않다.

기타노 다케시의 세계는 여전하면서도 더 촘촘하고 냉정한 유머를 발산한다.  

<아웃레이지>의 결말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이권을 향한 대물림. 사람이 바뀔 뿐, 세상의 근간은 뿌리 깊다. 어디서부터 잘라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견고한 시스템. 우리는 이권과 폭력과 악을 패션처럼 입고 있다. 

<아웃레이지>의 폭력이 잔인하다고? 나는 아니었다. 조직폭력배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세상의 단면을 본 것 같았다. 영화가 폭력을 전시했다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잔인했다. 세상의 잔인함을 스크린을 통해 새삼 확인해서. 내가 너무, 이권에 예민하고 폭력이 일상화됐으며, 악을 내면화한 인간이어서 그런 걸까? 나는 글러먹었다. 된장. 조심해라. Outrage할지도 모른다. 

물론, 절대 해치진 않아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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