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rench Dispatch 웨스 앤더슨 프렌치 디스패치 대본집 (Hardcover, Main)
웨스 앤더슨 / Faber & Faber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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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앤더슨 영화 대사는 좀 빠른 편이다. 리스닝이 된다고 조금만 자막을 소홀히 보면 상관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섬세하게 직조해놓은 구조를 최대한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빚어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풀리지 않다가 나오면서 이해가 되는 대목도 있고, 다시 봐도 결국 왜 그랬지?에 대해 뚜렷한 답변을 어디서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봤다. <프렌치 디스패치>. 첫 번째 봤을 때는 자막 올라가면서 코끝이 찡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는 왈칵 울음이 터져 옷소매로 계속 눈두덩이를 훔쳐야 했다. 바로 뒤에서 젊은 연인(영화 속 티모시 샬라메와 함께 나왔던 커플 같은) 중 여자가 “뭐야, 이게. 뭐가 눈물이 난다는 거야. 나 참.”이라고 성질을 내자 “영화를 보는 관점은 다 다를 수 있으니까.” 남자가 여자를 달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는데, 결국 자막이 다 올라가고 난 다음에도 훌쩍거리는 나를 자리에서 쫓아낸 것은 “영화 끝났습니다. 나가주세요.”라고 말하는 영화관 직원의 퉁명스런 외침이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유쾌한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느닷없이 눈물이 또로록 흘렀다. 옆에서 같이 보던 남편을 보자 왠만해선 별로 반응도 없는 사람이 같이 또로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폐간하는 잡지의 마지막 사진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니. 그 사진이라니. 아무 것도 아닌 그 장면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일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이제 그 책은 다시 볼 수 없으니. 아마 앤더슨의 영화는 계속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앤더슨이 만든 그 책은 다시 볼 수 없을 테니. 어쩌면 그 책을 보며 마음을 졸이고, 마음을 부풀리고, 조용히 떨고, 조용히 사무치는 사람들도 이젠 다시 볼 수 없을테니.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한 조사라고나 할까. 나는 그렇게 눈물로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시사인> 기사였고, <물음을 위한 물음>이란 책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 결정한 것도 <시사인> 기사였다. <물음을 위한 물음>은 갈무리에서 나왔다. <녹색평론>은 1년 휴간을 선언했다. 나는 <시사인>과 <뉴욕타임스>를 정기구독한다. 갈무리는 응원하지만 모든 책을 사진 않고, <녹색평론>은 종종 도서관에서 본다. <파리리뷰>에 열광하고, <뉴요커> writer’s voice에 설레고, <BBC> 북클럽을 고대하며 한 달에 한 번 업데이트를 기다린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그리고 왓차까지 충실하게 서브스크립션한다. 


. . .

사라지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도 <프렌치 디스패치> 스크린 플레이 책을 주문했다. 아마존에서 직접 받을 수 있지만 그냥 알라딘으로 주문했다. 내 책장에는 정기적 방출에도 꿋꿋이 살아있는 <개들의 섬> 영문본 스크린 플레이 책과 번역본이 모두 꽂혀있다. 어디서 <프렌치 디스패치>를 번역해 낼진 모르겠지만 한 줄 한 줄 형광펜으로 밑줄 그으며 읽을 예정이다. <개들의 섬>은 다시 읽어도 참 새롭다. <프렌치 디스패치>도 꼼꼼하게 다시 읽어야지.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모든 대사가 내 몸에 꼭꼭 박히도록. 웨스 앤더슨이 <뉴요커>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Try to make it seem that you wrote it that way on purpose.


<프렌치 디스패치> 편집장이 작가들에게 주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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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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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요일

일주일에 한 번 사우나가 쉬는 날이다.

새로 산 목욕바구니 달랑거리며 갔다가 헛걸음치고 와서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병이 있어

욕조 안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두께의 책을 찾다가

여러 번 이사에도 방출당하지 않고 남아있던 <싯다르타>를 발견하곤 

이거다 싶어 반갑게 들고 들어갔다.


헤세 책은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 문예반 모집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

이런 저런 걸 묻는 면접에서 <데미안>을 읽었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읽었다고 (중학교 1학년 때) 대답했고,

몇 번 읽었냐는 물음에 (네?)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게 결격 사유였다.


아. 그런 책은 세 번 이상 읽어야 문예반에 들어가는구나.


흥,칫,뽕


뭐 그리 대단한 책도 아닌데.

중학교 때나 읽지 대학교 와서 헤세 읽는 사람은 못 봤던 것 같고.

더구나 성인이 되어서 헤세를 읽는 건 별로 상상을 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어느 날 우연히 정말 충동적으로 구매한 후에,

첫 장 한 장 들춰보지 않고 몇 년을 책장에서 묵었던 책이다.

늘 새로운 책들이 쏟아졌고,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결코 이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놓고 손도 대지 않고 주기적 방출에 실려나간 책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욕조에서 손에 쥐기 좋다는 이유로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은 <싯다르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출근하지 않게 된 이후로

마음의 공허감이 메워지지 않았던 탓일까.

삶의 쳇바퀴 아래서 미뤄두고 나중을 기약하며 외면했던 문제들이

이제사 마음껏 물을 만난 고기처럼 퍼덕거리는 까닭일까.

자꾸만 예전에 잘 보지 않던 책들이 손에 잡힌다.


음식이 그러하듯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이 보약이듯

내가 원할 때 찾게 되는 책이 결국은 인생책이 되기 마련이다.

읽어야 해서 읽는 책만큼 재미없는 책이 있던가.

봐야 해서 봐야 하는 영화만큼 고역인 게 있던가.


작년인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왈칵 눈물이 났다.

그 책이 나온 이십여 년 전 그 책을 읽었더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내게 오는 책이 있다.

이번엔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고타마에게 부처, 그분의 보화와 신비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가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한 형언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 바로 그것을 체험하고자 그는 길을 떠났으며, 막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터였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을 체험해야 했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이 아트만이며, 브라만과 똑같이 영원한 본질에서 생겨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의 그물로 자신을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신도 분명 자기 자신이 아니었고 감각의 유희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색, 오성, 습득한 지혜, 결론을 도출하고 이미 생각한 것에서 다른 생각을 자아내는 학습된 능력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다. 이 사색의 세계 또한 여전히 차안의 세계에 있었고, 감각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죽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유와 학습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살찌운다 한들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각과 사유, 이 두 가지는 모두 좋은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귀기울여 들어볼 가치가 있고, 함께 작용해야 했으며, 그 어느 것도 경시되어서는 안 되고 과대평가되어서도 안 되며, 두 가지 모두에게서 가장 내밀한 진리의 비밀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깨달음은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성에 닿는 일은 자신이라는 재료, 인생이라는 시간, 경험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각,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새로 시작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몇 가지가 있다.


- 남들이 일해라, 절해라 하는 걸 귀담아 듣지 않기

- 몸의 감각을 우선할 것. 책으로 먼저 배우지 말 것

- 안다고 느껴지는 느낌을 경계할 것. 아는 것 같은 착각에 쉽게 굴복하지 말 것.

- 다.시.는. (안다고 떠드는 이들한테) 말리지 말 것.

- 무턱대고 따라하지 말 것.

- 내면의 불안을 응시할 것.

- 막막해지는 순간을 기꺼이 껴안을 것.

-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일에 몰두할 것.

- 해야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 적당히 읽을 것.


인생은 두 번 살게 되는 것 같다.

한 번은 배운대로. 한 번은 살고 싶은 대로.


싯다르타도 사문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늙은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결국 자신의 길을 떠나고, 고타마를 만나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배우는 길을 택한다.


욕망과 탐욕과 환희를 모두 경험한 후에야 

도반이자 스승이자 벗인 뱃사공을 만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강물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깨닫는다.


싯다르트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는 데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요?" 고빈다가 물었다.

"구도하는 사람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고, 그래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마음속에 들이지 못하는 법이죠. 늘 자신이 축구하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는 그 목표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어떤 목표도 갖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깨달음도 달성해야 하는 목표처럼 습관처럼 달려들면 요원하단 얘기다. 그저 뱃사공처럼 강물을 오래 바라보고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그러듯이 자신의 온 감각에 목적성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운동삼아 했던 일들을 멈추고 오늘부터 크리야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난다>를 읽고 크리야요가가 대체 뭔가 알아봤는데 우리나라에는 정식으로 크리아요가를 가르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어찌어찌하여 알게 된 분으로부터 크리야요가를 위한 호흡법을 배웠고, 크리야요가 명상법 같은 걸 알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I am not the mind. I am not even the mind.

들숨과 날숨에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되뇌이면 좋다고 하는 데 

무거운 머리가 몇분 동안의 명상만으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듯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나마 자아를 소멸시키는 원리인지.


요가 관련 책을 탐독하는 것보다

짧게 나마 내 몸과 내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훨씬 좋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좋으나 배움이라는 습관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감각을 놓칠 때

쉽게 관성의 쳇바퀴에서 자유의 기쁨을 잃고 만다.


헤세는 이 책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썼다고 전한다.

스스로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체험'해야 했던 것일까.

평생 헤세는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까. 

어쩌면 <싯다르타>는 그가 이루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은 아닐까.

<싯다르타>는 과연 헤세의 작품일까.

오랫동안 윤회를 거듭하던 어느 중생이 헤세를 통해 간증한 이야기는 아닐까.


아. 다시 또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시 또 반신욕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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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5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은 배운대로. 한 번은 살고 샆은 대로. 나뭇잎처럼님의 마음가짐이 느껴집니다.저도 그렇게 살고 싶네요

나뭇잎처럼 2021-11-16 09:12   좋아요 1 | URL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어요. 일단은 배운 걸 다 토해내야 할 거 같아요. ˝Unlearning˝ 이 요즘 제 화두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들에 너무 휘둘리며 살아온 거 같아요. ˝OOO 하는 O가지 방법˝ 같은 리스티클이 왜 클릭률이 높을까 생각해보면 다들 쉽게 가려고... 빨리 해답을 얻고 싶어서... 불안한 심리를 이용한 얄팍한 접근이 아닌가 생각 들어요. 천천히 느긋하게. 책도 천천히 느긋하게 읽고, 천천히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 싯다르타가 강물을 통해서 배운 게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인생을 그렇게 서두르며 살 필요가 없는데 왜 그렇게 일분일초 아까워하며 서둘렀는지. 몸에 묵은 나쁜 습관들 해독하는 게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 같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1-11-15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 같은 착각의 순간을 알아채고 경계하라는 내용의 말이 와닿네요. 저도 경계해야 된다고 평소 느끼는 말이에요. 님 리뷰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작품은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쓰인 거 같다고 말한 브룬디쉬가 생각납니다. 정말 신내림하여 쓴 듯 말이죠.
앗 브룬디쉬는 누구냐고요? 영화 북샵에 나온
진지한 남자입니다 ^^ 그리고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일에 몰두할 것,도 공감해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다음에 크리야요가 하시는 이야기 좀 더 페이퍼 써 주세요 ^^

나뭇잎처럼 2021-11-16 09:19   좋아요 2 | URL
읽는 걸 아는 걸로 착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읽으면 왠지 아는 것 같잖아요. 선생님이 칠판에서 수학문제 푸는 거 보고 있으면 나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읽는 거랑 아는 건 별로 상관 없더라고요. 오히려 읽어서 아는 척하게 되는 게 심각한 문제였던 거죠. 안다고 착각하고. 아예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 같은데, 라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겸손과 오만 사이 같은 크나큰 차이. 알고 싶은 욕망과 자신을 돌아보는 것 사이의 발란스를 찾지 못하면 어느 순간 배가 기우뚱하듯이 위태로워지는 것 같아요..
영화 북샵은 못봤는데 멋진 남자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ㅎㅎ 어느 순간 쓰지 않으면 모두 사라지잖아요. 우주가 나를 통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제가 그 길을 제대로 열여주지 않으면 모두 먼지처럼 사라지죠. <빅 매직>에서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그걸 아주 멋지게 표현했더군요. 정말 기적 같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크리야요가 연속 100일 하기 2일차입니다. 느낌 좀 올라오면 유용한 얘기 들려드릴게요.^^

새파랑 2021-11-15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헤세를 성인이 되어서 읽었는데 😅 싯타르타 읽고 와 감탄했던 기억이 있는데 한번 더 읽어봐야 될거 같아요 ㅋ 저도 깨달음을 좀 얻고 싶네요 ^^
뭐든지 지나치게 매달리는건 안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처럼 2021-11-16 09:27   좋아요 3 | URL
일단 시작하면 뭐든 중독되는 성향이라 뭐든 지나치게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얻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잃은 것도 많거든요. 힘을 빼고 유유히 흘러가는 걸 배워야 할 거 같아요. (태극권?)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뭘 알고 헤세를 읽었을까 싶어요. 그때 읽었던 <부활>이 정말 부활일까. 고전은 성인이 되어야 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거 쓰느라 한 평생 걸렸을 텐데 우리도 얼마큼은 살아야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에 읽었던, 혹은 읽다 말았던 고전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ㅎㅎ

다락방 2021-12-07 10: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리야 요가는 나뭇입처럼 님의 글에서 처음 접하네요. 저도 프레이야 님 말씀처럼, 크리야 요가 이야기 좀 더 자주 써주시길 바랍니다.
:)

나뭇잎처럼 2021-12-09 11:33   좋아요 2 | URL
헤헤. 제가 뭐 그렇게 알려드릴 형편은 못되지만 일단 매일매일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매일하는 게 쉽지 않네요. 하면 좋은 걸 아는데 매일 하는 건 아직 인이 박히지 않은 일인입니다. 뭐가 되었든 잠시 숨을 고르고 가만히 침잠하는 거.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점점 희귀해지는 기술이죠. 가만히 가만히. 조용히 조용히.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늘숨과 날숨을 바라보며...

그레이스 2021-12-09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나뭇잎처럼 2021-12-10 09:29   좋아요 2 | URL
우앙. 너무 조으네요. ㅎㅎ 적립금도 주시고. 알차게 써야겠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mini74 2021-12-09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저도 축하드려요 *^^*

나뭇잎처럼 2021-12-10 09:30   좋아요 2 | URL
넘. 감사해요. 미니님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했는데 앞으로 더 분주해지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ㅋㅋ

쎄인트saint 2021-12-09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달인분의 축하를 받으니 더 황송하네요. ㅎㅎ

thkang1001 2021-12-09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살다보니 또 이런 날도 있네요 ㅋㅋ

서니데이 2021-12-09 2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4   좋아요 3 | URL
하하. 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축하를 들으니 더욱 기쁘네요. 점점 멸종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소수민족인으로서 기쁨으로 감사를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파랑 2021-12-09 2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축하드립니다~!! 이 리뷰 재미있게 읽었어요 ^^

나뭇잎처럼 2021-12-10 09:35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이 추천해주셔서 선정되었나 보네요. ㅎㅎ 새파랑님 전작읽기 잘 되고 계시죠? 기쁨으로 책의 바다를 멋지게 항해하시기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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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사를 하고 나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개운치 않았다.


만성적인 좌골 신경통 때문에

밤새 잠을 뒤척여서인지 하루 종일 몽롱했다.

한의사가 커피는 내 체질에 독약이라 했지만

쓸쓸한 날씨를 핑계로 두 잔이나 마셨더니

끝내 오후에는 잠시 자리에 누울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한강이 보이는 좋은 집에 이사왔는데

기쁨도 잠시,

오른쪽 발목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기분 나쁜 통증과

왼쪽 엉치서부터 퍼져나가는 불안한 관절 조합은

의식을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평생 앉아서 일한 대가일까.

조금만 틈이 나도 앉아서 읽은 탓일까.

앉아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죄일까.


온몸을 떠돌아다니는 통증을 감지하며

잠깐 잠깐씩 앉아 황정은을 읽었다.


황정은이 그런 삶을 살았구나.


황정은의 책을 거진 다 읽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 그랬는지

그녀가 쓴 자기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아팠다.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구나.

...



어제 이삿짐을 옮기러 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온 분들이었다.

세 명 중 팀장 격이 그나마 가장 한국말을 잘했고, 

나머지 두 명은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세 명이 온 줄 알고 본사에 전화했더니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사람만 한국인.

그는 운전 담당이었던 모양인 듯

신발을 신고 들어와 말없이 화장실만 한 번 쓰고는 사라졌다.


이삿짐 옮기는 날 이른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짐을 옮기면 그나마 비를 맞지 않으련만

입주민 편의를 보호하는 생활지원센터에서는 끝내

지하주차장 to 지하주차장 이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짐을 옮기시는 분들은 짐이 젖지 않게 조심하며 

비를 쫄딱 맞아가며 짐을 날라야 했다.


팀장격인 사내는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은 내 발을 보며

춥지 않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운동화를 갈아신을 요량이었지만 이미 신발이 모두 실려나간 뒤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비를 안 맞으니까 별로 안춥다고 대답했다.


부엌짐을 담당한 중국출신 여성은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셋 중 가장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나는 하마터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었는지 물을 뻔했다.

간단한 의사소통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걸 알아차린 후에

나는 아주 천천히 일부러 단어 하나씩 끊어서 이야기했다.

말은 어색했지만 미소가 분홍색 스웨터마냥 부드러웠다.

한 번도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부엌이었지만

요리조리 궁리해 가장 손이 잘 닿을 곳에 먼저 있던 짐들의 배열을 최대한 고려해

잡다하고 일관성 없는 살림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이사할 때면 그릇들은 내가 정리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가지런히 놓아준대로 쓰기로 했다.

그녀의 수고로움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차가운 음료수 대신 따뜻한 커피를 내밀자

오전 내내 비바람 추위에 덜덜거리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추워서 그랬던 거다.


무거운 짐 같이 들자는 말도 없이 

작은 체구로 올리고 담고 나르고

힘으로 도와줄 길이 없는 나는

그들의 동선이 중복되지 않게 짐들의 행선지를 정확히 일러주며

연신 나뒹구는 박스테잎을 주워담았다.


하루만 이렇게 분주히 몸을 놀려도 몸이 아픈데

오로지 몸뚱아리 하나에 의지해서 사는 삶에서 고통은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할까.


어릴 적 엄마는 너무 지친 나머지

뜨거운 방바닥에 복숭아뼈가 까맣게 익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쇠뭉치도 아닌데 쇠뭉치처럼 몸을 쓰다가

겨우겨우 찜질방 같은 데서 몸을 풀고 다시 일을 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일하다가 결국 몸에 탈이 나 7년 반을 

침대에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뇌를 다쳐 말도 못하고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너무 속상해 눈물을 흘릴 적에 누군가 그랬다.


평생 일하시다가 그나마 아프셔서 누워 계실 수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일하셨으니 이제 호강하며 사실 때 누워계셔서 속상한 거라고 외쳤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누워계셨던 게 과연 좋았던 걸까 가끔씩 생각해보곤 했다.


눕지 않았으면 계속 일했을 게 뻔하므로.


엄마를 산소에 모시고 돌아온 날,

이모부는 차라리 잘 되었다며 방금 엄마를 태워 묻고 온 남매를 위로했다.

병 구완 하는 남매가 안쓰러워 그랬는지,

답답한 침대에 누워 식물인간처럼 누워지내던 엄마가 불쌍해 그랬는지,

'차라리 잘 됐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워 나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런 이모부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 선고를 받고 몇 년을 투병하셨는데

일년 내내 고추며 마늘이며 배추와 무를 키워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게 

이모와 이모부의 유일한 낙이었다.


올해가 마지막 김장이 될 거 같다는 말에 

절인 김치를 몇 포기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도우러 가겠다고 했다.


김장 담그는 날이면 유난히 예민해져서 소리도 버럭버럭 지르고

자기 식구들 서로 챙기느라 우당탕 거리는 이모와 이모부가 

마지막 김장 담글 때는 어떠실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한다.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로 이사갔다는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

삼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은근히 자기자랑을 늘어놓을텐데.

명절 때마다 식구들이 모여 한다는 건 

책망 아니면 자기자랑.


엄마에게 유일했던 자기자랑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


더운데 밖에서 일하지 않고

추운데 떨면서 일하지 않는 자식.


그 자식은 평생 앉아서 일한 탓에

허리병과 속병을 안고 산다.


내일은 책을 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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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09 2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ㅜㅜ 몸이 안좋으신거 같은데 잘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뭇잎처럼님의 따뜻한 배려에 이삿짐분들도 기분이 좋았을거 같아요. 그래도 멋진곳으로 이사하신거 축하드려요 ^^

나뭇잎처럼 2021-11-10 11:0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저는 뭐 한 것도 없는데요...;; 무거운 이삿짐 남한테 맡겨놓고 빈손으로 왔다 갔다 하는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나마도 이제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은 동남아시아나 중국분들이 많으시고요. 한국인들도 서구에 가면 힘쓰는 일 하면서 원치 않는 혐오나 무시 같은 거 당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죠? 한강 전망은 평생 모멸을 감수한 값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도 드네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던 하루였어요. 그래서 아팠나봐요..

책읽는나무 2021-11-10 0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는 정말 힘든 일인데 몸 상하지 않게 쉬엄 쉬엄 정리하세요.
좋은 집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모님댁 김장 도움도 탈 나지 않게 잘 도와드리고 오시길요...마음이 무거우시겠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1-10 11:06   좋아요 3 | URL
이모가 손이 커서 처음엔 200포기로 시작하시더니 급기야 작년에는 500포기를 담으셨어요. 온동네 분들이 다 도와주러 오시긴 했지만 덕분에 저도 며칠 앓았거든요. 이번엔 절인 김치 샀다는 핑계로 안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시니 안갈수가 없네요. 가서 기쁨조를 담당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다들 막판엔 눈물바람일 거 같아 묘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웃겨드릴까! ㅜㅜ

다락방 2021-11-10 0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시사인에서 황정은 인터뷰를 보고 이 책을 사야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뭇잎처럼 님의 글로 또 만나게 되네요.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뭇잎처럼 님.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라니, 너무 좋네요. 저는 영화속에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나올 때면 와 언제 저런 아파트에 살아보나, 생각하곤 했거든요. 멋진 아파트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셔요, 나뭇잎처럼 님. 지금 당장은 몸도 마음도 좀 추스르시고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11   좋아요 2 | URL
마자요! 저도 시사인 보고 냉큼 결제했어요. 여기저기 황정은 에세이 나왔다고 광고가 뜨는데 뭐 에세이까지 사봐야 될까 싶었지만 시사인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꿨죠.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같은 걸 키운다는 말에 진짜 살려고 애쓰는구나, 싶었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덕분에 저도 내밀한 이야기 쓸 수 있었습니다. 쓰고 나니까 좀 낫네요. 아직 더 꺼내놓을 게 많지만 아직은 용기가... 운좋게 서울 한 자락 제 집이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세입자일 뿐입니다. 언젠가 작별하게 될 멋진 뷰를 날마다 감사하게 잘 누리려고요. 언제고 인연이 닿으면 이곳에서 다락방님께 직접 내린 커피를 한 잔 대접하고 싶네요. 강건하시길!

그레이스 2021-11-10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하셨군요
앞뒤로 일주일이 비정상이죠
몸 잘 챙기세요
이사하신 곳에서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21   좋아요 1 | URL
마자요. 이사 하기 전에 또 엄청 신경쓰느라 늘 고생이죠. 이번엔 살살하자 다짐했는데 이사 당일 비바람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생활지원센터분들과 실갱이 하느라 진을 뺐네요. 입주민한테는 너무 친절하신데 택배,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낯뜨거울 정도로 대하시는 게 영 불편하더라구요. 들어오는 입주민은 환대해도 나가는 입주민에게는 또한 냉정한 게 현실... 도시에서 자주 이사를 다니다보니 이사 또한 누군가의 고된 애씀에 기대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고 남아요. 결국 더 싼 업체 찾아 경쟁 시킨 꼴이 되었던 것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맑음 2021-11-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이모부님의 올해가 마지막 김장일 것 같다는 말씀에 눈물이 그렁그렁ㅠㅠ
사는게 뭔지............
저는 책 내용보다 북친 분들의 리뷰와 이야기가 더 좋아지는 요즘입니다.
나뭇잎처럼님의 삶이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한 시간을 지나나 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지금이 그러한것 같습니다. 자꾸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지는 걸 보면.....
급하게 제 마음을 전하느라 두서없는 글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님 덕분에 저의 오늘은 따뜻함입니다.
이사 정말 축하드리구요, 타인에 대한 배려에 또 한번 감동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늘 나뭇잎처럼 찬란하실 거에요~!!!

나뭇잎처럼 2021-11-11 10:15   좋아요 1 | URL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귀해지고, 책 읽는 능력이 희귀한 기술이 되는 때 이곳에는 아직도 책을 진심으로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죠. 저 또한 이곳에서 세상 드문 분들을 뵙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책을 읽는 것이 활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기에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새로운 독서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고요. 그래서 혼자 읽기 못지 않게 같이 읽는 것도 독서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늘 우물 밑바닥에서 저멀리 끝에 있는 손바닥만 한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하늘이 넓어졌어요. 이제 제 인생을 제 손으로 써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는 한 계속 그 과거라는 감옥에서 못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황정은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내보았어요. 황정은이 록산 게이에 도움을 받은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꺼내 놓아야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nowing yourself deeply has nothing to do with whatever ideas are floating around in your mind. Knowing yourself is to be rooted in Being, instead of lost in your mind.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이런 저런 자신을 알기 위한 이야기를 듣거나 해석을 찾아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확정하는 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MBTI부터 혈액형, 별자리, 전생 등등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쯤인지 설명하는 것들은 너무 많지만 정작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연 그렇게 안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그렇게 알게 된 나는 평생 변하지 않는 뭔가를 안에 꽁꽁 싸매고 있는 걸까? 수시 때때로 불거져 나오는 나 같지 않은 특성이나, 아니면 파국으로 치닫는 일관된 성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Your sense of who you are determines what you perceive as your needs and what matters to you in life - and whatever matters to you will have the power to upset and disturb you.


What are the things that upset and disturb me?

나는 어떤 일에 분개하는가?


How you react to people and situations, especially when challenges arise, is the best indicator of how deeply you know yourself.

누구가의 말이 아니라 누군가의 행동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Their “faults” or what you perceive as their faults become to you their identity. This means you will see only the ego in them and thus strengthen the ego in yourself. Instead of looking “through” the ego in others, you are looking “at” the ego. Who is looking at the ego? The ego in you.

누군가의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내내 투덜대다가 결국 신경질이 되고, 화가 되고, 언성을 높였다.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는 대상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네가 망친거야.”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애꿎은 주변인들을 끌어들였던 거다. 그 아래에는 그 말이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내가 알면 너를 쪼았겠니? Blaming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과연 뭘까?



You are not the ego, so when you become aware of the ego in you, it does not mean you know who you are - it means you know who you are not. But it is through knowing who you are not that the greatest obstacle to truly knowing yourself is removed.

이건 약간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내가 뭐가 아닌지 아는 게 진짜 나를 아는 데 엄청 중요하다는 건데. 그럼 에고는 뭐냐? 그냥 내 안의 악마? Inner child? What is the core of myself? 대체 내 안에 코어가 있기는 한거냐? 수시 때때로 화에 휩쓸리는 나는 그럼 뭐냐?


You may be so fascinated with yourself that you spend years in psychoanalysis, delve into every aspect of your childhood, uncover secret fears and desires, and find layers upon layers of complexity in the makeup of your personality and character. There is nothing wrong with psychoanalysis or finding out about your past as long as you don’t confuse knowing about yourself with knowing yourself.

나에 대해서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은 다르다.


It is content, not essence. Going beyond ego is stepping out of content. Knowing yourself is being yourself, and being yourself is ceasing to identify with content.

사람들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 갖은 설명을 동원하지만 에고로부터 벗어나는 건 그런 identification에 갇히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내 삶에 채워진 것들이 아니라. 


You cannot understand it through thought, but you can sense it when you let go fo thought, become still and alert, and don’t try to understand or explain. Only then can you be aware of the sacredness of the forest. As soon as you sense that hidden harmony, that sacredness, you realize you are not separate from it, and when you realize that, you become a conscious participant in it. In this way, nature can help you become realigned with the wholeness of life. 


생각하고,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유를 달고, 언어로 규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본질과 멀어지는 경험. 썩은 나뭇잎 사이로 파란 싹이 돋아나고, 죽은 듯 보이는 나뭇가지에서 다시 새순이 돋는 것을 바라보는 건 우리가 온전히 존재하고 감각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금 당장 모니터를 박차고 가을 햇살을 만끽해야 하는데. 나는 또다시 활자 속에서 치유과 게으른 혜안을 얻기 위해 뒤적이는구나. 그래도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활자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니 조금은 가라앉는 듯. 언제 다시 덮칠지는 모르지만.



Thinking isolates a situation or event and calls it good or bad, as if it had a separate existence. Through excessive reliance on thinking, reality becomes fragmented. This fragmentation is an illusion, but it seems very real while you are trapped in it. And yet the universe is an indivisible whole in which all things are interconnected, in which nothing exists in isolation.

이걸 생각으로 깨우치는 건 정녕 불가능할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생각이 아니고 뭔가?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보이는 것들, 그것은 생각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I don’t mind what happens.

It mean not to label it mentally as good or bad, but to let it be.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없는 경지. 죽음까지도.


The decision to make the present moment into your friend is the end of the ego. The ego can never be in alignment with the present moment, which is to say, aligned with life, since its very nature compels it to ignore, resist, or devalue the Now. Time is what the ego lives on. Almost every thought you think is then concerned with past or future, and your sense of self depends on the past for your identity and on the future for its fulfilment. Fear, anxiety, expectation, regret, guilt, anger are the dysfunctions of the time-bound state of consciousness.

끊임없는 생각들의 종적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후회하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 대부분이다. 지금 현재에 머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You aren’t ever fully here because you are always busy trying to get elsewhere.

끊임없이 어딘가를 꿈꾸며.


What is my relationship with the present moment?

나는 현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 What it my relationship with Life?

그게 결국 삶과 맺고 있는 관계.



어느 순간 폭주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습관은 내가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였을 때 닥치는 결과일까. Is that so? Maybe. 이런 말들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흘려보내지 못해서 일까?



You cannot make the egoless state into a future goal and then work toward it. All you get is more dissatisfaction, more inner conflict, because it will always seem that you have not arrived yet, have not “attained” that state yet. When freedom from ego is your goal for the future, you give yourself more time, and more time means more ego.

그래서 오늘부터 우리는 에고없는 상태를 목표 삼아 부지런히 노력할거야, 라고 다짐할 순 없다. 달성해야 하는 목표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노력은 늘 부족하기 마련이다. 



Look carefully to find out if your spiritual search is a disguised form of ego. Even trying to get to get rid of your “self” can be a disguised search for more if the getting rid of your “self” is made into a future goal.

이런 통찰 넘 좋다. 깨달음을 향한 집착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법. 오늘부터 에로고부터 자유, 이런 목표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Time is the horizontal dimension of life, the surface layer of reality. Then there is the vertical dimension of depth, accessible to you only through the portal of the present moment.

그래서 시간을 잊을 때만이 우리가 온전히 현재에 머물 수 있는 순간일까. 00하기 위한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라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 이유. 아무리 그런 책을 읽어도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 


As long as the ego runs your life, there are two ways of being unhappy. Not getting what you want is one. Getting what you want is the other.

헉. 뭐냐. 이 비극적 시나리오는.



그렇다면 시간 또는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Say yes?


The dreamer is consciousness itself - who you are.

To awaken within the dream is our purpose now. When we are awake within the dream, the ego-created earth-drama comes to an end and a more benign and wondrous dream arises. This is the new earth.



A powerful spiritual practice is consciously to allow the diminishment of ego when it happens without attempting to restore it.

이런 게 수련이 될 수 있구나. 모욕을 참아내는 거?



The essence of space is no-thingness, so ti doesn’t “exist” in the normal sense of the word. Only things - forms - exist. Even calling it space can be misleading because by naming it, you make it into an object.

이름 붙이고, 규정하고, 정의내리고, 그러면서 멀어지는 감각들.



When you are aware of space, you are not really aware of anything, except awareness itself - the inner space of consciousness. Through you, the universe is becoming aware of itself!

우주는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우주를 알아채는 것이다. 


When you contemplate the unfathomable depth of space or listen to the silence in the early hours just before sunrise, something within you resonates with it as if in recognition. You then sense the vast depth of space as you own depth, and you know that precious stillness that has no form to be more deeply who you are than any of the things that make up the content of your life.

매순간 자연을 만나야 하는 이유. 이 장이 이 책의 백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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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ergy that was trapped in the pain-body then changes into vibrational frequency and is transmuted into Presence. In this way, the pain-body becomes fuel for consciousness. This is why many of the wisest, most enlightened men and women on our planet once had a heavy pain-body.

고통이 크면 깨달음의 기쁨도 크고나.


Some people are most clearly aware of it when they first meet someone, even before any words are exchanged. A little later, however, words take over the relationship and with words come the roles that most people play. Attention then moves to the realm of mind, and the ability to sense the other person’s energy field becomes greatly diminished. Nevertheless, it is still felt on an unconscious level.

말이 앞서기 전에 온전히 감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Suppressed pain-bodies are extremely toxic, even more so than openly active ones, and that psychic toxicity is absorbed by the children and contributes to the development of their own pain-body.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말자고 다짐해도, 억눌린 부정적인 기운마저 숨길 수 없다. 아이들은 그런 걸 포착하는 데 어른보다 더 감각적이다. 


Someone with a heavy pain-body easily finds reasons for being upset, angry, hurt, sad, or fearful. Relatively insignificant things that someone else would shrug off with a smile or not even notice become the apparent cause of intense unhappiness. They are, of course, not the true cause but only act as a trigger. They bring back to life the old accumulated emotion. The emotion then moves into the head and amplifies and energizes the egoic mind structures.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늘 화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늘 화낼 준비가 되어 있는 아니,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나 나 또한 그 pain-body에 묶여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The more negative emotion there is in a story, the heavier and more impenetrable it becomes. When you are completely trapped in the movement of thought and the accompanying emotion, stepping outside is not possible because you don’t even know that there is an outside. You are trapped in your own movie or dream, trapped in your own hell. To you it is reality and no other reality is possible. And as far as you are concerned, your reaction is the only possible reaction.

끊임없이 자기 피해 스토리를 쓰는 사람에게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도 공통된 상황 이해를 얻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 대화를 통해 꽉 막힌 벽을 부순다는 건 더더군다나. 평생 피해자 코스프레로 모든 화살을 주위를 향해 돌리는 사람을 향해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은 무엇일까?


For example, if a child grows up with parents for whom financial issues are the source of frequent drama and conflict, he or she may absorb the parent’s fear around money and develop a pain-body that is triggered whenever financial issues are involved. Behind the upset or anger lies issues of survival and intense fear.

흐음, 그렇군.


A friend arriving a few minutes late to pick them up at the airport or a spouse coming home late can trigger a major pain-body attack.

비정상적으로 화를 낼 때는 비정상적인 이유가 있기 마련. 



A woman who in childhood was physically abused by her father may find that her pain-body becomes easily activated in any close relationship with a man. Her pain-body may feel a magnetic pull to someone who it senses will give it more of the same pain. The pain is sometimes misinterpreted as falling in love.

인연이 아니라 악연.


When those triggers occur, you will immediately see them for what they are and enter a heightened state of alertness. “What you just said or did triggered my pain-body.” Have an agreement with your partner that whenever either of you says or does something that triggers the other person’s pain-body can no longer renew itself through drama in the relationship and instead of pulling you into unconsciousness, will help you become fully present. 

좌회전 받기 전에 좌회전 깜빡이 켜는 것과 같은 이치?


When the pain-body is activated, know that what you are feeling is the pain-body in you. This knowing is all that is needed to break your identification with it.


Pain-body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고통체’로 번역을 해놓았다. 고통을 느끼는 몸. 고통이 새겨진 몸. 아픈 몸. 우리 모두는 조금씩 아프다. 더 아프고 덜 아프고 차이만 있을 뿐.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통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고통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는 이치. 어디선가 많이 들은 것 같은 내용인데 새로운 경로를 통해 접근하니 의미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보다 가벼운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한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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