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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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사를 하고 나서

오늘 하루 종일 몸이 개운치 않았다.


만성적인 좌골 신경통 때문에

밤새 잠을 뒤척여서인지 하루 종일 몽롱했다.

한의사가 커피는 내 체질에 독약이라 했지만

쓸쓸한 날씨를 핑계로 두 잔이나 마셨더니

끝내 오후에는 잠시 자리에 누울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한강이 보이는 좋은 집에 이사왔는데

기쁨도 잠시,

오른쪽 발목에서 무릎으로 이어지는 기분 나쁜 통증과

왼쪽 엉치서부터 퍼져나가는 불안한 관절 조합은

의식을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렸다.


평생 앉아서 일한 대가일까.

조금만 틈이 나도 앉아서 읽은 탓일까.

앉아서 세상을 보려고 했던 죄일까.


온몸을 떠돌아다니는 통증을 감지하며

잠깐 잠깐씩 앉아 황정은을 읽었다.


황정은이 그런 삶을 살았구나.


황정은의 책을 거진 다 읽었는데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어 그랬는지

그녀가 쓴 자기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아팠다.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구나.

...



어제 이삿짐을 옮기러 온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온 분들이었다.

세 명 중 팀장 격이 그나마 가장 한국말을 잘했고, 

나머지 두 명은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세 명이 온 줄 알고 본사에 전화했더니

한 명이 더 있었다.

그 사람만 한국인.

그는 운전 담당이었던 모양인 듯

신발을 신고 들어와 말없이 화장실만 한 번 쓰고는 사라졌다.


이삿짐 옮기는 날 이른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짐을 옮기면 그나마 비를 맞지 않으련만

입주민 편의를 보호하는 생활지원센터에서는 끝내

지하주차장 to 지하주차장 이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짐을 옮기시는 분들은 짐이 젖지 않게 조심하며 

비를 쫄딱 맞아가며 짐을 날라야 했다.


팀장격인 사내는 운동화가 아닌 슬리퍼를 신은 내 발을 보며

춥지 않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운동화를 갈아신을 요량이었지만 이미 신발이 모두 실려나간 뒤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비를 안 맞으니까 별로 안춥다고 대답했다.


부엌짐을 담당한 중국출신 여성은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셋 중 가장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나는 하마터면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었는지 물을 뻔했다.

간단한 의사소통도 정확성이 떨어지는 걸 알아차린 후에

나는 아주 천천히 일부러 단어 하나씩 끊어서 이야기했다.

말은 어색했지만 미소가 분홍색 스웨터마냥 부드러웠다.

한 번도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부엌이었지만

요리조리 궁리해 가장 손이 잘 닿을 곳에 먼저 있던 짐들의 배열을 최대한 고려해

잡다하고 일관성 없는 살림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이사할 때면 그릇들은 내가 정리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가지런히 놓아준대로 쓰기로 했다.

그녀의 수고로움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차가운 음료수 대신 따뜻한 커피를 내밀자

오전 내내 비바람 추위에 덜덜거리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추워서 그랬던 거다.


무거운 짐 같이 들자는 말도 없이 

작은 체구로 올리고 담고 나르고

힘으로 도와줄 길이 없는 나는

그들의 동선이 중복되지 않게 짐들의 행선지를 정확히 일러주며

연신 나뒹구는 박스테잎을 주워담았다.


하루만 이렇게 분주히 몸을 놀려도 몸이 아픈데

오로지 몸뚱아리 하나에 의지해서 사는 삶에서 고통은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할까.


어릴 적 엄마는 너무 지친 나머지

뜨거운 방바닥에 복숭아뼈가 까맣게 익는지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

쇠뭉치도 아닌데 쇠뭉치처럼 몸을 쓰다가

겨우겨우 찜질방 같은 데서 몸을 풀고 다시 일을 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일하다가 결국 몸에 탈이 나 7년 반을 

침대에 누워있다가 돌아가셨다.


뇌를 다쳐 말도 못하고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너무 속상해 눈물을 흘릴 적에 누군가 그랬다.


평생 일하시다가 그나마 아프셔서 누워 계실 수 있는 거예요.


나는 평생 일하셨으니 이제 호강하며 사실 때 누워계셔서 속상한 거라고 외쳤지만

돌아가시기 전까지 누워계셨던 게 과연 좋았던 걸까 가끔씩 생각해보곤 했다.


눕지 않았으면 계속 일했을 게 뻔하므로.


엄마를 산소에 모시고 돌아온 날,

이모부는 차라리 잘 되었다며 방금 엄마를 태워 묻고 온 남매를 위로했다.

병 구완 하는 남매가 안쓰러워 그랬는지,

답답한 침대에 누워 식물인간처럼 누워지내던 엄마가 불쌍해 그랬는지,

'차라리 잘 됐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워 나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런 이모부가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 선고를 받고 몇 년을 투병하셨는데

일년 내내 고추며 마늘이며 배추와 무를 키워 수백 포기 김장을 담그는 게 

이모와 이모부의 유일한 낙이었다.


올해가 마지막 김장이 될 거 같다는 말에 

절인 김치를 몇 포기 주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도우러 가겠다고 했다.


김장 담그는 날이면 유난히 예민해져서 소리도 버럭버럭 지르고

자기 식구들 서로 챙기느라 우당탕 거리는 이모와 이모부가 

마지막 김장 담글 때는 어떠실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한다.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로 이사갔다는 자랑은 하지 말아야지.

삼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은근히 자기자랑을 늘어놓을텐데.

명절 때마다 식구들이 모여 한다는 건 

책망 아니면 자기자랑.


엄마에게 유일했던 자기자랑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자식.


더운데 밖에서 일하지 않고

추운데 떨면서 일하지 않는 자식.


그 자식은 평생 앉아서 일한 탓에

허리병과 속병을 안고 산다.


내일은 책을 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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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09 23: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사 하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ㅜㅜ 몸이 안좋으신거 같은데 잘 회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나뭇잎처럼님의 따뜻한 배려에 이삿짐분들도 기분이 좋았을거 같아요. 그래도 멋진곳으로 이사하신거 축하드려요 ^^

나뭇잎처럼 2021-11-10 11:03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저는 뭐 한 것도 없는데요...;; 무거운 이삿짐 남한테 맡겨놓고 빈손으로 왔다 갔다 하는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그나마도 이제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은 동남아시아나 중국분들이 많으시고요. 한국인들도 서구에 가면 힘쓰는 일 하면서 원치 않는 혐오나 무시 같은 거 당하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죠? 한강 전망은 평생 모멸을 감수한 값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도 드네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던 하루였어요. 그래서 아팠나봐요..

책읽는나무 2021-11-10 06: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는 정말 힘든 일인데 몸 상하지 않게 쉬엄 쉬엄 정리하세요.
좋은 집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모님댁 김장 도움도 탈 나지 않게 잘 도와드리고 오시길요...마음이 무거우시겠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1-10 11:06   좋아요 3 | URL
이모가 손이 커서 처음엔 200포기로 시작하시더니 급기야 작년에는 500포기를 담으셨어요. 온동네 분들이 다 도와주러 오시긴 했지만 덕분에 저도 며칠 앓았거든요. 이번엔 절인 김치 샀다는 핑계로 안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시니 안갈수가 없네요. 가서 기쁨조를 담당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다들 막판엔 눈물바람일 거 같아 묘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웃겨드릴까! ㅜㅜ

다락방 2021-11-10 0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며칠전 시사인에서 황정은 인터뷰를 보고 이 책을 사야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뭇잎처럼 님의 글로 또 만나게 되네요.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뭇잎처럼 님. 한강이 보이는 멋진 아파트라니, 너무 좋네요. 저는 영화속에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나올 때면 와 언제 저런 아파트에 살아보나, 생각하곤 했거든요. 멋진 아파트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셔요, 나뭇잎처럼 님. 지금 당장은 몸도 마음도 좀 추스르시고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11   좋아요 2 | URL
마자요! 저도 시사인 보고 냉큼 결제했어요. 여기저기 황정은 에세이 나왔다고 광고가 뜨는데 뭐 에세이까지 사봐야 될까 싶었지만 시사인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꿨죠.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같은 걸 키운다는 말에 진짜 살려고 애쓰는구나, 싶었어요. 얼마나 아팠으면. 덕분에 저도 내밀한 이야기 쓸 수 있었습니다. 쓰고 나니까 좀 낫네요. 아직 더 꺼내놓을 게 많지만 아직은 용기가... 운좋게 서울 한 자락 제 집이 아닌 곳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세입자일 뿐입니다. 언젠가 작별하게 될 멋진 뷰를 날마다 감사하게 잘 누리려고요. 언제고 인연이 닿으면 이곳에서 다락방님께 직접 내린 커피를 한 잔 대접하고 싶네요. 강건하시길!

그레이스 2021-11-10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사하셨군요
앞뒤로 일주일이 비정상이죠
몸 잘 챙기세요
이사하신 곳에서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 2021-11-10 11:21   좋아요 1 | URL
마자요. 이사 하기 전에 또 엄청 신경쓰느라 늘 고생이죠. 이번엔 살살하자 다짐했는데 이사 당일 비바람이 몰아닥치는 바람에 생활지원센터분들과 실갱이 하느라 진을 뺐네요. 입주민한테는 너무 친절하신데 택배,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에게는 정말 낯뜨거울 정도로 대하시는 게 영 불편하더라구요. 들어오는 입주민은 환대해도 나가는 입주민에게는 또한 냉정한 게 현실... 도시에서 자주 이사를 다니다보니 이사 또한 누군가의 고된 애씀에 기대서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고 남아요. 결국 더 싼 업체 찾아 경쟁 시킨 꼴이 되었던 것도.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도 맑음 2021-11-10 1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이모부님의 올해가 마지막 김장일 것 같다는 말씀에 눈물이 그렁그렁ㅠㅠ
사는게 뭔지............
저는 책 내용보다 북친 분들의 리뷰와 이야기가 더 좋아지는 요즘입니다.
나뭇잎처럼님의 삶이 지금은 그 어느때 보다 따뜻한 시간을 지나나 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 또한 지금이 그러한것 같습니다. 자꾸 제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지는 걸 보면.....
급하게 제 마음을 전하느라 두서없는 글 이해해주시길 바래요.
나뭇잎처럼님 덕분에 저의 오늘은 따뜻함입니다.
이사 정말 축하드리구요, 타인에 대한 배려에 또 한번 감동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늘 나뭇잎처럼 찬란하실 거에요~!!!

나뭇잎처럼 2021-11-11 10:15   좋아요 1 | URL
책 읽는 사람들이 점점 귀해지고, 책 읽는 능력이 희귀한 기술이 되는 때 이곳에는 아직도 책을 진심으로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시죠. 저 또한 이곳에서 세상 드문 분들을 뵙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책을 읽는 것이 활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기에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새로운 독서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고요. 그래서 혼자 읽기 못지 않게 같이 읽는 것도 독서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늘 우물 밑바닥에서 저멀리 끝에 있는 손바닥만 한 하늘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하늘이 넓어졌어요. 이제 제 인생을 제 손으로 써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는 한 계속 그 과거라는 감옥에서 못벗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황정은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내보았어요. 황정은이 록산 게이에 도움을 받은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꺼내 놓아야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