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처와 내러티브를 선사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작품의 필력만을 보면 여류작가(물론 여류 작가들을 싸잡아 폄해하거나 도외시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큼 시원, 시원스럽게(반면에 세세한 상태묘사나 심리묘사에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수도 있다)작품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눈에 확들어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타이포 그래픽 형식으로 신선한 반향을 선사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저자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가 남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만큼이나 유니크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생각, 역시 부창부수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아니 다른 한편으론 남편인 조너선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더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부부둘다 형식적인 쇼크를 바탕으로 작품 스트럭쳐를 재구성하였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조너선의 작품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 오히려 니콜의 작품은 세밀화 보다는 뭔가 큰 풍경화를 보는듯한 뉘양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는 십수개의 크고 작은 서랍이 내장되어 있는 마호가니풍의 책상을 두고 전혀 연결성 없는 것 같지만 미세한 아니 강렬한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들의 비밀과 삶을 투영해놓고 있는 작품으로 얼핏 보기엔 서로 전혀 연관 없는 액자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을 읽어 갈수록 옴니버스식의 이야기처럼 각자의 이야기들의 큰틀의 내러티브속에서 그 역활을 다하고 있고 상호 끊을수 없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다소 난해하다면 난해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게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이 구조적인 측면에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내러티브의 완성도나 문학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한 면들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스트럭쳐와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좋아하는 독자나 문학적인 면을 강조하는 독자 양측에게 환영받을 만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전혀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네가지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인 책상과 나디아, 레아, 바스키라는 인물의 매게로 연결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전혀 시간과 공간의 이격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동일인물이 동일시간과 동일공간속에서 모노드라마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다음 이야기로 접어들면 다시 앞의 이야기를 재생하지 않으면 왠지 이번 이야기를 읽어도 별 효과가 없을것 같다는 학습효과도 부여하고 있는 패러독스 같은 작품이다. (분명히 시간과 장소적 배경이 상이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뭔가 명확히 확정지을 수 없는 연결고리에 의해 동일 선상의 내러티브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하는 매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라는 작품 제목 상징성이 강하게 각인된 상태에서 출발하여 상징성이 해체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전개 자체가 바로 패러독스를 증폭시키는 구조적 역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대저택을 방문해서 문을 열고 집안의 상이한 분위기의 여러 방들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다시 대문을 닫고 나왔을때 느끼게 되는 묘한 감정과도 같다고 해야 겠다. 분명 다른 분위기와 컨셉의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집안 구조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저택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들어갈때 막연히 낯설은 두려움과 기대감들이 그리고 이방 저방을 둘러볼때 더욱 증폭되지만 막상 저택을 다 둘러보고 나왔을때 막연한 안도감을 바뀌듯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소설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남편인 조너선의 작품만큼이나 반향이 클 것으로 기대된다. 구조적인 독특함과 내면의 심리묘사나 문체의 선정등에서 신선함과 더불어 심도 깊은 철학적 요소들이 독자들을 자극하고 있고, 약간의 추리적인 부가서비스까지 적절하게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까지 배가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서 아무리 눈씯고 찾아봐도 집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나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왜 작품제목을 그레이트 하우스라 명명했을까라고 의야해 하는 독자들(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모르겠지만)이 있을만 하다.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의 의도는 범유대인적인 관점에서 부다페스트로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전이된 책상이 마치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 자신들 자체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유대인풀(pool)이라는 견지에서 십수개의 서랍이 각각의 유대인들 해당된다면 책상은 유대민족을 그리고 책상 소유권의 변경은 디아스포라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억측마저 들게 한다. 이는 작품전반에 들어나는 강한 유대  뉘양스적인 요소들로 인해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의무를 부여 받았고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니콜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의무에 충실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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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레드 라인
제임스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홍희범 감수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고, <고지전>에서 신대위는 "살아 남아서... 모두 집에 가자"라는 의미 있는 멘트를 날렸다. 결국 이말은 고대전쟁이나 현대전에서나 똑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말해주고 있다. 인류가 식량의 재생산 방법을 터득하면서 이와 동시에 전쟁이라는 신개념이 생겨났고 인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단한시도 멈춤없는 전쟁의 수레바퀴속에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규모나 잔혹성을 차치하더라도 인류와 전쟁은 다른 종이 보기엔 정말 잘맞아 떨어지는 앙상블이라 할 정도로 우리는 전쟁을 달고 살았고 전쟁을 통해서 성장해 왔다. 그러다 보니 전쟁불감증 환자들 처럼 여차하면 전쟁, 전쟁하는 끔직한 발상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고 이를 듣는 이들 또한 거의 무감각한 위트정도로 밖에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최고 유일의 전쟁 진행중인 국가에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의 사람들에게도 전쟁는 그저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처럼 무감각하고 때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전쟁이지만 이 테마가 영화나 소설로 일반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면 이상하리만큼 흥행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는 이유 또한 아마도 우리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일련의 폭력성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일례는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광폭한 전투신이나 피의 향연이 결들어지면 그야말로 롱런을 하게 되는 대박작품으로 남게 되니 더 이상 말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까지 전쟁소설의 일련의 성공방정식은 제2차세계전을 주 배경으로 특히 유럽지역에서 벌어지는 나찌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략전술 과정 그리고 약간의 분위기 전환을 위한 에로장면들과 결국 권선징악이라는 대단원의 결말을 거두는 라스트신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면에서 전쟁소설은 어찌보면 식상하면서도 이러한 작품의 스트럭쳐만 제대로 지켜 준다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반타작을 하는 셈이었다. 

제임스 존스의 <신 레드 라인>은 이러한 일련의 정형적인 전쟁소설의 틀에서 벗어난 소설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제외하곤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전쟁이란 유럽에서 마지막 구원투수의 요청으로 참전했던 2차세계대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느끼는 미국인들에게 정 반대편의 또 다른 전쟁을 다루면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물론 이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많은 부분들을 공감하게 되었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무대를 미국인들에게도 생소한 남태평양의 작은 섬 과달카날으로 선정하고 전투의 대상을 유럽의 독일이 아닌 동양의 일본으로 설정함으로써 기존 전투소설의 성공보장 카드를 슬그머니 포기해 버린다. 거기에다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나 에로신하나 없이 그야말로 시커먼 사내들의 이야기(문제는 동성애적인 장면을 첨부함으로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일지감치 손을 놓아라는 암시도 던져주고 있다)로만 가득 채우는 우를 범하므로써 알량한 기대감 마저도 날려 버린다. 또 이 작품에는 그 흔하디 흔한 작품의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주인공 마져 없애버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래파토리가 흘러감에 따라 과연 누가 살아남을지(뭐 이게 공식이라면 공식이겠지만)에 대한 어슬픈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이처럼 작품의 구조나 배경의 선정 그리고 내러티브의 진행등에 있어 기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보는 도식화된 형태를 찾기 힘들다. 또 그렇다고 이 작품이 무슨 반전 평화 등의 일련의 고상한 담론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지도 않고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전쟁소설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찬사는 과연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작품 전반은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시작하여 차분하게 내러티브를 이끌어 가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가 본 궤도(물론 수송선에 실려 과달카날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군인들의 심리묘사나 행동등에 있어 일부 엿보이고 있지만)에 오르는 시점에서부터 마치 영화의 한 컷 한 컷 처럼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심리묘사나 그들의 둘러싸고 있는 상황 그리고 행동범위 내지는 절실해 보이는 작은 절규에 이르기까지 각 개인들의 입장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는 1인칭시점 같은 기법을 혼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과달카날섬 전투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장치적 기법은 전쟁 영화의 단면을 보는 듯한 스펙타클을한 긴장감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인해 현장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고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섯부른 결과에 대한 어렴풋한 예측이나 기대 혹은 바램등의 모종의 종결샷을 머리속 한편에 그리면서도 지금 당장 연출되고 있는 장면들에 대한 각각의 장면들을 실사로 처리하여 한결 내러티브속으로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영화를 지배하는 감독이나 작가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주어진 역활만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촬영조감독의 단편적인 컷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엇박자 같은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유니크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또한 이러한 기법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자 동시에 이방인 듯한 묘한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 내면서 전쟁에 대해서 알게모르게 어렴풋한 담론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이 <신 레드 라인>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각 개인의 시점에서 전쟁과 자신의 미래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시각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이러한 각 개인의 관점들이 한데 뭉쳐 또 다른 거시적인 전쟁을 말하는 혼용적인 시점 구조는 마치 전쟁에 대한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상념들이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있지만 결국 내러티브 전반을 관통하고 있고 작가가 보여주는 상념들은 바로 이런 개개인 상념들의 합일 수 밖에 없다는 극히 평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소 번거스럽더라도 등장인물들 하나 하나가 생각하고 있는 상념들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위들과 욕설담긴 말들을 그냥 흘려버릴 수 없게 한다. 이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굳이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필요성이 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들 개개인의 행동과 생각의 합은 결국 하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전쟁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이다라는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고 이를 알리고자 하는 그런 고상한 종류의 작품은 결코 아니지만 <신 레드 라인>은 각 개인의 극히 개인적인 심리적 묘사를 사실적으로 이끌어내므로서 오히려 거시적인 담론들을 무색하게 해 버린다. 생사가 코앞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본국에 두고온 아내의 외도만을 생각하는 벨, 어떻게 하든 진정한 카우보이임을 증명하고 싶은 돌, 전리품 수집에 혈안인 데일, 진급이외는 관심없는 밴드,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후송되고 싶어 하는 파이프.... 이런 인간 군상들의 솔직 담백한 묘사야 말로 진정으로 전쟁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 내 거짓말을 믿어 주면 네가 하는 거짓말도 믿어 줄께"라는 말로 작가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단순화 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 간단한 문장처럼 전쟁에 대한 의미는 단순화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엔 거시적이고 고상하고 약간은 애국적인 그런 가시적인 담론을 담고 있길 거부한다. 그저 전쟁은 각 개인에게 있어서는 거짓말의 향연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 거짓말은 상호 묵인하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각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전쟁소설 특유의 담론을 그리는 작품은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징집되어 투입된 전선에서 느닷없이 생사의 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무수한 젊은이들의 진솔하고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서 전쟁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상당한 여운을 남기면서 오래토록 전쟁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상념을 지울수 없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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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알제리계 프랑스인 자크 데리다는 서양 현대 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물론 현대철학에 무관심하거나(솔직히 그 철학적 담론들이 담아내고 있는 정의가 어렵기 때문에 자연 무관심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한다) 철학하면 인상부터 쓰게 되는 독자들에게 자크 데리다는 의외의 인물중에 하나이다. 특히 그가 주창했던 해체주의라는 담론을 쉽게 접할 수 도 없었고 실상 해체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 또한 부족한 입장에서 자크 데리다는 그저 머나먼 이방인중에 하나로 남을 뿐일 것이다. 

철학(서양철학) 특히 현대철학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들 정도로 난해한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현대철학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이들 현대철학자들의 논거는 꿈길속을 건는듯한 모호함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담론들을 깊이 들어갈 냉철한 가슴과 머리도 부족하지만 대충 서브해서 접근하더라도 매한가지임을 통탄할 수 밖에 없는 한계점으로인해 현대철학은 일반독자들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면에서 이번 <자크 데리다 평전>은 그나마 멀어져 가는 끈을 놓지 않게금 새로운 방식으로 현대철학을 일반 독자들의 시선에 들이대고 있다. 

대게 평전이라는 장르는 특정 인물의 생애를 연대기별로 서술하여 인물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그 인물의 특정한 주요한 사상을 등재하는 것이 보편적인 형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가의 평전에선 그의 정치사상을 예술가의 평전에선 예술작품과 그 감각을 확이나게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데리다 평전은 현대철학자의 평전으로 그의 내면적인 상태와 더불어 데리다가 주창했던 철학적 담론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등 기라성같은 철학자들의 사유와 더불어 데리다의 사유를 비교해 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로 다가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데리다의 사유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을 시대별로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와 비교할 수 있어 자크 데리다 개인의 사유를 뛰어 넘어 서양현대철학의 틀을 정리할 수 있는 개론서적인 충실함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왠만한 현대철학 기본서를 능가할 정도의 다양한 사유들을 이렇게 한권의 책에서 만나기란 그다지 쉽지 않으리다 여겨 진다. 

하지만 평전임에도 불구하고 왠만한 현대철학 기본서를 능가할 정도의 사유로 점철된 이전 책은 오히려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일반독자들에겐 여전히 어럽게 다가올 공산이 크다. 루소의 애인 바랑부인과 관련되어 시작된 대리보충(연기와 차이) 논리와 이런 논리를 보이는 서구적 사유가 자신의 존립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는 작업이라서 점에서 "해체"라 불리고 이 해체는 또한 서구적 사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거부된다등의 핵심논거를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솔직히 많은 시간을 들여 읽어봤지만 그 모호성과 난해성앞에 버텨낼 재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의 평전답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지만(그리고 자크 데리다의 사유가 범인들의 사고틀로는 범접하기 힘들지만) 너무 철학적이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는 점이 강하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철학 특히 현대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 그리고 전공자들에겐 다시 없는 반가운 저작으로 보여진다. 또한 일반 독자들에게도 비록 책읽기의 고통을 감내해야 겠지만 자크 데리다라는 인물과 더불어 서양현대철학의 맥을 한번 잡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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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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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날 갑자기 난데없이 "흑묘백묘론"이라는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한 회색분자적인 뉘양스를 풍기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덩샤오핑의 연설에서 시작되어 또 다시 어느날 갑자기 난데없이 터져버린 미국발 경제위기는 세상사람들을 어리둥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지난 30년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와 굴곡의 시대라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화무쌍한 시간대를 보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난 30년전만 하더라도 세계는 어느정도 예측가능한 범주내에서 미래를 예측하며 나름의 대응방식을 고안해 앞으로 달려갔지만 30년이라는 길지 않는 시기를 거치면서 세계는 이제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불확정의 시대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지금의 시대를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니 불안의 시대니등으로 명시하고 있는 이유도 다름아닌 예측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번 <불안의 시대>는 바로 예측하기 힘든 시대의 정점에서 선 우리에게 지난 30년의 변화를 통해서 향후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면서 반면교사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담론을 정리해 보는 기회로 다가오게 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그동안 30년간 격동의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확인한 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지난 세월을 되새김질 해 볼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사회/경제/정치 전반을 다루면서 짦은 시기이지만 심도 깊게 접근하여 한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전체적인 정량적인 개념에서 지난 30년이라는 수량적인 의미는 미비하게 다가오지만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지난 30년만큼이나 세계사를 뒤흔든 시기도 없음을 저자의 논리에 따라가보면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저널리스트의 시각에서 바라본 지난 세월에 대한 접근방식(주요 사건과 주요 인물들의 등장과 그 내막을 인터뷰등의 르포형식을 통해서 학문적으로 심도깊게 고찰함으로써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스토리텔링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는 점등)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오게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저자의 시각은 극히 서구중심적인 시각에서 출발했다는 단점 또한 보이지만 나름의 명확한 시대구분과 그에 합당한 일련의 사건들을 파일링했다는 점에서 일견 수긍이 가는 점이 많다는 의미에서 각 시대구분별 결정 요소를 음미해 보는데 무리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양차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을 양대축으로 진행된 냉전시대가 소련의 붕괴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세계는 자유무역, 세계화, 민주주의의 전파라는 3대 전략의 장으로 전환되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자리잡고 있었고 사실상 다른 대안 또한 존재하질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단극체제에 대한 믿음은 그 중심인 미국에서부터 허물어 지면서 지금은 다양한 팩트가 상존하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축', "구심점"을 중심으로 시대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어쩌면 극히 서구적인 발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현상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구심점을 상실한 지금의 시대가 마치 선장을 잃고 망망대해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 처럼 불안의 시대의 근원적인 요소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선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의 등장과 성장에 대한 시각등에서는 동의하기 힘든 점들도 분명 상당한 부분 존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서구중심적인 시각이 존재하고 그에 맞게 제단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지만 지난 30년을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향후 논쟁의 요소에 대한 고찰에 대해서 그 심각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안의 시대>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와 더불어 또 다른 희망적인 요소를 동시에 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잡고 있다. 세계화와 자유무역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대는 앞으로도 그 엔진의 힘이 가속될 것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서 그동안 제로섬게임에 주력한 세계가 어떻게 포지트브섬게임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공통적이고 합의적인 접근이 시도되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는 살얼음판을 걷게 되는 형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이다. 지난 30년이 인류사에 있어 비록 짧았지만 가장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면 향후 30년는 아마도 더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접근은 그동안의 사태에서 보여주었듯이 일개인이나 일국가만의 대처로는 의미가 없게 될 것이고 전세계적인 합의만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시해 줄 거이라는 점을 <불안의 시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점에서 여러모로 많은 화두를 던져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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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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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가진 기존 관념을 타파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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