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레이트 하우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처와 내러티브를 선사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작품의 필력만을 보면 여류작가(물론 여류 작가들을 싸잡아 폄해하거나 도외시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 작품으로 믿어지지 않을 큼 시원, 시원스럽게(반면에 세세한 상태묘사나 심리묘사에선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수도 있다)작품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눈에 확들어오는 인물이 있다. 바로 타이포 그래픽 형식으로 신선한 반향을 선사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저자인 조너선 샤프란 포어가 남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만큼이나 유니크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라는 생각, 역시 부창부수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아니 다른 한편으론 남편인 조너선보다 형식적인 면에서 더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부부둘다 형식적인 쇼크를 바탕으로 작품 스트럭쳐를 재구성하였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조너선의 작품은 세밀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 오히려 니콜의 작품은 세밀화 보다는 뭔가 큰 풍경화를 보는듯한 뉘양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는 십수개의 크고 작은 서랍이 내장되어 있는 마호가니풍의 책상을 두고 전혀 연결성 없는 것 같지만 미세한 아니 강렬한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들의 비밀과 삶을 투영해놓고 있는 작품으로 얼핏 보기엔 서로 전혀 연관 없는 액자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을 읽어 갈수록 옴니버스식의 이야기처럼 각자의 이야기들의 큰틀의 내러티브속에서 그 역활을 다하고 있고 상호 끊을수 없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다소 난해하다면 난해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대게 이러한 형식의 작품들이 구조적인 측면에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내러티브의 완성도나 문학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한 면들이 많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스트럭쳐와 더불어 질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유니크한 스트럭쳐를 좋아하는 독자나 문학적인 면을 강조하는 독자 양측에게 환영받을 만한 작품으로 보여진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도 전혀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네가지 이야기는 가장 보편적인 책상과 나디아, 레아, 바스키라는 인물의 매게로 연결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전혀 시간과 공간의 이격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동일인물이 동일시간과 동일공간속에서 모노드라마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다음 이야기로 접어들면 다시 앞의 이야기를 재생하지 않으면 왠지 이번 이야기를 읽어도 별 효과가 없을것 같다는 학습효과도 부여하고 있는 패러독스 같은 작품이다. (분명히 시간과 장소적 배경이 상이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뭔가 명확히 확정지을 수 없는 연결고리에 의해 동일 선상의 내러티브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하는 매력이 존재하고 있다) 그레이트 하우스라는 작품 제목 상징성이 강하게 각인된 상태에서 출발하여 상징성이 해체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전개 자체가 바로 패러독스를 증폭시키는 구조적 역활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대저택을 방문해서 문을 열고 집안의 상이한 분위기의 여러 방들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다시 대문을 닫고 나왔을때 느끼게 되는 묘한 감정과도 같다고 해야 겠다. 분명 다른 분위기와 컨셉의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집안 구조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저택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들어갈때 막연히 낯설은 두려움과 기대감들이 그리고 이방 저방을 둘러볼때 더욱 증폭되지만 막상 저택을 다 둘러보고 나왔을때 막연한 안도감을 바뀌듯이 말이다.
전반적으로 소설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남편인 조너선의 작품만큼이나 반향이 클 것으로 기대된다. 구조적인 독특함과 내면의 심리묘사나 문체의 선정등에서 신선함과 더불어 심도 깊은 철학적 요소들이 독자들을 자극하고 있고, 약간의 추리적인 부가서비스까지 적절하게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까지 배가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서 아무리 눈씯고 찾아봐도 집에 대한 특별한 감흥이나 별다른 사건이 없는데 왜 작품제목을 그레이트 하우스라 명명했을까라고 의야해 하는 독자들(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모르겠지만)이 있을만 하다.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작가의 의도는 범유대인적인 관점에서 부다페스트로부터 뉴욕에 이르기까지 전이된 책상이 마치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 자신들 자체를 형상화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유대인풀(pool)이라는 견지에서 십수개의 서랍이 각각의 유대인들 해당된다면 책상은 유대민족을 그리고 책상 소유권의 변경은 디아스포라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억측마저 들게 한다. 이는 작품전반에 들어나는 강한 유대 뉘양스적인 요소들로 인해 더욱 그런 느낌을 지울수 없게 한다.
작가는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의무를 부여 받았고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니콜의 이번 작품은 이러한 의무에 충실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