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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화비평이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4
이택광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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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라 함은 고차원적으로 인류의 지식,신념,행위의 총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쉽게 굳이 정의를 내려보자면 한 민족이나 사회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지칭하더라도 크게 무리를 없을 것이다. 그럼 조금 평이한 수준의 정의개념을 들추어 보면 한 사회의 전반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그건 한 사회구성체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열대는 거의 모든 것의 총량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에게 정치, 철학, 사회, 경제, 인물등 그 사회 구성원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를 망라할 것이다. 단지 지엽적으로 문화라는 개념과는 사뭇 다른 거시적인 범위의 삶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개념이 전제된 상태에서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라는 책을 읽게 될 경우 지엽적인 문화개념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좀더 효과적으로 저자의 사유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삶 즉 문화에 대해서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비평을 펼쳐나간다. 물론 어디까지나 저자의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사유이기 때문에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이와 정반대로 납득하기 힘들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표출할 수 있는 사유들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독자들 개인적인 프리즘의 위치가 제각각이고 사유의 표출 방식이 제각각 상황에서 저자의 사유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단지 이러한 사유들을 독자 자신의 사유와 한번쯤 비교해 보고 자신의 사유가 어디쯤에 그리고 과연 올바르게 사물이나 사건을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체크해 본다는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문화비평이다>는 상당한 읽을거리와 더불어 많은 도움(인문학적 소양의 진전등)을 가져 올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상고하더라도 로마제국만큼 최대의 강역과 세월을 영위한 제국은 없었다. 이는 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다양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로마제국은 인종,국적,민족,문화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획일화 내지는 통일화 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던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구성원들 각자의 다양성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대제국이라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존속할 가치가 없고 존속하더라도 그 명이 짧을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지켜봐았다. 이런점을 상고해서 우리는 <이것이 문화비평이다>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사유 역시 또 하나의 다양성의 표출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십수년간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여졌던 사건,사고들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져 있는 문화와 그에 따른 비평들 전반적으로 지나온 시절을 리뷰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러한 사건과 그에 따른 사회 각층의 반응이 제각각일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정답을 이 책을 통해서 찾고자 하면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은 저마다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사유는 같을 수 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사유가 옳고 어느 한쪽의 사유가 틀렸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보다는 다양성에 근거한 포용적인 사고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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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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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평해야 한다"라는 말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의 기록이다. 아니 단지 문자상으로 전하는 기록이 아니라 그 시대를 말해주는 화석같은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현대를 살아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금석같은 역사가 잘못 서술되어 있었고 아니 잘못 해석되어 전해내려오고 어느 한편의 이익에 부합되어 왜곡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는 아주 간단명료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이부분에 대한 대답 역시 모호한 상태이다 적어도 한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겐... 

중국의 역사를 두고 우리는 춘추필법에 의한 자기합리화식의 역사라고 촌평을 하고 일본의 역사왜곡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는 자국사인 한국사에 대한 깨끗함이 깔려 있음을 넌즈시 내포하고 있는 표현임과 동시에 역사기록 만큼은 제대로 하는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근데 과연 우리 한국사는 왜곡이나 춘추필법식의 역사와 정말 무관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솔직히 1980년대 문교부검증교과서로 국사를 공부한 나(이후의 국사교사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지지만)는 선뜻 '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그만큼 그동안 공교육에서 배웠던 역사와 실상의 역사는 많은 격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흥미롭기도 한 것이고 새롭게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들이 매번 한국사 바로알기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이덕일선생의 저작들을 접하면서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전작이 김종서에 대한 평가에서도 역사 행간에 감추어져있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듯이 이번 백호 윤휴에 대한 저작인 <윤휴와 침묵의 제국>역시 사초를 기초로 하여 면밀한 분석과 애리한 판단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인식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고 있다. 

사실 백호 윤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그다지 없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당쟁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숙종조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되고 청남의 영수정도로 당쟁사에 집중된 사안과 관련되어 있는것이 일반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윤휴는 일반독자들에게 생소하다면 생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노론(서인)중심의 사관으로 기술된 조선후기 기록물들에 의하면 윤휴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어 사사된 공공의 적으로 남아 있기에 더욱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부분들이 왠지 모르게 윤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 내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우암을 당수로 하는 서인들에게 심지어 같은 남인(탁남계열)들에게 사문난적에 상종하지 못한 인물로 평가되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연히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한번쯤은 윤휴에 대해서 올바르게 접근해보고 싶은 유혹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번 역사평설을 통해서 윤휴에 대한 그동안의 역사적 평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동안 당쟁사라는 접근방식을 탈피해서 인조반정에서 시작되어 양대호란을 걸치면서 진행되었던 조선시대 후기 전반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까지 겸하고 있어 윤휴 개인뿐 아니라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의 변화까지도 다루고 있는 저작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동안 인지되지 못했던 감추어진 혹은 왜곡되어진 한국사의 진실을 파헤져 나가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그동안 교육받아 알고 있었고 그러리라고 생각되어진 부분들이 한쪽의 시각만으로 바라본 역사였다는 점에서 이번 저작 역시 많은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된 계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점과 전작이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도 조모조목 반박했던 북벌과 서인들의 실체등을 통해서 윤휴와 당시 시대상을 재조명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해야겠다. 

이미 왜와의 7년전쟁과 양대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그야말로 풍비박산난 상태로 신분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더불어 나라 존속이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나마 광해군조의 실리외교가 엉뚱한 명분으로 짓밟히면서 조선은 세계정세(동북아정세)와 역행하게 되고 국왕이 삼배구고두라는 오점을 남기면서 군주국가와 사뭇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형국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는 죽은자식 불알잡기하듯 존명이라는 명분에만 매달리면서 민생은 파탄났던 것이다. 오히려 패망하지 않은것이 신기할 정도로 국가 정체성 자체를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지패법과 호포법, 오가작통법, 서얼허통만이 북벌을 가능케함과 동시에 민생을 추스리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백호 윤휴의 사상은 어찌보면 당연한 주장이지만 비뚤어진 주자학 계승자들의 눈엔 그야말로 사문난적이나 공공의 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윤휴라는 이름은 시대의 금기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바로 잡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의 역사인 한국사부터 바로 잡지 못한다면 이또한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동안 왜곡된 혹은 한쪽의 시각만으로 평가된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내실을 다지고 외부의 주장에 올바른 반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책은 독자들로 다시한번 역사를 어떻게 관조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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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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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 아랍 아니 이슬람문학을 귀동냥하고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들에게 이번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획득한 시아파 이슬람의 본산이라 할 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여기서 호기심이란 그동안 무슬림세계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기대감이란 파묵의 작품이 터키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계열의 좀 릴렉스한 문화사상적 소산이라면 만다니푸르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의 작품배경이란 점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가장 노른잔 땅위에 테헤란로가 버티고 있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존재하고 있듯이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극히 단순한 측면에서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햇살 가득한 테헤란의 어느 봄날 차도르를 쓴 여학생이 대학 정문앞에서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피켓팅 시위로 시작되는 소설은 왠지 그 제목에서 말하는 사랑이야기보다는 정치색이 상당히 감미될 것 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희와 기영이라는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이러한 이름의 상징성이 픽션과 팩트(마치 있을법한 사실) 사이를 교묘하게 줄다리기 하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작품과 이와 병행하여 사랑이야기에 대한 부연설명과 검열관 페드로비치의 시각으로 바라본 올바른 작품의 타당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때론 자포자기식으로 변명하는 작가의 또다른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면이라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작가 본인을 포함한 인물들이 마치 자기만의 의식을 가지고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는 듯 보여지는 솔솔한 재미를 더해 준다. 마치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이 무게 중심이 제대로 서있지 못한다면 어디로 휘둘리지 모르는 부비트랙을 요소요소 배치해놓고 마치 그 덫에 걸리기만 기다리는 고약한 포식자와 같은 시선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런점들이 파묵의 사랑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오묘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심리상태의 섬세한 묘사(특히 사라에 대한 다라의 상상력) 압권으로 다가온다. 로멘스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면 의당 한두번의 야릇한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대게 그동안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실상 포로노그래픽 수준의 강도가 아니면 그저 내러티브의 연속상 불가피하게 삽입되는 장면정도로 밖에 인지될 수 없을 만큼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게 실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신비의 베일을 한거풀씩 벋겨 나가는 묘사들(소설시작전에 벌써 사전적으로 이란과 이슬람이라는 다소 폐쇄적인 정보가 주입된 상태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묘사들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감정이입에 몰입하게 된다. 가히 패티시즘의 화려한 승화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작가의 심리묘사는 말줄임표를 통해서 다소 앞서가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하고 있다. 또한 이란 민중들의 숨김없는 목소릴 대변하는 딱따구리의 소리를 통해서 기저에 깔려있는 이란 사회성을 들추어 내고 있다. 작가는 극히 사적인 영역의 로멘스와 공적인 영역의 사회성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이 두 요소가 별개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와 검열관의 날카로운 신경전 그리고 시대상을 풍자한 유머러스한 자조와 조롱은 얼마전 무대에 올린 <웃음의 대학>과 비슷한 플롯을 엿 볼 수 잇게 한다. 웃음의 대학이 문학작품에 대한 검열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작품은 이란이 처해 있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자조적인 목소리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국가를 대변하는 페트로비치와 이에 항거하지만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다라 그리고 또 다른 이면에 정치와 무관할 수 밖에 없지만 가장 소외받고 있는 여성상을 대변하는 사라를 통해서 이란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차도르를 입고 있지만 차도르를 벗는 순간 로멘스에서 한단계 격상된 사회소설로 둔갑해 버린다. 이러한 플롯은 소설속에 두가지 나레이션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전체 내러티브에 반영되어 있는 유니크한 구조와 맞물리면서 색다른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책들, 영화들, 그리고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서 차도르속에 숨겨진 욕망들인 자신의 조국 이란의 모든것을 벋겨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이러한 사전적 인센티브(이란작가의 작품, 이슬람문화 배경등)와 더불어 전문 리뷰지의 "페르시아 문학과 쿤데라,칼비노,요사의 감수성을 지닌 현대 이란의 대표작가의 작품으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라는 미사여구는 실상 페르시아 문학를 접해볼 기회도 자주 없거니와 문학적 전문성마저 떨어지는 일반독자들에겐 그저 무의미한 표현일수도 있지만(이는 찌든 빨래를 깨긋하게 빨아주면 더할나위 없는 세탁기에다 최첨단의 부가기능을 붙여놓고 마치 이 부가기능이 세탁기 본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카달로그에 혹해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그래도 이런 저런 부가기능이 장착되어 있는게 세탁기를 돋보이기 한다라는 자족감을 가지게 할 만큼의 안도감 내지는 속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다소 억측스러운 표현 같지만 이 작품을 다 읽더라도 페르시아 문학의 진수를 맛볼순 없지만 그래도 내러티브의 탄탄함과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절묘하게 버무린 작가의 필력만으로도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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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지구위의 모든 역사 

 

""인간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인류가 기록하지 못한 우주와 모든 생명의 역사까지 치밀하게 기록하며 137억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깊이 있는 통찰과 문명사를 횡단하는 광활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키워줄 글로벌 시대의 살아 있는 지구사 교과서. 수십억 년의 자연사와 동서양의 문명사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펼쳐지는 흥미진진하고 매혹적인 역사 여행이 시작된다"" 

 

 

 

2.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서구화.' 지금 지구상에서 생산되고 있는 문명의 산물들을 되돌아보면, 가장 앞서가고 있는 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서양에서 만들어졌거나 서양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쉽게 깨달게 된다. 약 500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들은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문화를 지니고 살아온 여러 인종과 국가들이 이렇듯 하나의 문명 아래 비슷한 생활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는 상황은 인류 문명이 발생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놀라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대체 서양 문명은 어떻게 발달한 동양 문명을 추월하여 무려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를 지배하는 대역전극을 이루어낼 수 있었는가. 니얼 퍼거슨이 지난 600년간의 세계사를 되짚어가며 그 비밀을 추적한다 

 

3. 삼국지의 세계 

 

재일교포 인문학자이자 일본 교토대학 교수인 김문경이 쓴, 새롭게 바라본 삼국지 이야기이다. 저자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란 팩션과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의 역사적 사실 사이를 오가며, 허구의 그림자에 뒤덮이거나 기술자의 의도를 좇아 왜곡되었던 역사적 진실의 원형을 회복해낸다.

이때 독창적인 캐릭터로 다가오는 인물이 바로 '손권'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비와 조조, 그리고 촉나라와 위나라 위주로 논의돼왔던 지금까지의 삼국지 담론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삼국정립의 실질적인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던 '노회한 현실주의자' 손권과 그의 제국 오나라를 역사와 문학의 각 페이지에 돋움 세운다 

 

 

4. 찰스 다윈 서간집 기원 

 

신학생 출신으로 유물론적 진화론의 주창자가 된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전환에 대해 고뇌하는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단호한 개종자였을까. 자연선택의 아이디어를 발견한 후 <종의 기원>의 출간까지 20년이 걸린 것은 정말로 그가 우유부단한 탓이었을까? 이러한 수수께끼와 논쟁의 실마리를 그가 남긴 편지들에서 찾는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류 지성사의 최대 거인 중 한 명인 다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평생에 걸쳐 쓴 수만 통의 편지를 엄선한 다윈 서간 선집은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있는 다윈 서간 프로젝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프레드릭 버크하르트(1913-2007)가 총 책임을 맡은 이 프로젝트는 수만 통에 이르는 다윈의 편지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동시에 주해를 달고 책으로 출간하는 동시에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비록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탁월하고 성실한 역사가 버크하르트는 이 편지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엄선해 주석을 달았다 

 

5. 뜨거운 지구, 역사를 뒤흔들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1~2℃ 변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고 어떤 위험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상승한 지구 평균기온이 인류를 흔들어놓았던 10~15세기, 중세 세계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온난화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브라이언 페이건은 이 책에서 1000년 전 대온난화에 인간 사회는 어떻게 대처했는지 보여주며, 기후의 힘은 우리의 삶을 붕괴시킬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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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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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한 자식들이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전통국악인의 흥겨운 축가속에 절을 올리고 가족,친지,동네지인들을 초청하여 하루동안 떠들석한 잔치를 베풀었던 풍경이 케케묵은 고래적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30년전 이 나라의 보편적인 풍습중에 하나였다. 당시 회갑을 지칭하는 61세라는 나이는 많은 의미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까지 생존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심장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물며 70을 넘어 세상을 등질경우 호상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까지 성행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인들이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자위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주변엔 이러한 풍경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회갑, 칠순을 지난 사람들을 대놓고 노인이라고 말하기도 뭔가 어색한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에서 이제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시기라고 해야할 정도로 나이에 대한 개념이 180도 변했다는 것이다. 통계는 우리도 이제 고령화 사회(사실 이 단어가 출현한지도 얼마되지 않았다. 30년전만 해도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 선진산업국에만 해당되는 부러운 현상으로 받아졌으니까)에 진입했고 조만간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인류가 출현하고 역사시대를 개척하면서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자부하지만 실상 산업혁명이전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에 대한 개념자체가 모호할 정도로 정작 자신의 수명에 대해선 통제불가능한 상태였다. 멀리 갈필요도 없이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수명이 47세정도였으니 의료적,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대중의 평균 수명은 그야말로 의미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종교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사후에 대한 보전책으로 장례관련문화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삶의 길이에 대한 로망이 어쩌면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고한 철학적 명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만큼이나 오래 살아볼 것인가' 가 더 현실적이고 중요한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한다면 지금의 시절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풍족하고 풍요로운 시대이다. 얼마큼 살 것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아웃라인이 정해져 있고 거의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다면 삶의 길이는 보장받는 시대에 각 개인들은 예전 철학자들이 부르짖었던 어떻게 살 것이가를 고민하는 시대이니 그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을 셈인가? 하지만 살짝 돌려 생각해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명제가 주는 압박감과 이면의 또 다른 문제에 대한 심도 깊은 담론이 또 다른 발목을 잡는 형국으로 커져가고만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말은 근대시대이전 사람들보다 두배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자 동시에 두배의 고민거리도 같이 안고 가야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색 쇼크>는 날로 고령화 되어가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며 또 어떻게 대비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인류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적 다양한 측면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충격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신선한 보고서이다. 과학혁명으로 인한 의학의 진보로 인해 평균 수명 자체가 길어지는 것을 우리는 당연시 받아 들이면서 모든 촛점은 좀 더 평균수명을 늘릴는데만 집중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 고령화가 과연 인간에게 축복인지 아니면 오일쇼크와 같은 충격인지에 대한 모호한 경계점에 도달했다는 점을 인식해 본적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고령화 국가인 일본,스페인,미국의 노인층들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고령화가 가져오는 폐해(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령화가 저출산과 맞물리면서 생산활동인구의 감소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자녀 양육기간의 증대, 사회보장보험(의료보험,연금등)에 대한 막대한 부담 그리고 생산구조(제조업의 쇠퇴등) 자체의 변화, 고령층을 상대로 한 사회적 범죄의 증가등 예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고령화문제는 리얼타임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경제축에 의해 이제 더 이상 일국의 사회적 문제를 떠나 세계 각국이 서로 연관될 수 밖에 없는 범지구적인 문제로 급상승하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과 일본의 실례에서 보여주듯이 생산적정인력의 부족은 이민의 부정적인 면을 증가시켜 자칫 잘못하면 인종적인 문제로까지 비약될 수 있음을 상기 시킨다. 반면에 이러한 부정적인 요인의 이면에 또 다른 경제적 틈새시장의 길이 열여 있음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은퇴연령층을 겨냥하는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의 증가는 새로운 블루마켓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래 저래 고령화 문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극히 인간적인 입장에서 분명 기대수명의 증가는 바람직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오랫동안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대이전 인간의 수명은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외부적 요인(전염병,전쟁,기아등)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에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는 구조였다면 현재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수명의 시간적인 개념 보다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담론이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인한 요인보다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획기적인 담론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인간수명은 다시 퇴보할 소지도 있다는 점이 두려운 것이다. 

<회색 쇼크>는 전체적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고 있어 그 현실감이 뛰어나고 그동안 고령화 문제를 원론적이고 통계적인 문제에서 보아왔던 시각을 미시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볼 기회를 주고 있다. 플로리다 세러소타의 신개념 주거단지인 CCRC, 물류업의 부상, 개인의 기억을 저장하는 라이프로깅등의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분야에 대한 언급은 고령화 시대와 발맞추어 어떠한 방식으로 삶의 질을 제고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인간노화의 과정을 30대부터 연령별로 분류한 항목은 그 어떠한 의학서적보다 더 현실감 있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어 호기심 많은 독자들에게 색다른 재미(약간의 서글픔을 포함하여)를 선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슴에 와닿은 점은 스페인과 일본의 고령화 사회상을 살펴 보면서 특히, 별다른 준비없이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인간의 어머니 자궁에서 착상되어 태아로 발달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수명시계의 축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더 오래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이제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령화시대는 한편으로 축복의 시대가 될 수 도 있지만 반면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시대가 될 수 도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살 것인가를 떠나서 이제는 정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범사회적인 담론 형성이 시급한 때임을 우리는<회색 쇼크>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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