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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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로 아랍 아니 이슬람문학을 귀동냥하고 오르한 파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이슬람 문학에 맛을 들인 독자들에게 이번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에 의해 악의 축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획득한 시아파 이슬람의 본산이라 할 이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우선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책을 손에 잡게 된다. 여기서 호기심이란 그동안 무슬림세계에 대한 무지와 더불어 기대감이란 파묵의 작품이 터키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계열의 좀 릴렉스한 문화사상적 소산이라면 만다니푸르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색다른 느낌의 작품배경이란 점에서 호기심과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또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가장 노른잔 땅위에 테헤란로가 버티고 있고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서울로가 존재하고 있듯이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와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극히 단순한 측면에서도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햇살 가득한 테헤란의 어느 봄날 차도르를 쓴 여학생이 대학 정문앞에서 "독재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피켓팅 시위로 시작되는 소설은 왠지 그 제목에서 말하는 사랑이야기보다는 정치색이 상당히 감미될 것 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영희와 기영이라는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이러한 이름의 상징성이 픽션과 팩트(마치 있을법한 사실) 사이를 교묘하게 줄다리기 하게 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작품과 이와 병행하여 사랑이야기에 대한 부연설명과 검열관 페드로비치의 시각으로 바라본 올바른 작품의 타당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때론 자포자기식으로 변명하는 작가의 또다른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면이라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작가 본인을 포함한 인물들이 마치 자기만의 의식을 가지고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게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 각자의 길을 가는 듯 보여지는 솔솔한 재미를 더해 준다. 마치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이 무게 중심이 제대로 서있지 못한다면 어디로 휘둘리지 모르는 부비트랙을 요소요소 배치해놓고 마치 그 덫에 걸리기만 기다리는 고약한 포식자와 같은 시선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런점들이 파묵의 사랑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오묘한 느낌을 전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심리상태의 섬세한 묘사(특히 사라에 대한 다라의 상상력) 압권으로 다가온다. 로멘스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면 의당 한두번의 야릇한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대게 그동안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실상 포로노그래픽 수준의 강도가 아니면 그저 내러티브의 연속상 불가피하게 삽입되는 장면정도로 밖에 인지될 수 없을 만큼 서구 패러다임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게 실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신비의 베일을 한거풀씩 벋겨 나가는 묘사들(소설시작전에 벌써 사전적으로 이란과 이슬람이라는 다소 폐쇄적인 정보가 주입된 상태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묘사들이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감정이입에 몰입하게 된다. 가히 패티시즘의 화려한 승화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작가의 심리묘사는 말줄임표를 통해서 다소 앞서가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까지 하고 있다. 또한 이란 민중들의 숨김없는 목소릴 대변하는 딱따구리의 소리를 통해서 기저에 깔려있는 이란 사회성을 들추어 내고 있다. 작가는 극히 사적인 영역의 로멘스와 공적인 영역의 사회성을 동시에 거론하면서 이 두 요소가 별개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와 검열관의 날카로운 신경전 그리고 시대상을 풍자한 유머러스한 자조와 조롱은 얼마전 무대에 올린 <웃음의 대학>과 비슷한 플롯을 엿 볼 수 잇게 한다. 웃음의 대학이 문학작품에 대한 검열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작품은 이란이 처해 있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자조적인 목소리의 대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국가를 대변하는 페트로비치와 이에 항거하지만 결국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다라 그리고 또 다른 이면에 정치와 무관할 수 밖에 없지만 가장 소외받고 있는 여성상을 대변하는 사라를 통해서 이란의 현주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라는 차도르를 입고 있지만 차도르를 벗는 순간 로멘스에서 한단계 격상된 사회소설로 둔갑해 버린다. 이러한 플롯은 소설속에 두가지 나레이션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전체 내러티브에 반영되어 있는 유니크한 구조와 맞물리면서 색다른 방향타를 제시하고 있다. 세상에 온갖 종류의 책들, 영화들, 그리고 사람들을 등장시키면서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서 차도르속에 숨겨진 욕망들인 자신의 조국 이란의 모든것을 벋겨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이러한 사전적 인센티브(이란작가의 작품, 이슬람문화 배경등)와 더불어 전문 리뷰지의 "페르시아 문학과 쿤데라,칼비노,요사의 감수성을 지닌 현대 이란의 대표작가의 작품으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라는 미사여구는 실상 페르시아 문학를 접해볼 기회도 자주 없거니와 문학적 전문성마저 떨어지는 일반독자들에겐 그저 무의미한 표현일수도 있지만(이는 찌든 빨래를 깨긋하게 빨아주면 더할나위 없는 세탁기에다 최첨단의 부가기능을 붙여놓고 마치 이 부가기능이 세탁기 본연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카달로그에 혹해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  작품을 읽어 나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그래도 이런 저런 부가기능이 장착되어 있는게 세탁기를 돋보이기 한다라는 자족감을 가지게 할 만큼의 안도감 내지는 속지 않았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해야겠다. 다소 억측스러운 표현 같지만 이 작품을 다 읽더라도 페르시아 문학의 진수를 맛볼순 없지만 그래도 내러티브의 탄탄함과 개인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절묘하게 버무린 작가의 필력만으로도 후회 없는 선택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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