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 - 아마티아 센, 기아와 빈곤의 극복, 인간의 안전보장을 이야기하다
아마티아 센 지음, 원용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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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코노믹스(SENCONOMICS)


저자인 아마티아 센은 그동안 경제학이란 학문분야에서 다소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경제학을 설명했던 학자중의 한 사람으로 비주류경제학였다. 경제학의 대표적인 서구중심의 학문으로 거의 서양학자들 중심으로 그 이론의 전파 및 실경제현실에 적용하는 사례가 주종을 이루었다. 센의 인간중심 경제학이 세간의 관심을 받으면서 아시아 최초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지금도 아시아의 민중의 빈곤과 기아등에 관한 그의 경제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흔히들 경제학이란 학문은 숫자와 그래프로 점철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학문중의 하나이다. 특히 경제학은 인간의 실생활에서 한치라도 배제할 수 없는 학문이다. 인간이 사회활동을 중지하지 않는한 경제학은 인간의 모든 사회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학문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에서 보면 정말 인간에게 가까운 학문이지만 전공자를 제외한 보통의 사람들에겐 경제학이란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이다. 또한 위정자들 또한 정책기조 마련에서 경제학을 원용하고 있다. 자국의 경제적인 부와 국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경제학은 필수불가분한 학문인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제학은 인간의 삶에 어느것 하나 심지어 연인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관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동안 경제학은 어떠한 방식으로 진화해왔을까?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스미스의 자유시장논리인 보이지 않은 손에 의거한 철저한 간섭이 없는 완벽한 시장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경제가 인간에게 가장 이롭다는 논리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의 간섭이나 규제등을 최대한 배제하고 시장참여자 구성원들의 의지에 맡겨주는 것이 시장외부의 왜곡을 최소화하는 완벽한 경제활동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제학자나 정책입안자들이 그를 마치 교리처럼 믿고 신봉하고 있는게 전세계적인 추세인것이다. WE ARE THE WORLD를 부르짖으면서 세계화를 꿈꾸고 있는 그런 세상인것이다.

그러면 우린 경제학이란 학문을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까? 정답은 아주 간단한것 같다. 결국 경제학이란 학문도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 인간의 삶을 좀더 풍요롭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보장하는데 밑바탕이 되는 그런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점에 대해서 모든 경제학자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경제학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인것이다. 경제의 구성요소인 자본과 노동이라는 큰 두축에서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가르키는 것이지만 그 노동은 단순한 인간의 육체적인 노동뿐 아니라 인간자체라는 인식이 부족한것 같다. 인간은 노동활동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자신의 생존에 기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요소와 달리 인간에게는 감정이라는 특이한 요소가 있다. 그 요소가 사회발전을 이끌어왔고 앞으로도 발전을 담당하는 모토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주류경제학에서 논외에 있던 인간의 행복이라는 요소를 센은 경제학적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있고 결국 경제학의 발전은 인간의 행복추구라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인간의 행복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는 학문은 사상누각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행복을 배제한 경제학의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특히 산업국가의 대열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의 국민이나 최빈국의 국민들의 경우 그동안 경제학의 발전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례이다. 하루 1달러도 되지 않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 신자유주의니 세계화의 장점이 뭐니 설파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그동안 숫자로 점철된 개량경제학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좀 더 인간적인 경제학 좀더 실용적인 경제학에 눈을 돌려야 할때가 아닌가 싶다. 그런면에서 센은 뛰어난 학자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행복이 가져다 주는 밝은 미래를 향해 노력하고 있는 그의 행동에 마음 속 깊이 갈채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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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순자 - 쓰면 뱉고, 달면 삼켜라
류예 지음, 양성희 옮김 / 미래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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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흔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수 많은 사상가중 우리의 뇌리에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이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등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사상이 지금까지도 우리 특히 동아시아 국가중 중국과 한국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것이 사실이고 현재까지도 그런 정신적인 맥락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경우는 지배계층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큰 한획을 담당했고 일반민중들에게도 올곧은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해왔던 것이다.

그럼 그 춘추전국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사상가들(제자백가)중 순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맹자의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성선설에 반대한 "인간의 본성의 악하다"라는 성악설의 주장한 사상가정도로 밖에는 모르것이 현실인것 같다. 그 만큼 순자에 대한 비중은 법가, 묵가를 주창했던 한비자나 묵자보다 덜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도 순자의 사상을 함축한 성악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는 명제가 조금은 인간본성에 대한 과격한 사상으로 접해지질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것이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모든것이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정치, 민생, 경제등 하루밤 자고 나면 지도가 바뀌는 그야말로 일반 민중들에겐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기가 있어기에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면에서 학술적인 사상의 꽃이 만개할 수 있는 시기였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마치 서양철학의 시발점인 그리스의 철학의 다양한 사상들처럼 말이다. 지금에 와서 그 당시의 서양철학이나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을 되 돌아 볼 경우 다연 주목받는 것이 있다면 순자와 소피스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순자의 성악설이 소피스트들이나 결국 모든 철학의 핵심은 인간자체에 있고 인간 스스로 그 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공통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의 경우 자연철학에 대한 확고한 숭배에서 결국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했듯이 순자의 사상은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연구였다. 맹자의 경우 비록 성선설을 주창했지만 공자사상의 계승자였다. 하지만 순자의 경우 결국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탄생할때 부터 운명이 정해지는 숙명론을 부정했다는 자체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그 당시의 분위기로는 가히 도발적인 사상이 아닌가 싶다. 생사는 창조주가 아닌 우리 인간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다는 사상 그 자체만으로 충격적이고 이단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나 법가에 비해서 그 메리트가 떨어질 수 밖에 없을 뿐더러 하늘의 대리인 자격을 가지는 절대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위험한 사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순자의 사상은 백가쟁명이라는 큰틀속의 일부로 묻혀버렸던 것이다.

시대가 흘러 인간중심의 세상에서 보면 그 먼 옛날 순자라는 사람이 주창했던 사상은 정말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순자는 정치, 군사, 경제, 교육등의 분야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지만 그의 사상의 일맥상통한 점은 그 근저에 인간에 대한 인간자체에 대한 믿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순자의 삶은 역시 많은 백가들처럼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까지 그의 사상에 대해 고개를 숙일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게 그가 주창하는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아니였을까 싶다.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개발과 노력으로 선해질 수 있다. 대자연에는 정해진 운행 법칙이 있지만 이것이 요임금이 현군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걸임금이 폭군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것처럼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수 있는 것은 하늘이나 창조주나 대장연이 아닌 인간 자신이라는 점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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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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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왕의 밀사

-일본 막부 잠입 사건-


7년전쟁을 통해 조선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서 말이다. 그리고 군주인 선조를 비롯한 지배계층이 받은 충격은 말할나위 없이 거대했다. 그리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조선은 또 다시 망각했다 다 쓰러져 가는 명이라는 나무를 부여잡고선 같이 죽자고 했고 그래야 명분을 지킨다며 제대로 왕노릇하는 군주를 강제로 퇴위시키면서까지 같이 쓰러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괄시했던 오랑캐앞에서 군주가 머리를 숙이고 완전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찌보면 7년전쟁보다 더 치욕스러운일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은 중심을 잡지못했다.

이책 왕의 밀사는 그런 혼란스런시기를 배경으로 출발한다. 효종 1655년 공식기록에 의하면 일본 막부의 쇼군인 이에쓰나의 간곡한 요청으로 정사 조형, 부사 유석, 종사관 남용익을 포함한 대략 500여명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통신사이다. 일본이 입장에선 혼란스런 내부갈등 봉합용일것이고 조선의 입장으로선 교린의 강화목적이 맞아떨어진 사절단인것이다. 이 책은 그런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여 종사관 남용익과 그의 전담 역관인 박명준이 일본에서 겪게 되는 우여곡절을 그리고 있다. 소재는 역사소설이지만 그 흐름의 전개를 보면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절단이 겪는 살인사건을 통해서 하나씩 정체를 들어내는 음모와 그 음모를 파헤쳐나가는 주인공 명준의 추리력과 논리력 책을 읽을수록 역사소설이야 추리소설이 할 정도 두가지를 절묘하게 혼합한 작가의 능력에 다시한번 혀를 내두르게 된다. 또한 그동안 우리의 역사소설이라는것이 한정된 공간 특히 권력을 다룬 왕실이나 그에 추종하는 세력들을 상대로 한것이 많다면 이 책은 색다른 시도임에 틀림없다. 효종의 밀서 전달과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정치적 음모와  제2의 임진란이 발발할 가능성등 그 스케일 아주 장구하다. 또한 도공의 자식으로 임시역관으로 발탁된 박명준이라는 조선시대에 신분이 낮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구도 역시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다른 격을 보여주는것 같다. 또한 추리소설입장에서보면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일본전역과 조선을 넘나드는 아주 광범위한 장소적 배경을 보여주므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숨가쁜 추리의 날개를 펼치게 하는것 같아 상당한 호감이 가는 책이다. 특히 일본막부를 비롯한 천황에 이르기까지의 권력지배구조를 좀더 쉽게 알 수 있는 기회도 접하게 된다.

또한 섬세한 인물들의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말한마디에 일본의 각종 역사적 유례나 전설, 설화와 연결시켜 복선을 제시하는 저자의 의도 또한 책을 덮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만드는 작품인것 같다.

이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의 반전이다. 대게 추리소설의 경우 반전의 부분이 존재하지만 그와는 색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진범의 범행동기가 아무리 소설이지만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변해야 한다. 국수적인 자세를 버리고 선진문물을 하루바삐 수용하여 위대한 일본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미명하에 모든 범행을 자행했다는 말이 그리고 부터 불과 200년뒤의 미래를 암시하지 않나 싶어 소름끼치는 부분인것 같다. 모처럼 역사소설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손을 놓을수 없는 좋은 작품이 나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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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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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Reclaiming Development)


I.
개혁의 덫, 사다리 걷어차기, 국가의 역활, 나쁜 사마리아인들등 그동안 저자인 장하준교수는 이 시대의 거스릴 수 없는 큰 흐름인 세계화(Golbalization) 와,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에 물결에 대항하여 대세란 없다는 논지를 펼치고 있는 몇 안되는 경제학자이다. 이번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라는 책 또한 그동안 필자의 논지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볼수 있는 책이다. 이 번 책의 특징은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무역,산업정책, 민영화와 지적재산권, 국제자본흐름, 국내금융규제, 환율과 통화정책, 중앙은행제도와 통화정책, 재정정책등에 대하여 신자유주의자의 논거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에 대한 반박으로 끝을 맺는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정책)을 제시하므로서 개발도상국의 정책입안자 및 경제학도 그리고 일반인들의 사고를 한층 더 넓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인 것 같아 다시금 필자의 논지를 재확인 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II.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친 제국주의의 국가들은 군사력이라는 무력을 앞세워 세계를 자지우지했고, 세계양차대전을 전후론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이념국가들이 세계의 판도를 이끌어 갔다. 그럼 지금의 21세기에는 어떤 국가들이 선도대열에서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다름아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사조로 똘똘 뭉친 국가들의 입김이 과히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왜 이런 일련의 흐름이 발생했을까 하면 다른 논지는 없다고 봐야할것이다. 문명화가 덜된 낙후한 국가의 문명화를 가속했다는 제국주의나 억압과 압제에서 자유를 선사했다는 이념주의, 그리고 이제는 세계인모두가 똑같은 조건을 누리면서 전지구적 축제의 장으로 나아가자는 세계화주의등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내세우는 커다른 이슈의 저편엔 항상 돈이라는 즉 경제적 이득이란 큰 맥락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국의 경제적 부의 획득을 위해선 허울좋은 이념이고 세계평등일뿐 그 내막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말 무서운 현실인 것이다. 특히 비산업국가인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큰 희생의 댓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세계 경제사조는 산업혁명을 통하면서 급격한 경제적 부의 폭발이 시작됨으로써 제국주의라는 불가피한 시장확대의 정책이 출현했던 것이고 이념대결의 장이 사라지고 세계각국이 실시간의 정보공유를 접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 다시금 부의 폭발이 창출되는 시점에 와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신자유주의 대두는 어찌 보면 산업국가들의 대안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간의 역사를 상고해 볼 때 작금의 신자유주의가 정말 대안없는 정책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고 현실에서도 대안은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것이다. 특히 1997년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사태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논거하건데 신자유주의 실패라고 단언해도 과히 틀린것은 아닐것이다. IMF와 WTO, 세계은행이라는 삼지창을 휘두려면서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지금시점에서 보면 그 득보다는 그 패해가 얼마나 큰 상처를 가져다 준지에 대해서 이들 삼총사의 고백에서도 들어나듯이 상당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게 사실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IMF구제금융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교본에 의해 경제정책을 실행했지만 그 결과는 여기서 논거하지 않더라도 실패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남미의 개발도상국들 또한 똑같은 전철을 걸어왔고 아프리카의 경우는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그 댓가는 냉혹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같은시기에 신자유주의를 채택하지 않은 중국이나 인도의 경우는 과연 어떠한가? 물론 절대비교는 할 수 없지만 그 현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1980년대만 해도 외자유치의 가장 좋은 방안인 외국인직접투자(FDI)와 간접투자(포토폴리오투자, 외국은행투자)에 대해서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길이 우리나라같은 개발도상국이 산업국가반열로 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배운 기억이 난다. 당시 외화유입의 가장 안정적인 방안이었고, 기술이전이나 개발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래서 규제을 최대한으로 풀고 외국자본의 유치에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지 않은 공산진영의 국가나 종교적문제를 가진 아랍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고... 하지만 불과 20년이 채안되어서 그렇게 외국자본을 유치한 국가의 경우 하루아침에 그 자본이 유출됨으로서 금융위기에 시달렸고 그러지 않는 국가의 경우는 소낙비를 피해갔던 것이다.  

III.
세계화나 신자유주의가 마냥 잘못되고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쇄국정책이니 국수적인 민족주의로서는 한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부상조의 정신만이 세계화라는 큰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임을 모르는 이도 없다. 단지 세계의 태반이 비산업국가인 현실에서 산업국가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개발도상국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산업국가들도 개발도상국의 위치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지금의 개발도상국가들도 언제가는 산업국가의 반열에 합류할 것임을 인지하고 효과적인 정책수렴에 서로 상부상조해야 할것이다.

특히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의 경우는 더욱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정책은 밑바닥의 민중들만 힘들뿐이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이란 것이 특정 국가에 어떤 정책이 적절한지는 그 나라 고유의 조건들인 부존자원, 외화획득여건, 세계 경제시장에 접근 가능성 여부, 사회적, 정치적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교리가 마치 중세의 기독교가 발빠르게 전파되듯이 세계인들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실정에서 필자의 신자유주의 거부는 정말 신선한 종교적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예라고 할때 모두가 대안이 없다고 할때 이렇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개혁자가 있다는 것이 기쁜일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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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자가복제하라 - 2000년 기업을 창조한 예수의 경영비결
신순철.김진철 지음 / 책든사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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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자가복제하라

기업을 경영하는 이에게는 작금의 시대는 정말 가시밭길을 걷는 세상이다. 국경이 사라진 글로벌 경쟁시대에 진입함으로서 어떤 대상을 모델로 삼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쟁시대에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아니 벌써 우리곁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치 2000년전 예수가 살았던 시대상 만큼 세상이 혼탁하고 관연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인지 구별이 안되는 세상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경영관련 컨설팅업체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는 신경영기법들 자고 나면 그러한 신경영기법들 또한 역사의 뒷편으로 살아져 가는 그런 세상이다. 과연 우리에게 불루오션이라는 희망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현실이다.

이 책은 그 옛날 예수가 민중들을 설교했던 가르침을 속에서 기업의 창조적인 경영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럼 예수와 기업경영이 무슨 상관이 있는것인데 이제는 예수까지 들먹이면서 경영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책을 접하고 나면 수긍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2000년전 예수는 유대교의 모진 정치적 탄압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나는 무신론자라서 신의 의지 내지는 대리인이라는 등의 종교적 색깔이 있는 용어는 피한다) 가장 빠른 기간동안 민중들의 인심을 얻어낸 비결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 예수와 경영을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된것 같다. 당시 예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포교방식이나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생에 대해서 레드오션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그럼 좀더 민중에게 다가갈수 있는 종교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해답은 민중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고 민중들을 무시하지 않고 민중들과 같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종교 즉 블루오션으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강점은 다름아닌 그런한 문제점들을 알고 바로 실행에 들어간 것이다. 민중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흘려듣지 않고 경청하고, 민중들의 섬김의 자세로 대우하고 민중모두를 호혜평등의 정신으로 대하므로서 구세력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블루오션의 장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기업의 경영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 동안 우리의 기업들이 취한 자세는 공급자위주의 생산방식과 마케팅방식 그리고 경영마인드로 뭉쳐져 있었다. 소비자의 성향이나 needs에 대한 외면으로 일관하였던게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매출의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제는 소비자들의 입장에서 경영마인드를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갈 길이 요원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기업의 경영마인드 또한 예수가 실천했듯이 소비자들의 판매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소비자들과 같이 생존할 수 있는 그런 마인드를 가질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출범한 이명박정부의 모토가 바로 섬김의 정부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 하다. 그동안 국가라는 절대권력앞에서 국민들의 위상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국민을 섬김다는 모토는 국민과 같이 국가정책등의 분야에서 같이 나가자는 말이 아니겠는가 싶다. 

비단 기업의 경영방식에 대한 변화 뿐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경영방법에서 작게는 일반 가정에 이르기 까지 예수가 주장하고 실천 했던 기법은 지금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성원들 깍듯이 받들고 그 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구성원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끔 하므로서 좀더 발전된 경영마인드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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