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고래바위 - 어른이 읽는 동화
이순원 지음, 홍원표 그림 / 굿북(GoodBook)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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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저자는 산꼭대기 위의 거대한 고래바위의 바다를 향한 기나긴(시간의 그림자)여정을 통해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당신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고...

왠지 바다를 생각하면 세상을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 그 푸르름에 한없이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바다는 한없이 자상한 어머니 같다가도 때론 엄격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른 아침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절로 흘릴 수 있는 것 역시 바다라는 거대한 안식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로부터 모든 생명체가 출발했듯이 모든 생명체의 삶의 종착역 역시 바다이다. 바다는 우리의 모든 기억과 경험을 태초부터 간직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참을 느끼는 것이다.

세상 어느 바위보다도 우람했던 고래바위에서 너럭바위로 뾰족바위 징검돌 빨래돌 조약돌 공깃돌 모래를 거쳐 티끌 만한 명개흙이 되어서야 바다에 이르는 여정은 공수래공수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모든 욕심과 탐욕을 한줌 티끌도 없이 훌훌 털어야만 해탈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지금 현재 우리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한때의 기억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겁의 시간을 지나서 결국 자연에서 태어난 것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고래바위가 말해주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형상은 없어질지 몰라도 삶에 대한 희망만큼은 내가 억지로 손에 잡고 있는 것을 하나 둘씩 놓을 때 마다 커져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고래바위였을 때는 몰랐던 바다(꿈과 희망)에 대한 동경이 점차 몸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그 크기에 반비례하여 바다에 대한 열망은 커져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삶을 살면서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과 불신이 높아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짧은 한편의 동화를 통해서 다시금 어릴적 꿈과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토록 갈망하고 희망했던 어릴적 꿈은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고래바위에서 명개흙으로 줄어든 만큼이나 작아진 것이다. 내가 걸치고 있는 사회의 지위와 권력을 놓치지 않을려고 할수록 그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마치 고래바위가 명개흙이 되어서야 알았던 진정한 바다를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거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는 마치 모래시계에서 모래알이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꿈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꿈과 희망마저 잃어버린 바위들은 지금도 산중턱에 그리고 개울가에서 마치 자신이 꿈과 희망의 바다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 현재에 우리 자신이 이룩한 부와 사회적 지위가 마치 꿈과 희망의 종착역에 온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은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꿈과 희망이 과연 그토록 우리 자신이 갈망했던 진정한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동화가 인생의 무슨 허무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고래바위가 명개흙이 되어서야 깨달았듯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그 꿈을 찾아가는 길을 찾지 못했을 뿐이라고...

우리에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꿈과 희망이 있다. 그 꿈과 희망을 고스란히 찾는 간직하는 방법을 고래바위는 그 길고 힘든 여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확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바다에게 말해보라 과연 바다는 어떠한 대답을 할까 아마도 모든 것을 털고 어릴적 모습 그대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지 않을까,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깊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라는 꿈과 희망은 우리 자신이 순수한 모습을 다가가면 갈수록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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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웨이 - 세계는 지금 새로운 리더를 요구한다
달라이 라마, 라우렌드 판 덴 마위젠베르흐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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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망명정부의 수반이자 티벳인들의 정신적인 지주 달라이 라마 중국정부의 온갖 핍박을 극복하고 오직 평화로만 독립을 주창하고 있는 현존하는 몇 안되는 평화주의자이다. 그런 달라이 라마가 경영학관련 서적을 출판했다. 다소 생소하고 의외라는 선입관이 먼저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도대체 불교와 경영컨설팅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는가?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역활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먼저 가지게 된다. 

이익창출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의 모티브와 공수래공수거라는 가진것 조차도 훌훌털고 살아가야 한다는 개념의 불교 모티브가 과연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불교의 개념이 기업을 포함한 모든 조직의 리더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심성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콜레보레이션(collaboration)이라는 개념이 이렇게 적절하게 적용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이절적인 두 개념간의 협동이 빛을 발한것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근원은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이나 소유물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 행복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거나 성취하느냐와는 무관하게 바로 우리가 만족할 때 생긴다고 한다. 이 개념은 바로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조직의 리더로서 조직원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임에 틀림없다. 조직원 전체의 행복은 바로 조직원이 그 조직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만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직원의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리더는 그 어떠한 조직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게는 자기 자신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체로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는 리더들을 우리 주위에선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리더들을 진정한 리더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리더의 필수요건으로 바른 눈(正見)을 가지고서 바른 일(正業)을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바른 눈이란 지혜를 뜻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작용 즉 모든일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개념인 연기성 즉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리더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눈을 통해서 바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리더의 조건으로 많은 인내와 바른생활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바른 눈과 바른 행동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청년시절 한때 사회주의 시스템에 매료된 적이 있다는 그가 결국 이 세계의 가난과 핍박으로 고생하는 빈곤층의 희망을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찾은것 같다. 달라이 라마는 이러한 정신으로 무장된 리더들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책임감 있는 자유시장경제를 그 대안으로 보고 있고 그런 대안이 실현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불교의 금용주의와 나눔이라는 개념이 자본주의 속성과는 어울릴수 없는 개념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리더 한 사람의 변화만으로도 지금의 자본주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근저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영컨설팅이나 자기개발관련 분야에서 최첨단의 다양한 기법들이 하루가 멀게 소개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달라이 라마의 <리더스 웨이>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불교라는 정적인 공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무궁무진하다. 영원한 존재는 없으며 모든 것은 변한다,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결과는 없다. 이 모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명제이지만 여기에 리더의 참된 요건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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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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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시경제의 대부이자 시장주의자인 서울대학교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는 현정부의 경제정책과 교육정책 및 부동산정책에 대한 실랄한 사회비평서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모티브로 출범한 현정부의 색깔은 보수와 친시장주의을 그 캐치프레이즈로 하고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마치 시계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돌리다 보니 자신 스스로 보수이자 시장주의라고 생각하는 저자조차도 좌파로 낙인찍힐 만큼 현정부의 이념논쟁이 극에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정책의 허와 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시장주의자가 좌파로 몰리는 아이러니를 현정부가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의 과정에서 사상 초유의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어 출범한 현정부의 대선공약을 믿고서 표를 던지 유권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 지는 모르지만 당시 일반적인 국민들의 생각은 경제적 난국을 하루빨리 돌파하자는 일념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라는 시간을 훌쩍넘긴 시점에서 그러한 절대적이라는 지지을 받고 당선된 대통령의 신인도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 것 또한 아이너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당시의 공약인 747, 대운하건설등의 공약에 대해서 그 달성 가능성을 믿었던 국민 또한 과연 얼마나 될까... 현정부의 경제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신자유주의 노선을 가고 있는 지 조차도 알쏭달쏭하게 만들고 있다. 대운하건설이라는 토목정책으로 경기부양에 목을 걸고 있는 점이나 외환시시장의 적극적인 간섭, 물가지수 및 통화정책등의 깊숙한 개입등은 신자유주의보다는 케인스주의적인 노선이라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이렇듯이 현정부의 경제정책 자체가 그 무게중심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이 책을 읽노라면 그야말로 저자는 국민 대다수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속이 다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현정부의 정책들에 대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입장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학자적 입장에서 정책들에 대한 논거를 표하고 있다. 물론 현정부의 출범과 동시에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발발한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상황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부양과 정책들에 대해서 반기만을 들 수 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때의 경기부양으로 인한 향후에 뻔히 보이는 문제점들을 그냥 무시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의견수렴이라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참여정부의 정책들을 통해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정부나 몇몇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에 의한 밀어붙이기식의 정책이 가져다 주는 폐해를 온몸을 느끼고 실감해 왔다. 사실상 이번 정권의 교체에 담긴 의미는 그러한 아마추어적인 정책관리 보다는 좀더 깊이있고 실용적인 정책입안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정부의 출범과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정책들을 보고있노라면 과연 참여정부를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참여정부나 현정부나 국민여론의 수렴 및 국민의 소리를 듣는 귀가 막혀있다는 것은 매한가지로 보인다는 것이 일반 대중이 느끼는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사실상 지금의 경제상황은 이구동성으로 최악의 위치에 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위기가 1930년의 세계대공황의 경제위기와는 엄연히 다른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돌파했기 때문에 지금도 대규모의 토목공사로 위기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지금의 위기는 당시의 위기와 다른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들이 작용하여 연출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두가지 해법으로 위기국면이 돌파될 수 만 있다면 온 국민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현정부가 집권하면서 마치 새로운 왕조 탄생과 동시에 직전왕조의 모든정책이 폐기 되듯이 참여정부가 지향했던 노선과 정책들이 줄줄이 폐기 처분 되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종부세 흔들기에서 부터 영어몰입교육 및 각종 부동산의 규제 철폐, 녹색뉴딜추진등 그야말로 열거하기도 숨찬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정책들이 이 어려운 경제위기를 살아가고 있는 일반 서민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이라도 해보고 내놓은 것인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지금 국민의 대다수는 747공약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대선당시의 공약들을 지키라고 우기는 국민도 없다. 사실상은 공약은 공약일 뿐이지 공약을 보고 투표를 한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단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올바른 정책을 내놓고 정당한 방법으로 여론을 수렴해서 정책을 펴나간다면 어느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은 부동산 얼마이상 종부세를 부과하겠다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밀반 서민들은 먹고살기에 풍족하지는 않더라도 제발 부족하게는 하지 말아 달라는 바램뿐이라는 것을 왜 그토록 모르는지 답답할 뿐이다. 

자칭 시장주의자라는 저자도 좌파로 오인받을 정도로 현정부의 정책들의 쏠림 현상이 심각한 지경에 도달했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이념논쟁과는 무관할 따름이다. 그저 대다수의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작은 것들이다. 거창한 정책이나 이념논쟁 보다는 현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수 있기만을 바랄뿐이다. 지난 1년동안 그들이 말했듯이 악법적인 요소의 청산기간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정책을 제시하여 국민들로 부터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게 해주었으면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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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 상인 김만덕
윤수민 지음 / 창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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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만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처음 접한 것은 KBS 한국사전을 통해서이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이 그동안 역사적으로 주목 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을 취지로 하고 있었기에 상당히 흥미롭게 시청한 기억이 난다. 제주의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나 집안의 몰락으로 기녀라는 신분으로 지내다가 상업에 눈을 뜨고 재물을 모으기 시작한 김만덕은 당시 제주와 본토를 비롯한 대기근의 시기에 사재를 털어 진휼한 의녀로서 지금까지도 제주에서는 상당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역사서적이나 프로그램은 이러한 김만덕의 생을 조선 최초의 여성 CEO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번 팩션은 김만덕의 생을 역사소설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그녀가 살았던 당시 제주에 대한 생활상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지금이야 제주가 일일생활권에 속해 있다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는 중앙정부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였고 물산이나 문화적인 면에서도 본토와 상당히 이질적인 곳이였다. 그래서 제주는 또 다른 조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척박한 땅에서 한때 기안에 적을 올린적인 있는 여성의 신분으로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그녀의 삶은 아마 제주였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반문을 가지게 한다. 

특히 이번 소설을 통해서 제주 특유의 방언과 잠녀들의 삶 그리고 제주의 주거문화등 제주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한 기녀들의 삶을 세세히 알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최명희의 혼불등에서 봐왔던 특유의 지방색 문화를 오랫만에 접하게 된 것 같다. 사실 지금의 시대에도 제주에 대해서는 관광이나 레저이외 다른 분야에 대해선 몰랐던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이 한권의 소설로 많은 부분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만덕이라는 여걸의 삶과 더불어 제주라는 지방의 지방색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리속에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리고 일반 백성들의 삶이 절로 그려진 것은 필자의 섬세한 묘사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제주의 지방방언이나 고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읽어나가는 속도감이 떨어 졌으나 한편으로는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미주나 낱말풀이를 찾아 읽어가면서 오히려 더 소설속의 현장을 빠져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역사가 말하는 김만덕는 분명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여성이었다는 점을 이 소설은 말해 주고 있다. 아마도 역사소설을 자주 찾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픽션화 하면서 그들의 삶을 공유해볼 기회가 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 최초의 여성 CEO,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어떤것인가를 보여준 인물, 신분적 한계를 극복한 여성등의 거대한 담론에 앞서 그녀 역시 사랑과 좌절과 고뇌 속에 일생을 살다간 한 인간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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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드라마 한 장으로 보는 지식 계보도 1
최복현 지음 / 풀로엮은집(숨비소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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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장으로 보는 그리스 신화 계보도 - 
 

한장으로 보는 지식계보도 시리즈물 중 첫번째 작품인 <신화드라마>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리스신화와 관련하여 신화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 그리고 그 신들의 탄생과정과 부모/형제/자식간의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마치 왕조의 계보도나 개인집안의 족보처럼 체계화하였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신들의 제왕 제우스 그리고의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을 중심으로 한 올림푸스의 12제신들의 생생한 출생 비화와 그들의 자손들과 맡은 임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신들의 일대기를 책 한 권으로 압축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신들의 출발점을 태초의 카오스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혼돈이라는 의미로 알려져 있지만 진정한 신들의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바로 카오스이다. 또한 신들은 생명은 무한하기 때문에 지금도 태초의 신 카오스는 존재하고 있다. 카오스속에 카오스와 가이아를 통해서 생성된 모든 신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주라는 거대한 품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듯이 신들 또한 카오스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카오스를 출발점으로 한 신들의 계보는 크게 4세대로 구별하고 있다. 카오스을 제1세대, 기이아와 우라노스의 결합으로 생겨난 신들을 제2세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티탄이라는 거대하고 흉측한 신들이다. 그리고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고 제왕에 등극한 크로노스와 레아사이에 태어난 신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제우스, 하데스, 포세이돈, 헤라등 신들을 제3세대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제4세대는 제우스와 형제자매들의 자손들 통칭해서 일컫는다.  

또한 그리스 신들은 세대격차와 그에 따른 권력의 투쟁의 과정에서 4번에 걸친 전쟁과 내부 쿠테타를 거치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라고 본다. 신들과 인간과의 공통점이라고 할까 필자는 서두에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언급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일말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름을 불렀을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이 이러한 신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불렀을때 비로소 신들의 진정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접하다 보면 신들의 가장 공통점중에 하나가 우리의 인간과 너무나 너무나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다. 정의,유혹,절망,질투,배신등 어쩜 그리 인간의 복사판인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신들을 다름아닌 인간이 만들어냈다는 증거인 것이다. 신들을 통한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아니면 신들을 통한 정당성 확보라고 할까. 아마도 신들과 우리인간은 공생하는 관계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신은 인간을 통해서 인간은 신을 통해서 바라보지 않았을까? 

<신화드라마>는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비중있는 신들에서 부터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신들에 이르기까지 신이라는 피가 섞여있는 모든 신들을 망라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들의 백과사전이다. 거기에 다 덤으로 아테나왕가, 탄탈로스왕가, 헤라클레스가계, 미노스왕가, 데베왕가, 트로이왕가등 신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 후예들이 세운 나라의 계보까지 보여주고 있어 전반적인 이해도를 높여주고 있다.  

우리가 신화를 접하고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신들의 얄궂은 장난이나 운명처럼 전개되는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화는 다름아닌 우리인간들이 공통된 기억과 경험을 신이라는 대리인을 통해서 표체화한 서사시이다. 당시 인간들의 공동체가 향유했던 가치관의 집결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화에는 문화와 철학이 들어있는 것이다. 신들의 이야기이면 이러한 요소들이 가미될 이유가 하등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를 포함한 세상의 그 어떠한 신화가 오래 세월을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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