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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절 - 42곳 사찰에 깃든 풍물과 역사에 관한 에세이
장영섭 글.사진 / 불광출판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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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절>은 전국 각도에 산재해 있는 42곳의 절들과 만남이다. 무속신앙과 함께 불교는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비록 외래종교이지만 수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다 보니 왠지 낯설지 않은 그런 종교이다. 최초로 우리에게 전래될 당시만해도 권력층의 효과적인 민중지배와 구심점 역활을 수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고려왕조까지는 철저하게 귀족화된 지배층의 화려한 소일거리만 그 역활을 해왔다. 오히려 조선이라는 성리학 중심의 국가가 들어서 철저히 배척당하면서 불교는 일반 민중들의 가슴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이는 석가세존이 말한 손에 쥐고 있을 수록 놓아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계명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 어떠한 종교적 성소보다 사찰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불교라는 종교자체에 대한 깨달음, 대체로 우리나라의 사찰들이 산속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곳에 자리하고 있다보니 절을 둘로싼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역사만큼 사찰은 무언의 역사를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찰을 감싸고 있는 풍경 또한 볼 수록 멋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이런 4가지의 테마로 절의 존재성을 말하고 있다.

<절안의 깨달음>
경북 문경의 김용사에는 대략 300여년은 족히 넘은 똥간이 있다. 원래 서기 588년에 운달조사가 창건 했다가 다시 김용이라는 사람의 중창으로 김용사로 그 이름이 바뀌었지만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다. 이 절은 성철스님, 서암스님,서옹스님과도 인연이 깊은 절로 한때는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그 이름값을 독독히 했다. 하지만 실화로 인해 절의 반이상이 화마에 휩쓸려 간 이후로 김천 직지사한테 본사 역활을 내주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절이다. 그러나 정작 이 절에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대웅전의 불상이나 삼층석탑의 단아함이 아니다. 바로 오래된 똥간에서 무위성이 영구성을 보장해 준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치게 된다. 인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똥을 눈다. 배설이라는 생리현상을 거를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 배설물을 논이나 밭에 거름이라는 형식으로 뿌려 거기서 나오는 작물들을 먹는다. 식물이 우리의 똥을 먹고 우리가 다시 우리의 똥을 먹는 형국이다. 이처럼 모두가 더럽다고 혐오하지만 결국 똥은 우리의 몸을 몸답게 만드는 것이다. 절에서 똥간을 해우소라고 한다.

<절이 안고 있는 생명>
충남 천안의 광적사에 가면 천연기념물 제39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호두나무가 있다. 고려 충렬왕때 원나라 사신으로 갔던 류청신이 귀국하면서 호두나무 묘목을 가져야 심었으니 그 수력이 대단하다.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의 시조인 셈이다.
호두는 원래 서역에서 들어온 종자이다. 그래서 오랑캐 胡자를 쓴다. 중국의 오만함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호두는 인간의 뇌에 좋은 식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인간의 뇌와 흡사하게 생겼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이 제우스에게 호두를 제물로 받쳤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두는 인간에게 유익한 식물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구황작물로서 그 인기가 높았다. 비록 호두나무를 고려에 전래한 류청신의 조국에 대한 배신이나 복수심은 광적사 입구의 호두나무 그늘에 가려져서 이제는 옛이야기일 뿐이다. 지금도 이 호두나무에는 많은 호두가 열린다. 하지만 가장먼저 이 호두의 맛을 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바로 청설모이다. 그렇다고 미물인 청설모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이 준 생명력을 나누는 것일 뿐이다.

<절에 잠든 역사>
안성의 칠장사. 칠장사는 조서시대 대쪽 어사로 이름난 박문수가 나한전에 기도를 올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해서 유명해진 사찰이다. 하지만 오히려 도둑때문에 더욱 유명세를 타는 절이 바로 칠장사이다. 임꺽정이 생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병해대사를 찾아가 감화를 받고 일생동안 스승으로 모셨던 유명한 일화가 있는 절이기도 하고 나한전에 봉안된 7인의 아라한이 본래는 산적이었다는 점이 이채롭기만 하다. 또한 임꺽정이 나라를 훔치는데 실패한 도적이었다면 태봉을 건국한 궁예는 열 살 때까지 여기서 활을 배웠다고 한다.
절에 이렇게 보듯이 많은 역사가 잠들어 있다. 임꺽정세력이 최고 정점을 이룬 황해도는 이후 불모의 땅이 되어버렸다. 왕실에 반역했다는 이유로 하지만 수십년후 임진왜란 당시 민초들은 그런 왕실에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유독 의병 봉기가 없는 곳으로 자신들의 한을 대변했던 것이다. 사찰은 우리의 이런 저런 역사를 말없이 묻어 두고 있다. 누가 굳이 들추지 않는 이상 역사 만큼이나 사찰은 아무말을 하지 않는다. 절에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비추는 역사라는 거울이 있다.

<절 바깥의 풍경>
전국에 사찰에서 이름을 따온 역은 모두 9곳이라고 한다. 논산의 개태사역, 사천의 다솔사역, 의정부의 망월사역, 장성의 백양사역, 경주의 불국사역, 창원의 성주사역, 김천의 직지사역, 여수의 흥국사역, 영주의 희방사역이다. 이 점을 보아서도 사찰의 오랜 역사성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기차가 현대의 상징이라면 사찰은 전통의 표상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중 역 본연의 역활을 하는 곳은 망월사역밖에 없다. 그 만큼 전통을 대변하는 사찰의 퇴색을 말해주면서 동신에 현대의 승리를 말해준다. 그러나 왠지 그 현대의 승리가 그리 시원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 만큼 우리가 달려온 현대는 공허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찻길은 가도 가도 서로 마주봐야 한다. 다른 운송수단 보다 더디고 불편하다. 자유자재로 뻗어나갈 수도 없고 융통성도 없다. 그래서 기찻길은 자동차길에 밀리기 시작했고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기찻길이 더 많이 있다.

그러한 한때는 문명의 척도 역활을 했던 기찻길 역시 지금은 사찰과 함께 전통의 저편으로 지고 있다. 기찻길이 굽이 보이는 영주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마을의 아낙을 잡아먹은 호랑이가 목에 비녀가 걸려 괴로워하는 것을 스님이 살려주고 나서 세운 절이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만큼이나 오래된 희방사와 이제 막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기찻길의 조화가 볼 수 록 아름다운 곳이다.

절은 불상과 불경을 모시고 단순하게 승려들이 정진하는 그런 곳은 아닐 것이다. 종교적인 편력을 떠나서 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절에 묻어 있는 생명력과 절을 오르는길에 느낄 수 있는 풍경, 그리고 절안에 품고 있는 오래된 우리의 역사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절로 깨달음을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이란 큰 것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무단히 협력하여 살아가는 삶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면에서 책의 제목과는 달리 길 위에 절은 없다. 현대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이 고도로 발달된 세상에서 길 위에 있는 절의 의미는 무의미 한 것이다. 길 위에 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절 위에 길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길을 따라 절이라는 목적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절 위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 듯 절에 이르는 것이다.
절이란 우리민족에게 일종의 도피처이자 마음의 고향같은 장소를 제공한다. 그 사상적 근원을 무시하고 절은 그냥 살아있는 생명체를 아무말 없이 어떠한 이유도 없이 품을 뿐이다.

그래서 절에는 주인이 없다. 석가세존도 잠시 머물뿐이지 자신의 집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래서 절까지 걸으가면서 그 길위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 것은 내껏과 네껏이 없는 그런 깨달음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단지 절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있는 깨달음과 자연과의 화해, 잠들어 있는 역사와 절과 자연을 한아름에 품고 있는 풍경을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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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 삼국지 1
김정태 지음 / 일월서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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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중국의 의미는 세계사에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쌍방간에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문명의 태동에서 고대국가시기를 거치면서 중국과 요동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을 지배했던 우리와 관계는 사실상 근대라는 시기가 도래하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삼국시대이전의 시기는 강역적인 면에서 모호한 관계를 형성했고 그 이후론 사실상 문화적으로 그 경계를 구분짓기가 모호하다면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에게 친근하다. 특히 중국역사를 우리만큼 잘알고 있는 외국인들도 중국입장에서 보면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본토인 중국보다 대한민국에서 더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고 이런한 삼국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비교검토하는 책자만 해도 엄청나게 출간되고 읽혀지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중국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을 필두로 하는 역사왜곡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 역사와 중국역사 바로알기라는 명분이 많은 사람들을 자극시키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중국역사의 최종점을 찾으라고 하면 청조의 멸망까지를 말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 좀더 나아가면 장제스와 마오쩌뚱의 국궁합작과 분열로 인해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나뉘는 과정까지일 것이다. 그나마 이 부분은 우리의 독립항쟁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라 교과서를 비롯한 공식적인 주입이 있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이후의 과정은 냉전이라는 절대이데올로기시대를 거치면서 알아서는 안되는 금역으로 간주되었고 그러나 영향이 고스란히 지금까지 이어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물론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뒤을 이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시대에 도래해서야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국혁명 삼국지>는 다름 아닌 청말시대부터 문화대혁명직전시기까지의 비화를 다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에 한제국의 멸망과 그에 따른 조조,유비,손권,제갈량,원술등의 걸세출의 영웅들이 천하을 할거했다면 이 시기에도 쑨원,위안스카이,장제스,마오저뚱,린바오등의 영웅들을 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역사의 공통점인 것 같다. 단지 한말의 삼국지는 전제국가에서 전제국가로 실질적인 왕조의 명칭만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되지만 청조말의 시대에는 천하가 개벽할 새로운 사조가 이런 영웅들의 패권집착에 한층더 탄력을 받게 한다. 그간의 절대전제국가 시스템의 종말과 동시에 민주와 평등 그리고 인민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중국은 그야말로 열광과 절망이 뒤섞인 도가니속으로 접어들게 된다.  

변증법적인 역사발전과정의 가장 대표적예가 근현대사의 중국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이들 영웅들을 대표하는 중국의 치열한 근현대사는 많은 점을 안고 있다. 그 땅덩어리에 비례한 어마어마한 민중의 희생을 기반으로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지만 역시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민의 위상이 과연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 했는가에 대해선 향후 전개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권력다툼을 보면 의구심이 가기 마련이다.
여하튼 이번 책은 중국의 근대국가의 탄생과정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상당한것 같다. 여기저기 나오는 각종인물들과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화들 그리고 최고층사이의 권력암투등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점을 보여주고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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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나라 사람들 - 목욕탕에서 발가벗겨진 세상과 나
신병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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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메세지를 던져 주는 책이다. <탕나라 사람들>은 우리모두가 자주 찾아가는 목욕탕을 소재로 삶에 대한 무거운 화두를 아주 재치있게 던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연륜이 짧다는 점이 오히려 더 정확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고 가감 없이 보여주는 목욕탕속에서의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가 목욕탕을 찾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단순히 목욕한다는 개념을 뛰어 넘어 휴식과 재충전의 계기가 될 수 있는 복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목욕탕의 근본적인 목적은 변함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근본적인 목적은 다름아닌 우리 몸의 묵은 더러운 때를 벗겨내고 아주 깨끗한 몸으로 재 탄생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목욕탕을 갔다 오면 땟깔이 좋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육신의 더러운 때를 벗겨내고 나면 태초에 순결했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서 상쾌함을 느낀다. 절로 기분이 한결 좋아 지면서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세속의 연을 털고 열반의 세계로 접어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어릴적 가장 싫은 것이 목욕탕가는 것이였다. 아마도 이점은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목욕탕에 빼기고 온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나 자신의 나신을 남에게 고슨란히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 왠지 수치심을 자극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복합적인 생각들로 인해 목욕탕은 그리 유쾌한 공간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것이다.

그럼 왜 이제 와서 다시 목욕탕이야기인가?
저자의 의도는 아마도 목욕탕 만큼 만민이 평등한 출발점에서 출발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목욕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지금이야 때밀이나 피부관리등의 신종직업으로 인해 평등한 출발점이라고 보기에 약간은 무리가 가기도 하지만, 크게 봐서 목욕탕에서는 권력의 높낮이나 부의 대소를 떠나 누구나 실오라기 하나 걸칠 수 없다는 점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을 스스로 밀던 금전을 지불하고 밀던 간에 모두 때를 미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기만 해보았지 그 이상의 생각을 해보진 않았던 것 같다. 때란 다름 아닌 우리 육신의 욕망이나 허세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겉모습의 이런 욕망은 말끔히 덜어내고 오면서 정작 우리 마음속의 때는 언제 밀었는지 기억조차 없는 것이다. 너무 도학적인 말이 될수도 있지만 결국 육신과 영혼이 때를 밀지 않고선 온전한 목욕을 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인간은 목욕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두어왔다. 종교적인 행사나 의례를 지낼 때 목욕을 하면서 그 의미를 더 존중했고 지금도 집안의 재사를 받을땐 목욕을 한다. 바로 이점은 육신의 깨끗함만을 추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육신과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완전한 자아를 찾았던 것이다. 목욕이라는 행위가 갖고 있는 의미는 매우 깊고 심오하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몸의 때를 미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을 정화하는 것이 진정한 목욕의 의미인 것이다.

<탕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목욕탕이라는 작은 공간속으로 그대로 옮겨 놨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림처럼 목욕탕 자체가 사람의 모습을 띄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욕을 하긴 위해서 우리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를 벗어 버리고 때를 밀어야 하듯이 우리의 삶 역시 이런 행위와 크게 다른바가 없은 것이다. 이제 몸과 마음속에 가득찬 욕망이라는 때를 벗어 던져야 할 때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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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 순례
최준식 지음 / 소나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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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우리나라의 중심지가 된지 대략 6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세계사에 유래없이 장수한 조선왕조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반쪽짜리이지만 한나라의 수도로서 서울은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을 같이한 그런 도시이다. 특히 지금의 서울은 대한민국 경제, 교육, 문화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이 서울은 수도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 이런 서울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서울에 살던 지방에 살던 오히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정작 서울에 대해서는 더 모르고 있는 내용들이 더 많을 것이다. <서울 문화 순례>는 이화여대 한국학 교수인 저자가 서울의 전통문화를 내국인만이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올바르게 전파하기 위하여 남산부터 홍대앞까지 손수 발로 돌아다니면서 집필한 일종의 서울 가이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여행가이드 도서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서울에 남아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유적과 문화에 대한 설명과 그 기원을 소개하고 있지만 서울에 한정된 개념을 뛰어넘는 우리의 전통문화 가이드 라고 볼 수 있다.
처음 소개되는 남산경복궁은 그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정신적인 면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수도의 궁궐 신축에서 우리 조상들은 비록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조선식으로 개창하였다. 이는 나중에 보조적인 궁인 창덕궁을 보면 두더러진다.
소위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이 녹아 있는 곳이다. 최대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인 건축방식은 우리 선조들의 철학을 대변하는 일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종묘성균관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성리학의 원산지인 중국보다 오히려 더 발달한 유교문화의 대표적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오죽하면 공자에 재사드리는 문묘제례를 제대로 보기 위해 지금 중국에서 찾아오고 있을 정도로 명나라 멸망이후 우리의 선조들은 조선이 중화을 잇는 적장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이책의 별미중에 하나는 국사당조계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은 극히 유교적인 도시이다. 지금이야 그 빛이 많이 퇴색했지만 500여년을 유교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유교를 제외한 그 어떠한 종교는 배척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건국초기에 설립된것으로 알려진 국사당의 내력을 보면 무교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의식도 확인 할 수 있다. 흔희들 비과학적이고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집권층으로부터 외면당했던 무속신앙은 불교와 함께 우리 민족의식 깊은 속에 자리잡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자 한민족과 그 맥을 같이한 유일한 전통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지나간 서울의 모습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사동홍대앞을 통해서 우리는 문화라는 컨텐츠의 중요한 역활을 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두곳은 연령대나 가치관면에서 대립적인 요소를 보여주지만 그 자체로서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갈이 살아 숨쉬고 있는 역동감 넘치는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강변을 둘러싼 고층아파트와 업무용빌딩의 어지러운 스카이라인등이 서울의 전부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서울에 대한 생각과 의미를 다시금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문화유산을 이어받은 우리의 현주소가 안타까움으로 다가 온다. 경제우선정책으로 인하여 무분별한 개발과 그로 인한 문화유산의 회손은 이제 그 복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가고 있다. 비록 이제야 그 중요성을 깨닫고 부랴부랴 보존절차에 들어갔으나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많이 간다. 전통을 포함한 문화유산은 우리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겨 그대로 후손들에게 대물림하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의 입맛대로 이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문화유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책 한권으로 서울 문화순례를 해보는 것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목차에 따라 남산에서 시작하여 홍대앞에서 끝마치는 도심여행은 그 어떤 여행보다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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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잡영 - 이황, 토계마을에서 시를 쓰다
이황 지음, 이장우.장세후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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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년-1570년)은 율곡 이이와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사상인 이기호발설은 영남학파라는 학맥을 탄생시키면서 이이의 기호학파와 양대산맥을 형성하여 조선시대 학문번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물론 이런 학파가 단순한 학문정진을 넘어서 정치에 관여함으로서 당쟁이라는 돌이킬수 없는 부정적인 면도 보였지만 중국보다 더 깊은 학문적 성과를 발휘했던 것은 사실이다. 후대에 와서도 이황과 이이는 화폐에 등재될 만큼 우리에게 영향력이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이황은 고지식하고 원리 원칙적인 학자의 이미지로 비쳐지기도 한다. 대부분 이황을 접하게 되는것은 그의 학문적인 이론이나 정치적인 담론에 급급하다보니 한 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 이황은 대학자이기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에 철저히 가려져 실상 인간 이황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퇴계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에는 자식들과 주고 받은 편지나, 정계은퇴 이후 고향마을에 은둔하면서 지은 한시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학문적연구성과나 정책조언등의 저술에 퇴계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퇴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 공적인 면만을 부각하게 되었고 정작 퇴계가 일반대중으로 부터 멀어지는 사단을 낳게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퇴계의 편지집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한 인간의 애절한 모습을 보게된다. 부모의 자식사랑에서 부터 부부간의 애틋한 정,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가감없는 솔직한 감정을 볼 수 있어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점이 많아 오히려 퇴계를 알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퇴계잡영>은 은퇴 후 고향마을인 토계에 정착하면서 그간 정치적인 허탈감과 학문적인 고뇌, 선비로의 삶등을 한시로 남긴 것을 모은 책이다. 한시라는 특성이 아무래도 서찰 만큼의 개인적인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퇴계의 개인적인 감정이 물씬 묻어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한시들을 통해서 진정한 선비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향집에서 마주하는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의 친화을 담은 시는 고래로 부터 선비들이 추구했던 안빈낙도의 삶을 대변해주는것 같아 지금의 시대에 읽어봐도 몸과 마음이 참 편안한 구절들이다. 토계에서 바라본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인간의 삶에 투영시킨 시들은 삶의 의미를 재조명해주는 명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퇴계는 이러한 한시를 통해서 자신의 복잡하고 번뇌로운 감정을 드러냈을 것이다. 결국 대자연의 섭리앞에 굴복하는 모습이 아니라 동행하는 정신으로 이후 학문적 연구에 정진하고 완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퇴계잡영>의 한시는 거의 토계마을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시냇물과 청명한 하늘 그리고 그 아래 푸르기만 한 산에서 풍기는 정취를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진흙탕처럼 어수선한 정치장을 떠났다는 안도감 또한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퇴계의 이러한 면들이 대학자 이황을 만든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조선시대는 학문과 정치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왕도정치라는 개념하에 성실한 학문이 곧 올바른 정치를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퇴계는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렸던 것이다. 비록 그의 진정한 마음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지만 향후 발생하는 당쟁의 원인을 영남학파의 태두인 퇴계에게 전적으로 그 책임을 물을수는 없는 것이다.
이 번 한시 모음집을 읽고 있노라면 현대사회처럼 바쁘게 살아가면서 정작 삶에 대한 한줌의 의문도 가질 수 없는 현대인들이 마냥 부끄럽게만 여겨진다. 그 만큼 퇴계는 그 자신을 학문이 아닌 자연에서 찾았다고 하면 억지로만 들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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