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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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달과 6펜스>로 잘알려진 영국작가 서머싯 몸의 또 다른 장편소설 <면도날>은 1918년 부터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시기를 살아간 미국출신의 젊은이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 카파 우파니사드의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여려우니라 』라는 명구를 시작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마치 면도칼의 날까로운 칼날처럼 제단하면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극중 화자로 등장하면서 자신이 겪게 되는 미국젊은이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찾는 진정한 실재와 진리는 무엇인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래리의 삶을 미화하거나 절대로 우상시하는 것 역시 없다.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만 주인공 래리의 삶을 통해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와 인간성의 본질, 그리고 인간성 회복을 향한 순수한 젊은 청춘의 영혼을 마치 타인에게 그냥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전개하고 있지만 극중 주인공인 래리는 또다른 작가의 분신인양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비록 소설속에 화자로서 등장하지만 방관자적이고 관찰자적인 화자을 뛰어넘어 래리와 작가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세계1차대전이라는 화마속에서 공군으로 자원입대한 래리는 전쟁이 끝난후 시카고로 귀국하였지만 전쟁전의 그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정체성을 띠게 된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래리는 진정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고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사랑과 안락함을 다 버리고 그가 찾아나서는 길은 마치 수도사들의 고행의 가시밭길을 연상케 하고 마침내 긴 세월 끝에 래리가 깨닫게 된 삶의 정체성은 세상밖이 아닌 세상속에서 자신을 찾는 길이 해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서 래리는 극히 평범하지만 쉽지만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소설을 통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본격적인 자본주의시대의 서막을 올리게 되는 20세기초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신생국 미국의 문화적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의 사교계를 선택하고 끊임없이 성공하기 위해 인생을 건 사교계의 풍운아 엘리엇, 래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속성을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없는 자본주의를 가장 잘 알고 제대로 이용한 여인 이사벨등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현상을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자본의 물결속에서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의 폭주처럼 번영의 끝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유로운 시대에 삶에 대한 근원과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고뇌하는 래리는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극중인물들이 래리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넘쳐나는 풍요속에서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를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눈앞에 보이는 삶을 누리기에도 주어진 삶은 짧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세계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출간되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속에서 과연 인간성에 대한 본질이 무엇이며 실존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의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젊은층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다루고 있지만 대공황 이후 또다시 찾아온 지금의 경제위기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살아 남기위해선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야 하는 적자생존의 시대에 과연 나 자신의 실재는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극중에서 이사벨이 말했듯이 래리가 추구했던 본질에 대한 문제는 그동안 인간이 살아오면서 수천년동안 고민했던 문제였고 그 해답은 없없다. 굳이 그 해답을 내가 찾아야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풍유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게 돌아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면도칼의 날카로운 면을 자신에게 들이대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가는 래리이외의 인물들에 대한 삶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극중 관찰자의 위치에서 그 결말 또한 아주 무덤덤하게 진술하고 있다. 세상속에서 삶의 실존을 찾아나서는 래리, 비록 대공황으로 인해 파산을 맞지만 다시 재기하여 그들만의 세상으로 다시 재기하는 이사벨과 그레이, 양단의 고뇌를 죽음으로 결정한 소피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삶이 틀리고 맞고는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 있다. 그 판단은 독자 개인의 몫인 것이다. 이러면에서 보면 여타의 소설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앤딩(물론 등장인물들 각자의 삶은 해피앤딩으로 끝나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한줌의 안타까움의 묘사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만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그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또다른 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찌보면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위를 아슬하게 걷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발짝만 다른 생각만해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는 그런 세상속을 살아가고 있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은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벼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날카로운 날이 무뎌지는 날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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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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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인류의 기원의 거슬러 올라 가면 지구라는 행성이 46억년전에 탄생했고 그중에서도 길게 잡아 600만년전에 영장류가 탄생했다. 좀더 현생 인류와 직접적이고 유전적인 연관성을 가진 조상은 200만년전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지구와 인류의 역사이고 다른 시각에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하고 있다. 근본적인 창조론을 믿고 있는 신봉자들은 지금도 지구의 역사는 대략 길게 1만년전으로 신이라는 지적설계자에 의해 하루아침에 온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숭배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상 지구의 반이상의 사람들이 이러한 믿음에 빠져 있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어느 것이 진리인가? 우리 인류는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하나씩 그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는 중이며 아직까지도 그 해답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면에서 사회생물학의 시조격인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진위여부를 가리고자 않는 이분법적인 해결방안을 제공하기 보다는 이러한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믿음 내지는 지식의 효과적인 통합적인 방안에 대한 논거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종교 그리고 종교을 뒤받침하는 신학이라는 학문체제내에서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 또한 이러한 신학에 뿌리를 둔 철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이 주류 지식체계로 우리의 생활양식 전반에 깊이 내재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시대와 계몽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사고와 지적인 의구심은 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세계를 창출하였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학의 위치는 새로운 범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극히 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현대인(물론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유신론자들이 비상식적이라는 말은 아니다)들에게 진화론과 창조론의 진위여부를 따지는 자체가 난센스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자체가 의미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이시각에도 이러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비생산적인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필자인 윌슨은 우리들의 지식체계가 극히 편협한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인문학, 사회과학, 종교, 과학이라는 학문이 상호간에 연계성이 없고 자기들만의 지적회로 속에서 배타적인 생각만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수십세기에 걸쳐 전달되었고 특히 과학이라는 신규업체의 등장으로 그 배탕성은 극에 달했다고 본다. 수천년에 걸쳐 확고한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던 기존의 업체가 한순간에 자신의 고객들을 침탈해간 신규업체를 도저히 묵과할 수도 없을 것이고 무한 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규업체역시 점유율 향상을 위해 그야 말로 제로섬게임을 펼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때는 점유율이 역전현상도 가져왔지만 그 결과는 상대편에 대한 수많은 적개심만을 낳게 한 비생산적인 구도를 양산했을 뿐이다. 

윌슨은 이러한 해답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분법적인 지적 사고가 아닌 과학과 인문사회학의 지적인 대통합을 통해야만이 인류의 새로운 도약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물론 그 통합의 주도적인 견인차 역활은 두말할 것 없이 과학적 지식에 그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점 또한 잊지 않고 있다. 이런면을 보면 이 책은 과학적 사고와 지식을 기저에 둔 다소 편향적인 통합 방법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발상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 보면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할 수 있다. 윌슨은 이 책을 통해서 인문학, 사회과학, 종교와 윤리등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도 자연과학적인 통합을 통한 한단계 발전된 지식의 통합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윌슨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나 문화적 진화, 후성규칙, 지적설계자의 디자인등에 대해서 근본적인 진위문제를 논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인류와 지구의 환경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시점에서 자연과학의 오만함과 과학이외의 분야의 타성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체계로서는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들은 그야말로 극히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불과 몇세기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지식이 인류가 갖고 있는 지식의 근간이 될 수는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이러한 지식은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들의 통합체인 지혜야 말로 지금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울한 현실에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여타분야가 통합된 참된 지혜만이 지금이 복잡한 시스템속에서 인류라는 종의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종의 생존여부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인류가 자처한 원인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어느 한 분야의 단편적이고 편협된 지식체계로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풀어 나가지 못한다. 진정한 지식의 대통합만이 대안중에 하나일 것이다. 과학만이 지금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자체가 극히 위험스러운 것이고 또한 과학은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 역시 무지의 소치일 것이다. 

지금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기를 살아가면서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저변에 깔려있던 시대 또한 인류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과학과 그외의 분야가 물과 기름같은 존재가 아니라 한지붕을 맞대고 살아갸야 하는 동거인일 수 밖에는 없다는 또다른 반증이기도 하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시점이다. 이 역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각종 현상을 보면 이제 독불장군식으로 자기 영역만의 지식체계로서는 현상들은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영위하게 위함이며 인간의 사고체계을 확장시켜주기 위함이다. 그동안 우리는 역사을 통해서 편협된 지식체계가 가져다 준 폐악에 대해서 값비싼 댓가를 치루면서 뼈저리게 학습해왔다. 이제는 이러한 학습효과는 충분히 경험했다 볼 수 있다. 모든학문의 지식 대통합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역사의 시발점을 찾아야 할 시점인 것이다. 

이 책은 전반적인 내용에서 자연과학에 기준의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윌슨은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윤리, 종교적인 문제를 과학적인 사고체계에서 해부해 나가고 있어 다소 편향적인 지식 대통합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견해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을 빠져나올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과학만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한가닥만이 아니듯이 과학과 과학외의 분야가 하나로 통합된 실타래만이 지금의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동안 우리가 만든 편협된 지식의 미궁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그 진탕속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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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 - 풋내기 사서의 좌충우돌 도서관 일기
스콧 더글러스 지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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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면서 지적인 풍유로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문자의 발명은 말그대로 인류가 지니고 있는 사상을 통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혹은 효과적인 방법으로 후대에 전할 수 있는 혁명적인 발명이었고 이런 문자을 통해서 일련의 책이라는 형태의 기록물이 탄생하게 된다. 인류는 이러한 문자들의 집합체인 책을 보관하는 곳으로 도서관이라는 특별한 장소를 고안하게 되고 고대의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은 인류의 지적집합체의 결실이었다. 이후 인간들은 명칭은 각양각색이지만 나름대로의 도서관을 운영했고 이러한 도서관은 일종의 특혜적인 산물이었다. 일반대중은 범절할 수 없는 권력층이나 특정 종교계급에의 해 독점되어 왔다. 그런면에서 지금의 도서관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숭고함이나 경외감이 있는 곳이 도서관이었다. 

시민사회에 접어들면서 도서관의 기능은 이전 시대보다 다소 격하된 느낌을 가지고 있다. 학문연구나 정책토론의 장에서 단순한 소일거리, 밀린잠을 보충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이런면에서 보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도서관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 단지 지식의 공유화 내지는 보편화의 증진 일반대중의 교양수준의 확대, 독서인구의 저변확대등의 높은 가치를 부여해서 도서관의 존재가치를 설명할 수 도 있겠지만 이미 지금의 시대에 도서관이외 이러한 지적 충족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왜 국민이 내는 혈세로 사서들의 월급을 지급하면서 좋은 땅에 자리잡고 있는 도서관이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쉿, 조용히!>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준다. 도서관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는 책이다. 어느날 갑자기 뜻하지 않게 시작한 도서관사서라는 직업을 통해서 필자가 바라본 도서관 밖에의 세상과 도서관내의 세상은 인류가 지속하는한 도서관이 왜 인류에게 필요한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일종의 필자 회고록의 형태이고 좌충우돌식의 가볍운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지만 지금도 도서관을 찾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자와의 소통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가장 큰 필요성이 바로 소통이다. 문자을 통해서 문자를 층층이 쌓은 책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옛선현들의 사상과 소통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또한 책들의 집합체인 도서관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상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소통의 역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서관은 우리에게 커뮤니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이 일대일 소통이라면 도서관은 이러한 개인들을 한데 모은 공동체적인 소통의 집합체이다. 도서관 이용자들이 공부를 하던, 신문을 보던, 책을 보던, 잠을 자던, 멍하니 앉아있던 간에 우리는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거대한 커뮤니티속에 빠져들게 된다. 지금처럼 계층간의 차별화된 커뮤니티 세상속에서 계층간의 차별이 없는 곳은 아마도 공중화장실과 도서관이 유일한 공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가을 떠나서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지금 이시간에도 도서관에는 각양각색의 이용자들이 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의식으로 가지고 도서관을 이용하던 간에 도서관은 모든이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싫던 좋던 커뮤니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이야기는 도서관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면서 책을 읽어라는 소리가 아니다. 또한 굳이 도서관이 책을 빌리고 읽는 장소가 아니라는 소리다. 도서관은 열려 있는 커뮤니티이다. 그냥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소통의 제약을 받지 않는 곳이다. 인간이 책을 만들고 도서관을 만든것이지 책이나 도서관이 사람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서관과 책이라느 존재를 하나로 묶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도서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하나의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도서관하면 왠지 무겁고 탐탁치 않은 존재로 다가온다. 도서관에 가면 조용히하고 책을 읽고 아주 작은 소리로 방해되지 않게 대화를 해야하는 공간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저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도서관에 가자. 가서 잠을 자던, 책을 보던간에 먼저 도서관과 열린 커뮤니티를 느끼는 것이 먼저인것 같다. 도서관은 항상 열려 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운것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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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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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이 책은 작금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좌우양측의 승인을 받지 못한 개혁이 가져왔던 부작용으로 인해 단순하게 실용주의와 경제살리기라는 화두를 전면에 내세운 MB정권을 탄생시킨지 1년하고 반정도가 흘러간 시점에서 우리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야말로 지금의 시대를 표현하라면 혼돈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가치조차도 보이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가치관이 역전된 시대, 한마디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전적인 의미로만 국한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공안경찰의 부활, 과도한 시위억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자아내고 어느것이 진정한 가치인지도 구분하기 힘든 그야말로 정체성의 부재인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저자들의 강연내용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단순한게 저자들의 면모를 보면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있는 상당히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그야말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성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은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견지보다는 지금의 시대를 혼돈의 시대로 파악하고 바로 이 혼돈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담론들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면 4.19, 5,18, 6.10이라는 굴직한 변혁의 시대가 바로 숨죽여 있던 일반민중들에게 의해서 촉발되었고 그 기화점으로 세상을 바꾸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최소한 그런 민중의 구심점하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속에서 오직 차별화된 개인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우리라는 개념은 살아진지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그 어떠한 배려나 자비는 있을 수 없는 삶을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가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인 것이다. 청년실업, 경제대란, 가치관의 공동화가 가져오는 폐단은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종착점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에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고 희망일까? 물론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항거하고 비판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해야하는 것 역시 국민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임은 두말 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의 올바른 가치관 형성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들 역시 그동안 만연되어 왔던 신자본주의의 색체와 개인주의의 색깔부터 먼저 걷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오로지 앞만 보고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질주 했던 삶에 대해서 그 근본적인 생각을 제고해야 만이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기만큼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없다는 것은 다 인지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가치관을 한번쯤 뒤집어서 거꾸로 생각해 볼 필요성이 이제는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농촌에 희망이 있다, 여성운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 조직적인 대기업이 아닌 사회적 기업, 신자주의주의 시스템의 극복, 문화 콘텐츠의 다양성, 역사인식의 문제 등 저자들이 거론하고 있는 현문제와 극복방안은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나 보게 되면 누구나 다 인지하고 있는 현실이고 대안으로 알고 있다. 단지 그에 대한 실천방안이 현 사회구조내에서 각 개인의 위치와 저울질 되면서 고뇌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책 한권으로 지금의 거대한 강요된 담론에 반기를 들수는 결코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번쯤은 지금의 담론에 거꾸로 생각하는 자생적인 힘을 가질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발전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듯이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오기가 기폭제가 되어 거대한 담론을 형성해왔다는 것을 볼수 있듯이 작은 실천에서 부터 그 시작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거꾸로보는 관점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민들의 흔적들이 결국 큰 강줄기를 만들듯이 지금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결국 희망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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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1
생 텍쥐페리 지음, 김민지 그림 / 인디고(글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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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세라는 한창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삶을 마감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마치 필자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물음표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왕자는 세대를 뛰어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어린나이에 읽으면 꿈과 희망을 볼 수 있는 책이고 나이가 들어 다시 이 책을 읽게 되면 지난온 세월에 대한 상념과 일종의 부끄러움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가슴속의 희망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마치 그동안 잊고 살아온 진정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어린왕자를 통해서 되돌아보게 하고 왠지 모를 끝없는 심연으로 끌어가게 한다. 

어린왕자는 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이 세속화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 자신 또한 그런 세태를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장애속에서 끊없이 방황하고 고뇌하고 그리워하고 희망했던 자신의 삶이었을 것이다. 어린왕자를 통해서 생텍쥐페리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끈을 잡듯이 영혼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소행성에서 지구로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왕, 허영심으로 가득한 남자, 술꾼, 사업가, 가로등 켜는 사람, 지리학자를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권력, 허망, 자기학대, 돈등으로 정의되고 그리고 이 모든것이 마치 진리인양 이것을 향해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다. 여행의 종착점인 지구라는 별은 그동안 어린왕자가 만났던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모두보다 더 많은 모순덩어리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모순덩어리 세상에서 작은 아주 작은 희망을 남겨두고 있다. 단지 그 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면서 모자로만 보이는 지금의 시선이 잃어버렸거나 잊혀져버린 순수함의 동경 내지는 그리움일 것이다. 어린왕자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그 내용은 더 철학적인 의미로 다가오는것 같다.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과 다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 그리고 과연 돌아갈 수는 있는가 하는 상념들이 머리속을 맴돈다. 꿈과 희망을 각양각색의 사유로 포장해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 그 색깔이 무엇인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길들인다라는 것은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라는 말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꿈과 희망에 대한 관계정립일 것이다. 자신의 꿈과 희망에 길들려지고 관계화 된 자신을 생각해본적이 있는가? 이러한 꿈과 희망에 길들려진다는것 자체가 바로 꿈과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닌겠는가? 수없이 많은 현상과 사람들에게 우리는 길들려져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꿈과 희망에 길들려있다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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