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달과 6펜스>로 잘알려진 영국작가 서머싯 몸의 또 다른 장편소설 <면도날>은 1918년 부터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시기를 살아간 미국출신의 젊은이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의 서두에 카파 우파니사드의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여려우니라 』라는 명구를 시작으로 이 소설의 성격을 마치 면도칼의 날까로운 칼날처럼 제단하면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작가 자신이 극중 화자로 등장하면서 자신이 겪게 되는 미국젊은이들의 삶을 통해서 인간이 찾는 진정한 실재와 진리는 무엇인가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고 래리의 삶을 미화하거나 절대로 우상시하는 것 역시 없다.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만 주인공 래리의 삶을 통해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와 인간성의 본질, 그리고 인간성 회복을 향한 순수한 젊은 청춘의 영혼을 마치 타인에게 그냥 전해들은 이야기처럼 전개하고 있지만 극중 주인공인 래리는 또다른 작가의 분신인양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비록 소설속에 화자로서 등장하지만 방관자적이고 관찰자적인 화자을 뛰어넘어 래리와 작가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다. 세계1차대전이라는 화마속에서 공군으로 자원입대한 래리는 전쟁이 끝난후 시카고로 귀국하였지만 전쟁전의 그의 모습과는 사뭇다른 정체성을 띠게 된다.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래리는 진정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고 진정한 자아의 모습을 찾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사랑과 안락함을 다 버리고 그가 찾아나서는 길은 마치 수도사들의 고행의 가시밭길을 연상케 하고 마침내 긴 세월 끝에 래리가 깨닫게 된 삶의 정체성은 세상밖이 아닌 세상속에서 자신을 찾는 길이 해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서 래리는 극히 평범하지만 쉽지만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소설을 통해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본격적인 자본주의시대의 서막을 올리게 되는 20세기초의 사회상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신생국 미국의 문화적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의 사교계를 선택하고 끊임없이 성공하기 위해 인생을 건 사교계의 풍운아 엘리엇, 래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속성을 너무나 잘알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없는 자본주의를 가장 잘 알고 제대로 이용한 여인 이사벨등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현상을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자본의 물결속에서 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의 폭주처럼 번영의 끝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 풍유로운 시대에 삶에 대한 근원과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고뇌하는 래리는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극중인물들이 래리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의 넘쳐나는 풍요속에서 굳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를 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눈앞에 보이는 삶을 누리기에도 주어진 삶은 짧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세계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출간되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속에서 과연 인간성에 대한 본질이 무엇이며 실존적인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회의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젊은층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다루고 있지만 대공황 이후 또다시 찾아온 지금의 경제위기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내가 살아 남기위해선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야 하는 적자생존의 시대에 과연 나 자신의 실재는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들에 대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극중에서 이사벨이 말했듯이 래리가 추구했던 본질에 대한 문제는 그동안 인간이 살아오면서 수천년동안 고민했던 문제였고 그 해답은 없없다. 굳이 그 해답을 내가 찾아야할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풍유로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게 돌아갈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면도칼의 날카로운 면을 자신에게 들이대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가는 래리이외의 인물들에 대한 삶을 폄하하지는 않는다. 극중 관찰자의 위치에서 그 결말 또한 아주 무덤덤하게 진술하고 있다. 세상속에서 삶의 실존을 찾아나서는 래리, 비록 대공황으로 인해 파산을 맞지만 다시 재기하여 그들만의 세상으로 다시 재기하는 이사벨과 그레이, 양단의 고뇌를 죽음으로 결정한 소피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 삶이 틀리고 맞고는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 있다. 그 판단은 독자 개인의 몫인 것이다. 이러면에서 보면 여타의 소설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권선징악이나 해피앤딩(물론 등장인물들 각자의 삶은 해피앤딩으로 끝나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한줌의 안타까움의 묘사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만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그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또다른 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찌보면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위를 아슬하게 걷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발짝만 다른 생각만해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는 그런 세상속을 살아가고 있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은 남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벼린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날카로운 날이 무뎌지는 날은 언제쯤 오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