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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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Music)과 사랑(Philia)의 합성어로 음악를 사랑 하면서 인체의 변화에 대한 일종의 뇌신경학 가설중의 하나로 올리버 색스는 이 책에서 음악과 관련된 아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음악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전작인 <색맹의 섬>에서 펼쳐지는 한편의 수채화 같은 흐름을 다소 기대하였으나 이번 책은 그야말로 일종의 학술 보고서의 양식같아 속도를 높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막상 책 속으로 빠져들어보면 정말 올리브 색스 다운 필체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생물종 중에서 인간이란 종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여러 시각과 관찰을 통해 음악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있다. 처음에는 일단의 사고로 인하여 마치 이명현상 같이 귀속이나 머리속에 음악소리가 들린다는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그런 환자들을 상담하면서 공통적으로 사고로 인한 머리의 충격 내지는 외상으로 인해 그러한 현상이 유발되고 있고 그것은 저자의 전공인 뇌신경학과 상관성이 높다는 결론을 가지면서 그의 본격적인 음악과 인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 

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부지불식간에 음악과 접촉하고 있다. 내가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거의 매일 음악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 만큼 음악은 인류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초의 문자발명이전 부터 각종 역사의 전달방법중 음악이 차지했던 비중도 높거니와 종교와 관련된 그리고 정치와 관련된 음악 또한 수 많이 있다. 왜 그럼 인간은 음악에 그토록 많은 비중을 두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음악의 구조가 우리 인간의 뇌구조에 반응하는 시스템이 마치 일종의 언어형식으로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지구상의 여러 소리를 접하면서 음악만큼 우리의 정서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소리가 없듯이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닌 언어의 또 다른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인간의 청각기관과 신경체제는 아주 예민하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마음속으로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방식으로 인식하더라도 그에 대한 전달이미지는 모두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동안 음악과 관련한 과학적이고 특히 의학적분야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되어 왔다. 사실 의학기술이 좀더 발달한 지금의 시점에서야 음악을 인식하는 뇌의 부분이 언어를 인식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는 결과를 얻기 까지 우리는 과연 음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에 대한 과학적 반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상담결과를 통해 어릴적 부터 음악을 체계적으로 교육받으면 뇌발달에 크게 도움이 되고 뇌졸증이나 알츠하이머병, 실어증, 운동실조증, 기억상실증의 치료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특히 발달지체, 자폐증,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좀더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음악이 그러한 질병치료에 치료제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치료와 같이 병행할 경우 생각보다 더 효과적인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본다. 

음악이 인간에 전해주는 사랑이라는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이해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수 있는가는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랑에서 출발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와 같이 해 온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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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2 로마제국 쇠망사 2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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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아프리카, 브리타니아, 도나우강주변, 달타미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주변을 경계로 하는 로마제국의 정지척 심장이자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였고 당시 로마제국과 변방의 국가들의 로망이었던 제국의 수도였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확립된 제정은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공화정을 거쳐서 제정이라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는 동안 항상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라고 여겨졌다. 제정 성립당시 최초의 황제를 비롯한 초기의 황제들은 로마의 원로원과 귀족출신이었고 이후 로마제국이 특성이 다양성이라는 조수에 의해 변방 속주 출신의 황제들이 제위에 오르게 된다. 물론 제위 계승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로마라는 제국의 수도에서 그 즉위식을 거행하고 원로원과 로마시민, 군대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으로 모든 불법적인 도발은 합법으로 당연시 받아 들려졌던 것이다(아마도 합법화하는 방법이 제국유지에 필수불가분한 역학관계를 자아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만큼 수도 로마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와 제국 변경의 속주민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국 인프라적인 측면을 살펴봐도 모든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나가 제국의 최하단의 변방까지 정비되어 있을 만큼 수도 로마는 제국의 성장과 함께 그 영욕을 같이 했다. 이러한 수도 로마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 와서는 거의 그 역활을 상실하게 된다. 마치 세계의 모든 문물이 빠르게 수로 로마로 집중했듯이 그에 비례하여 수도 로마의 권위 또한 빠르게 쇠퇴하게 된다. 당시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한 야만족이 잦은 로마국경 침범과 약탈로 인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편볍적인 변혁을 꾀하게 된다.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구분하여 공동황제 제도를 선출하고 각각의 정황제 아래에 향후 안정적인 권력이양을 위해서 부황제라는 황제에 준하는 권력구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머나먼 제국변경을 괴롭혀온 야만족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측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서방제국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고 동방은 니코메디아를 중심으로 수도 로마의 역활을 대신하게 된다. 이후 수도 로마의 역활은 원로원이 존재하는 형식적인 수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2>는 바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여는 비잔티움의 대두를 사실상 로마제국의 쇠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의해 대제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는 콘스탄티누스의 콘스탄티노스플의 창건은 새로운 시대의 도약이 아닌 로마제국 특유의 정신이 다양성의 몰락으로 본 것이다. 이후 발렌티아누스의 선출과 발렌스의 공동통치로 인해 로마는 동서 제국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비잔티움시대는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다. 물론 당시 고트족을 비롯한 야만족으로 간주된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동방의 페르시아와의 피할수 없는 대결때문에 제국의 분할통치가 불가피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외침보다는 내부적인 권력의 배분이 로마의 쇠망을 더 가속시켰기 때문이다.  

기번은 이번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이교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후대에 대제로 일컫어지는 콘스탄티누스와 배교자라는 낙인이 찍힌 율리아누스의 치세기간을 비교 검토함으로서 그동안 일방통행격이었던 역사적 판단에 제동을 걸고 있다. 좀더 나아가서 기번은 율리아누스를 제정시대를 연 아우구스투스와 감히 비교하여 비록 짧았던 치세였지만 율리아누스의치세기간이 로마의 꺼져가는 혼을 되살린 마지막 기회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누누히 강조하지만 로마의 정신은 다양성과 그런 다양성의 포용력이었다. 이런 정신이 근간이 되어 로마는 각양각색의 민족과 이념 그리고 종교를 인정하고 그런 다양성의 화합이 제국의 버팀목 역활을 해왔던 것이었고 역대 황제들(제위의 정상적인 계승이나 찬탈은 차치하고)역시 창시자의 정신을 계승하고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치세가 후대의 비뚤어지고 편파적인 역사적 판단을 받는다고 해도 로마제국의 안정과 계승이라는 대의적인 명분에는 충실했다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이를 적절히 활용한 콘스탄티누스의 등장은 새로운 로마의 첫출발이라는 형식적인 면보다는 내용면에서는 전혀 다른 로마의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율리아누스의 일시적인 과거로의 회기가 시도 되었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거스릴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번은 1권과 2권의 상당량을 할애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쇄와 로마제국의 정치구도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 다소 개인적인 역사관의 피력으로 기우는 듯 인상을 준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 로마제국의 영원한 골치거리였던 야만족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박식함을 독자들에게 은근히 내비치는 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방대한 주를 통해서 그리고 각 야만족의 기원과 의식주, 통치구도등 정치,문화,경제등 각종 제도적인 면에서 두루두루 상세한 설명을 해 놓고 있다. 고토족을 필두로한 설명은 로마와 반대편에 있을수 밖에 없는 야만족들에 대한 변명으로도 비쳐 지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철저하게 반로마적인 입장에서 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기번이 살았던 역사시대의 한계였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를 다루는 장에서 기번의 오리엔탈리즘은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어 방대한 그의 저작에 흠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기번이 살았던 대영제국의 당위성을 로마제국에서 찾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번 역시 아시아와 야만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히려 로마제국이 바라보았던 시각보다 협소하면 협소하지 더 나을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로마제국는 그동안 수많은 야만족의 외침을 로마 특유의 정신으로 정복하고 회유하고 협상하면서 그 변방을 지켜왔다. 정복할때는 아주 단호하게 밀어 붙이면서 포용할때는 로마시민이나 원로원 자리를 수여함으로서 로마제국내로 흡수하였지만 국가라는 개념보다 피로 연결된 민족의 개념이 훨씬 강했던 야만족의 본성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속에도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역사서에 새로운 장을 개척한 것 만은 사실이다. 이번 편 역시 시시콜콜한 면도 있지만 본서에 맞먹는 방대한 주석을 통해서 당시 로마시대 인물들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었고, 그리스도교 초기 삼위일체로 분열된 종파싸움의 내막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로마제국을 둘러싼 경쟁민족들의 삶과 명멸에 대해서 일목요연한 정리는 로마제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끔 해주는 기번만의 보너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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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리뷰해주세요.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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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야 와서 일종의 정신병력으로 인정받고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인지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보통의 경우 전쟁을 비롯한 강력한 트라우마에 의해서 발병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통해서 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실상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트라우마를 소재로한 영화를 통해서 살펴보게 되지만 그러한 현상들은 우리들 주변을 약간은 주시해 보아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더욱 더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와닿는다. 아주 작게는 어릴적 유년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에서 부터 크게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충격의 여파가 우리가 인지하던 인지하지 않는다고 인식하던 간에 우리의 뇌리속에 트라우마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과 이런 트라우마는 우리의 뇌가 가지고 있는 통제나 조절의 영역밖에서 언제든지 과거의 겪었던 유사한 경험을 하게되면 어김없이 우리의 상식적인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도도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문제로 커질수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이러한 범주는 주로 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정도 했으면 이제 잊혀질때도 됐다 내지는 그리 마음이 약해서 무슨 큰일을 할수있겠느냐등의 말로서 극히 개인적인 감정조절의 능력으로 치부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을 안고 살아가는 장본인 역시 무던히 힘들고 그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 또한 힘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인체에 대한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지금도 인간의 뇌만큼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숙제이다. 특히 뇌와 우리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는 그래서 더욱더 신이라는 맹목적이고 언제든지 회피할 수 있는 존재를 대입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질병은 그동안 개인적인 영역에 일부 그러한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에게 한정된것으로 알려져왔으나 이번 책을 통해서 그리고 책속의 영화들을 통해서 살펴본 증상들은 거의 모든 개인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민족이나 국가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길이 없다. 또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흔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역지사지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말 이러한 증상의 치료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바로 역지사지인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입장을 내가 바라보는 상대방의 입장이 아니라 거울속의 나를 보는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아픔을 공유할 수 있고 이러한 공유가 그들의 치료에 크나큰 힘이 된다는 사실이 극히 쉬우면서도 현대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힘이 든 일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작은 출발에서 사회구성원으로 동반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또다른 우리들이 책임인것을 인지해야할 때가 온것 같다.
전쟁,폭력,학대라는 큰 담론적인 문제에서 과보호,무관심등의 작게만 여겨졌던 현상들에서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은 어마 어마한 트라우마를 언제든지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좀더 남을 배려하는 세상만이 이러한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극히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가 이러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다양성 확보가 시급하게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과거에도 트라우마가 존재했을 것이고 이러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역시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히 개인적이고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처에 이러한 트라우마가 널려있고 그 어떠한 강력한 이성과 논리의 소유자들이라도 이러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개인적인 문제에서 전 사회적문제로 인식하고 그 대처방안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영화속의 주인공을 보면서 그들의 장애를 간접체험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극복해나가는 상처 치유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발병케 하는 트라우마는 거의 모두가 인간 그자체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문화,종교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을 상하게 하는 만큼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 재정립이 가장 근본적인 치료방법이자 예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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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 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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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로마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정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로마라는 제국이 남긴 족적은 지금의 대부분의 서양 근대국가에 남아있을 만큼 문화,정치,종교,제도적인 측면에서 사실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민법이 법체계만 보더라도 로마법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정도로 로마라는 제국이 전세계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 한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가 그 뼈대를 만들고 오현제 시대에 이룩한 Pax Romana는 단지 역사적 기간만을 의미한 협의의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광의의 팍스 로마나라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우리가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사에 굵직 굵직한 영향을 끼친 제국들을 보게 되지만 로마제국 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제국 또한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동로마제국까지의 역사적 기간만을 놓고 봐도 대략 1500여년이라는 산술적인 기간에서 부터 여타 제국의 수명과 비교가 될 수 없지만 무엇 보다도 최고 권력자의 특수한 권력계승관계(특히 동방의 군주국에 있어 피한방울 안섞인 남에게 제위를 이어 받게 한다는 발상자체가 어리둥절하게 보이지만)나 황제와 원로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정치제도, 특히 국적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없는 수용과 그 자체의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 들였던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적 다양성과 선진성을 보더라도 지금의 왠만한 근대 국가보다 뛰어남 성숙함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적인 구조나 문화, 철학, 종교는 그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자연의 법칙을 로마제국 또한 비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한마디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다룬 계몽시대이후 최초의 역사서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양의 방대함과 본문의 양에 맞먹는 주석의 양등의 형식적인 내용보다는 근대에 와서 저술된 유일무이한 로마제국의 역사서라는 점일 것이다. 기번 이후 로마제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에게 그의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일종의 바이블같은 존재였을 만큼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번 로마제국 쇠망사의 완역본은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때 일본 작가였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면서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역사에세이가 아닌 정사적인 입장에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좀더 깊이 있는 역사적 시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번은 첫 출발점을 오현제의 한명인 트리이아누스 황제시대부터 시작함으로써 모든 제도나 문물의 가장 성황기가 다름 아닌 쇠망기의 시작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카이사르에 의해 은밀히 진행된 제정시대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마황제중 가장 연기력이 뛰었났던 아우구스투스의 절묘한 포장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고 네르바, 트리이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오현제시대을 거치면서 팍스 로마나를 구현했다. 기번은 바로 팍스 로마나의 절정인 서기 98년을 시발점으로 로마라는 제국은 그 쇠망의 뒷안길로 접어 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팍스 로마나 시대중에도 네로등을 비롯한 실정의 황제들이 있었지만 큰틀에서 보면 로마제국은 큰 흔들림 없는 항해을 했다. 하지만 오현제를 거치면서 황위에 대한 도전과 반목, 그리고 황위를 둘러싼 내전등은 게르만,고트,프랑크,페르시아등 외적인 위협보다 더 큰 내부적인 갈등으로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내부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몇몇 황제의 치세동안 반짝 호황기를 누리지만 죽음이라는 대명제는 거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마라는 제국이 오래기간 동안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정치제도적의 측면을 비롯한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 보다도 관용과 포용,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로마인들 특유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로마인이라는 경계 또한 후대에 갈수록 무의미해 지겠지만 로마제국은 모든 문화와 문명 그리고 심지어 나중에 제국을 쇠망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종교에 이르기 까지 모든것에 대한 개방 정신이 방대한 로마제국을 지켜 주었던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연구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로마제국은 형식상 로마라는 이름하에 모인 범지구적인(당대의 기준으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 팍스 브리타니아를 외친 대영제국이나 현대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부하고 있는 미국과 비교해 봐도 그들의 시스템적 우수성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의 특징중에 하나는 트라이아누스에서 시작하여 동서로 분활된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한 콘스탄티누스황제시기 까지의 역사적 서술을 보통의 사서 집필과정을 따르면서도 출간 당시 상당한 저항을 받게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논의를 기재함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종교 특히 서구의 경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입장정리가 자유로울수 없는 시대에 기번의 종교관 표현은 상당히 불순한 시도였던 것이다. 당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기번의 편협한(?) 종교관과 그런 오만불순한 종교관이 역사서라는 미명하에 활자화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 방대한 저서는 각종 이유로 저평가 되고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은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물론 기번의 개인적인 종교관을 무시할 수 없지만 대단한 사자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에 관심이 있던 없던간에 필히 한번은 읽어 봄직한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상 로마제국을 떠올리게 되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한 존재가 있다.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이다. 로마와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양립할 수 없는 존재만큼 그 거리감이 커지고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로마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지위를 정당화는 입장에서 각각 로마와 그리스도교의 불편한 진실은 바로 이러한 각기 다른 로망들에 의해서 묻혀져 왔다고 해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리한 이가 바로 기번이다.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받아들기 싫던간에 역사가 말하는 것은 당시의 사실임을 기번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대로 그의 저술에 담고 있다.

대체로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제국 특히 콘스탄티누스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더 많이 불리지만) 이전의 로마 역사는 생각하기 싫은 역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예수의 사형집행에서 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박해로 인해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악의 축으로 오인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번은 그동안의 오해와 추측으로 난무한 역사를 고증을 통해서 바로 잡고자 했다. 그의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어마 어마한 박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황제들에 의한 조직적인 박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라도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박해와 순교로 이어지는 과장된 요인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로마제국의 가장 근간은 모든것의 통합과 조화 그리고 수용, 그리고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의 근간을 뒤흔든 맹목적인 일신교의 숭배과 여타 종교와 문화의 극단적인 배척은 그 어떠한 권력자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도의 대부분이 노예나 로마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 속주민들 그리고 로마시민중에서도 하층민들에게 집중되었던 이유가 낮은곳에서 부터 성령이 일어난다는 논거가 아닌 어느 시대나 이런 계층의 불만은 새로운 로망으로 충분히 번질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시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번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이교도(그 중심에 로마가 있고)의 박해보다 같은 종파의 박해가 오히려 더 많았다는 점을 고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클 것이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국교로 성장한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로마 제국의 쇠망사에 대한 아이너리를 엿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로마인들이 향락과 사치 그리고 그들의 오만, 외부의 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실상 그리스도교라는 일률단편적인 사상체계가 로마제국의 다양성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라는 제국은 쇠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초와 유물을들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성황으로 인해 그동안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아테네, 동방의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을 볼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다양성의 상실은 야만족을 대하는 정치제도의 측면에서도 강변일변도로 바뀌면서 그야말로 앞만 보고 질주하는 기관차같은 존재로 남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성황만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거대한 담론적인 입장에서 견지하더라도 그 멍에를 벗어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성이 상실한 세상이 얼마나 해독스러운지는 유럽의 중세나 조선시대, 그리고 가까이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제국주의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못하는 시대는 그야말로 악이고 어둠만이 존재하는 우울한 세상임을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인 것이다. 어찌보면 다양성의 소멸과 유일성의 대두는 역사라는 바퀴를 뒤로 돌리는 반동적인 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마는 오현제 시대를 거치면서 그 정점을 지나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획기적인 제국 분활통치와 부황제라는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다시한번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게 된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과연 팍스 로마나를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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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게임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책을 소재로한 소설이다. <장미의 이름>은 요한 묵시록을 소재로 벌어지는 중세 수도원에 감쳐진 비밀을 헤쳐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방각본 살인사건>은 조선 정조시대에 문체반정을 불어오게 되는 소설과 관련된 미스테리를 헤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책을 소재로 하는 대표적인 국내외 소설이다. 이들 작품들은 각 소설의 소재가 된 책을 통해서 그 책에 기록된 내용대로 현실화 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면에서 보면 <천사의 게임>은 같은 책을 소재로화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다른 면을 추구하고 있다. 책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만 왠지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작중 다비드 마르틴을 통해 괴테의 파우스트와 뱀파이어와 인터뷰의 로이를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1년도 채 남지 않는 목숨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만나게 되는 코넬리라는 의뢰인을 통해 그와 더불어 영생불멸의 삶을 살아가게되는 마르틴의 설정은 파우스트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두 주인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가 이 소설을 대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것을 책의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또다른 책속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다. 

  
작중에서 고아나 다름없는 마르틴에게 책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했던 지인인 셈페레는 책 속에는 작가의 영혼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떠한 책도 소중하다"고 했다
또한 소설의 말미부분에 마르틴은 자신의 작품을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 일컫는 영원한 책들의 안식처에 보관하면서 자신의 애제자인 이사벨라에게 책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각각의 책은 모두 영혼을 지니고 있어. 그 책을 쓴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책을 읽었고 그 책과 함께 살았고 꿈꾸었던 사람들의 영혼도 가지고 있어. 책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그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릴 때마다, 그 책의 영혼은 커지고 강해지지. 이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잊혀 버린 책들은 이 곳에서 영원히 살면서, 새로운 독자나 새로운 영혼의 손에 이르기를 기다려." 마르틴의 이 말이 결국 다름 아닌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대변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얼핏 들어서는 책이 가지고 있는 진실에 대해서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포장하고 있는듯 하나 작가는 마르틴의 말을 통해서 책속에 담겨져 있는 이러한 영혼과 현실을 보기좋게 혼합해 버리면서 또 다른 공포를 현실로 끄집어 내고 있다. <장미의 이름>이나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처럼 책에 서술된 내용대로 현실에서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지만 작가는 책속에 담긴 영혼이라는 형태를 현실로 포장하면서 기존의 공포와는 또다른 공포를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소설전체를 휘어잡는 공포의 연장이 아닌 소설을 읽어나갈수록 무엇인가 알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공포의 유발을 통해서 독자들이 느끼는 공포마저도 혼란케하는 독특한 면을 발휘하고 있는 소설이다.

대부분의 공포영화의 색감자체가 어둡고 습기찬 화면의 연속이라면 만약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어둠과 밝음의 적절한 조화가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이어지는 공포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주인공인 마르틴이 자신의 영혼을 악마인지 천사인지 분가하기 힘든 의뢰인인 코렐리와의 계약을 마치 작가 자신이나 다른 작가들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과정의 목적성 내지는 정당성으로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든간에 <천사의 게임>이 내포하고 있는 독창성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내내 소설과 소설속의 소설사이에서 혼돈아닌 혼돈을 야기하면서 조용하게 다가오는 얕은 의미의 공포는 소설의 정점으로 다가갈수록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오랫만에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고나서 주변에 관심받지 못하고 이러저리로 굴러다니는 책들을 다시금 보게 한다. 마치 그들 책속에 작가의 영혼과 그 책을 읽고 조금씩 자라나는 또 다른 영혼을 느끼면서 이 세상에 활자화된 책은 어떤 책이라도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잠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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