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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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로마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의 정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 들었다. 하지만 로마라는 제국이 남긴 족적은 지금의 대부분의 서양 근대국가에 남아있을 만큼 문화,정치,종교,제도적인 측면에서 사실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민법이 법체계만 보더라도 로마법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 정도로 로마라는 제국이 전세계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 한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가 그 뼈대를 만들고 오현제 시대에 이룩한 Pax Romana는 단지 역사적 기간만을 의미한 협의의 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로마인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 광의의 팍스 로마나라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우리가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인류사에 굵직 굵직한 영향을 끼친 제국들을 보게 되지만 로마제국 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제국 또한 없을 것이다. 단순하게 동로마제국까지의 역사적 기간만을 놓고 봐도 대략 1500여년이라는 산술적인 기간에서 부터 여타 제국의 수명과 비교가 될 수 없지만 무엇 보다도 최고 권력자의 특수한 권력계승관계(특히 동방의 군주국에 있어 피한방울 안섞인 남에게 제위를 이어 받게 한다는 발상자체가 어리둥절하게 보이지만)나 황제와 원로원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정치제도, 특히 국적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없는 수용과 그 자체의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 들였던 사회 전반에 걸친 문화적 다양성과 선진성을 보더라도 지금의 왠만한 근대 국가보다 뛰어남 성숙함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적인 구조나 문화, 철학, 종교는 그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자연의 법칙을 로마제국 또한 비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한마디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다룬 계몽시대이후 최초의 역사서이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양의 방대함과 본문의 양에 맞먹는 주석의 양등의 형식적인 내용보다는 근대에 와서 저술된 유일무이한 로마제국의 역사서라는 점일 것이다. 기번 이후 로마제국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에게 그의 <로마제국의 쇠망사>는 일종의 바이블같은 존재였을 만큼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번 로마제국 쇠망사의 완역본은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때 일본 작가였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면서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던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역사에세이가 아닌 정사적인 입장에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좀더 깊이 있는 역사적 시각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번은 첫 출발점을 오현제의 한명인 트리이아누스 황제시대부터 시작함으로써 모든 제도나 문물의 가장 성황기가 다름 아닌 쇠망기의 시작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카이사르에 의해 은밀히 진행된 제정시대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로마황제중 가장 연기력이 뛰었났던 아우구스투스의 절묘한 포장으로 자리를 확고히 했고 네르바, 트리이아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오현제시대을 거치면서 팍스 로마나를 구현했다. 기번은 바로 팍스 로마나의 절정인 서기 98년을 시발점으로 로마라는 제국은 그 쇠망의 뒷안길로 접어 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팍스 로마나 시대중에도 네로등을 비롯한 실정의 황제들이 있었지만 큰틀에서 보면 로마제국은 큰 흔들림 없는 항해을 했다. 하지만 오현제를 거치면서 황위에 대한 도전과 반목, 그리고 황위를 둘러싼 내전등은 게르만,고트,프랑크,페르시아등 외적인 위협보다 더 큰 내부적인 갈등으로 외형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서서히 내부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몇몇 황제의 치세동안 반짝 호황기를 누리지만 죽음이라는 대명제는 거슬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로마라는 제국이 오래기간 동안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정치제도적의 측면을 비롯한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 보다도 관용과 포용,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로마인들 특유의 장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로마인이라는 경계 또한 후대에 갈수록 무의미해 지겠지만 로마제국은 모든 문화와 문명 그리고 심지어 나중에 제국을 쇠망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인 종교에 이르기 까지 모든것에 대한 개방 정신이 방대한 로마제국을 지켜 주었던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연구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 만큼 로마제국은 형식상 로마라는 이름하에 모인 범지구적인(당대의 기준으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후대에 팍스 브리타니아를 외친 대영제국이나 현대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자부하고 있는 미국과 비교해 봐도 그들의 시스템적 우수성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의 특징중에 하나는 트라이아누스에서 시작하여 동서로 분활된 제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한 콘스탄티누스황제시기 까지의 역사적 서술을 보통의 사서 집필과정을 따르면서도 출간 당시 상당한 저항을 받게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논의를 기재함으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8세기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종교 특히 서구의 경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입장정리가 자유로울수 없는 시대에 기번의 종교관 표현은 상당히 불순한 시도였던 것이다. 당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기번의 편협한(?) 종교관과 그런 오만불순한 종교관이 역사서라는 미명하에 활자화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 방대한 저서는 각종 이유로 저평가 되고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은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물론 기번의 개인적인 종교관을 무시할 수 없지만 대단한 사자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에 관심이 있던 없던간에 필히 한번은 읽어 봄직한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항상 로마제국을 떠올리게 되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불편한 존재가 있다. 다름아닌 그리스도교이다. 로마와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양립할 수 없는 존재만큼 그 거리감이 커지고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 로마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지위를 정당화는 입장에서 각각 로마와 그리스도교의 불편한 진실은 바로 이러한 각기 다른 로망들에 의해서 묻혀져 왔다고 해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정리한 이가 바로 기번이다.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받아들기 싫던간에 역사가 말하는 것은 당시의 사실임을 기번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대로 그의 저술에 담고 있다.

대체로 카톨릭이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제국 특히 콘스탄티누스황제(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더 많이 불리지만) 이전의 로마 역사는 생각하기 싫은 역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예수의 사형집행에서 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박해로 인해 로마제국은 그야말로 악의 축으로 오인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번은 그동안의 오해와 추측으로 난무한 역사를 고증을 통해서 바로 잡고자 했다. 그의 결론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어마 어마한 박해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황제들에 의한 조직적인 박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이러한 경우라도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박해와 순교로 이어지는 과장된 요인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로마제국의 가장 근간은 모든것의 통합과 조화 그리고 수용, 그리고 다양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제국의 근간을 뒤흔든 맹목적인 일신교의 숭배과 여타 종교와 문화의 극단적인 배척은 그 어떠한 권력자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도의 대부분이 노예나 로마시민의 자격을 얻지 못한 속주민들 그리고 로마시민중에서도 하층민들에게 집중되었던 이유가 낮은곳에서 부터 성령이 일어난다는 논거가 아닌 어느 시대나 이런 계층의 불만은 새로운 로망으로 충분히 번질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시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번은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는 이교도(그 중심에 로마가 있고)의 박해보다 같은 종파의 박해가 오히려 더 많았다는 점을 고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클 것이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국교로 성장한 그리스도교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로마 제국의 쇠망사에 대한 아이너리를 엿볼 수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은 로마인들이 향락과 사치 그리고 그들의 오만, 외부의 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실상 그리스도교라는 일률단편적인 사상체계가 로마제국의 다양성을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라는 제국은 쇠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초와 유물을들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의 성황으로 인해 그동안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아테네, 동방의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을 볼 수 없게 되고 이러한 다양성의 상실은 야만족을 대하는 정치제도의 측면에서도 강변일변도로 바뀌면서 그야말로 앞만 보고 질주하는 기관차같은 존재로 남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성황만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거대한 담론적인 입장에서 견지하더라도 그 멍에를 벗어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성이 상실한 세상이 얼마나 해독스러운지는 유럽의 중세나 조선시대, 그리고 가까이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제국주의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성이 존재하지 못하는 시대는 그야말로 악이고 어둠만이 존재하는 우울한 세상임을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지하는 사실인 것이다. 어찌보면 다양성의 소멸과 유일성의 대두는 역사라는 바퀴를 뒤로 돌리는 반동적인 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마는 오현제 시대를 거치면서 그 정점을 지나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걷게 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획기적인 제국 분활통치와 부황제라는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다시한번 예전의 영광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게 된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과연 팍스 로마나를 재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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