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나탈리, 멜리사, 판 시스터스, 도널드 트럼프, 세이디 그리고 딕 체니 이들 이름만 들어도 상당히 알려진 저명인사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다름 아닌 염소, 개, 수탉 그리고 코요테를 지칭한다. <굿바이, 스바루>는 저자인 덕 파인의 에코 농장 프로젝트를 다룬 자서전적 현장 체험 보고서이자 지구 온난화 위기에 봉착해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뉴욕커인 저자가 어느날 갑자기 수천킬로 떨어진 뉴멕시코의 외진 곳 그야말로 산넘고 물건너 위치한 목장을 인수하면서 그의 좌충우돌 에코농장 가꾸기 생활이 시작된다. 단순한 농장생활이 아닌 그야말로 자급자족형태를 갖추면서 친환경적인 농장 경영을 해보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 첫출발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애마와의 작별이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운행하던 자동차를 처분하고 폐식용유를 연료는 하는 픽업대형트럭을 개조한 몬스터를 운행하면서 에코경영의 첫발를 딛게 된다. 난생 처음염소(나탈리와 멜리사)을 키우면서 겪게되는 어려움과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얻게 되는 성취감과 기쁨은 작가 특유의 위트감각으로 지면을 대신해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농작물을 심고 재배하고 닭을 키워 달걀을 생산해서 자급자족을 하면서 여유분은 인근마트에 파는 방식을 통해 서서히 에코농장경영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축적방식으로 최대한의 탄소발생을 억제하는 삶을 실천해 보이기 있다. 

산업혁명이후 급작스러운 기술발달로 인해 인류는 엄청난 편의를 제공받고 있다. 하지만 자연법칙이란 작용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분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구온난화를 통해서 몸소 확인하고 있다. 국지성호우, 기온급상승등 해마다 그 규모를 더해가는 자연재해로 인해 인간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쏟아낸 이산화탄소로 인한 후유증이다. 부랴부랴 기상이상협약등을 체결하여 탄소배출에 대한 억제 의지를 내비치고는 있지만 몇몇 거대 방출 국가의 불참으로 사실상 그 실효는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비록 우리와는 정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다른 미국 대도시 젊은이의 실천지향적인 행동에는 정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결국 작가는 자긴의 친환경생활체험을 통해서 지구를 그나만 지금보다 악화되지 않게 지키는 방법은 거대한 담론이나 프로젝트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각 개인이 지금의 생활습관을 조금씩만 바꿔 나간다면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간생활 영위의 3대요소인 의,식,주에 약간의 방법 변화만 가져와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면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막상 실천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결국 무임승차라는 커다란 유혹앞에서 좌절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편의성이라는 달콤한 설탕앞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는 생활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신종플루로 인한 위협 거의 공포심을 느끼게까지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어찌보면 이러한 바이러스의 범람 역시 자연과 소통이라는 극히 간단한 진리를 외면해 버린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작가처럼 우리도 친환경생활을 위해서 훌훌 다 털어버리고 시골 산간으로 가자는 소리는 아니다. 단지 지금의 생활패턴을 아주 조금만 바꾸더라도 환경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경제성을 무시하고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만든 시스템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그 시스템속의 노예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음을 근래들어 벌어지는 각종 위기와 자연재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는 아닌가 싶다. 

책장을 덮으면서 작가가 장미밭을 지키기 위해 염소들과 사투하는 모습 그리고 음험한 딕 체니(코요테, 정말 적절한 비유이다)로 부터 닭들을 지키위한 노력들에 미소를 짓게 하고 달걀을 수확하면서 뿌듯해 하는 모습들이 생각난다. 그러한 환경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가 그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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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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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중에 한 다스(물론 이 말은 일본어이다 영어로는 알다시피 dozen)는 12개라고 알고 있기 마련이고 여태까지 이런 개념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한 다스가 12개가 아니라 13개라고 하면 어떨까? 여기 <마녀의 한 다스>는 바로 이러한 개념들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즉 개념이 먼저냐 말이 먼저냐에 대한 이를테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와 엇비슷한 이야기들로 넘처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상식중(물론 일신교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일부 인들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은 보편타당성을 획득한 과학 진리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 내지는 진리들이 국가와 민족간에도 과연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 대해선 일식견이 없지만 그녀의 책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 특히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민족의 특징들을 자신의 주업무인 동시통역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인간내면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다가오는 것 같다.

러시아에서 만난 일본인, 중국인, 일본에서의 중국인, 미국인, 조선인, 이탈리아에서 만난 중국인 기타 등등 다양한 환경속에서 다양한 민족들과 좌충우돌과정에서 그 민족(이 역시 전부다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의 특성과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인간만이 가지는 속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세계를 이처럼 재미있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책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구분되는 민족이라는 개념의 특수성을 르네상스시대이후 쟁점이 되었던 지동설과 천동설의 충돌이 아닌 오직 천동설의 영역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즉 내가 바라보는 모든 관점은 본인 위주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흔히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易地思之 즉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봐라" 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아마도 이는 특히 전혀 다른 문화권을 가진 이들에게는 한줄기 빛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비슷한 발음상의 차이로 어느쪽은 긍정적인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듣는 상대쪽에서는 엄청난 모욕이 될 수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자체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부자연스러울수도 있다는 것이 작가의 뜻이다. 더욱이 역사도 나라도 문화도 상이한 사람들끼리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우리와 일본의 경우 같은 한자 문화권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네들과 우리들의 사고 시스템은 아무리 상대방의 배려차원에서 생각해도 멀기만 한 당신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럴바에는 상배방이 말을 그대로 하게 하고 나서 그 관점에 우리의 마음과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어페가 있는듯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수긍이 절로 가는 말이다. 우리 주변 시야를 좁게 가져가 보면 남녀관계에서 그 효과는 여실히 들어날 것이다. 상대방에 맞춘 언행보다는 상대방의 언행에 좀더 귀기울이는 것이 관계 진척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다.

러시아 동시통역사인 요네하라 마리는 동시통역이라는 특수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나라와 민족 구성원들을 통해서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있다. 각각의 말고 개념이 다르듯이 역사와 문화가 이질적인 환경속에서 과연 어떻게 상대방에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한 다스가 12개라는 개념은 이제는 고정관념에 불과할 수 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13개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11개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차피 한 다스가 12개라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 편의를 위한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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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절판


인류 역사를 한시간에 비유하면 5분동안 평화로왔고 나머지 55분은 전쟁속에 지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전쟁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떠한 생명체 보다 동종을 멸종의 위기로 까지 몰고 가는 잔혹한 행위를 하는 종이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그것도 정의라는 기치하에 정당화하는 행위는 우리말고 그 어떠한 생명체도 시도해본적이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만이 왜 이렇듯 상식밖의 행동을 서슴치 않은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우주소년 아톰의 아버지인 데즈카 오사무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해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인간이라면 당연시 하는 가치 바로 다름아닌 정의라고. 인간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서 초개같이 목숨을 버릴수 있다는 궤변론적인 논리가 전쟁의 주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세계제2차대전을 배경으로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 그리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독일계 일본인 아돌프 카우프만, 그리고 유대계 독일인 아돌프 카밀이라는 각기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세명의 아돌프를 통해서 그들이 겪는 전쟁과 삶을 조명하고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파시즘의 원조격인 히틀러가 다름아닌 유대혈통이라는 픽션하에 출발한다. 히틀러 출생의 비밀이 담긴 문서를 되찾고자하는 나치스와 그 비밀문서를 세상에 폭로하여 나치즘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양방의 묵숨을 건 사투와 그런 과정에서 서서히 정의라는 대의앞에 변해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너무나 잘 알듯이 당시의 세계는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 세상은 일촉즉발의 위기속에 있었다. 그런와중에 한반도와 중국은 일본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고 유럽은 이탈리아와 독일에 의해 숙대밭이 되었다. 결국 연합국에 패배 히틀러는 자살이라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 나머지 두명의 아돌프는 또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유대인들의 염원이었던 독립국가가 설립되고 중동땅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간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유년시절 절친했던 두명의 아돌프는 중동의 사막에서 적으로 맞이하게 되고 서로 그렇게 죽어가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시기를 직접 몸소 겪었던 작가의 경험담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한민족에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겼던 일본인의 시각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지만 전쟁기간 동안 일본이 자행했던 각종 만행에 대해서 작가는 있는 그대로는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쟁기간 동안 민간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전쟁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국가의 정의라는 힘 앞에선 어김없이 복종하고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을 담으면서 과연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쟁이라는 자체가 절대다수의 기본권과 행복을 배제하여야만 가능한 행위임을 일본인들이나 유대인들의 삶을 통해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들을 접해왔다. 영화나 소설등을 통해서 전쟁이 가져다 주는 잔혹함과 비참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전쟁은 이땅에서 살아져야 한다고 되뇌이고 있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정의라는 미명하에 버저이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 나치에 의해 인종말살이라는 곤역을 겪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서 또 다른 어쩌면 나치보다 더한 잔혹행위를 자행하고 있고 세계평화의 걸림돌이라 명명된 악의 축을 이루는 몇몇의 국가는 난데없는 전쟁속으로 휘말리는 상황에 쳐해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과연 이러한 전쟁의 정당성은 그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작가는 작품은 통해서 민족, 국가라는 개념을 떠나 전쟁의 진실은 정의의 왜곡된 실현에 있다는 메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정의라고 명명된 집단의 신들림이 결국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같은 종에 가해지는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한국전쟁이라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 민족이다. 그 정의때문에 동족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분단이라는 길로 들어선지 반세기도 훌쩍 지나버렸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전쟁이 몇몇 골수분자들에 의해 그 단초가 제공되는 것이지만 결국 대다수의 인민들 역시 정의라는 개념하에 철저하게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결국 전쟁의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이다. 젊은나이에 독일 나치의 친위대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했던 아돌프 카우프만의 "온세상의 아이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배우면 언제가 세상 모든 인간들이 전멸하고 말거야"라는 독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너무 태연하게 정의라는 단어를 잘도 갔다 붙이곤 한다. 몇 십년전 이땅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듯이 정의는 어찌보면 아주 위험한 단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의는 결국 모든 인류가 품고 가야하는 대의인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 사용방법을 곡해하거나 오인하고 있을 뿐 정의는 항상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작품들이 전쟁의 잔혹함과 비참함을 통해 경개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번 <아돌프에 고한다>는 비록 만화의 형식을 통하고 있지만 상당히 수준 깊은 철학서라고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로 하여금 전쟁과 정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책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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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밖으로 뛰어야 산다 - KOTRA 조환익 사장이 젊은이와 비즈니스맨에게 보내는 성공 메시지
조환익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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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모기지의 불량사태를 단초로 폭발한 미국發 금융위기는 세계경제에 엄청난 먹구름을 드리웠다(아니 지금도 진행중에 있다). 세계경제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가히 富의 폭발을 이루어 내면서 그동안 이룩한 인류 역사상의 그 어떠한 부보다 비교도 안될만큼 놀라운 실적을 아주 짧은 시간에 달성하면서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경제질서가 완벽하게 자리잡게 되는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금자탑은 세계대공항이라는 유사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으면서 각국의 보호모역주의의 대두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그렇지만 인류의 부의 행진에 또다른 구원투수인 존 매이너드 케인스가 등장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게 되고 이러한 위기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1980년대 잠시 찾아왔던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위기를 미국의 카우보이 레이건과 영국의 당돌한 여자 대처의 진두지휘아래 신자유주의라 명명된 새로운 구원투수에 의해 아주 효과적인 세이브를 기록하게 되면서 신자유의주의호는 순항을 하게 된다. 


결국 그 모토에서 엿볼수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절대자유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세계 이데올로 기의 양대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한층 탄력을 더 받게된 신자유주의는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정해진 수순이라고 봐야 할 지도 모른다. 제조업 위주의 시스템에서 금융서비스업으로 탈바꿈한 신자유주의는 모든것을 금융시스템에 맞게끔 변모시켜 버렸다. 모든 것을 유동화시킬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다양한 금융 파생상품을 만들어 내었고 이러한 파생상품을 주고 받는 경제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결국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만든 덫에 걸린 꼴이 되어 버렸고 세계경제는 순식간에 대공항이라는 암담한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여파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극동의 작은 나라 우리에게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다가왔고 IMF라는 초유를 사태를 겪은 우리에게는 카운터펀치에 버금가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로 강제적인 경기부양과 실업율의 증대를 방지하는 프로그램을 단행하고 있지만 그 해결방안은 사실상 손에 잡히질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지금의 위기난국을 풀어가야 하는가? 


<한국, 밖으로 뛰어야 산다>는 바로 이러한 시점에 주목해야할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일제감정기와 한국전쟁등 굴직한 현대사를 경험하면서 대한민국의 출발은 공정한 게임의 룰에서 한참을 비켜난 시점에서 달리기 경주를 한셈이다. 하지만 당시의 모토였던 팔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해외에 팔아 달러를 벌어 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첩첩산중의 시골아낙네의 머리카락을 회수해 가발로 가공하여 수출할 정도로 대외무역에 막대한 비중을 두었고 결국 이러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인해 OECD가입국, 세계10대 경제대국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갑을박론의 말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같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아닌 해외에 그 촛점을 맞추는 전략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일국의 최고 권력자의 책상에 아침마다 보고되었던 수출동향보고서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정책으로 그나마 지금의 경제상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와중에 묻혀버린 노동자의 인권문제와 정경유착등의 부조리 문제는 또다른 아픔 상처를 남기고 있지만 긍정적인 면을 우리 스스로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저자은 KOTRA사장으로 그리고 평생을 해외수출관련 업무에 종사한 이로서 지금의 경제난국의 해법을 다름아닌 해외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갖추고 있는 부존자원 하나없이 자동차, 조선, 반도체, LCD, 휴대폰등 세계경쟁력을 갖춘 우리의 기술력을 폄하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듯이 지금의 힘들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저돌성과 끈기인 것이다. 사실상 IMF는 몇몇 대기업의 과잉설비투자와 부동산투자로 말미암아 그 화근이 발생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생산요소에 대한 투자가 결국 IMF라는 지옥에서 단시간에 탈출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는 점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지금의 금융위기는 결국 산업의 근간인 제조업을 무시하고 돈이 돈을 낳는식의 경제시스템속에서 발발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경제는 제조업과 금융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지 제대로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극히 단순한 경제논리를 무시할 결과가 지금의 대재앙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결과는 어설프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하여 무리하게 확장일로의 정책을 감행했던 우리에겐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안겨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의 경제해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그동안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잘 해온 해외부분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길 밖에 없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을 꾈수 없듯이 가장 익숙하고 가장 잘할수 있는 분야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바로 해외경제가 그런 부분이다. 단지 수출이라는 개념의 국소적인 분야가 아닌 해외경제라는 좀 거대한 담론으로 접급하게 되면 우리에겐 아직도 무한한 기회의 장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해외부분을 흔히 샌드위치같은 처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무섭게 달려오고 있는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국가들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신흥개도국과 최첨단기술력으로 멀리 달아가고 있는 선진산업국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형국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고 아직까지 우리에겐 이러한 형태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이 남아있다는 사실 또한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샌드위치의 발상으로 사업다각화와 해외투자 및 조인터벤처를 극복할 수 있음을 사례를 통해서 우리는 확인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자괴심보다는 할 수 있는다는 희망을 가져야 할 때이다. 경영의 신인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불황을 길수록 그리고 깊을수록 좋다고 했다. 그 만큼 호황의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들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바로 지금의 이때가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해답은 다름아닌 해외에 있다. 우리가 해외로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희망의 끈은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결코 낙관도 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회의적으로 바라봐서도 될은 없을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바 있는 대한민국의 저력은 결코 종이 호랑이신세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자.
경제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모처럼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그동안 대부분의 경제저서들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지금의 경제현상의 원인만을 따졌다면 이번 책은 열려있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은 메세지들로 가득해서 한국경제의 희망을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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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4 로마제국 쇠망사 4
에드워드 기번 지음, 운수인.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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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눈에는 야만족 그리고 로마를 제외한 다른 시각에서는 개척자라 칭할 수 있는 게르만족의 대왕 오도아케르에 의해 정확히 로마의 반쪽이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사실상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한 동로마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부여받게 되지만 로마의 생명력은 자신들의 지배통치 방식 만큼이나 새롭고 끈질기게 연명하게 된다. 로마제국으로서는 최대의 위난시대였지만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국시로 새롭게 신장개업을 한 동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같은 형제이지만 이단과 이교도로 득실거리면서 그 옛날 로마 번성기의 향수에 빠져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는 형제는 이제 더 이상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였던 것이다.

서로마제국의 몰락은 이런 측면에서 보게 되면 예견된 길을 걸었고 이미 사형선고를 받는 말기암 환자에게 인공적인 생명의 연장조치로 간신히 버텨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 장대한 죽음을 그다치 수치스럽게 맞이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세계사를 둘러보아도 아주 온건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던 서로마제국은 이제 더이상 유럽의 지배자가 아니였다는 점은 분명해진 것이다.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동쪽 끝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은 새로운 도약을 길을 모색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 국교의 신이 위대한 하느님이 보우와사 또 하나의 대제를 그들의 땅에 내려줌으로써 다시 화려한 번창기를 맞게 된다. 그 구세주는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다. 로마 역사상 대제라는 칭호는 받은 황제는 단 두명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고 로마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변모시키고 동로마제국의 시조가 된 콘스탄티누스대제. 그리고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의기소침해 있던 제국을 재정비한 유스티니아누스법전으로 더 잘알려져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이다.

이런 면에서 로마는 다른 여타 제국에 비해 그 운이 좋은 제국임에 틀림없다. 아우구스투스로 부터 출발한 제국은 휘청할 때마다 구원투수들이 등장해서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게임을 마무리 짓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오현제가 그렇고 디오글레티아누스가 등장하여 제국의 분할정치를 창안하여 안정을 찾았듯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구원투수의 등장으로 로마는 유리한 카드를 쥐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을 운으로만 몰고 가기엔 무리가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로마제국만의 특수성과 탁월적이고 효과적인제국통치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비록 기독교라는 일신교가 무대의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면면히 내려오는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은 아직까지도 로마제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기에 걸출한 황제의 탄생이 가능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진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은 다양한 경로와 문헌 그리고 남아서 존재하고 있는 유적들을 통해서 알고 있는 바이지만 여기서 기번의 해석은 또 다시 로마제국의 포용력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비록 일신교 제국이었고 향후 기독교에 의해 대제라는 반열에 오르게 되지만 유스티니아누스는 황후 테오도라가 죽음을 맞고 말년에가서야 종교에 대한 맹신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대부분의 치세 동안은 극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제국을 통치할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물들을 얻어냈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형제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이탈리아반도를 어느 정도 회복했고 제국내의 법을 재정비하여 흔들리던 제국을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유스티니아누스도 결국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관련된 종교문제로 인해 치세 말년을 이탈리아 교황과의 한판 승부로 소진하게 된다. 기번은 이번에도 결국 로마라는 제국이 일어설수 있는 실마리마저도 외면해 버린 기독교에 대한 맹비난을 가하고 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테오도라가 유스티니아누스의 황후가 아니였다면 또한 그녀가 정치적인 성향이 약했더라면 로마제국의 앞길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 무의미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말년과 그리고 이어지는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보게 되는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네스토리우스파, 야고브파, 마론파, 아르메니아파, 콥트파등 수없이 많은 분파와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신학적인 접근을 통일시켜 나가게 되지만 결국 이러한 일련의 행보가 과연 로마제국에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사를 던지게 된다. 이번 권 역시 기번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와 치열한 신학논쟁 그리고 신학논쟁에서 확대되는 정치분열등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전통적인 로마사상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하는 견지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한번 상고해 보더라도 로마라는 거대한 호수는 그 샘이 마르지 않고 그 어떠한 불순물이 흘러들어와도 자체 정화능력과 불순물을 불순물로 받아 들이지 않는 위대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틀에서 로마라는 제국은 다양한 고난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형제의 한쪽을 잃고 홀로 남은 동로마 제국 역시 자신의 근본적인 사상에서 너무 멀리와 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나마 유스티니아누스의 제동으로 그 물결을 멈출 수는 있었지만 결국 거대한 일신교의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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