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서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가 딱딱하고 지루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부류의 책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걸맞게 대부분의 역사서들이 딱딱하고 지루하고 전문적인 학자들의 서책인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국내사의 경우 한시대적 배경과 정치적인 쟁점 및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보니 일반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가 녹녹치 않다고 볼 수 있다. 하물며 세계사의 경우라면 일단은 그 방대함에 멈칫거릴수 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에게 역사는 크로니클적인 암기과목 내지는 알쏭달쏭하고 헷갈리는 인물들과의 조우였기 때문에 더욱더 친숙하지 못했던 분야였다. 그렇다고 역사를 모른다고 하지도 못할정도로 많이 접하게 되는것 역시 역사이다. 근래들어 철학이나 경제학, 자연과학분야에서는 이러한 독자층을 겨냥해서 스토리텔링방식으로 일반대중들에게 좀더 쉽게 접근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좋은 호응을 받고 있지만 막상 이러한 스토리텔링방식을 역사에 접목시키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스토리텔링방식의 역사서술은 자칫하면 야사로서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쪽으로 흘러가서 역사적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괴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적 서술의 다양성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 역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고착화 때문이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면에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기존의 연대기적 서술을 과감하게 탈피하여 <욕망>,<모던주의>,<제국주의>,<몬스터>,<종교>라는 다섯가지의 테마로 세계사를 개괄하고 있는 깔끔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세계사 개괄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책장속에 자고 있는 백과사전같은 개념은 아니다. 세계사를 거꾸로 상고해 봤을때 역사 발전의 원동력 내지는 근원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이자 가장 오래된 요소인 욕망과 종교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탄생한 모던이즘,제국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에 대한 뿌리깊은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 범위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욕망편에서 커피와 홍차, 금과 철 그리고 브랜드와 도시는 인류의 탄생과 역사시대를 개창하면서 발생하게 된 필연적인 요소들이었고 향후 도시화와 민족국가 단위의 개념이 창출되면서 충돌하게되는 문명과 민족간의 대결등이 결국 인간의 작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욕망에서 그 근원을 찾는 방식과 이해도출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역사는 광기와 우연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 진다고 했듯이 역사발전의 가장 근원적인 밑바탕에는 욕망이라는 요소가 들어있다. 이런한 욕망이 종교를 탄생시켰고 그 종교를 바탕으로 국가와 제국 그리고 각종 이념들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커피나 홍차처럼 아주 변변치 못한 물품에서 비롯된 세계사의 얼룩진 이면들이 마치 또다른 욕망의 시작을 가져오는 것처럼 세계사를 떠받치고 있는 이러한 욕망들은 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이고 바로 이러한 점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는 항상 인간들의 욕망의 출구를 향해서 마지못해 혹은 떠밀려서 흐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점인 것이다.  

당초 이 책을 읽기전에 약간의 우려했던 점은 나 역시 아직까지 일본이라는 강력한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나 몬스터장에서 저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일본을 서술해 나갈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의 기본적인 서술방식이 비판적인 관점보다는 이러한 원인으로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형식으로 취하고 있는 관계로 일본제국주의의 행태나 만행에 대한 심도깊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고 있는 점도 다소 아쉽지만 그래도 일본학자라로서 제국주의와 몬스터에 일본을 여러차례 거론하면서 독자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자체로 위안을 삼고 싶다.  


전반적으로 아주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테마속에는 심도깊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는 이렇듯 쉬운듯 하면서도 약간만 깊이 들어가면 어려운것이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역사적 접근방법에 차별화를 둔 이번 기획물은 여러가지 면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기술적인 면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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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키친>은 요즘 대한민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처녀작을 세편(엄밀히 말하자면 두편이라고 해야겟지만)을 모은 단편집이다. 첫 작품 키친과 이어지는 만월은 키친의 뒤이야기라고 보면 되지만 마지막 작품인 달빛 그림자는 앞선 작품과는 별개의 내러티브이다. 미카게와 유이치, 사츠키와 히토시가 등장하는 각각의 내러티브는 독립적인 영역을 각자 가지고 있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플롯으로 전개 된다고 볼 수 있다. 키친과 달빛 그림자의 전체적인 플롯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이별 그리고 그로인해 마음에 상처받은 아픔의 치유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가족,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묵도하게 되고 또 이별하게 되고 이로 인한 아픔을 가슴속에 담아주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힘든 것이다. 특히 남아있는 사람에게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상상치 못할 정도로 많은 시련을 가져다 준다.

작가가 그려내는 두편의 이야기는 바로 흔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이별이야기 그렇지만 한없이 아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미카게와 사츠키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거창하게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일상생활에 묻어나게 그리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을 통해서 결국 자신들의 상처를 꿰메는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미카게는 키친을 공간으로 음식을 통해서 죽은 할머니와의 의미있는 이별을 준비하고 사츠키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애인 히토시의 죽음을 강과 다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아름다운 이별을 고하게 된다. 어릴적 일찍 고아가 된 미카게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면서 유독 집안중에서 주방에 애착을 갖게 된다. 할머니 사후 덩그러니 남겨진 집안에서도 주방에서만이 간신히 자신의 감정을 추슬릴수 있을 정도로 주방에 집착하게 되고 주방에 있으면 마치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은 것 처럼 느껴진다. 이후 유이치와의 조우를 통해서 그리고 유이치의 엄마(사실은 아버지)죽음 그리고 상호간에 느끼는 아픔과 끌리는 감정들, 미카게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지속을 주방의 연속이자 주방의 산물인 음식과 결부짓게 된다. 결국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서서히 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고 자신과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새로운 연인과의 사랑을 시작한다. 또하나의 이야기인 달빛 그림자 역시 연인인 히토시와 산책했던 길을 잊을 수 없어 매일같이 그길을 따라 조깅을 하면서 연인을 잊을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 길은 죽은 연인의 추억과 그리움만을 더 키울 뿐이다. 뻔히 알면서도 조깅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차마 그 사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별이었기에 연인의 웃은 모습이라도 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에 매일 아침 그 길을 조깅하게 된다. 우연히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우라라를 만나 그 길위에서 사츠키는 한없이 웃는 히토시를 만나고 비단 꿈이나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강건편 다리를 지나 영원히 연인을 보내게 된다. 이 영원한 이별이 오히려 사츠키에게는 한번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그리고 이제 정말 가슴속에 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가오게 된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바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평범한 이야기를 그녀답게 아주 잔잔하게 수면에 물잽이 일듯이 편안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비록 중간에 등장하는 트랜스잰더 이야기나 죽은 애인의 세일러복을 입고 다니는 약간의 괴이한 설정을 하고 있지만 이는 우리와 다른 일본의 또다른 문화적 현상일뿐이다. 하지만 이 특이하게 설정된 인물들 역시 각자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의 아픔을 자신들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극복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키친은 등장 하는 모든 인물들이 이렇듯 서로 각각 다른 이별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구도이다. 그러면서 서로 각각 이별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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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 - 잘못된 5대 금융상식과 5대 금융명제
신장섭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국내 굴지의 경제연구소, 한국은행, 정부, 그리고 IMF에서 내년 한국경제성장율을 예상보다 높이 책정했다는 보도가 슬슬 흘러나오고 있다. 이제 불황의 바닥을 쳤다. 유동성확장에 대한 준비로서 이제는 출구전략 검토를 운운하던 우리 경제에 지난주 엄습한 두발이發 쇼크는 또다시 국내 금융시장을 아노미상태로 몰아넣어 버렸고 일반 개미투자자들은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뱉어내야 했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를 힘들게 넘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물론 그 여타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와 연구기관의 전망치가 나오지만 IMF위기때나 이번 세계금융위기때도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들어야만 했던 우리에게 어디가 그 끝인지에 대해서 정말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IMF권고와 워싱턴 컨센서스가 주창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 세상 어느 국가보다 충실하게 모범을 보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이번 세계금융위기에서 또다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도대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금융시스템을 가져와 10년가까이 학습하고 외환보유고 역시 세계6위를 기록할 만큼 풍부했다고 자부했던 우리에겐 더할 나위없는 낭패감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IMF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몇몇 국가의 국소적인 원인으로 그리고 당시 IMF를 비롯한 서구선진국들의 표현처럼 낙후되고 경직된 금융시스템과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전반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인하여 우리가 자처한 결과라고 한다면 이후 IMF의 처방전과 선진산업국의 선진기법 금융시스템과 금융시장을 한치의 속임 없이 활짝 열어 재쳐 자유화를 실천했는데도 이번 금융위기에서 영국과 브라질처럼 몇 안되는 이중고(경제침체+외환위기)를 겪고 있으니 더욱더 환장할 노릇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선진금융시스템을 받아 들인 우리에게 문제가 있던지 아니면 선진금융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금융전쟁 한국경제의 기회와 위험>은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로 IMF위기에 대한 남다른 이론을 주장해서 주목을 받았던 싱가폴국립대 신장섭교수의 또다른 역작이다. 저자가 지난번 저서에서 IMF위기의 원인과 그 대처방안에 대한 논증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금융주권을 포기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우리의 환기를 일깨우고 있다. 저자는 그동안 정사(정설)로 여겨져 온 5가지 명제에 대해서 조목조목 그 반증을 하면서 결국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거한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허상에 대해서 강도높은 비판과 그 대응방안에 대해서 논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라는 도그마가 제시한 펀더멘틀의 강화 그리고 자유로운 금융거래를 통한 펀더멘틀의 강화만이 제2의 IMF를 겪지 않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한 우리는 그동안 금융자유화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충실하게 이행해왔다. IMF의 권고대로 금융기관의 BIS강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자유환율변동제 도입등을 통해서 우리는 슬기롭게 IMF위기를 조속한 시일내에 벋어 나고 서서히 정상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또한 국제적인 위상에서도 G7에는 미치지 못하나 G20이라는 중심국의 위치로까지 올라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체질적 개선으로 우리는 선진국 반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보여주었던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조차 그 규제의 범위에 유통성을 가지는 BIS기준을 오히려 12%대로 상향함으로써 국내경제를 더 혼란으로 빠트리고 세계6위라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서도 환율방어를 하지 못하여 환치기보험 형식으로 가입한 키코(KIKO)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이번 금융위기 피해자중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을 이렇게 당하다 보면 이제는 그런 금융시스템자체에 대한 재 검토가 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책입안자들이나 일부 관련 전문가들은 워싱턴 컨세서스에 의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사실 이번 금융위기에서 그다지 피해를 적게 본 국가들(중국,인도,싱가폴등)의 면모를 보면 물론 강력한 내수시장의 바탕이 있었던 점도 있지만 나름대로의 금융정책에 있어서 자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싱가폴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바스킷환율제도와 금융의 규제를 통해서 외환보유고와 적절한 환율유지로 이번 금융위기를 최소화 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러한 조절시스템을 포기함으로써 그 어떠한 조치를 할 수 없었고 급기야 스왑이라는 극단적인 조치와 미국의 IB은행(투자은행)들의 국유화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진정국면을 맞이할만큼 우리 독자적인 조치의 약발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우리는 우리 경제에 대한 칼자루를 쥐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우리를 비롯한 세계에 많은 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동안 신앙처럼 믿었던 글로벌 스탠다드는 없었다는 점 아니 한마디로 말해 글로벌 스탠다드는 선진국만의 제도였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를 IMF극복사례로 글로벌 스탠다를 강조했던 점 자체가 모순이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IMF구제금융을 받은 나라치고 향후 경제발전에 성공한 사례가 대한민국이외는 없다는 점이 바로 IMF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가 문제가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IMF위기를 맞이했고 그리고 친철한 IMF씨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위기를 탈출했다고 믿는 것이 정설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100%맞는 말이 아니다. 단기외환부채의 급증과 일부 해외 투기세력의 외환유출로 인해 IMF위기를 맞이했다고 하면 너무나 큰 음모론에 동조하는 것일까? IMF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그동안 과잉투자했다는 기업들의 기반이 있었기에 실물경제의 회복속도가 탄력을 받았다고 하면 이것 역시 음모론으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물론 IMF위기는 이러한 음모론과 우리의 경제정책 실패에서 온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네들이 강조한 글로벌 스탠다드를 수용한 지금의 금융위기는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저 운이 없다고만 해야 하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논거들에 의거해서 향후 우리 금융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제도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그 해결책을 각 나라의 역사와 제도를 중시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전반에 걸친 현상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이는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개념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성에 기인한다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금융주권에 관해서는 시장에 맡겨두는 것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례로 현재 아시아에서 자유변동환율제를 도입한 나라는 일본과 필리핀 그리고 대한민국 이렇게 3나라 밖에 없다. 일본이야 선진국이다는 논리 그리고 필리핀이야 미국의 제2중대라는 개념 그러면 남는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물론 그동안 시행해 왔던 제도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선진산업국들의 눈치보 봐야겠지만 미래를 봐서라도 금융주권의 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글러벌 스탠다드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선진산업국의 입맛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국유화도 하고 달러도 맘껏 찍어내고 이런것이 바로 글러벌 스탠다드의 실체인 것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글로벌 스탠다드의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면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차려진 밥상에서 한줌의 힘들임도 없이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설겆이는 우리가 해왔던 것이고. 

이제 두번의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터득한 진리는 다름아닌 우리나라 제도와 환경에 맞는 금융정책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결국 총성없는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실탄을 축적해야 하는 것이고 이 실탄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탄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만의 통제가 가능한 시스템이 이었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번 금융위기같은 파도는 언제든지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파도를 시의 적절하게 이용하여 타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번처럼 또 한번 그 파도에 휘말리게 되면 정말 회생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갈수록 파생금융상품과 각종 펀드주의 그리고 금융에 대한 공격들은 거세질 것이다. 이러한 때 국부를 지킬수 있는 칼자루를 우리가 쥘 것인지 아니면 아예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인지 이제 그 해답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앞으로 이런 데자뷰가 오지 않는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에게 맞는 제도와 정책을 캐취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못담그랴는 말이 있다. 결국 장맛은 구더기의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것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생각하면 우리 금융정책에 산재하는 구더기를 줄여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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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명의들 - 중국 역사 최고의 명의 5인의 세상을 살린 놀라운 의술 이야기
쑨리췬 외 지음, 류방승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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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편작, 화타, 그리고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의 유명한 명의들이다. 한때 허준이나 대장금등이 드라마로 방영되어 동양의학의 진수를 일반인들에게 새삼 각인 시켰던 적이 있었다. 산업혁명과 기독교를 내세운 근대화라는 물결속에서 동양의 모든 가치는 부정되었다. 근대화==서구화라는 등식에 의해 그동안 수천년동안 진리처럼 여겨졌던 동양의 사상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사상적 담론은 물론이고 과학과 합리화라는 도구에 의해 동양의학도 부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첨단기술과 과학을 앞세운 서양의학에 동양의학은 그저 비합리적인 민간의학쯤으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서서히 극복하면서 동양의 제모습 찾기가 진행되고 이제서야 동양의 홀로서기가 어느정도 자리잡아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 <천고의 명의>라는 서책은 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서양철학이나 과학, 그리고 의학을 보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적재적소의 문제점을 바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한다. 의학만을 예로 들더라도 서양의학은 질병의 근원인 질병이나 상처부위를 직접 절개하거나 치료하여 그 효과를 바로 발현하기에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신속함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치료방법인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동양의학은 그 치료의 방법이나 기간등이 서양의학에 말하는 적재적소의 치료법과 신속함과는 사실상 거리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양의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철학적인 문제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래로 동양의 철학적인 바탕은 눈에 보이는 현시적인 가치 보다는 보이지 않은 근원적인 가치에 매진 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사상을 비롯하여 중세의 주자학, 양명학등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카테고리에 의한 알고리즘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의학적인 부분에서 서양은 발병한 질병에 그 근원적인 치료방법을 연구하고 해결하는 쪽으로 발전을 하였다면 동양의학은 질병보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몸상태에 초점을 두고 연구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결국 이는 근대화라는 담론에서 서양의학에 밀리는 현상을 가져 왔지만 복잡해지는 현대사회구조에서 현대의학의 맹신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등이 등장하면서 치료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국이나 우리의 전통의학은 오행과 음양이라는 철학적인 문제에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인간에게 발병하는 모든 질병은 결국 외부요 인보다는 인간 자체의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발병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인간의 심성연구가 우선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서양의 이런한 현격한 시각차이에서 굳이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하면 서양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발전의 기준 역시 지금은 모호할 따름이다.  

이번 천고의 명의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는 동양의학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장중경의 개체의학을 통해서 주먹구구식이었다고 폄하했던 동양의학이 인간 개개인의 개별적인 성향에 맟추어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같은 증세라도 그 처방을 달리하여 치료하는 다양성등을 통해서 결코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점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가장 근원적인 인간자체에 대한 고뇌와 연구를 볼 수 있다. 서양의학이 테크놀리지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동양의학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철학적인 요소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질병을 우선시하기보다는 그 질병의 발병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먼저 한 인간의 심성에서 치료방법을 찾은 것이 바로 동양의학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적인 상식이 없는 입장에서 어느 방법이 우수하다고 논할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인간중심적인 치료방법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소 시일이 소요되더라도 근원적인 발명원인의 제거가 결국 더 효과적인 치료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바로 직접적인 효과를 거두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지금의 시대에서 시대착오적인 방법일 수 도 있겠지만 옛말에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근원적인 원인에 대한 치유많이 재발을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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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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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양차대전을 기화로 세계 중심의 축은 신생국가인 미국으로 옮겨갔고 세계사를 통틀어 팍스 로마나만큼의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면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비단 9.11사태와 그로인한 끼워 맞추기식 보복과 근래발생한 서프프라임모기지사태로 그 위상에 손상을 입긴했지만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것 역시 사실이다. 프랑스 혁명이 태동하기전 기존 종교에 대한 염증과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낯선땅에 첫발을 디딘 이들에게 신대륙은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꿈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광활한 대지, 풍부한 자원 그리고 속박 받지 않는 그들만의 자유 그리고 이 신생국가는 국가설립의지에도 담겨 있듯이 철절하게 개인의 자율의지를 강조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향해서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질주했다.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와 독립전쟁이나 내전을 거치면서도 서서히 유일무이한 강자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탄생배경에게는 그들만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전세계인들이 동경하는 <아메리칸 드림> 모든 개인에게 그 어떠한 차별도 없고 개인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그래서 특히 개도국 사람들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바로 그 꿈 아메리카 드림이 지금의 미국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프론티어정신이 깃든 아메리카 드림은 전세계인들로부터 찬사와 동경을 받으면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후발 개도국들에게 또 하나의 표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급격한 산업화를 일구어 냈던 신흥국가들에서는 그 정도가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까지 번지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 만큼 아케리칸 드림은 상당히 설득력있고 미래지향적인 꿈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9.11사태에 대한 반응이나 전세계적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바로 이 신기루 같았던 아메리칸 드림에 하나 둘씩 의문점을 제시하기 시작하였고 EU라는 거대한 집단이 대두되면서 아메리칸 드림은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다름 아닌 미국인에 의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게 된 동기를 마련했다. <소유의 종말>,<노동의 종말>로 국내에서도 익숙한 제러미 리프킨은 그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인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을 비교 분석하고 왜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로 접어들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 저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허와 실을 분석하면서 미국인들의 각성을 일깨우고 있지만 비단 이점은 미국인들만이 아닌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 우리처럼 미국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그냥 지나칠수 없는 문제이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모범생을 자처해온 우리의 경우는 이처럼 변화하는 패러다임을 놓칠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포용성>,<문화적 다양성>,<보편적 인권>,<삶의 질>,<지속 가능한 개발>,<평화 공존>등 6개분야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아닌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비록 지금 유럽공동체가 저자나 다른이들이 생각하는 만큼 궤도에 올라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유럽에서 보여준 일련의 형태와 유럽인들의 의식구조의 변화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유럽피언 드림의 시대는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유는 유럽인들의 각고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미국인들 스스로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으로는 미래에 대한 인류의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6가지 분야에서 조목조목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피언 드림을 비교하고 왜 유럽피언 드림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구절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피언 드림의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고 바로 이점에서 이제는 왜 유럽피언 드림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지배하라) 하시니라"

과학기술의 맹아인 미국이지만 성서를 가장 완벽하게 해석하고 아직도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50%를 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 구절을 해석해 나가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충실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포용성, 문화적 다양성, 보편적 인권, 삶의 질, 지속 가능한 개발, 평화 공존이라는 더불어 생존한다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대리인 자격 즉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위감과 미국인만의 카우보이 정신이 합쳐서 사회가 없는 개인의 자율성만이 강조된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처럼 글로벌시대를 살아가는데는 낡은 생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유럽인들은(물론 전부다는 아니지만)하나님의 대리인 자격인 아닌 자연과 공생하는 파트너로서 그리고 관리&보호자의 역활로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하겠지만 이러한 시각차이에서 출발한 양쪽의 드림은 그 결과물에서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비단 지구 온난화와 환경오염을 방지하기 위한 범세계적 논의와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논의 대상에서 항상 미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 전쟁방지를 위한 핵무기감축등의 협약에서도 항상 빠진다는 점등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바로 이러한 지배라는 의식구조가 아메리칸 드림의 근저에 깔려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수렵 채집의 시대를 출발점으로 농경시대를 거치면서 획기적인 비약을 했다.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야생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자연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자연을 관리나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지배 내지는 다스림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이러한 지배의식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배나 다스림의 결과는 냉혹한 현실로 우리 인류를 내몰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비단 자연과 환경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등 다양한 분야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서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왔고 인류가 다시금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 새로운 대안으로 저자는 관리 보호란 기본적인 틀에서 출발하는 유럽피언 드림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피언 드림은 전세계적인 비전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개별국가적으로도 많은점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로 인해 그 정신적 뿌리마저도 찾기 힘든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과 꿈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서거전까지 손에 놓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지금 우리시대에 만연한 지배의식의 폐단 그리고 포용성 부족, 다양성 없는 획일성등에 대한 기난긴 숙고였지는 않았을까 싶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브리타니카나 팍스 아메리카나나 평화가 절정을 달했던 시기에는 앞에서 언급했던 포용성,다양성,보편적 인권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천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들 제국의 평화구축이 실패했던 것은 공존이라는 개념보다 지배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임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글로벌시대를 맞이한 인류에게 과연 어떠한 드림이 인류를 위해 올바른 꿈이 될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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