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7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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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한 담배연기, 어두운 조명, 그리고 재즈와 재즈의 박자에 몸을 맡기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선남선녀들 영화 <에덴의 동쪽>은 시대의 반항아이자 자기 신념이 강한 제임스 딘이라는 불세출의 히이로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재즈,청바지,제임스 딘은 당시를대변하는 문화적 코드이자 콘텐츠로서의 역활을 수행했다. 비록 세계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었지만 전후시대에 대한 사회 각층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과 개인들 특히 젊은층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가 바로 비트문화라는 새로운 충격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리듬 앤 블루스(R&B), 재즈, 마리화나, 구속받지 않는 섹스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속 화자인 셀 파라다이스는 작가 자신의 현화이고 그의 평생친구였던 닐 캐시디는 딘 모리아티로 현화시켰다. 소설속 화자인 셀과 그의 나이 어린친구이자 정신적 지주 역활을 했던 딘과 미국 대륙을 東에서 西로 그리고 南에서 北으로 히치하이크를 통해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들의 삶과 그 삶에 배여있는 우울,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미국이 대표적인 비트문학의 선구작품의 반열에 올라있다.

작가는 전후 미국사회의 상반된 즉 극단적인 사회적 현상을 작가의 눈과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쟁특수로 인한 부유층의 증가와 그와 상반된 늘어나는 거리의 불랑아층 그리고 이쪽 저쪽에서도 소속감을 찾질 못하는 전후 세대 젊은층의 분출적인 욕구를 <길 위에서>라는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잭 케루악의 비트문학은 1955년 개막한 <에덴의 동쪽>의 제임스 딘을 통해서 당시 미국 젊은층의 변화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립심이 강하면서도 그 어떠한 상황에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젊은층의 탄생을 작가는 미리 경험했고 그 경험을 그대로 활자화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방탕함과 무절제(물론 기존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무질서나 무절제속에는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삶 또한 우정과 사랑으로 집약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미국대륙을 횡단하면서 길 위에서 그 절망과 고독을 느끼면서도 희망이라는 끈을 단 한번도 놓칠 않고 있다. 
 

길이라는 의미가 갖고 있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화적인 의미를 내포하면서도 동시에 실증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교통수단으로서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서의 의미등 우리 인간들은 이렇듯 길에 대한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길 자체에 유독 집착하기도 한다. 임제선사는 길 위에서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는 아주 극단적인 선문답을 던졌다. 서산대사는 눈덮인 길을 걸어갈때 더욱더 조심하라고 했다. 뒤에 따라 오는 이들이 자신이 걸어갔던 발자국을 보고 오기 때문에 더더욱 첫 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삶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는 그 누구도 제시해주지 않으며 역시 어느 누구의 길을 따라 걸어갈 수 도 없는 것이다. 삶에 종착역에 이르는 길은 수만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판단은 자신만의 몫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 <길 위에서>는 대략 3여년 동안의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기난긴 여정이다. 그 기간동안 셀과 딘은 같은 길 위에서 같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도 서로 다른 희망과 삶의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고뇌와 방황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길 위에서 찾게 된다. <길 위에서>는 1950년을 전후한 미국 전후세대 젊은층의 아노미같은 공황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경자체가 미국전역을 다루고 있어 소설을 따라 동반여행한다는 느낌을 불러오기도 한다. 히치하이크방식의 여행에서 보여주는 짜릿함과 고단함 그리고 한순간 분출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살아있는 젊음을 느낄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비단 문화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삶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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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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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우리에게 9.11테러라고 알려진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세계의 중심이자 선도국가라고 자타가가 공인했던 미국의 심장부에 난데없는 자살테러로 인하여 세계를 공포와 경악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었다. 가족과 친지와 연인과의 평화롭고 행복했던 밤을 보내고 각자의 일터로 출근해서 간단한 커피타임을 가지기도 전에 세상은 한줄기 섬광과 그리고 이어진 암흑, 절규, 생과사의 갈림길로 나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고 친구를 잃었다. 민족국간의 선전포고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이라는 개념이 아닌 어느날 느닷없이 삶의 모든것을 잃어버렸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도 없이 한순간에 쓰나미처럼 모든것을 휩쓸어가벼렸다. 그리고 이제는 남겨진 이들에게 지울수 없는 상처만이 가슴한곳에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바로 9.11테러를 다룬 작품이다. 세계무역센타에 회의가 있어 이른 아침에 나간 아빠 그리고 등교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서 부재중 메세지속의 아빠 목소리를 듣고 그저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오스카, 시간이 흘러 텅빈 관만을 매장할 수 밖에 없었던 아빠의 장례식 그리고 어느날 아빠의 서재에서 발견한 알수 없는 정체불명의 메모와 남겨진 열쇠 하나의 비밀과 아빠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어린 주인공 오스카 셀의 여정을 통해서 서서히 사랑하는 아빠를 잃어버린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러티브만 담고 있다면 다소 싱거울 수 있을 것이지만 작가는 오스카 셀의 알려지지 않은 할아버지에 대한 내러티브를 추가함으로써 시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또 하나의 플롯으로 작품전반을 통찰해가고 있다. 세계2차대전의 와중에서 사랑하는 가족, 연인 그리고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자신의 아이를 잃어버리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린 할아버지와 자신의 언니의 연인인 할아버지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할머니의 숨겨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런 플롯은 외상후 스트레스증후군을 앓아가는 남겨진 이들에게 그저 슬픔과 증오만이 남겨지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아홉살의 천재적 기질을 지닌 오스카라를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비극을 유쾌한 흥분과 그러면서도 한없은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아빠가 남긴 흔적을 찾아서 뉴욕시 전체를 마치 탐정이 수사를 진행하듯이 한사람씩 찾아가면서 아빠가 혹시라도 남긴 흔적을 되집어 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명의 블랙을 통해서 기쁨과 슬픔 그리고 삶의 의미를 알아가게 된다. 어쩌면 아빠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홀로 남겨질 자신의 아들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편주를 남겨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두명의 아들과 두명의 아버지 결국 3대의 걸치 가족사를 다루고 있지만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주면서도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세계2차대전과 9.11이라는 참사를 통해 한 아버지는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단절시켜 버렸고 그리고 다른 아버지는 끊임없는 소통을 남겨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상반되는 아버지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한 아버지는 남겨둔 아들에게 전하지는 못했지만 끊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남겼고 다른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받지 못하 아버지의 정을 죽어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차이밖에는 없다. 결국 남겨진 이 두사람은 아들과 아버지의 흔적을 결국 텅빈 관에 고스란히 남겨두게 된다. 할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 손자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그날 밤 아빠의 묘지에서 텅빈 관을 열고 미안함과 그리움을 고스란히 묻고 일어서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전쟁과 테러라는 끔직한 트라우마를 통해서 치유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요란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섬세하게 마치 모노드라마 같은 전개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아픔의 깊이를 전달해 주고 있다. 특히 타이포 그래픽 형식을 빌러 문자나 글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깊이를 표현함으로서 작품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스스로 발견하게 하고 스스로 각자의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마지막 무역센타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의 사진을 거꾸로 나열함으로써 그날의 일이 사진의 전개처럼 거꾸로 흘러갔으면 하는 애달프고 간절한 마음이 배어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표현하기 힘든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 작가는 9.11테러라는 비극적인 일은 결코 단 한번도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왜 발생했으면 이후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라는 그리고 또다른 공포인 세계2차대전에 관해서도 어떠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단지 이러한 비극적인 일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적인 극히 개인적인 관점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플롯을 통해서 작가는 개인적이지만 한층 더 심오한 슬픔과 이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어떠한 제도적 해설보다 개인의 삶에 촛점을 맞춤으로서 진정한 슬픔과 그 상처를 치유해가는 인간의 삶을 통해서 정치적의미를 희석시키고자 하는 숨겨진 의도를 보여준다고 할까...

남겨진 이들에게 자신을 떠난 사람들의 의미는 그 어떠한 정치적 제도적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저 상호간의 소통에서 이런 제도적인 의미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개인적인 소통과 화해만이 우리가 형식적으로 부여하는 제도적 정치적의미의 화해를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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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1859년의 과학과 기술
피터 매시니스 지음, 석기용 옮김 / 부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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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들에 의해 일명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진 정말 정치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철종의 재임기간이 10년째를 맞이하고, 신흥대륙 북아메리카에서 두개의 결정적인 철도 노선의 완공, 해저 케이블의 설치로 인한 격지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증기 인쇄기와 철도의 발달로 인해 거의 실시간의 뉴스가 유럽전역에서 공유되고, 한때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스포츠 패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서커스 곡예사 박물관 동물원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등장하고, 노동자들의 의식이 한층 깨어나 노조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바로 1859년에 일었났던 세계소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859년이 우리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름아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1859년을 기점으로 세계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오는 한편의 예고탄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지금의 우리나 그 당시를 살아갔던 이들이 예상치도 못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서양세계는 팍스로마나를 거쳐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승인과 이후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성쇄로 인해 흔히들 표현하는 암흑이 시대 즉 중세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종교와 신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에서 인간의 역활을 하나 둘씩 찾게 되지만 그 시작과 힘은 극히 미비했다. 다시 계몽주의와 민족국가형성 그리고 절대왕권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미비했던 인간의 힘은 한층 강화되지만 역시 아직까지도 지구의 역사가 구약성서를 해석한 종교인들에 의해 6000년이라는 연대적 숫자를 정설로 받아 들여야할 만큼 시대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물며 신에 의한 천지창조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창조가 설계되었다는 창조론이 한줌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역사는 수십억년은 족히 되고도 남는다는지 혹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신이라는 설계자에 의해 빈틈 없이 설계되고 계획되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을 통해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진화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야말로 허튼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이느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처럼 보인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859년 다윈의 <종이 기원>출판을 계기로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마치 예정된 선로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는 바로 세계사적으로 주시되는 1859년의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859년을 전후해서 발생했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 왜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나열을 통해서 얼핏 보기엔 다윈과 무관하리만큼의 시대적 소사를 통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엄청한 과학적 발전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비단 이러한 해택이 인류에게 골구로 퍼지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창조 해내고 관리하지 못한 제도적인 문제점이지 이는 결코 역사발전의 오류내지는 역행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적 풍요와 기술발달을 하루아침에 이루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1859년을 전후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다윈의 <종이 기원>의 근간이 되었고 세상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다윈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무르익은 분위기에 다윈은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생각은 다윈의 독창적인 학술이 아니다 이전부터 라마르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였고 그들은 이제 근접했던 것이다. 단지 다윈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사실을 그대로 세상에 뿌렸을 뿐이다. 바로 이점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1859년을 전후로 세상은 서서히 변화의 패러다임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단지 그 패러다임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망설이거나 주저했을 뿐이다. 이제 다윈의 등장으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가속 받게 되었고 끊없이 확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미래의 장미빛만을 예고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게 새로운 골치덩어리 역시 그 맥을 같이 하여 확대재생산 되었던 것이다. 부의 집중과 그로인한 갈등, 새로운 질병의 대두, 혼인과 이혼이라는 가족관계의 새로운 역학관계와 범죄의 증가등 각종 사회적 병폐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속에 파묻혀 고스란히 후대에 전달된 것이다.

저자는 정과 부의 두가지 관점에서 1859년전후를 파악하고 보여주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은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그 담 강의 강물은 늘 다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흐르는 강이라는 거대한 변화는 그 어떠한 누구도 거를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변화라는 거대한 강물 앞에서 머뭇거릴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강을 건너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인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한 1859년전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변화라는 강물에 과감히 발을 담갔던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긍정적인과 부정적인 것들이 담겨져 있더라도 변화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단 이미 한번 흘러간 강물을 어떻게 되돌리수 없지만 다시 다가오는 변화라는 강물에 어떻게 발을 담글건지에 대한 판단은 지금의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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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귀환 - 위기의 시장경제 경제학 거장에게 길을 묻다
마크 스쿠젠 지음, 박수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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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작금의 경제상황에 대한 대안이나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그런 경제서적은 아니다. 필자의 집필의도중의 하나인 경제학사를 통하여 과연 어떤 방식이 가장 경제적인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픈 심정에서 애덤 스미스를 필두로 하여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의 경제학 전반의 역사를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존 케인스라는 3명의 거장을 통해 경제학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하는 책이다.(물론 필자 개인적인 사상의 가미가 다수 포함되어 있지만) 

경제학이란 학문자체가 일반인들이 접근하고 이해하기엔 왠지 거리감이 많은 학문임에 틀림없지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알아야 할 학문 역시 경제학이다. 그동안 막연한 논쟁중심의 경제학에서 수학을 도입한 계량경제학의 발달로 인하여 오히려 일반대중에겐 더 난해한 학문이 되어 버린 것 또한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경제학사의 개괄을 통해 경제학의 태생에서 부터 발달과정을 한눈에 보여 준다는 필자의 의도는 일단 성공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인 편견을 제외하고는 경제학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는데는 많은 도움이 될 만하다. 
 

애덤 스미스
의 <국부론>은 그야말로 일대의 혁명적인 사상을 전파하였다 기존 중상주의자들의 논거를 한방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한 그를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그의 자연적 자유에 의한 자유경제라는 개념과 ’공정한 관찰자’의 정의와 자유, 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완전균형을 이룬다는 이론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였다. 비록 스미스의 고향인 영국에서는 맬서스나 리카아도, 밀에 의해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세이을 비롯한 학자들에겐 복음과도 같은 이론으로 전수되었고 이후 이들에게 우리는 고전학파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게 된다.


하지만 스미스의 이론은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리카도는 성장보다는 분배라는 입장에 촛점을 맞추면서 마침내 한 획을 긋은 인물을 탄생케 한다. 바로 카를 마르크스, 계급투쟁과 노동가치설을 주장하면서 국가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한 그는 결국 자본주의 자본주의 자체의 결함으로 망하고 사회주의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는 이론을 설파하면서 사회의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되고 결국 나중에 발생하게되는 전제적사회주의의 폐배를 본의 아니게 고스란히 안게 되는 불명애를 가지게 된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고전학파가 등장하게된다. 한계효용이론과 화폐수량설을 이론적 무기로 장착한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을(특히 노동가치설)을 격파하면서 다시금 시장경제를 불활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세계는 유사이래 없었던 대혼란을 겪게 된다. 대공항을 맞이하면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가 바로 존 케인스이다. 기존의 고전학파, 신고전학파의 이론을 무시하고 정부의 역활만이 기나긴 불황을 타계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나섰고 그 해법은 맞아 들어가 길고긴 대공황의 막을 내리게 한다. 이 후로 대세는 케인스주의가 세계경제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으로 인해 케인스주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루커스의 합리적 기대이론, 뷰케넌의 공공선택이론의 등장으로 케인스주의는 심각한 파국을 맞게 되면서 작은 정부가 마치 유행처럼 전세계를 강타하게 된다. 물론 기존의 케인스주의를 보완한 스티글리츠을 필두로 한 신케인스학파가 등장하여 경제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양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소련의 몰락으로 인해 마르크스주의가 동반으로 몰락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의 저작을 이해 할려고 하는 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략하게만 봐도 경제학사는 많은 굴곡과 변화를 거쳐왔다. 그 시대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이론과 학파가 등장하여 발생하고 있는 경제현상을 설명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분명히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물을 한시적이지만 세계가 공유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책은 경제학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한면에서는 긍정적인 평점을 받을수도 있게지만 필자가 신자유주의입장에서 집필하다 보니 무게의 중심이 상당히 신자유주의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사로 기우러져 있다는 점이 애석하다. 특히 마르크스나 케인스의 극히 사적인 부분(마르크스의 사생아 출산, 케인스의 동성애적인 성적편견, 경제학사전에 스미스보다 케인스나 마르크스에 대한 설명부분이 좀 더 길다는 점등)들 까지 언급하는 것은 경제학사를 다루는 책으로서는 적절치 못할 정도로 개인적인 감정이 표출된 부분이다. 그러면 그리도 자유무역을 주창했던 스미스가 말년에 밀수와 관세를 담당하는 세관고위직을 역임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난감해진다. 마르크스나 케인스의 이론은 그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그 이론들은 지금의 시각으로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필자의 극히 개인적인 견해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보여 진다. 특히 서두에 필자가 밝힌 이들 3인에 대한 서열나열방식 또한 수긍하기 힘든 것이다. 스미스, 마르크스, 케인스라는 대학자들을 1,2,3등이라는 서열로 나열한다는 발상 또한 유아적인 발상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 논거를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미국 금융위기는 마치 산불이 번지듯이 거칠것 없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우리의 경제까지 위협하고 있다. 1930년대 시작된 대공황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필적할만한 경제위기상태라는 것은 신케인스주의나 신자유주의자 다들 인지하고 있는 현실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살아가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계화라는 시장자유화 조치로 인해 전염성이 과거?? 있다. 그런면에서 정책입자안자를 비롯한 경제주체들의 사고방식 또한 과거에 비해 많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위기상황을 신자유주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왜곡된 시장개입이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신케인스주의 입장에서 보면 보다 적극적인 정부개입이 소홀했기 때문에 이런 위기가 발생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지금도 정부정책을 가지고 갑론을박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명확한 해답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바로 절대라는 개념이다. 특히 경제처럼 유동성이 활발한 분야에서 절대주의라는 고집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역대 경제이론이나 학파들의 주장을 통해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국가개입주의 극단을 달린 전체사회주의 몰락을 보았고 신시장자유화를 복음으로 선택한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의 경제위기를 두 눈과 온몸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이런 경제정책의 실패는 무슨 무슨주의를 채택하는냐를 앞서 무슨 무슨주의만이 대안이라는 절대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인한 폐해였던 것이다. 
 

리가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알프레드 마샬이 말했듯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유익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로서의 학문이 경제학인 것이지 경제학의 각종 이론으로 인해 절대주의자를 양산하는 그런 학문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철학, 사회학, 인문학, 역사학, 논리학, 자연과학등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학문들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중에 기본일 것이다.


경제는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면서 변화한다. 이 말은 경제학에 대한 절대주의적 가설이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과 일맥상통한 말인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사를 보면 각종이론과 각종학파가 존재했던 것 아닌가. 물론 대표적인 이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개방성은 적어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포용과 개방성이 없는 학문은 죽은 학문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미스나 마르크스, 케인스가 주장했던 진정한 의도를 우리가 곡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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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밤
세사르 비달 지음, 정창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밤의 꿈>, <헴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세익스피어. 그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을 할 필요가 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었던 읽지 않았던 간에 그에 대한 명성은 수도 없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영국인들은 인도와 세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고 했겠는가.  

<<폭풍의 밤>>
이 책은 이런 전설적인 인물인 세익스피어의 유언장을 토대로 그의 장례식 직후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재구성한 팩션이다.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었으나 그 역시 죽음의 손길은 피하지 못했고 살아생전 작성한 유언장이 공개되는 순간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점을 필자는 이 책의 소재로 삼고 있다.
 

막대한 유산을 남기면서 유독 장녀인 수재너에게만 대부분의 재산을 남기고 둘째 딸과 아내에겐 초라한 유산을 남긴 행동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세인들의 추측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무엇때문에 사랑하는 가족 전부에게 공평하게 남기지 않고 장녀에게만 막대한 재산을 남겼을까?
 

이 소설은 유언장의 공개로 부터 출발한다. 세익스피어의 생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유언장의 내용만으로 상당한 부분을 추측할 수는 있다. 세익스피어는 장녀를 제외한 아내와 나머지 자녀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왜 그들 사이가 안 좋았을까? 이 역시 그동안 많은 의문과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전해졌지만 정작 본인과 그 가족들 말고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 원인을 세익스피어 아내의 불륜행각을 원인을 상정하면서 소설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런 스토리라면 결과가 뻔한것 아닌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내의 불륜과 다른 남자의 자식들을 키우는 세익스피어에 대한 연민과 고통 그로인한 유언장의 작성,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장녀의 그동안의 의문 해소, 그리고 유언장의 비밀을 알게되면서 눈녹듯이 녹아내리는 그간의 감정들, 이건 정말 뻔하고 어찌보면 3류연애소설의 줄거리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맞는말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의 독창성을 돋보이는 보너스가 숨겨져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작가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체험이 작품속에 녹아들기 마련이다. 그러면에서 세익스피어의 출세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로미오가 세익스피어의 분신이고 줄리엣이 아내 앤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세익스피어의 작품 하나 하나와 그의 생애를 접목시켜 세익스피어가 아내의 불륜과 다른사람의 자식을 낳아 키우고 있어도 묵묵히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지켜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고뇌를 고스란히 그의 작품을 통해 승화시키면서 결국 <푹풍>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수재너에게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세익스피어의 작품으로 통해 세익스피어의 개인적인 삶과 영욕을 서술해간다. 청교도의 비밀집회를 우연히 목격한 이후로 마음속의 끌어오르는 복수를 접고 작품세계에 온신의 정열을 쏟아붓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폭풍>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세이스피어 자신이 걸어왔던 삶을 고스란히 작품에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필자는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유심히 보면 바로 그의 삶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자신의 연애담과 결혼, 4대비극을 통해서 불우한 가정사,<폭풍>을 통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사랑과 보상 그리고 통쾌한 복수 그러면서 화해의 메세지...
 

마지막으로 필자의 보너스가 하나 더 있다. 이 소설 한권으로 세익스피어의 왠만한 작품들의 간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챕터마다 세익스피어의 불후의 명작들 중 중요대사를 수록해서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아마도 이러한 발췌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세익스피어의 삶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은 분명 소설이다. 단지 세익스피어의 유언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집필된 팩션이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처럼 세익스피어의 아내가 불륜을 했고 나아가 남의 아이까지 낳았다는 설정은 단지 소설이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문호라는 개념보다 역시 그도 우리와 다르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익스피어도 여타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똑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그러한 감정은 같다는 것을..


다만 세익스피어와 일반이 다른점은 이러한 감정의 골을 그대로 밖으로만 표출하지 않고 그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의 불후의 명작을 보고 웃고, 울고, 분노하고 행복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통해서 희망이라는 단초를 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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