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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1859년의 과학과 기술
피터 매시니스 지음, 석기용 옮김 / 부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풍양조씨들에 의해 일명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진 정말 정치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철종의 재임기간이 10년째를 맞이하고, 신흥대륙 북아메리카에서 두개의 결정적인 철도 노선의 완공, 해저 케이블의 설치로 인한 격지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증기 인쇄기와 철도의 발달로 인해 거의 실시간의 뉴스가 유럽전역에서 공유되고, 한때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스포츠 패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서커스 곡예사 박물관 동물원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등장하고, 노동자들의 의식이 한층 깨어나 노조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바로 1859년에 일었났던 세계소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859년이 우리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름아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1859년을 기점으로 세계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오는 한편의 예고탄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지금의 우리나 그 당시를 살아갔던 이들이 예상치도 못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서양세계는 팍스로마나를 거쳐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승인과 이후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성쇄로 인해 흔히들 표현하는 암흑이 시대 즉 중세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종교와 신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에서 인간의 역활을 하나 둘씩 찾게 되지만 그 시작과 힘은 극히 미비했다. 다시 계몽주의와 민족국가형성 그리고 절대왕권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미비했던 인간의 힘은 한층 강화되지만 역시 아직까지도 지구의 역사가 구약성서를 해석한 종교인들에 의해 6000년이라는 연대적 숫자를 정설로 받아 들여야할 만큼 시대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물며 신에 의한 천지창조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창조가 설계되었다는 창조론이 한줌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역사는 수십억년은 족히 되고도 남는다는지 혹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신이라는 설계자에 의해 빈틈 없이 설계되고 계획되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을 통해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진화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야말로 허튼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이느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처럼 보인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859년 다윈의 <종이 기원>출판을 계기로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마치 예정된 선로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는 바로 세계사적으로 주시되는 1859년의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859년을 전후해서 발생했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 왜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나열을 통해서 얼핏 보기엔 다윈과 무관하리만큼의 시대적 소사를 통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엄청한 과학적 발전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비단 이러한 해택이 인류에게 골구로 퍼지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창조 해내고 관리하지 못한 제도적인 문제점이지 이는 결코 역사발전의 오류내지는 역행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적 풍요와 기술발달을 하루아침에 이루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1859년을 전후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다윈의 <종이 기원>의 근간이 되었고 세상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다윈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무르익은 분위기에 다윈은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생각은 다윈의 독창적인 학술이 아니다 이전부터 라마르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였고 그들은 이제 근접했던 것이다. 단지 다윈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사실을 그대로 세상에 뿌렸을 뿐이다. 바로 이점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1859년을 전후로 세상은 서서히 변화의 패러다임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단지 그 패러다임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망설이거나 주저했을 뿐이다. 이제 다윈의 등장으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가속 받게 되었고 끊없이 확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미래의 장미빛만을 예고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게 새로운 골치덩어리 역시 그 맥을 같이 하여 확대재생산 되었던 것이다. 부의 집중과 그로인한 갈등, 새로운 질병의 대두, 혼인과 이혼이라는 가족관계의 새로운 역학관계와 범죄의 증가등 각종 사회적 병폐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속에 파묻혀 고스란히 후대에 전달된 것이다.
저자는 정과 부의 두가지 관점에서 1859년전후를 파악하고 보여주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은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그 담 강의 강물은 늘 다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흐르는 강이라는 거대한 변화는 그 어떠한 누구도 거를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변화라는 거대한 강물 앞에서 머뭇거릴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강을 건너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인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한 1859년전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변화라는 강물에 과감히 발을 담갔던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긍정적인과 부정적인 것들이 담겨져 있더라도 변화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단 이미 한번 흘러간 강물을 어떻게 되돌리수 없지만 다시 다가오는 변화라는 강물에 어떻게 발을 담글건지에 대한 판단은 지금의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