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1 - 제국의 부활
박문영 지음 / 평민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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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노론일색이었던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개혁적인 정치를 추진하던 중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후대를 위해 규장각 비밀금고에 숨겨둔 금괴, 천문학적인 환산비용의 가치를 가진 금괴를 고종의 아버지이자 조선왕조사상 최초로 생존한 대원군 이하응의 꿈속에서 그 비밀의 단초를 계시 받아 마침내 황금의 정체를 찾게되고 이 황금를 발판으로 경복궁의 재건과 왕실의 위엄 그리고 망국이후 이어지는 독립항쟁의 거름이 될 수 있었다는 소설의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내게 할 만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사중에서 특히 근세사인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는 한민족에게는 아무래도 아킬레스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즉 이 말은 그 만큼 이시기에 대한 애환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서구기독과학주의를 근대화의 이정표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이시기의 갈팡질찰하게 보였던 정책의 혼선들이 아쉽게만 보일지 모른다. 항상 역사에 가정이라는 없지만 만약 이 시기에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빨리 조선이 근대화를 적극 수용했다면 과연 이후의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러한 가정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가정을 외면해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에 대한 가정 보다는 미래에 대한 바램이랄까 작가는 이 소설에 마지막에 <제국의 미래>라는 짧막한 내용으로 소설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추구한 플롯을 고스라히 담아내고 있다. 204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재미교포 후손이 당선되고 중국땅에서도 조선족 후손이 총리로 선출되는등 전세계 주요국의 지도자가 한민족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사람들 그야말로 제국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픽션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도 없는 일임을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하였을까? 작가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고종에 대한 현대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그 실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당히 냉정한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중 선조만큼이나 부정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자신의 재위기간에 나라를 거들냈다는 점 그리고 왕후민씨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는 점 무엇보다 망국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고종은 역사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러한 모든 멍에를 고종에게 짊어지게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는 점을 느낀다.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정조의 죽음인해 뇌사상태에 빠진 시한부인생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기간동안 몇몇 절호의 기회가 있긴 하였지만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서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근대국가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는 어쩌면 호모에렉투스에게 현생인류의 지적능력을 바라는 것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변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모든 역사적 책임을 고종에게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고종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 아니다라는 것은 알 것이다. 단지 작가가 설정한 내러티브는 지금같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고종과 그 시대 그와 함께 했던 인물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그 보다는 대한제국에 대한 미련이 많다 그래서 더 제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내러티브가 독자들 가슴에 와닿길 바라는 마음이 이 소설 전반에 묻어나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조선을 집어삼키고 대동아건설 일보직전에 무너진 일본은 아직도 천황이라는 존재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의 경우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지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한제국 황실들의 비참한 가족사를 보면서 과연 이들을 비판한 우리는 무엇했는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대한제국의 비애는 그들 황실사의 비애만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비애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것이다. 그 시대에는 소설에서 보았듯이 황제도 신민도 없었던 그야말로 이권다툼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국가보다 개인의 사리사욕이 크게만 느껴졌던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를 시의적절하게 활용했던 이들에게는 천운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민족이나 국가는 뒷이야기였을 것이고 결국 망국의 책임은 지도자 한사람에게만 뒤집어 씌우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당시를 살았던 모든일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더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와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같이 싸잡아 매자는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그동안 고종에 대한 평가가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노파심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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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3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3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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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듯 연암의 발길을 따라 숨가쁘고 머나먼 여정을 했다. 물론 연암은 이러한 여정이 찰나처럼 짧게만 느껴졌겠지만 조선선비로는 최초로 열하의 피서산장을 구경하고 이교도인 반선을 만나는등 그야말로 자신의 목적을 120%달성한 여정이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번 권은 연암이 열하와 그리고 열하에서 북경으로 건너와서 북경 거리의 진기한 모습을 보고 느낀점을 위주로 기록한 일종의 박물기라고 해야할 것이다. 특히 귀국하는 길에 옥갑이라는 곳에서 역관들과 격식을 떠나 담소를 하는 도중 윤영의 이야기라는 단소를 달면서 들려준 <허생전>은 지금까지도 많은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번 권은 앞에서 말했듯이 박물기의 성격이 강하지만 연암이 누구인가 연암은 쉽고 부담없이 읽을거리에도 그만의 촌철살인같은 해학과 자기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연암을 읽으면 읽을수록 역시 프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건륭황제의 만수절을 기념하여 열하곳곳에서 펼쳐진 신기한 요술이벤트를 목격하고 남긴 환희기는 그 내용만으로도 현대의 마술 디너쇼를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듯이 리얼하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환희기의 원문은 모두 4자씩 토를 끊을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연암의 탁월한 글솜씨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연암은 말미에 화담 서경덕과 장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생물학적인 눈에 보이는 실체가 세상의 모든것이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광명정대한 눈이란 진정한 자신의 소견이 없으면 그저 창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 선비들의 학문연구를 독려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권의 하이라이트는 옥갑에서 들려주는 허생전일 것이다. 우리는 허생전을 주로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지금으로 따지면 허생은 거시적 경제흐름을 읽을줄 아는 대가였다. 특히 상품의 유통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지고 한나라 경제를 통제한다. 하지만 연암은 허생전을 통해서 당시 조선의 경제적 체력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비판함과 동시에 아직도 존명정신으로 똘똘 뭉쳐있는 엘리층의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허생은 아마도 연암 자신의 분신일 것이다. 탁상공론과 명분에 목메고 있는 당시의 지식층은 연암눈엔 마치 어린애들의 투정으로만 비쳐졌다. 북벌의 쌍두마차였던 효종과 이완을 슬그머니 끌여들여 북벌의 허와 실을 세세하게 밝혀 북벌의 허망함을 질타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암이 친청주의자라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연암은 열하일기 곳곳에서 되놈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듯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지만 연암에게 그러한 되놈에게도 배울것은 배워야 한다는 근본적인 갈망이 이었다. 연암은 손자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듯이 그토록 증오하는 적을 알아야 그 적을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암은 청나라의 제도 특히 기와나 수레, 난방장치 심지어 똥거름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철철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만큼 연암에게 청의 모든 문물은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극기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북경의 사찰과 도교사원 그리고 야소교의 성당을 관람하면서 느꼇던 양엽기에서 연암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를 보여주므로서 다시 한번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북경의 법장사라는 절에서 발견한 김창업과 홍대용의 이름을 발견하고선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고북구 만리장성벽에 새겼던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새겨볼까라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우리들이 공공건물이나 화장실등에 써갈기는 낙서의 기원은 역사적으로도 그 내력이 있는것 같다는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연암의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열하일기 전반에 걸쳐서 연암은 이용후생을 강조하고 있으면서도 주체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비단 지금의 청제국이 최강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은 있고, 비록 오랑캐라고 하지만 그런 오랑캐에게도 배울것은 분명이 있다는 점을 소중화라고 떠벌이는 조선의 비루한 선비들에게 던져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 정조가 침몰하는 조선이라는 배의 선장이었다면 연암은 알려지지 않는 조타수였다. 이는 물론 사견이지만 정조의 문체반정은 정조의 노론에 대한 히든카드였다. 정조는 문체반정의 시범케이스로 연암의 열하일기를 지목했고 열하일기는 그야말로 금서로 낙인 찍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금서지정이 오히려 세간의 불을 댕겨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서 그동안 우물안의 개구리격이었던 조선선비들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일조를 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아마도 정조는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역으로 식자층의 허상을 깨는데 연암의 열하일기를 적극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분명히 열하일기는 당시에 불온한 서적이었다. 건륭이라는 연호를 버젓이 사용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무엇보다 열하일기의 내용자체가 쓰나미와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충격 그자체였던 것이다. 왜 연암은 이렇듯 위험한 게임을 했을까 아마도 그 해답은 치서록에 담겨있는 밴댕이가 새우가 되고 새우가 가오리가 된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려고 하는 것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연암에게 진실이나 진리는 고정화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그 과정을 찾아가는 길이 있을 뿐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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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규칙 - 스티븐 핑커가 들려주는 언어와 마음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9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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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지 1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윈이전부터 막연하게나마 진화론의 개념이 대두되긴 했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인해 세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게 된다. 농업혁명, 문자발명, 산업혁명등 인류역사를 뒤바꾼 거대한 패러다임들이 있었지만 진정한 인류역사의 새장을 연 혁명적 사고는 바로 다윈의 진화론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이치를 신의 시각이 아닌 자연과 인간자체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종교의 영역을 떠나 권력을 쟁취하면서 왜곡된 인간들의 사유는 암흑의 시대 중세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는 진리였고 이 진리에 신이 아닌이상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유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사유의 틀을 뒤흔든 혁명이 바로 진화론이었다. 지금처럼 진화론에 기반을 둔 과학적사고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우리들이지만 불과 150년전만 하더라도 아주 위험한 사유였던 것이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의 어디까지 그 해석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을까? <단어와 규칙>은 바로 진화론에 근거를 둔 영역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에까지 미치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빈 서판>으로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진 저자의 언어학에 대한 고찰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윈사고의 유추는 현대 생물학뿐만 아니라 언어학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론의 범위를 생물학분야에 한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범위를 확장하면 진화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을 설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언어학만큼 구미가 당기는 분야도 없었다. 인간은 어떻게 그 수많은 단어, 특히 영어의 경우 각종 시제와 그 시제에 따른 규칙형과 불규칙형, 단수의 복수화, 명사의 동사화등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체계를 인지하고 사용하는 것은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적설계자에 의해 설계된 시스템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를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반박도 있어지만 그 논조가 강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진화론의 가장 거대한 뼈대는 자연선택적 논리에 의한 일종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연성에 근거한 현상이 아닌 나름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규칙성이 단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방대한 자료를 살펴보면서 단어의 규칙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뇌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동안 미지의 영역이었던 뇌관련 질환과 언어사용능력의 원인이 서서히 발켜지면서 단어는 일종의 패턴이라는 형식보다는 우리들 마음속의 사전에서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으로 일관되게 연결된 거대한 규칙에 의해 인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영어와 현대영어를 비교할때 고대에 그토록 많았던 불규칙동사들이 현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감소한(물론 비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많게만 느껴지지만)원인을 일종의 자연도태로 볼 수 있고 좀 더 확장하여 이러한 불규칙동사를 규칙형의 돌연변이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규칙과 불규칙을 분리하여 패턴적으로 인용해 사용해왔다는 패턴연상망 기억보다는 거대한 규칙형안에 불규칙이 존재했다는 규칙성을 보여주므로서 다윈사고의 확장이 그대로 적용됨을 다시한번 확인하여 준다. 

<단어와 규칙>은 언어학에 대한 진화론적 입장을 적용하여 진화라는 담론을 확장시키는데 기여를 하는 책이다. 물론 언어학적 전문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한 내용임은 틀림없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영어 단어들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인한 그 번역의 이해등에 의해서 이해하기 만만치 않는 책이다. 하지만 거대한 줄기는 진화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읽어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그동안 영어단어는 규칙형이든 비규칙형이든간에 암기형식으로만 인식했던 비영어권의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영어단어들의 일종의 규칙성을 깨닫게 되면 새삼 죽어만 있었던 영어단어들이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처럼 영어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어가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규칙은 생물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생물학이던 언어학이던 규칙을 거슬리는것은 불편한 것이다. 결국 불편한 것은 어딘가 어색한 것이고 어색한 것은 자연의 선택에서 제외될 확률이 그 만큼 높은 것이다. 저자는 다윈사유의 유추를 통해서 우리가 여전히 혁명적인 패러다임속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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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블루슈머 - 미래를 지배할 12가지 골든 마켓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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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시도된 적이 없는 광범위하고 깊은 잠재력을 가진 시장을 비유해서 블루오션(Blue Ocean)이라고 한다. 블루오션은 누구나 한번쯤은 망상이나 공상으로 끝냈을 아이디어를 현실의 시장에 적용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경제가 글로벌화에 진입하면서 기존의 레드오션적인 마인드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 남기가 힘든 시점에서 이러한 개척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2010>블루슈머 는 전세계적으로 무한 경쟁시대를 돌입한 경제상황에서 블루오션이라는 매력적인 시장을 보여주고 있다. 블루오션이 공급자측면에서 바라봤다면 블루슈머는 이와 반대로 소비자측면에서 바라본 시장이다. 그동안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규모의 확대를 통한 규모의 경제가 도입됨에 따라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 경제의 견인차 역활을 해왔다면 이제 그리고 앞으로의 시장은 소비자 위주의 시장으로 변모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주변에서 피부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그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기업이나 제품은 이제 시장에서 철철히 외면당하고 결국 레드오션의 영역을 넘어가게 된다. 그만큼 소비자의 힘이 전체 경제시장에서 차지는 비중이 높아졌고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변함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톡톡 튀는 블루슈머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을까?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는 세계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블루슈머들의 사례를 들어 기업 및 예비 창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시장을 볼 수 있는 힘을 던져주고 있다. 고령화시대, 웨빙시대, 단독가구시대, 동물애호시대, 매스컴시대등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그런 세대들의 기호에 맞는 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함은 물론이고 새로운 시장에서 좀 더 세분화된 틈새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시스템속에서 시장은 우리가 상상치 못할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무슬림의 히잡패션등 종교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까지도 이제는 새로운 패션이라는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듯이 시장의 크기나 종류는 이 책에 열거하는 다양한 종류를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저명한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영역이 혼합된 프로슈머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향후 새로운 미래환경에서는 시장이 이러한 프로슈머에 의해서 재편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만큼 시장주도권이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급격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더이상 공급자패턴에 맞는 시장형성은  레드오션영역으로 밀려났다. 이제 새로운 환경 블루오션이라는 거대한 대양속에서 숨은 블루슈머를 적절하게 공략할 수 있는 기업만이 경쟁이라는 각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특히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대외경제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는 무한한 시장이 열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외형적 확장이 아닌 이러한 틈새시장을 개척하여 선점하는 길이 기업 성장력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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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우리역사
信太一郞 지음, 이종윤 옮김 / 삼국시대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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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고찰하여 특이한 국가관계가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중에서도 韓日양국가처럼 복잡하고 특별한 케이스는 드물 것이다. 지리적으로 근거리에 위치하고 언어학적이나 문화, 인종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민족적 정체성이 두드러지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양국은 그 차이점만큼이나 물리적인 거리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 역시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임진왜란, 일제감정기, 한국전쟁등 우리에게 생각조차 하기 싫은 역사적 배경들은 상대방인 일본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듯이 양국은 동일한 역사적 관점을 각각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고 그러한 시각은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상을 달리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출간된 <또 하나의 우리역사>는 일본의 역사매니아가 쓴 한일역사통사로서 양국간의 역사적 시각에 대한 많은점을 시사하고 있다. 오히려 전문역사학자가 저술한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주목할 필요성이 있는듯 하다. 역사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일간의 역사가 학계에서 바라보는 역사보다 더 대중적이면서도 일반인들의 역사관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아서 우리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서술형태를 볼 수 있다. 이말은 마치 이 책의 저자가 만일 한국인이었다면 과연 어떠한 반향을 불러왔을까라는 점이다. 우선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은 韓民族중심의 국수주의적인 역사해석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라는 일본학계의 반응이 먼저 떠오르고, 다음은 어렵사리 아픈상처를 보듬고 출발하고 있는 양국간의 부스럼을 키우는 꼴이며 역사적 고증이 확실하지 않는 사실을 과대포장하고 있다는 국내학계의 반응일 것이다. 그 만큼 일본인으로 이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라는 점에 사뭇 호김심이 발동할 만큼 저자의 역사시각이 진보적이다. 물론 우리는 저자가 진보적인 것이 아니고 이제야 역사적 진실을 깨닫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동안 일본내의 역사관에 비추어보는 정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다. 

다음으로 저자의  각별한 노력이다. 비전문가이지만 전문가 못지 않는 역사연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전문가들이 보지 못한 역사의 이면을 제대로 보고 연구했다는 점이다. 아니 보지 않을려고 외면했던 면들을 제대로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의 일본과 삼국과의 관계에서 중국과 삼국과의 관계등 그동안 정설에서 외면했던 내용들을 조명하면서 양국간의 역사흐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인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전반적인 견해는 마치 몸에 걸친 옷을 벗겨내는 부끄러움을 자아낼 만큼 애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해방이후 난장판이었던 시대를 나름의 논조로 해석하는 부분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물론 저자가 조선시대를 李氏조선으로 인식하면서 당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점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는 국내 강당학계의 역사인식에 비하면 조족지혈정도도 되지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이번 저서를 통해서 한일양국간의 역사관이 역사적 사실에 좀더 근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 가장 돋보인다. 그동안 우리는 일방적으로 문화경제적으로 혜택을 주었는데 배은망덕한 행위만 해왔다는 피해의식, 일본측은 그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있다는 논리로 반박하는등 결말없는 양쪽의 메아리만 주고 받아왔지만 이번 책의 출간으로 인하여 양국간의 새로운 역사인식이 자리를 잡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준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강단학계의 역사인식에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런 일본이도 있었구나라는 생각보다 왜 우리는 이러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먼저들어 얼굴을 절로 붉히게 한다는 점을 소위전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은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국의 일반대중들의 한쪽방향으로만 치우친 역사관의 재성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동북아 3국은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어느쪽 주장이 옳고 잘못되었다는 점을 떠나서 동북아 3국의 진정한 발전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희미하게나마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역사라는 큰 강은 작은 지류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하찮게 보이지만 이러한 지류가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소소한 개인적인 역사관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작은 지류가 모여모여 역사를 써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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