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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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목은 잘라도 부모가 물려준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조선말 단발령에 향변했던 이땅의 선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일갈이었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집안에 불이 나더라도 조상을 모시는 신주만큼은 훼손해서는 아니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은덕을 기린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이자 그들의 사유를 대표하는 표현들이다. 조선말 세계의 대세였던 패러다임의 파도를 넘치못하고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원인중에 하나로 이러한 선비들의 고지식한 사고방식이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교적인 관념들을 구습으로 진단하였다. 즉 폐기처분해야할 악습으로 무속신앙과 동격의 자리에 올려놓고 무자비한 칼날을 들이댔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공권력까지 동원해서 일대 정신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두번 다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극히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이러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에 흔들림이 없다. 물론 게중에 예전의 구습인 사조를 잊지 못하는 이들은 경쟁과 자유라는 틀에서 서서히 고립되고 밀려나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습이자 폐악이었던 선비들의 사유가 서서히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동안 정의라고 받아들여졌던 관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늘어나면서 과연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대두하고 있다. 

<선비>그동안 부정적이고 형식적이었던 유교와 전근대적 사유로 점철되었다고 여겨졌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유와 삶을 통해서 현대의 아노미적인 심리적 관념적 공황상태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과거로의 여행이자 현대와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같은 대안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파악했던 자연, 인간, 사회,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속에 살아있었던 사유의 체계를 재발견하고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일종의 잣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 나아가 인간문명 발전의 발판으로 생각했던 서구 이데올로기와는 사뭇 다르게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을 우리 인간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했다. 선비들은 자신의 사유의 확장을 대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면서 동격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연을 파악했던 것이다. 안빈낙도나 무위자연이라는 개념들이 인간과 자연이 상호 조화롭게 상생하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禮는 비단 거추장스럽고 형식적인 면이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서구 개인주의적 사고와는 달리 존재공동체로서의 핵심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강화되면서 개인이 가지는 지위나 위치보다 가정, 가문, 나아가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속에서 개인을 파악했던 것이다. 물론 선비들의 이러한 사유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해서 등한시 한 점등과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등은 비합리적인 몰인간적이면서 비과학적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상제라는 제도로 옮겨오면 가히 절정에 이르게 된다. 孝라는 미명하에 상사 두번만 겪으면 생사람을 잡는다는 식으로 복잡하고 어렵고 그리고 형식적이면서 비 생산적인 관례가 즐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발자국 비켜서서 선비들이 사유했던 죽음과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심오한 사유가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들은 서구와 달리 죽음과 삶을 구분하지 않았다. 삶속에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속에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상제는 효의 연장선 개념이었다. 또한 선비들이 인간사회를 공동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현대적 기준으로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사유를 제단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네들의 사유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도 없는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는 서구의 합리주의적 개인주의 사고에 철저하게 젖어있지만 오래토록 내려온 선비적 사유에서도 극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단 당시와 형식적인 절차면에서 대폭 간소화 되었지만 거대한 줄기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사유에 접해있다. 아마도 이는 급속하고 타자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발현된 혼란으로 수용하는 입장보다 주입되었던 개념들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형국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선비>를 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다시 회귀하자는 소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지금 이처럼 혼돈된 사유의 개념들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정리해나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가슴속 깊은 곳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의 빼어난 사유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 작용하는 것처럼 양쪽 사유를 적절히 배합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동안 잊혀졌던 선비들의 사유와 삶을 재조명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때가 온것 아닌가 싶다.

율곡,퇴계,매천이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구했던 사유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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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온 사진엽서 -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사진엽서를 통해 본 시선의 권력과 조선의 이미지
권혁희 지음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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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은 오랜세월 우리들의 잔상속에 혹은 시각적인 정형화의 모습 내지는 촉각으로 와닿을 수 있는 형체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특히 형이하학적인 실체보다 뜬구름 잡을것만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의 지속성은 인간이 존재하는한 지속될 것이고 또한 세대와 역사를 거듭 되풀이 할 수록 재편성되어 우리 인간들의 뇌리속에 꽈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특히 근세에 탄생했던 이데올로기중 제국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이로인해 보편화 되었던 식민주의의 여파는 지금 탈냉전의 시대를 넘어 세계 각국의 국가주권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이 시점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에서 온 사진엽서>는 19세기말부터 세계를 강타한 제국주의와 그로인해 붐을 일으킨 식민지건설 당시의 조선의 모습을 [풍속사진첩], [기념엽서], [각종 관광팜플렛]등 남아있는 그당시 기록문화를 통해 세계에 비쳐진 조선 바로 우리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조선의 풍경이나 인물사진 그리고 각종 풍습의 모습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세계에 각인된 <은자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 탄생의 배경과 그 허실을 저자는 제국주의 시각에서 통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칼을 목에 쓰고 촬영에 임한 죄수들의 모습에서부터 우리는 심상치 않는 제국주의의 view를 짐작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태두와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의 촉발로 인해 서구는 합리주의 그리고 과학주의라는 일대의 혁명을 성공리에 끝내고 더이상 내수시장의 한계로 인해 이러한 선진문명을 세계 각곳에 전파해야 한다는 교조주의적 기독교와 적절히 동거한 형태로 세계 각국을 마치 자기들 안방드나들듯이 유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이전 대항해시대부터 이러한 식민주의의 역사는 태동되었지만 당시 식민지개척의 역사는 순전히 하드웨어적인 면이 강조되었다면 19세기접어들면서는 문명전파라는 왜곡된 소프트웨어가 살짝 가미되면서 오히려 그 정당성을 상호간에(제국주의 국가들) 인정하게 되는 꼴이 되어버린다. 특히 사진기술과 인쇄매체의 혁기적인 발달로 인해 거의 전세계는 리얼타임으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서구의 이러한 패러다임은 그동안 신들의 영역에서 서서히 인간의 지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된 시점에서 문맹률의 제고와 더불어 지식충족 그리고 지배자의 일종의 이벤트로서 역활을 하게 된다. 

당시 서구의 시각은 극히 제한적인 면에서만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된 그들이 바라보는 동양사회의 모습은 미개, 야만 그 자체였다. 비숍여사를 비롯한 최초로 조선을 방문하고 여행기를 남긴 이들의 눈에 조선의 광경은 그야말로 비위생적이고 비문명화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들에게 동양의 문화는 그저 한낮의 신기한 현상내지는 자국민들의 오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사진엽서나 풍속사진을 보면 대부분이 인종학적인 특징이나 과도한 여성들의 노출사진, 그리고 비위생적으로 보일듯한 생활상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조선의 모습은 당시 서구에서는 알려지지 않는 은자의 나라 내지는 조용한 나라라는 타이틀 타고 각인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일본이 먼저 경험했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이러한 이미지들이 서구에 전파되었고 자신들이 대동아 공영을 외치면 감행했던 제국주의 첫발의 희생양인 조선과 중국에선 확대 재생산 이미지를 창출하면서 더욱더 왜곡된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된다.   

어디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각이 조선을 비롯한 동양에서만 자행되었겠는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의 노예등을 비롯해서 식민지역사를 경험했던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겪었던 뼈아픈 일이다.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종들 같은 인간이 아닌 일종의 전시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이야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당시 세계의 절반은 그렇게 생각했고 나머지 절반역시 아무런 대책없이 그리 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더욱더 무서운것은 이러한 이미지의 창출들이 타자의 문화를 이해하기는 커녕 타자를 철저히 대중화 시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고 각 민족의 개개인의 특성을 마치 그 민족 국가 전체적인 이미지로 포장해 버렸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현상들이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고 민주국가들이 탄생한 현재에도 부지불식간에 확대 재편성, 복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이미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갓을 쓰고 긴 곰방대를 물고 있는 노인,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 외출용 장옷을 입고 얼굴만 내밀고 있는 여인, 홍두깨로 다딤돌을 두드리고 있는 여인, 마치 연애인을 방불케할만큼의 미모를 가지고 고운 한복을 입고 있는 여인들의 이미지가 한국을 홍보하고 있는 모습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게 되는 모습들이지만 이러한 컨셉에는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조선을 보았던 바로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대만 바뀌었을뿐 그때와 별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서구인들에게도 익숙했듯이 이러한 제국주의적 시각은 우리들의 잔상에도 별 저항없이 자리잡고 말았던 것이다.  

그 만큼 이념, 이데올로기의 잔상들은 지금도 많은 부분에서 그 잔해들을 남기고 있고 설혹 치유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로 확대 재생산되고 복제되어 은연중에 남아있는 것이다. 역지사지로 우리가 아프리카를 생각할때 역시 서구가 만들어낸 view의 영향에서 자유로울수 없듯이 우리의 모습 또한 비뚤어진 은자의 나라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스틸사진에 불과한 한두장의 사진으로도 이러한 왜곡의 이미지들이 창출되고 있는데 매체의 천국이라고 하는 현대에는 두말해야 잔소리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이미지도 어떤 방향으로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지금의 이미지가 결국 세계인들의 인식에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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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금강 지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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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 해남땅 그리고 그곳 달마산을 이불삼아 자리잡고 있는 천녀의 사찰 미황사, 그리고 바지런한 주지 스님 같지 않고 우리 옆집의 친숙한 아저씨 같은 금강스님과 소박한 마을사람들이 살아가는 정겨운 이야기들로 가득찬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은 제목 그대로 정말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세칭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미(美)라는 개념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은 아름다움이 바로 이 책 미황사에 있다. 인간의 눈에 시각화하고 정형화시키는 아름다움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느끼는 감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이 바로 미황사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관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적하고 공기 좋은 산속에 자리잡은 풍광좋은 사찰이라는 이미지화보다는 속세와 불가의 개념을 구획하지 않는 만남이 바로 아름다움의 근원인 것이다. 

또한 미황사라는 사찰의 역사는 바로 우리 종교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이정표로서의 역활도 하고 있다. 당초 불교가 국내에 자리잡게 된 계기는 절대권력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었다. 물론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이런것이 아니였지만 당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과 그 이후 불교가 자리잡게 되는 과정에서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가 아닌 일부 특권계층의 종교 내지는 권력의 안정화에 기여하는 일종의 도구로서 출발하였다. 이는 근세에 우리곁에 다가온 기독교와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불교는 그동안 산속이라는 지리적 고립감과 동일한 패쇄적인 뉘양스를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몇몇 선사들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찾아가는 종교보다는 찾아오는 종교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근세이후 서구합리주의와 과학주의라는 패러다임으로 무장한 기독교의 공세에 비문명화 내지는 혹세무민의 기복신앙등으로 폄하되었고 이런 와중에서 보기좋지 못한 행태를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면서 그저 등산이나 여행을 할때 잠시 쉬어가는 개념으로 다가왔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역사적 붙임에 미황사라는 사찰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미황사만의 비애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바로 이런 미황사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사찰의 건축물이 하나 둘 늘어나는 규모적 확장만이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모토가 서서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수련회, 음악회, 노인노래자랑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반 대중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장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물론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종교라는 시장에서 블루오션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성공한 마케팅 사례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불교계의 나아가야할 바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근세들어 세약의 길로 접어든 불교가 현대 복잡한 시대에 들어서 여타의 종교보다 일반대중에게 어필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친심성을 달래주는 대자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찰이 있기 마련이고 이러한 지리적 여건은 예전에는 단점이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장점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우선일 것이다. 미황사 주지스님인 금강스님은 그런면에서 그 옛날 원효대사의 대중성을 엿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 그에 맞추어서 종교도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시대는 지났다 일반대중과 서로 호흡하고 그들의 삶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종교가 대중들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고 실재로 비빌 언덕인 것이다. 

땅끝이 최종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듯이 이제 대중에게 다가가고 대중과 같이 호흡하는 종교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불교의 희망이 엿보이는 책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종교는 그저 망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 종교적 가르침과 비전이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감이 있는 종교는 도태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역시 대중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아마도 이것이 석가모니의 진정한 가르침일 것이다. 이번 책은 불교라는 특정 종교를 떠나서 현재 대한민국에 산재해 있는 모든 종교의 기준점이 될 것이다.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인의 진정한 역활이 무엇인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잔잔하면서도 무게감있고 정말 편안한 내러티브들도 가득했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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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들의 생로병사
강영민 지음 / 이가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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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生.老.病.死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생로병사라는 굴레를 벋어날 수 없는 것은 지당한 것이다. 무릇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진리이기도 하다. 지상파 모방송국 프로그램에도 있듯이 생로병사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웰빙이라는 이름으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옛날 옛적 하루먹고 사는 것 자체가 치열한 투쟁이었던 시절에도 생로병사는 인간에게 끝없는 유혹의 손길을 던졌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에게 생로병사는 바로 인생, 삶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만인지상의 자리인 왕들에게는 그 의미가 지대했음을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가 불로초를 찾아 온 세상을 해맸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들의 생로병사>는 바로 약 500년이라는 장수제국인 조선의 군주들의 생과 노 그리고 병, 죽음을 다룬 책이다. 저자가 의사라는 직업상 관점에서 조선왕들의 출생에서 성장 그리고 그들을 괴롭혔던 각종 질환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의학적 견해를 첨부하여 왕들의 일대기를 조명하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혔듯이 조선왕조실록과 세간의 흥미로운 야사들을 참고하여 다소 지루하게만 느껴질 내용들을 적절한 흥미를 자아내게 한 점등이 돋보이는 저술이다. 특히 조선왕들을 괴롭혔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했던 각종 질병들과 이를 치유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들을 보면서 왕도 죽음앞에서는 일개의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교의 인생무상이나 불가의 空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지금의 의학적 관점에서는 대수롭지 않는 질병들이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던 점등이 다소 허무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당시 최고 의료진의 보필을 받았던 왕도 이 모양이었는데 그러한 해택을 전혀 받지 못한 일반 대중의 삶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치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왕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에게 생로병사는 넘을 수 없는 강이었을 것이다. 특히 과도한 스트레스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건강에 치명적인 역활을 담당했다는 것이 왕들의 삶을 통해서 재확인 되고 있다. 조선왕들의 평균수명이 오히려 일반 사대부들보다 짧았던 것 역시 국정부담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이러한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지 못한 생활이 결국 그들의 수명을 단축한 주범이 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마음의 병이 결국 육체의 병으로 옮겨지고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조선왕들의 삶을 의학적 견해로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왕과 권력은 바늘과 실처럼 항상 붙어 다니면서 왕 개인들의 생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면에서 조선왕들이 앓고 있었던 질병과 그 치유법등을 의학적 측면으로 한 눈에 조선시대를 개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단지 문종, 예종, 경종, 정조등을 비롯한 석연치 않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다른 측면으로 비쳐질수도 있고, 선조와 광해군, 인조, 효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책의 출간목적이 왕들의 개인적인 생로병사에 촛점을 두고 있다는 큰 관점에서 볼 때 묻어두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이 부분에서 갑을박론하게 되면 책의 목적을 상실할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사이든, 병사이든, 혹은 타살이든간에 조선의 왕들도 생로병사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정종, 광해군, 영조만이 편한한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왕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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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쇼 -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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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는 거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 즉 복제 매개물질로" meme"이라는 논의를 제기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눈먼 시계공>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요모조목 비교 비판하면서 포스터 다윈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고 급기야 <만들어진 신>를 통해서 창조론자들과 유신론자들에게 다윈을 뛰어넘는 문제아 '울트라 다윈'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그동안 도킨스의 삶과 연구는 그야말로 창조론과의 진검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전사로서의 면모를 십분발휘해 주었다. 특히 <만들어진 신>를 통해서 종교의 폐해중 가장 큰 부분인 어린자녀들에게 강요되는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두고두고 무신론자나 유신론자들에게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시각을 틀을 약간만 회전하면 마치 도킨스의 학문과 신념들이 마치 창조론을 부정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편협되고 사소한 걱정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기우를 가질 수 도 있다. 물론 그의 여태까지의 논조의 강약과 화련한 비유를 볼 때 일반 독자들로서는 충분한 오해의 소지가 담겨져 있음을 아마 그 자신도 100%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도킨스 자신은 소를 물가까지 끌고가는데 온갖 감언이설과 약간의 물리적인 협박(?)이 필요하지만 막상 물가에서 물을 먹는것은 소자신만의 선택이지 않느냐고 향변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한 측면에서 이번 <지상 최대의 쇼>는 창조론과 진검승부를 펼쳤던 그간의 전사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아주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필체의 저서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내용중에 간간이(여태까지 그의 저서에서와 정말 다르게 빈도가 낮은)전사적인 태도로 돌변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인 플롯은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의 타 저서에 비한다면). 본 저서가 출간되자 마자 또 다시 세계는 뒤숭숭해졌고 각계각층에서 찬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창조론자입장에서는 그저 또 하나의 창조론 반박서 정도로 폄하 하겠지만 건강하고 상식적인 정신적 구조를 가진 일반인들에게는 다른 측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150여년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이후 출간된 제대로된 진화론의 입문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다윈이후 진행되고 발전하고 발견된 각종 증거와 과학적 사실 그리고 자연현상등 흔히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진리의 파편들을 한데 모아서 "진화란 무엇을 뜻하는가?","진화는 사실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져 주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각종 증거와 사실들은 그동안 창조론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막상 창조론자들의 반박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실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저자 특유의 비유는 이번 저서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진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사건발생 이후 뒤늦게 도착한 탐정에 비유하면서 풀어가는 진화의 비밀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를 보는 듯한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홈즈가 사건 현장에서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 하듯이 우리가 진화라는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 역시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서 진화론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그동안 진화을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도 잘못되고 곡해된 진화의 진실에 대해서 재무장을 요구하고 있다. 막연하게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명확하고 잊혀지지 않는 개념정리를 제대로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논증들과 이론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진화적인 현실들과 각종 실험결과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억할 필요성은 없다. 이 분야는 전문가들의 몫일 뿐이다. 단지 일반독자가 기억해야할 것은 진화라는 거대한 줄기를 잡는 것이다. 화는 흔히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지적설계자의 절제되고 효율적인 설계도면에 의해서 어느날 갑자기 이 지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는 철저하게 자연선택과정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가는 기나긴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속에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이것 마저도 진화라는 큰 줄기의 지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자의 저서들을 통해서 창조론과 신에 대한 반박(사실 무신론자나 진화론자입장에서는 표현이 좋아 반박이라고 하는 것이지)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번 저서는 진화를 사실로 믿고 있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막연하게 그리고 얄팍한 몇몇 단어로 진화가 사실이라고 믿어 오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하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정신적 무장을 해주는 바이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진화론이 맞다 아니다(창조론은 분명히 틀렸기에 진화론의 진의 여부만 파악하면 된다는 말이다)라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저서라고 봐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창조론자들(저자는 역사부인자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역시 도킨스다운 표현이다) 이 간혹 딴지를 거는 '잃어버린 고리'라는 개념에 굳이 반박할 필요성도 없이(사실 도킨스는 어떤면에서 너무 요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안쓰러워 보일정도로 말이다) 진화는 그냥 사실일 뿐이다. 진화라는 현상은 지금도 우리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쇼를 자연 그래도 즉 지적설계자의 설계에 의한 쇼가 아닌( 안무가 없이 엄밀히 말하면 자연이 안무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무계획적이고 무절제한 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는 장엄하고 버라이어티한 쇼를 우리들 눈앞에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에게 선사한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 지상 최대 쇼의 출연자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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