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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목은 잘라도 부모가 물려준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조선말 단발령에 향변했던 이땅의 선비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일갈이었다.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집안에 불이 나더라도 조상을 모시는 신주만큼은 훼손해서는 아니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은덕을 기린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이자 그들의 사유를 대표하는 표현들이다. 조선말 세계의 대세였던 패러다임의 파도를 넘치못하고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원인중에 하나로 이러한 선비들의 고지식한 사고방식이 일조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유교적인 관념들을 구습으로 진단하였다. 즉 폐기처분해야할 악습으로 무속신앙과 동격의 자리에 올려놓고 무자비한 칼날을 들이댔다.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공권력까지 동원해서 일대 정신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두번 다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극히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이러한 신앙에 가까운 믿음에 흔들림이 없다. 물론 게중에 예전의 구습인 사조를 잊지 못하는 이들은 경쟁과 자유라는 틀에서 서서히 고립되고 밀려나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습이자 폐악이었던 선비들의 사유가 서서히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동안 정의라고 받아들여졌던 관념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늘어나면서 과연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대두하고 있다.
<선비>는 그동안 부정적이고 형식적이었던 유교와 전근대적 사유로 점철되었다고 여겨졌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유와 삶을 통해서 현대의 아노미적인 심리적 관념적 공황상태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과거로의 여행이자 현대와 미래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같은 대안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파악했던 자연, 인간, 사회,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속에 살아있었던 사유의 체계를 재발견하고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일종의 잣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 나아가 인간문명 발전의 발판으로 생각했던 서구 이데올로기와는 사뭇 다르게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을 우리 인간과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했다. 선비들은 자신의 사유의 확장을 대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면서 동격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연을 파악했던 것이다. 안빈낙도나 무위자연이라는 개념들이 인간과 자연이 상호 조화롭게 상생하는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禮는 비단 거추장스럽고 형식적인 면이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서구 개인주의적 사고와는 달리 존재공동체로서의 핵심적인 역활을 하게 된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이 강화되면서 개인이 가지는 지위나 위치보다 가정, 가문, 나아가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속에서 개인을 파악했던 것이다. 물론 선비들의 이러한 사유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해서 등한시 한 점등과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는 행위등은 비합리적인 몰인간적이면서 비과학적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상제라는 제도로 옮겨오면 가히 절정에 이르게 된다. 孝라는 미명하에 상사 두번만 겪으면 생사람을 잡는다는 식으로 복잡하고 어렵고 그리고 형식적이면서 비 생산적인 관례가 즐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발자국 비켜서서 선비들이 사유했던 죽음과 삶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심오한 사유가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들은 서구와 달리 죽음과 삶을 구분하지 않았다. 삶속에 죽음이 존재하고 죽음속에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상제는 효의 연장선 개념이었다. 또한 선비들이 인간사회를 공동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현대적 기준으로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사유를 제단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네들의 사유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도 없는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금도 우리는 서구의 합리주의적 개인주의 사고에 철저하게 젖어있지만 오래토록 내려온 선비적 사유에서도 극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비단 당시와 형식적인 절차면에서 대폭 간소화 되었지만 거대한 줄기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사유에 접해있다. 아마도 이는 급속하고 타자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발현된 혼란으로 수용하는 입장보다 주입되었던 개념들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형국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선비>를 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다시 회귀하자는 소리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지금 이처럼 혼돈된 사유의 개념들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정리해나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가슴속 깊은 곳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의 빼어난 사유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 작용하는 것처럼 양쪽 사유를 적절히 배합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동안 잊혀졌던 선비들의 사유와 삶을 재조명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때가 온것 아닌가 싶다.
율곡,퇴계,매천이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고뇌하고 갈구했던 사유가 결코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