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 촉서
진수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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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한국,일본등 동북아시아권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서양기독문화권의 성경만큼이나 베스트셀러이면서 동시 꾸준하게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3세기 후한의 내리막길에서 조조,유비,손권으로 대표되는 영웅들의 피말리는 정권쟁탈과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걸세출의 영웅들과 그들이 평생을 누비고 다닌 전장 그리고 전우애등을 소설적인 픽션을 가미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 국내에서만 하더라도 정비석, 이문열, 황석영등의 대문호들이 경쟁하듯 편역하여 많은 매니아층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세간에는 삼국지를 40대가 넘어서는 읽지말라는 말처럼 삼국지연의에는 다양한 간계와 모사 그리고 이합집산등 인간사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총망랑되어 있을 정도로 역사소설이지만 인간심리학이나 경영전략등 인간관계를 모두 다루고 있을 만큼 다양한 플롯과 네러티브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팩션을 자칫 오인하게 되면 정작 올바른 역사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 삼국지연의에 대한 맹목적인 인기가 소설이 아닌 실제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로 각인되어 많은 문제점을 이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그동안 소설속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왜곡되어 있는 간웅 조조와 유비의 관계 그리고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관우, 초자연현상을 일으켜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제갈량등 많은 부분들이 정사와는 사뭇 다르게 연출되어 있어 자칫 역사적 오류에 빠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혹자는 소설은 소설이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소설이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상당히 위험할 수 도 있는 것이다. 또한 남의 나라 역사에 대해서 소설과 정사를 따지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라고 하겠지만 소설 삼국지가 국내의 독자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제대로 알것은 알고 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국내의 몇몇학자들이 삼국지 바로알기라는 저서들을 발간했지만 아직도 많은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측면에서 삼국지연의와 더불어 정사 삼국지를 같이 보면 소설과 현실의 차이를 제대로 알 수 있거니와 또한 소설 삼국지의 또 다른 매력에 빠져볼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사실상 삼국이라는 표현보다는 양국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수 도 있다. 위,촉,오의 역사지도만 보더라도 촉이 지배한 영토는 그야말로 미약하기 때문이다)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존재했던 혼돈의 시대였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자웅을 겨루었던 각 영웅들의 역사적 평가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사가의 시각은 어떤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았을까? 바로 이러한 점이 정사 삼국지를 읽는 매력중에 하나일것이다.

저자인 진수는 촉나라 태생이지만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았고 후대의 대부분의 사가들 역시 위를 정통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간의 상식을 벗어나 버린다. 또한 천재적인 전략가 제갈량에 대해서도 진수의 평가는 후대에 세인들에게 알려진 만큼 후하지 않다. 진수의 이러한 생각은 삼국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황제에 해당하는 기를 위나라에만 두었을 뿐이다. 즉 소열황제 유비나 그의 아들 유선을 제갈량이나 관우,장비등과 같은 전으로 처리했다는 점에서 촉을 일개 소국으로 판단했고 정통은 위에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렇게 큰 맥락에서 부터 정사는 소설과 다르다. 각 열전으로 들어가서 살펴보더라도 촉의 5대명장인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등의 평가가 소설속에 나오는 이미지와는 사뭇다른 점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관우와 장비의 평가보다는 마초나 황충 그리고 조운에 대한 평가 더 나을 정도로 진수의 촉서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표현하는 이들 영웅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고 촉태생이라는 점에서 외히려 진수의 삼국지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진수는 촉이 40년이라는 짧은 생애을 마감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제갈량의 후사문제 촛점을 맞추고 있다. 제갈량은 분명 뛰어난 재상이었지만 자신의 후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포스트 제갈량을 자칭했던 장완,비의,강유등의 화합되지 못한 국가경영이 결국 위나라에게 정벌당했다고 보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촉의 단명은 제갈량을 제외하고는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인재풀이 너무 빈약했다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진수는 방통과 법정의 단명을 누구보다 애통하게 여겼다. 즉 초기 창단멤버들의 자질이나 위엄은 뛰어났으나 뒤를 이를 후사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다는 점에서 촉의 단명은 예견되었던 사실이라는 것이다. 

진수는 자신의 기록에 대한 객관성을 더하기 위해 촉말의 신하였던 양희를 별도의 전에 삽입하여 그가 남긴 유비를 비롯한 촉의 대표적인 인사들에 대한 평가를 첨가하여 사관의 개인적인 시각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진수 스스로가 밝혔듯이 촉은 자체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사실상 그럴 능력이 부재했을 정도로 국가경영에 있어 타국보다 위태로웠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촉서는 그동안 과대평가되었던 유비와 제갈량을 비롯한 촉인사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본다는 측면에서 소설속의 인물들과 많은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인것임을 잊지 말야하 할 교훈을 남기는 저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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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조선을 사로잡다 - 일제 강점기 연예인이 된 기생 이야기
신현규 지음 / 어문학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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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혹은 기녀라고 불리우는 그녀들은 비록 신분계층이라는 피라미드상에 가장 최하위에 위치한 천민계층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일반적인 천민계층과 사뭇 다른 또 하나의 계층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권력 창출계층이었던 사대부들과 유일하게 어울릴수 있는 여성계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역사의 다른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조선사회는 철저하게 남성위주 특히 양반이라 지칭되는 일부 남성들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비단 남성으로 태어나더라도 적자가 아닌 이상은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 밖에는 없는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그것도 천민이라는 계층의 신분적 장애를 딛고 많은 기생들이 사대부들을 농락한 예를 조선실록을 보더라도 많이 있었다. 특히 국가적으로 환란을 겪을때마다 남성사대부들도 하지 못한 의를 몸으로 실천한 이들중에 항상 기생이라는 계층의 여인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는 이러한 기생들의 알려지지 않은 삶과 행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전반을 다루는 측면이 아니라 일제감정기에 접어들어 기생들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집어보는 저작이다. 지금의 만능엔터테이너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당시 모던걸로 상징되었던 기생들의 사회참여는 근대화라는 시대적 조류와 더불어 우리사회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왔고 그러한 변혁과 영향들은 현대 미디어시대의 원천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측면으로 저자는 접근하고 있다. 또한 현대음악과 미술, 영화 그리고 광고모델등 근대화를 지칭하는 문화사조에서 선구자 역활을 담당하면서 조선의 근대문화의 선봉장이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일제감정기 시대에 기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지금의 연예인에 비유되는 특성들에 대해서만 나열되어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당시 기생학교학교의 경쟁율과 경제적대우등이 일반민중들에 비해서 탁월했다는 점등을 들어 기생이 되고자 하는 인기가 높았다는 점, 근대화의 표상인 모던걸을 상징했다는 점 등에서 그 표면상의 현상만을 다루고 있는 점이 못내 아쉽다. 또한 각종 사진엽서나 광고물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화려한 이면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상세한 비판이 생략된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저자도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결국 일제의 식민지정책중의 일환으로 기생들의 화려한 면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피해자 역시 기생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강제근대화를 당했을때 받았던 제국주의의 시각을 그대로 조선에 심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홍보물에서 기생들을 배경으로 하는 팜플렛을 제작하면서 식민지정책의 당위성을 은연중에 내포했던 것이다. 지금의 언론의 영향보다야 떨어지는 효과를 가지고 있을 지언정 이러한 정책들은 한동안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사회적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능 엔터테이너와 같은 화려한 측면만을 고찰하는 것은 진정한 기생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에서 다소 그 균형서을 잃을 소지가 있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측면들이 기생이라는 이미지를 고착화할 수 있는 또다른 시각의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기존의 기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타파하는 차원에서 만능 연애인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지만 다른 면에서 바라볼때는 이러한 연애인이나 모던걸의 이미지가 기생의 또 다른 이미지로 각인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기생이라는 계층은 엄연히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계층이자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일반 민중이었다. 단지 봉권적인 권력구조가 만들어낸 희생양으로 묻어둘 수 없는 아픔이었던 것이다.  

항상 국가적인 환란이 닥칠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한 이들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층이 아니라 기생과 같은 최하층이 대다수였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기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생을 어느곳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특수한 집단으로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기생역시 엄연한 우리의 어머니, 누나와 같은 동일한 인격체로 그리고 남성위주의 신분사회가 낳은 피해자로 봐야함과 동시에 일반민중과 동등한 사회의 조직구성원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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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 대전환기, 기업 성장 전략
도널드 설 지음, 안세민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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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호는 그 태생적 원인에서부터 순탄치 않은 출항을 시작했다. 선박이 건조되자 마자 배의 옻칠이 마르기도 전에 한국전쟁이라는 풍파를 만나 거의 좌초의 위기까지 내몰렸고 겨우 폭풍우를 비켜나갔으나 승무원들의 자질부족과 선장의 아집으로 대양으로 치고 나가지 못했다. 그러던 대한민국호가 비뚤어진 야망을 가진 신임선장을 영입(사실상 강탈당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하고선 대모험의 장에 오르게되고 마침 불어준 순풍덕에 범선에서 쾌속선으로 탈바꿈하면서 거대선박들과 어깨를 나라히 한다는 착각까지 들정도로 순항하게 된다. 하지만 IMF라는 열대성 저기압을 만나면서 휘청거리다가 결국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라는 허리케인을 만나서면서 그동안의 순황에 대한 의문점을 던져주게 된다. 

지금의 시대를 정의하자면 혼돈 내지는 격동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격동이라는 말은 어찌보면 대한민국호의 승무원들에게는 어찌 보면 너무나 익숙한 상징중에 하나이다. 그동안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이나라만큼 격동에 알맞는 상황을 경험한 곳도 드물정도로는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다. <혼돈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도널드 설은 지금 세계가 처해있는 경제적 환경을 격동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동안 대공황을 비롯한 수많은 변화무쌍한 경제적 환경들이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폭된 시대는 없었고 특히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에겐 거대한 먹이사슬속에 갇힌 정글의 법칙을 방불케하는 혼돈의 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혼돈과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돌파해서 순항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들 혼돈과 격동의 시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머리속을 강타하는 것은 다름아닌 위기, 리스크관리등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시대에는 그저 몸보신이나 하고 적당한 눈치작전으로 소나기를 피해보자는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마인드로 인해서 그동안 쌓아왔던 기업의 가치가 한순간에 도미노 무너지듯이 무너져 버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혼돈과 격동의 시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부정적요소과 긍정적 요소 즉 기회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그동안 혼돈과 격동의 시대라고 명명되었던 경제적 혼란기속에서도 꾸준한 매출과 수익을 창출한 초인류기업들과 초인류기업에서 그저그런 기업으로 나락한 기업들을 모너터링한 결과치를 제시하면서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방안을 도출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격동의 시대는 한국현대사를 추론해봐도 알 수 있듯이 마냥 부정적인 측면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분명 격동의 시대는 부정적인 요인과 그와 더불어 긍정적인 기회가 상존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예측 불허의 시대에서 어떤 기업은 승승장구하고 또한 어떤 기업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것이 역사일 것이고 이러한 역사에서 살아남는 기업이 강한 기업이 되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가야할 기업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향후 찾아오게 될 기회를 잡기 위한 만만의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적인 마인드에는 절대적이라는 진리는 존재하지도 않고 불변이라는 시장상황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유동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마인드에 걸맞는 조직과 자본 그리고 R&D와 더불어 인재육성이 미래에 다갈올 기회를 하루라도 빨리 잡을 수 있는 전재조건이 될 것이다. 

기업을 떠나 개인과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체에게 격동의 시대른 누구도 원치않는 불명확성의 시대이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속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하냐에 따란 격동의 시대는 기회의 장을 열어줄 것이다. 세계사의 수많은 명망성쇄에서 학습하듯이 준비된 자, 특히 적극적으로 준비된 자에게 격동의 시대는 다시오지 않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일본의 경영신이라 일컫는 마스씨타 고노스케는 "불황은 깊을수록 좋다 그 만큼 기회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시대적 환경이 주어진 통제불가능한 요소라면 그러한 환경에서 통제가능한 요소는 바로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일 것이다.  

대한민국호는 그동안의 격동의 파도를 나름대로 슬기롭게 넘어왔다. 그 원인에는 분명히 승무원들의 적극적인 마인드가 있어기에 가능했다. 더이상 추락은 없다는 생각은 반대로 위만 보고 나아가면 된다는 말로도 풀이된다. 세계적인 불황과 금융위기속에서도 세계각곳에는 지금도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준비하는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많다. 우리도 이러한 마인드로 다시한번 허리케인의 파고를 뛰어넘어 순탄한 대양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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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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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극히 상식 내지는 하나의 사실이 되어버린(물론 아직도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 이라는 유사과학논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진화론에 대해서 우리 일반독자들의 생각의 기제는 거의 인간을 제외한 동식물종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도 언급을 했고 다윈 이후 수 많은 진화론자들이 증명해 보였지만 왠지 아직도 진화론을 믿던 창조론을 비롯한 유사과학논거를 믿는 사람이건 간에 동물원에서 우리 인간들의 눈요기를 제공해주고 있는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들과 우리가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선 왠지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특히 우리 인간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중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대전제아래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흔들리지 않는 일종의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들은 특히나 우리가 자연계중에서 가장 고등동물이라는 유인원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모든 생물학적 특성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의해서 설명되고 증거화 되겠지만 우리들의 정신 즉 마음속의 기제들은 인간이라는 종만의 독특한 현상이자 고유한 특성이라는 전제에 있을 것이고 또한 하나의 믿음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관념들이 진화심리학자인 전중환 교수의 <오래된 연장통>을 읽고 나면 그 얼마나 커다란 오류에 빠져 있었고 무지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화심리학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학문이지만 이미 서구학계에서는 그 연혁이나 학력이 자리잡은지 오래되었다. 심리학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심리학의 한 분파쯤으로 오인받을 수 있지만 진화심리학은 인간본성에 대한 모든 심리학적 기제들을 과학적 논거와 증거들 그리고 보편타당한 실험등으로 검증하여 인간의 마음 역시 다윈이 주창한 진환론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진화론의 적용범위의 끝이 없음을 다시한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들 알고 있는 갓난애기의 마음은 백지와도 같고 이러한 백지상태에서 어떻게 주위환경이나 문화에 의해 그 심성이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많은 사례들을 그동안 우리는 많이도 접해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위환경이나 문화등 후천적인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시간적 경제적 노력을 해왔다. 하지만 어린아이와 새끼침팬지을 같이 키우면서 들어난 결과는 그동안 우리가 가져왔던 생각들에 대해서 의문점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공작새 수컷의 꼬리가 길어지고 한없이 화려해지는 것을 동물들의 성선택에 의한 진화로 인정하면서 인간 남성이나 여성들이 상대 이성들에게 잘보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선 그저 심리학적인 논거로 대치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인간만이 음악을 듣도 감상할 수 있다는 점, 인간만의 본성이라고 생각되는 도덕, 정의등의 문제 역시 우리의 조상들이 수백만년전 아프리카 사나바에서부터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 둘씩 우리의 심리적 기제에 쌓인 진화론적 결과물이라면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왜 유독 동양에서 계급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가족과 친족 그리고 더 나아가 같은 민족이나 국가간의 유대관계가 높고 타집단에 대한 배타의식이 강한지에 대해서도 진화론은 말끔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 인간종은 아득하게 머나먼 과거로부터 생물학전 진화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본능 즉 마음의 진화도 더불어 같이 해왔다는 것이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의 공통된 논리이고 이를 반증하는 예는 수없이 많이 있다.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하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심리적 기제는 우리 조상들이 대자연앞에서 자연선태되는 과정에서 선택되고 제거되면서 남아있는 진화론적 유물인 것이고 우리는 이처럼 아주 아주 오래된 연장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이 연장통속에서 그때 그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양한 조합들을 창출하고 이러한 조합들은 어김없이 자연선택되어지는 것이다 

새삼 다시한번 진화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진화론의 범위확장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 조차 진화심리학의 설득력있는 논거를 접하게 되면 진화론의 확장은 아마도 그 끝이 보이질 않을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에서 지구를 벗어난 우주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진화론보다 설득력있는 논거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유에 대해서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다윈혁명 이후 깨닫게 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정체성에 대한 한가닥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금 우리가 생활하고 사유하는 모든 행위가 그 옛날 우리조상에서부터 장착되기 시작한 연장통에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좀더 명확하고 간결하게 주위현상들을 다시한번 들여다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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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명의 미래 - 디지털 기억 혁명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고든 벨.짐 겜멜 지음, 홍성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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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革命/revolution)은 사전적 의미로 기존의 정체를 변혁하는 일 즉 기존의 사회체제를 개조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인류사는 바로 혁명의 연장선에 속에서 지금도 수 많은 혁명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혁명이라는 패러다임을 거부할 수 도 없고 비켜갈 수 도 없는 것이다. 크게 인류사를 상고해보면 이러한 대혁명은 세차례에 걸쳐 있음을 볼 수 있다. 첫번째가 바로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이 대륙 저 대륙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때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다 다니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농업혁명이다. 인류는 농업혁명으로 인해 특정한 한 곳에 정착하는 형태가 되었고 식량난을 해결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종보다 빠르게 자손을 증식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영국에서 아주 작은 계기로 출발한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은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그야말로 인류의 삶의 질적인 번창을 약속하게 되면서 그동안 먹기위해서 살아가는다는 방식의 의식을 한 순간에 뒤바꾸어 버린 패더라임이었다. 이렇게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은 우리 인류의 정체성과 역사발전방향을 틀어놓았다. 그럼 이제 이와 같은 혁명의 시대는 지나갔을까? 

<디지털 혁명의 미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뒤이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반향을 가져올 혁명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디지털 혁명이다.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된 상황이지만 우리는 디지털시대라는 패러다임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싫든 좋든 이 패러다임은 현재, 아니 미래로 갈 수록 더욱 더 거부하거나 외면하기 힘든 대세임에 틀림없다.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이순간에도 디지털혁명의 시대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낼 수 없을 만큼의 시간적/금전적 효용비용을 상쇄시켜주는 것 역시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잇점 중에 아주 작은 단편일 것이다. 이보다 더 많은 장점들을 여기서 나열한다는 자체가 넌센스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디지털 혁명이란 하드웨어적인 기능향상을 증폭시켜주는 수준에서 머물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절로 든다. 저자는 디지털 혁명의 미래는 지금같은 하드웨어의 발전이 아닌 바로 인간과 디지털기술이 합해질때 비로서 진정한 혁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확신를 가지면서... 

인간이라는 생물체는 생로병사에 의해 특히 생물학적으로 세월을 보낼수록 뇌의 역활이 감소하게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누군가와의 약속을 까막득하게 잃어버리는 일들이 나를 포함해 왕왕 일어난다. 또한 지금까지 지구상에 나온 그 어떠한 기억장치보다 우수한 우리 뇌도 세월의 힘앞에선 버텨내지 못하게 되어 있고 설령 몇몇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들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저자는 바로 우리의 불안정한 기억을 완전한 기억으로 대체하는 것이 디지털 혁명의 미래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보고 있다. 즉 라이프로깅(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웹 사이트에 자료를 올릴 수 있는 서비스) 통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여기에는 자고 먹고 사랑하고 일하고등 24시간 365일내내)의 수없이 많은 현상과 기억들을 포함하여 내주변에 나와 조금만큼이라도 연관된 모든 것들을 스캔이나 캡처하여 기억장치에 저장하였다가 필요한 부분만을 검색하여 인식하고 있었지만 흐릿했던 일들, 전혀 인식도 못했던 일들을 재생할 수 있는 미래가 올 것이라는 논지이다. 지금 생필품화 되어버린 휴대폰,스캐너,디지털카메라.캠코드,데스크탑등의 주변기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를 온전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자손대대로 영원히 이어질 수 있고 비록 생물학적 육체는 사라져도 정신적인 기억들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육분야나 의료분야에서의 활용은 정말 대단할 것이다. 본인의 병적이력이 고스란히 기록된 작은 USB만 있으면 특정병의 발발예상에서 부터 가족력까지 한눈에 진단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이고 교육분야에서는 책가방속의 책이 사라지는 시대가 오고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하나로 연결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미 마이라이프비츠라는 솔루션으로 자신주변의 기억들을 저장하고 포맷하고 백업하고 있다. 소소한 신변잡기에서 부터 어마어마한 비지니스영역에 이르기 까지 그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저장장치에 저장되고 있다. 완전한 기억을 만들어 가는데는 이처럼 하드웨어적인 문제점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소프트웨어적인 문제 즉 이러한 완전한 기억이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의 역활로 변질되지 않을까라는 문제인 것이다. 개개인의 가장 사소한 기억들까지 공개되거나 공유될 경우(장담하거든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한다) 완전한 기억은 또다른 권력유지장치의 일환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앞선 두가지 혁명을 거치면서 뼈저리게 겪은 것이 혁명이라는 장미빛 속에 감춰져 있는 부작용들이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인류는 처음으로 계급화가 이루어졌고 산업혁명으로 부의 재편성과 인간성상실의 시대를 경험했듯이 이번 혁명으로 과연 또 어떠한 부작용이 있을지에 대해서 한번쯤은 고민하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인간의 망각의 동물이고 어떤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소중한 것이다. 또한 추억이 소중한 이유는 과거에 기억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렴풋하게 지금 현존하고 있는 나의 머리속에서 재프로그램된 추억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지 마치 사진을 찍듯이 선명한 추억은 왠지 정보라는 개념으로 와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기억은 분명 장점들이 수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수없이 이루어 질 것이고 결국 그 어떠한 형태로 결론을 짖게 될 것이다. 디지털 혁명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거부할 수 없다면 적응해야 할 것이고 바로 이러한 적응은 올바른 형태로 합의되어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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