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재키 울슐라거 지음, 최준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러시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얼마전 우리와 월드컵 평가전을 치루었던 벨라루스라는 나라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국이다. 사실상 알려진게 많지 않는 신생국이지만 벨라루스의 작은 도시 비테프스크는 오히려 벨라루스라는 나라보다 더 세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샤갈이라는 걸출한 화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마르크 샤갈은 입체주의 화법의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 색체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특히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나 천정화 그리고 오페라나 음악회의 무대장식등 기존 미술계에서 추구했던 이젤화법에서 벗어난 다양하고 독튿한 분야로 다가 가면서 현대 미술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 시킨 장본인 중에 한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라는 詩나 전국 어디가나 한두번쯤 맞딱 뜨리게 되는 거리의 카페 이름에서도 더욱 친밀감을 주는 화가이다. 정작 샤갈의 평전을 읽기 전만 하더라도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 샤갈의 작품인 줄 알았을 정도이니 그 만큼 샤갈에 대해서 무지 했다고 해야 하겠다. 초현실주의 라는 현대미술의 지파에서는 그 시조로 샤갈을 거론하고 입체파니 야수파니 다양한 미술화풍에서 샤갈을 들먹이지만 정작 샤갈 본인은 단 한번도 그 어느 특정화풍에 얽매이지 않는 철저한 독립화가이자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에서 샤갈의 인생을 엿 보는 그 자체로만으로 흥미진지해 지는 평전이다.

무엇보다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평전에서는 강조되는 관념이나 사상을 부각시키는 공적인 부분보다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은밀한 사생활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화가라는 직업상 그의 작품세계를 화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그 어떠한 평전에서 느낄 수 없는 신선함과 동시에 색다른 독서기행이 된다. 평전치고는 상당한 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방대한 화보들로 인해 책의 두께감을 느낄 수 없게 하고 특히 샤갈의 처녀 작품에서 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그의 화풍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시각적인 즐거움도 선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련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과 더불어 샤갈의 심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시대적, 인물적인 접근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어 샤갈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된다. 특히 현대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에겐 샤갈의 평전만으로도 현대미술의 맥을 짚어가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화가들(야수파의 대표격인 드랭, 오르피즘의 창시자 들로네, 마티스, 피카소등)과 그들의 작품을 같이 수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의 전반적 이해를 한층 가볍게 해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 화가들과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화상들의 세계까지 소개되어서 미술작품의 제작과정에서 판매 그리고 전시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는 일반 대중들이 갤러리에서 보는 미술작품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어두운면도 아울러 다루고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게되면 이러한 면들도 미술작품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되는 또 다른 방법론적 측면으로 이해될 수 도 있는 것이다.샤갈은 프랑스 국적의 화가이지만 그가 태어난 비테프스크는 러시아내에서도 제법 커다란 정착 유대인촌이었다. 특히 샤갈이 속했던유대촌은 이시디어를 사용하고 하시디즘(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온 종파)을 신봉하는 배경으로 인해 샤갈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단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망명하게 되어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샤갈에게 고향은 한없는 작품세계의 소재를 제공했던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희망 그 자체였다.

샤갈에게 정신적으로 그리고 작품적으로 잣대를 제공한 것은 유대교, 고향 비테프스크의 기억, 러시아, 첫 아내인 벨라로 집약된다. 이는 샤갈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극복대상 이자 마지막 보루였다고 해야 겠다. 특히 세번째 부인 바바(법적으론 두번째 부인)와 가장 오래시간을 살았지만 첫 부인 벨라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동경은 항상 그녀와 같이 했다. 샤갈은 여자들에게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던 인물이었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벨라, 버지니아(두번째 여인), 바바 그리고 딸 이다. 딸 이다가 성장하기까지 벨라는 샤갈의 정신적 지주였고 동시에 뛰어난 사업가이자 큐레이터의 역활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망하고 나서는 이다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바바와 재혼하고 나서는 다시 그자리를 바바가 대체했다. 작품세계이외에는 모든 것을 이들에게 맞겨두고 자신은 오직 작품활동에만 전념한 것 처럼 비쳐지지만 실상 다른 면에서는 그녀들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샤갈은 영악했다. 이는 그의 두번째 연인인 버지니아의 고백과 말년에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구호위원회 기금모금 과정에서 형식상으로는 아내인 바바가 거절하게 되지만 그 뒤편에서 그냥 주시하고 있었던 샤갈의 내면을 말해 주기도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종료 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비쳐지는 그의 일련의 행동에 대해선 왠만한 사업가들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여 자신의 명성유지에 집착하는 모습등은 결코 그가 평생을 작품활동에 몰두 했다고 볼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는 피카소나 마티스와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막연히 이러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왠지 인상이 지푸려지기 마련이다. 샤갈의 성장배경과 유대인이라는 태생적 컴플렉스 그리고 고향을 떠난 집시같은 방랑생활들이 혼합되면서 샤갈이 왜 그토록 화가로서의 명성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있다.

샤갈은 평생 지인으로 유대인만을 고집했고 비유대인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유대인들의 예술적 무지에 대해선크게 낙담했다. 이러한 그의 지엽적인 대인관계는 하시디즘에 입각관 초기의 가치관에서 비롯 되었고 고향을 떠났다는 자책감의 발로였던 것이다.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더이상 고향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현실화 되면서 샤갈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캔버스에 벗어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나 무대장식등으로 작품세계의 폭을 넓히게 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비단 죽음과 동시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공동묘지에 잠들게 되지만 정작 자신은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는 것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샤갈은 죽어서 작품을 남겼다. 우리가 호랑이의 가죽을 평할 때 단지 죽은 호랑이에 대해선 알 것 없이 가죽만을 평하듯이 샤갈의 작품만을 논하게 되면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샤갈의 신념,가치관,그리고 열정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저 한장의 스쳐 지나가는 스넵 사진을 보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샤갈의 삶을 축약한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 다시 한번 그의 작품 세계와 작품의 배경 그리고 샤갈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방대한 화보는 마치 독자들로 하여금 샤갈 특별전시회에 와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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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 1.2 세트 - 전2권
시미즈 이사오 지음, 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옮김 / 어문학사 / 2008년 4월
품절


근대화(近代化;modernization)의 의미,특히 동양에서의 근대화의 의미는 좀 더 다른 뉘양스가 담겨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라는 높은 파고는 순식간에 유럽 전역을 휩쓸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쉼없이 퍼져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화는 인류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사유의 다양성을 던져 주었지만 또 다른 이면엔 제국주의라는 치명적인 독소 역시 동시에 던져준 양면의 칼날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근대화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동양에서는 강요와 강박으로 문호가 개방되면서 제국주의에 의해 도입된 근대화의 왜곡된 측면은 오랜기간 동안 그 중심을 잡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는 바로 이렇게 서구열강에 의해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 일본의 시대상을 서구인의 눈으로 그려낸 화보집이다. 좀 더 엄밀하게 보자면 풍속화첩이라고 해야 할까. 철도,근대적인 병사들의 모습, 게이샤와 창부 그리고 하녀들의 모습, 일본인들의 풍습, 각종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펜으로 스케치하여 당시 메이지유신 시대의 살아있는 현장감을 보여주는 일본에서도 보기드문 장면들이 많을 정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작가인 프랑스인 조르주 비고는 직접 일본인과 결혼까지 하여 일본에 대한 애착이 컸던 인물로 대게 서구열강의 신민이라는 우월적인 가치관에서 미개한 동양인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을 가진 보통의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그가 바라 보았던 일본에 대한 시각이 좀더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태생적 한계를 모두다 극복했다고 할 수 는 없으나 일본이라는 거대한 국가차원의 껍데기를 관찰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세세한 부분을 촛점에 맞춤으로서 생동감 있고 현실성 있는 일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계층이나 직업에 지엽성(군인,게이샤,창부,하녀등)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시각으로 판단하면 오히려 신분계층상의 최하층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진귀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근대화의 가장 큰 특징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강력한 힘 그리고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이다. 대게 이를 반영하는 것이 철도라는 동양인들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바퀴 달린 괴물같은 동체였고 제복을 멋찌게 입고 총칼로 무장한 신식군대에서 강력한 근대화를 느끼게 된다. 최초로 개통된 <도쿄-고베>간 철도와 객실의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 근대화를 상징하는 의상과 그 의상과 어울리지 않지만 근대화를 온몸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상부층의 인물들과 아직까지도 근대화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는 일반인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근대화 추종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군대입대를 위한 예비소집 광경을 묘사한 그림에서 우리는 신분적인 파괴를 볼 수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근대화의 시발점은 다름 아닌 강력한 근대화의 군대 구성이었다. 그동안 사무라이라는 특정계층에 의해 유지되었던 군이라는 개념이 하층민에게도 개방되면서 일종의 신분상승의 창구역활을 하였고 결국 이는 비뚤어진 제국주의 학습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렇듯 근대화를 대표하는 철도와 군대는 일본을 빠른시간내에 근대화로 이끌어 갔지만 한편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운명을 바꾼 역활을 하게 된다

근대화가 가져온 결과가 다 좋을 수 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례가 게이샤와 창부들 그리고 하녀들이라는 최하층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들의 삶은 사실상 막부시대가 종식되고 근대화를 상징하는 메이지유신이 개창 되었다고 해서 변하는게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굴절된 근대화라는 공간속에서 더욱더 개개인의 인간적인 가치보다 상품화되고 타자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물론 그중에서 힘있는 서양인의 눈에 띄여 정부로 신분 상승한 게이샤도 있었지만 대게의 경우는 근대화라는 물결속에서 몸에 대한 금전적인 가치로 환원된 삶을 살아야 했다는 점이 이들 하층민들의 현실이었다.

당시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유행했던 것은 안경과 자전거였다고 한다. 특히 안경은 검은색을 더 선호했고 그래서 남녀노소를가리지 않고 안경을 쓰고 다니는 대유행이 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전거 역시 처음엔 고가였던 것이 보급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 되었다. 우편배달에서 부터 유용하게 그리고 공적인 개념을 사용되던 자전거가 급기야 게이샤들의 오락거리로까지 파급 되면서 근대화는 계층의 차별을 뛰어넘는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일본인들에게 전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비고에게 한편으로 신나는 풍속화 재료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고의 눈에 비친 평범한 일본인들의 모습은 때론 많은 충격을 주기도 했다. 특히 남녀혼욕은 그야말로 신비한 재료감이었고 비고의 손을 쉴사이 없이 바쁘게 했던 것 같다. 비고는 교사,외교관,병사,사진사,누드모델,외국인가정의 메이드,건널목 여자철도원,근대식 레스토랑의 여종업원, 간호사등 다양한 직종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스케치하여 당시 근대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준다. 한편으로 비고는 근대화와는 동떨어져 있는 순박하면서 전통적인 일본의 모습을 간직한 어촌의 여자들과 막 시작된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일반인들의 어울리지 않는 근대화 과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 그려져 있는 이 시대의 다양한 불평등조약체결과 그에 대한 평가 그리고 사상의 변화로 인한 지식인들의 혼란속에서 비고는 어쩌면 강요된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근대화라는 시대적 대세를 뒤쳐지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사람들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번 책은 그동안 가해자로만 각인 되었던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들 역시 크게 근대화의 피해자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우리와 일본의 독특한 관계를 걷어내고 철저하게 근대화의 과정과 근대화 시대를 맞이 하여 살아가는 운명에 놓인 일반인들의 모습에서 사뭇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토대로 근대화를 받아 들였고 자체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받아 들인 근대화의 장단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불행한 과오를 범하게 되면서 동북 아시아에서 근대화라는 단어를 그다지 유쾌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단어로 이루어진 글보다 이렇게 단장의 시각적인 표출물이 주는 효과가 어쩌면 더 사람들의 머리속에 오래토록 각인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근대화가 어떻고 그로 인한 파급효과가 어떠했다는 말보다 비고의 삽화가 보여주는 상징성과 진실성이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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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행복 이야기
천진 지음, 현현 엮음 / 불광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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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가? 혹은 당신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선뜻 "네"라고 대답하는 한국인은 생각보다 그다지 많지 않다. 영국의 레스터 대학이라는 곳에서 발표한 세계국가별 행복지수를 보게 되면 대한민국은 143개국중 68번째로 행복하다고 한다. 특히 행복지수가 44.5로 과반수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 발표에 따른 행복지수 1위국가는 과연 어디일까? 우리보다 문화,경제적으로 선진산업국인 미국?유럽국가들? 일본?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고 중앙아메리카의 작은 나라 코스타리카로 선정되었다. 1부터 10위까지가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국가이고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베트남이 선정되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대한민국보다 더 행복지수가 낮게 조사되었다. 물론 행복지수를 우리가 정의하는 행복이라는 가치관을 가장 유효 적절하게 평가했다고 할 순 없지만 이러한 연구결과가 주는 의미는 분명하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행복(幸福, Happiness)은,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는 주관적일 수 있고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 단, 행복은 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며 금욕을 행복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생물에도 이에 상응하는 상태가 있을 수 있다. 라는 극히 사전적인 용어를 떠나서 행복에 대한 인간의 추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중에 하나이다. 갑자기 <지리산 스님들의 못말리는 행복이야기>와 이러한 행복에 대한 논거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라고 의구심도 들지만 사실상 이 책은 우리가 행복하다,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해야 한다라는 두서 없지만 꼭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에 대한 원론적이고 각론적인 행복론이기 때문이다. 지리산 홍서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정봉스님과 천진,현현스님의 수행이야기는 전작인 <못말리는 수행이야기>를 통해서 일반 독자들에게 전해졌고 그 파장은 은근하게 그러면서도 진하게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전작이 만찬을 들기 위한(아마도 이러한 표현자체가 이분들에게 누가 되겠지만...)에피타이저였다면 이번 책은 그야말로 정말 맛있고 향기로운 메인코스라고 해야 겠다. 물론 저자가 불도를 닦고 있는 불제자이기 때문에 고성제,집성제,멸성제,팔정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색체가 묻어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는 불교를 통한 행복의 도달이라는 종교적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행복론 일반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쉽게 보면 정봉스님이 중간중간에 던져주는 법문은 선지식적인 면도 있지만 불교지식이나 종교적으로 귀의하지 않는 일반대중들에게 정말 쉽게 인도해주는 행복길라잡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가 설파한 무소유, 욕구나 욕망의 갈구자체를 뛰어넘어 편안한 상태를 진정한 행복이자 해탈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일반 대중에게는 이러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엄청난 수행이나 자기희생이 사실상 어렵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럼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져 주는 화두가 우리는 심신산골에서 맑은 공기에 청정음식을 먹으면서 석가여래를 받들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으니까 행복하다 그러니 당신네들도 우리같은 삶을 살아보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스님들이 던져주는 화두는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듯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닐까...
즉 이말은 불교라는 종교를 넘어서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다 같이 한번쯤 사유해보자는 취지가 더 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암감을 느끼지 않는 심리적인 상태를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그대로 수용하면 아마도 세상 어느 누구도 행복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욕망충족에 대한 자의적 주관적인 측정불가능한 잣대를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보다 스님들이 제시하는 행복론은 이러한 명사적 의미의 행복론이 아닌 행복을 찾아 끝없은 구도를 걸어가는 수도승처럼 일련의 과정에서 바로 절로 행복을 찾게 된다는 동사적 의미의 행복론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한다. 이러한 동사적 행복론에는 스님들처럼 법문에 귀의하여 석가의 가르침을 하나씩 익혀가는 과정일수도 있을 것이고, 일반 대중들이 속세를 살아가면서 맞부딛히는 세상사에서도 찾을 수 있는 움직이는 행복일 것이다. 물론 삼성제와 팔정도라는 원론과 각론이 행복찾기에 좀더 효율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를 모른다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그저 각자의 행복찾기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행복지수를 보면서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한 선진산업국의 국민들이 개발도상국의 국민들보다 오히려 더 불행하게 생각한다는 자료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욕망과 욕구의 충족이라는 명사적 개념으로 행복을 받아 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총족에 대한 정답은 없는 것이다.  행복을 단순하게 통장의 잔고개념인 stock으로 받아 들여서는 그 크기에 변화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 할 뿐이다. 행복은 fiow의 개념으로 진행되는 과정 움직이는 동사의 개념을 받아 들여야만 진정한 행복 찾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의 표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천진스님과 현현스님의 얼굴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이의 평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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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6 로마제국 쇠망사 6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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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신이 그렇게 원하신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신의 뜻이오 십자가는 그대들을 구원하는 상징일지니 붉은 핏빛 십자가를 철회할 수 없는 신성한 계약의 증표로 그대들의 어깨나 가슴에 걸도록 하라"로 촉발된 십자군 전쟁은 그마나 제국의 버팀목 역활을 했던 약간의 다양성 표출에 직격탄을 날리고 하느님의 휴전이 확인될 때 까지 유럽과 중동인근을 대 혼란의 시대로 몰아가게 된다. 물론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역사라는 수레바퀴는 변함 없이 굴러갔지만 이 전쟁이 가져온 댓가 역시 수레바퀴의 동력만큼이나 값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했다.

기번은 십자군 전쟁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평가한다. 그것은 "야만적인 광신의 표출" 이다. 원래 성전(聖戰:holy war)이라는 의미는 평화시대의 군주을 섬기는 자들이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불가피하게 정당한 싸움에 나서는 경우가 아니라면, 파괴의 칼을 뽑은 명분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본 기번은 십자군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속세의 영역속으로 들어오면서 급기야 속세와 종교의 통상적인 잣대를 단하나 종교의 잣대로 저울질 하면서 벌어진 참흑이었다. 결국 십자군원정의 구성원들은 빚이나 이자, 명예훼손죄, 세속의 처벌 면제등 속죄에 대한 댓가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를 독려받게 되고 이러한 모든 속세의 죄들이 성전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면죄부를 받다 보니 결국 전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명확약관해 지는 것이다. 이는 비잔티움 함락 후 발생했던 마호메트 2세 군대의 약탈행위 보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한 약탈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음을 전쟁으로 인한 약탈은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를 매우 작게 만든다라는 기술로 그 씁쓸한 뒤맛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십자군 전쟁은 광신으로 둘러싸인 일부 지도층의 광기와 더 이상 삶의 존재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 민중의 분풀이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실패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교가 로마를 장악했지만 로마시민들 대다수에게 로마 교황청의 이름과 권위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만큼 현실적인 괴리가 존재하였고 물론 이는 현세적인 괴리만큼이나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평민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그리스도를 거부했듯이 로마인들이 화려하고 거만한 현세적 지배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대리인(교황)을 몰라본 것처럼 말이다.이러한 괴리감은 결국 교황의 선출과정을 바꾸는 계기로 이어진다. 기존에 성직자와 민중의 투표로 추대되던 방식에서 1179년 알렉산데르3세와 1274년 그레고리우스 10세에 이르러 추기경으로 만 구성된 협의체(콘클라베) 탄생하면서 성 베드로의 제자들은 민중과 결별을 선언하게 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 정체성에 대한 확신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번은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마무리 하면서 1430년 포기우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 황폐해진 로마시 전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회로 자신의 대작을 마무리 한다. 아이네이아스와 로물로스의 건국으로 시작된 로마가 공화정과 제정을 거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세계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정작 지금 포기우스의 눈앞에 서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패허나 다름없는 쇠잔한 정경으로만 다가온 이유를 기번은 티투스의 원형경기장으로 잘알려진 콜로세움의 붕괴 과정을 네가지 이유를 상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시간과 자연에 의한 훼손
 2) 야만족과 그리스도교도들의 적대적 침략
 3) 건물 자재들의 도용과 남용
 4) 로마내부의 분쟁 

기번은 특히 위의 4가지 요인중 두번째와 네번째 요인에 주목하고 있다. 야만족으로 대변되는 알라리크와 가이세리크의 병사들이 승전의 열정에 취하여 무분별한 탐욕과 잔학함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들이 주 목적은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귀중품이었지 집정관들과 황제들이 남긴 기념비들을 철저히 파괴하는 무익한 행동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눈에는 악마의 조각상이나 제단, 신전들은 모두 증오의 대상이었고 로마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선조들의 우상 숭배 흔적을 없애기 위해 열과 성을 다 바쳤고, 다만 신앙의 논쟁거리에서 살짝 비켜간 공공건물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만큼 다양성에 대한 포용이 현격히 살아지면서 세상을 이분법적인 잣대로만 생각한 후대인들의 로마계승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략 4천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과 본문에 맞먹는 주석으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일반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고전으로 인식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기에 상당한 인내와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에 로마제국의 번성기를 다루는 내용도 아닌 쇠망기를 다루다 보니 역사적 인용자료가 방대하다 못해 기번 자신 역시 긴가민가하는 주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다소 산만한 내용들과 중복되는 내용들이 상당부분 차지 하고 있는 것 역시 가독성을 저해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기번이 살았던 팍스 브리타아니아시대나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에서도 로마라는 대제국에서 멀어져서 사유할 수 없는 이유를 기번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도교라는 암적인 존재(물론 이 표현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해석한 말이다)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해가 질 수 없는 대 제국이었다. 도시국가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다름 아닌 문화와 종교를 비롯한 각종 사회제도 심지어 인종적인 편견에서 까지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인 다양성과 포용력에 그 근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회를 잠식하면서 로마는 두 가지의 원동력을 상실한 채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으로 점철되면서 결국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로마는 서양역사와 문화 그리고 제도등에서 지금도 서양 대부분의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다만 로마死後 등장한 열강들이 진정한 포스터로마가 되지 못한 것은 로마의 진정한 정신인 다양성의 포용을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포스터로마를 자처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국가들에게 로마의 흥망성쇠는 역사속의 지는 노을이 아닌 현실속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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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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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쪽눈으로 봐서는 절대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파하는데 일등공신역활을 한 이덕일 선생의 새로운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가 출간되었다. 조선 27명의 군주중 태종,세조,성종,연산군,선조,광해군,인조,영조 8명의 군주를 각각 4가지 테마로 묶어 군주 자신들의 삶과 치세를 살펴보면서 후대에 많은 부분 왜곡되었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던져주고 있다. 물론 이번 저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저자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과 그외의 역사적 사초를 근간으로 역사책은 글자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정황과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우리의 역사적 시각은 바로 이러한 역사서를 있는 그대로의 문자로만 앞뒤의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을 싹둑 걷어낸 골자만으로 인식되길 강요 받아 오다보니 사실상의 역사적 진실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그야말로 자신의 역사관이 아닌 주입되고 강요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측면에서 이번 저작 역시 새롭게 조선의 군주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역사는 과거학이 아닌 미래학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사의 올바른 인식 부족이 가져오는 정치의 파탄(이는 절대군주국가였던 조선의 경우 그 패해가 더 했음은 두말할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과 그로 인한 소용돌이가 군주를 비롯한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던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고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함을 넘어선 필연적인 선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지난날 조선에서 제왕학에 춘추나 자치통감등의 역사서가 필수과목이었던 이유 역시 과거의 사례를 반면교사삼아 현재를 상고하고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기에 꾸준히 역사에 대한 관심과 성찰이 이었던 것이다, 비단 이러한 과정과 교육을 받고 보위에 올라서도 올바른 치세가 쉽지 않았던것이 바로 왕이라는 지존의 자리였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위정자들의 역사관과 그로 인해 파생되고 전파되어지는 담론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 저서에서 주목해야할 군주는 다름 아닌 희대의 폐륜 군주로 각인된 연산군에 대한 평가이다. 그동안 TV사극이나 역사물 그리고 픽션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두 글자로 대변되었고 절대군주시대에 상상하기 조차 힘든 신하들의 반정으로 보위에서 쫒겨나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당한 정치적 흐름이었다고 배워 왔고 그리고 믿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흥청망청의 원조격으로 폐위되는 그 순간까지도 장녹수의 치마폭에서 해쳐나오지 못한 색마, 자신의 향락을 위해 민초들의 삶을 처절하게 짓밟은 폭군 그리고 선왕의 후궁들까지 스스럼 없이 살해한 살인마의 이미지로 연산군일기는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실록을 바탕으로 전파된 야사는 연산군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대재생산함으로서 군주폐위에 대한 정당성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과 그리고 실록을 세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연산군의 이미지에 대해서 의구점이 발견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산군 이외에 또 다른 반정의 대상이었던 광해군은 끝까지 천수를 누린 반면 연산군은 폐위와 동시에 목숨까지 요구했던 것은 반정에 대한 정당성에 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점은 반정세력이 작성한 연산군일기에서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전부다 세탁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연산군의 비극의 원인은 세조의 찬시(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이 모든 악역을 자처하고 반석위에 올려놓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헌정질서를 송두리채 꺽어버린 세조의 등극과 그에 빌붙은 훈구공신들의 역사적 퇴행이 가져온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미 조선은 군왕의 나라가 아니였음을 연산군은 인지하지 못하였고 그나마 자신의 편인 사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사화라는 훈구대신이 파놓은 덫에 걸려서 몰락하게 된 것이지 그동안 왜곡된 연산군의 비행에 그 원인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시쳇말로 태종만큼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연산군은 그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했던 차이가 폐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성종의 요절과 연산군의 폐위로 조선은 신하들의 나라 정확히 문신들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그들만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비단 소현세자나 이후에 정조라는 불세출의 개혁군주가 탄생했지만 이들 역시 신하의 나라에선 필요치 않는 눈에 가시였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제거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태에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군주자신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강요했다고 볼 수 도 있지만 결국 위정자의 잘못된 역사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금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거울을 처다보듯이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저서를 통해서 다시금 그동안 알아 왔고 자연스럽게 인지 되었던 조선왕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치세 및 역사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역사는 과거학이 아니라 미래학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역사는 이를 보는 관점에서 正인 것이 反이 되고 反인 것이 正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냉철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이고, 새가 한쪽 개로 날 수 없듯이 역사 인식이야말로 왼쪽 오른쪽을 모두 다 정확하게 살펴봐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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