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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재키 울슐라거 지음, 최준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러시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얼마전 우리와 월드컵 평가전을 치루었던 벨라루스라는 나라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신생국이다. 사실상 알려진게 많지 않는 신생국이지만 벨라루스의 작은 도시 비테프스크는 오히려 벨라루스라는 나라보다 더 세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샤갈이라는 걸출한 화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마르크 샤갈은 입체주의 화법의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 색체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다. 특히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나 천정화 그리고 오페라나 음악회의 무대장식등 기존 미술계에서 추구했던 이젤화법에서 벗어난 다양하고 독튿한 분야로 다가 가면서 현대 미술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 시킨 장본인 중에 한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라는 詩나 전국 어디가나 한두번쯤 맞딱 뜨리게 되는 거리의 카페 이름에서도 더욱 친밀감을 주는 화가이다. 정작 샤갈의 평전을 읽기 전만 하더라도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이 샤갈의 작품인 줄 알았을 정도이니 그 만큼 샤갈에 대해서 무지 했다고 해야 하겠다. 초현실주의 라는 현대미술의 지파에서는 그 시조로 샤갈을 거론하고 입체파니 야수파니 다양한 미술화풍에서 샤갈을 들먹이지만 정작 샤갈 본인은 단 한번도 그 어느 특정화풍에 얽매이지 않는 철저한 독립화가이자 아웃사이더였다는 점에서 샤갈의 인생을 엿 보는 그 자체로만으로 흥미진지해 지는 평전이다.
무엇보다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평전에서는 강조되는 관념이나 사상을 부각시키는 공적인 부분보다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은밀한 사생활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화가라는 직업상 그의 작품세계를 화보를 통해서 접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그 어떠한 평전에서 느낄 수 없는 신선함과 동시에 색다른 독서기행이 된다. 평전치고는 상당한 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방대한 화보들로 인해 책의 두께감을 느낄 수 없게 하고 특히 샤갈의 처녀 작품에서 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그의 화풍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시각적인 즐거움도 선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련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과 더불어 샤갈의 심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시대적, 인물적인 접근이 동시에 묘사되어 있어 샤갈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한층 도움이 된다. 특히 현대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에겐 샤갈의 평전만으로도 현대미술의 맥을 짚어가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 많은 화가들(야수파의 대표격인 드랭, 오르피즘의 창시자 들로네, 마티스, 피카소등)과 그들의 작품을 같이 수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의 전반적 이해를 한층 가볍게 해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 화가들과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는 화상들의 세계까지 소개되어서 미술작품의 제작과정에서 판매 그리고 전시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는 일반 대중들이 갤러리에서 보는 미술작품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어두운면도 아울러 다루고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게되면 이러한 면들도 미술작품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되는 또 다른 방법론적 측면으로 이해될 수 도 있는 것이다.샤갈은 프랑스 국적의 화가이지만 그가 태어난 비테프스크는 러시아내에서도 제법 커다란 정착 유대인촌이었다. 특히 샤갈이 속했던유대촌은 이시디어를 사용하고 하시디즘(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온 종파)을 신봉하는 배경으로 인해 샤갈의 예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단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망명하게 되어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면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샤갈에게 고향은 한없는 작품세계의 소재를 제공했던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이자 희망 그 자체였다.
샤갈에게 정신적으로 그리고 작품적으로 잣대를 제공한 것은 유대교, 고향 비테프스크의 기억, 러시아, 첫 아내인 벨라로 집약된다. 이는 샤갈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극복대상 이자 마지막 보루였다고 해야 겠다. 특히 세번째 부인 바바(법적으론 두번째 부인)와 가장 오래시간을 살았지만 첫 부인 벨라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동경은 항상 그녀와 같이 했다. 샤갈은 여자들에게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던 인물이었다. 어머니를 시작으로 벨라, 버지니아(두번째 여인), 바바 그리고 딸 이다. 딸 이다가 성장하기까지 벨라는 샤갈의 정신적 지주였고 동시에 뛰어난 사업가이자 큐레이터의 역활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망하고 나서는 이다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바바와 재혼하고 나서는 다시 그자리를 바바가 대체했다. 작품세계이외에는 모든 것을 이들에게 맞겨두고 자신은 오직 작품활동에만 전념한 것 처럼 비쳐지지만 실상 다른 면에서는 그녀들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샤갈은 영악했다. 이는 그의 두번째 연인인 버지니아의 고백과 말년에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구호위원회 기금모금 과정에서 형식상으로는 아내인 바바가 거절하게 되지만 그 뒤편에서 그냥 주시하고 있었던 샤갈의 내면을 말해 주기도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종료 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비쳐지는 그의 일련의 행동에 대해선 왠만한 사업가들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여 자신의 명성유지에 집착하는 모습등은 결코 그가 평생을 작품활동에 몰두 했다고 볼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는 피카소나 마티스와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막연히 이러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왠지 인상이 지푸려지기 마련이다. 샤갈의 성장배경과 유대인이라는 태생적 컴플렉스 그리고 고향을 떠난 집시같은 방랑생활들이 혼합되면서 샤갈이 왜 그토록 화가로서의 명성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있다.
샤갈은 평생 지인으로 유대인만을 고집했고 비유대인들을 신뢰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유대인들의 예술적 무지에 대해선크게 낙담했다. 이러한 그의 지엽적인 대인관계는 하시디즘에 입각관 초기의 가치관에서 비롯 되었고 고향을 떠났다는 자책감의 발로였던 것이다.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더이상 고향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현실화 되면서 샤갈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캔버스에 벗어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이나 무대장식등으로 작품세계의 폭을 넓히게 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비단 죽음과 동시에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 공동묘지에 잠들게 되지만 정작 자신은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는 것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샤갈은 죽어서 작품을 남겼다. 우리가 호랑이의 가죽을 평할 때 단지 죽은 호랑이에 대해선 알 것 없이 가죽만을 평하듯이 샤갈의 작품만을 논하게 되면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샤갈의 신념,가치관,그리고 열정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저 한장의 스쳐 지나가는 스넵 사진을 보는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샤갈의 삶을 축약한 평전을 읽으면서 새삼 다시 한번 그의 작품 세계와 작품의 배경 그리고 샤갈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방대한 화보는 마치 독자들로 하여금 샤갈 특별전시회에 와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