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다윈의 시대 - 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EBS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 제작팀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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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는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스티브 존스, 윌리엄 뎀스키, 마이클 베히등 세계적인 석학들의 저서을 통해서 진화론, 지적설계론고 그 밖의 창조론에 대한 서구의 열띤 공방을 접해왔고 이러한 담론에 대해선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에 대한 고견을 사실상 접해보질 못했다. 그나마 2009년 <종교전쟁>이라는 책을 통해서 종교와 과학간의 갈등에 대해서 일반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준것 이외에는 우리사회에 진화론 對 창조론 구도에 대한 심도깊은 논쟁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화론에 대해서 우리는 극히 과학적인 사실로 인지하고 있으나 최근에 실시된 여론조사의 결과는 사뭇 충격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론 창조론자들의 입장에서는 극히 실망스러운 수치이겠지만) 대한민국의 40%가량의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고 있다는 통계 그중에서도 개신교 신자들은 60%가량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는 통계가 나오면서 이제 우리사회도 진화 대 창조 내지는 과학 대 종교의 허심탄회한 담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신과 다윈의 시대>는 이런 측면에서 굉장히 시의적절한 책이라고 하겠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어머어마한 혁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철학에서 제기되었던 인간과 자연철학에 대한 비중이 로마제국과 중세를 거치면서 신학 즉 종교가 모든 가치관을 대변하면서 신을 떠난 사유의 확장은 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런 의식구조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것이 바로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고 그중에서도 [자연선택론]은 당시로서는 충격이 이만전만이 아니였다. 신을 닮았고 신을 대신해 이 지구상을 통치하는 우리가 원숭이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에 세계는 경악 그 자체였고 특히 종교계는 마치 핵폭탄에 피폭된 것처럼 아노미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윈의 사유를 시발로 그동안 신학의 하부개념에 만족해야 했던 많은 분야의 학문들이 본연의 위치로 자리잡게되는데 다윈만큼 기여한 학자도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이제는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적인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근본주의 개신교와 이슬람교등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판도라같은 상자이지만 대체적으로 진화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괄호밖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사회적인 관심이나 이슈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근현대화의 역사적 기원이 타율적이고 시간적인 추이에서 서구선진산업국에 비해 급속로 이루어진 관계로 이러한 학문적 기반이나 토론의 장이 마련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정이 달라지고 있고 달라져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짧은시간내에 가장 많은 개신교신자을 확보한 나라이자 추기경을 배출한 나라 그리고 유전공학분야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 우리사회에서 이점에 대한 서로간의 논쟁이나 토론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든 문제이고 오히려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토론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되면 각자의 사고가 독설화 되어버리는 경향이 농후하고 이러한 추이는 결국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만을 양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신과 다윈의 시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세지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진화 대 창조, 인간 대 신에 대한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동안 진화의 입장에서 바라본 신과 종교, 종교의 입장에서 바라본 진화와 과학이라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명제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을 가지고 과학과 종교의 역활에 대해서 심도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자는 취지가 강력하다. 특히 이 책의 출간 의도가 어느 한편의 진영에 일방적인 판정승을 끌어내는 제로섬 게임 매치는 아니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의 반대 논거 또한 많은 부분에서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종교를 위한 종교,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과학과 종교가 상생할 수 있는 계기 마련에 일조를 하는 책임에 분명하다. 양측의 담론이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결국 그 어떠한 담론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양 진영은 서로의 담론에 대해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고 서로의 견지를 묵살하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서 과학과 종교가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나마도 어느 쪽의 견해가 주가 되는냐에 대한 논거로 유명무실해진 형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시도가 양측 진영의 화해의 밑거름이 될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이다. 이 양측진영의 대결은 모든 인류에게 해악만을 가져다 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신과 다윈의 시대>은 양측의 화해 가능성과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한쪽 사고에 편협될 수 있는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담론인 보편타당성을 종교에도 적용해야 하고 종교적 담론인 사랑,평화을 과학에 적용 한다면 분명 일류의 한발짝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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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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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업화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계는 분명 지금보다는 아주 느리게 돌아같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 보다 더 많은 기이한 일들이 벌어 졌고 그에 대한 반응도 지금의 사람들 보다 훨씬 강도가 큰 놀라움으로 다가같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풀어갈 수 없다고 여겨진 기이하고 놀라운 일에 대해서 기적을 바랬을 것이다. 놀라움이 많고 클수록 기적도 자주 일어나는 것이니까. 이에 반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놀라움이나 기이한 일에 대해서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다. 이제 사고로 몇십명 정도 죽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충격으로 와닿지도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기적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난센스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그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혜성처럼 나타난 영국의 신예 작가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 동안 정통 문학에 다소 식상 했던 독자들을 위해서 자구책이든 문학장르의 혁신이든 간에 추리,에로,호러,SF등 다양한 장르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던 문학계나 독자들에게 소설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제 독자들은 왠만히 상큼하고 기발한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러티브로 어필이 되지 않는 이상 작품에 대한 기이함이나 놀라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던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적같은 작품을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 도 없게 되어 버렸다. 너무나 극성스러운 플롯에 중독되어 왠만한 충격은 그저 그렇게 묻혀갈 뿐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동안 스팩타컬한 내러티브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겐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내러티브의 연속뿐이다. 영국의 어느 빈촌의 다세대같은(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발생한 한 소년의 교통사고와 사고 이후 화자이자 3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그날 오후에 있었던 거리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는 그렇고 그런 내러티브이다. 추리나 반전의 요소도 없고 충격적인 장면 하나 나오질 않는다. 심지어 작가는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서 구어의 표현인 따옴표 조차 생략해 버렸다. 사실 한번 읽어 보다가 턴테이블의 카세트를 되 감듯이 몇 번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고약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영국을 휩쓸고 각종 리뷰어지에서 찬사를 받게 된 계기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조금씩 다가오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뇌리에 깊이 오버랩 되는 작품이다. 

흔히 쉽게 잊혀져 가고 지나쳐 버리는 소재를 이토록 유심히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특히 거리의 모습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겉 모습과 심리묘사는 마치 CCTV를 통해서 리얼타임으로 현장을 중계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에서 소소하면서도 세밀했던 묘사들이 불현듯 생각나는 작품이다. 전혀 생각할 가치 조차 없다고 여겼던 일에 대해서 작가는 시와 같은 문체를 동원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의미는 소설을 읽는 내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무엇인가에 의해 잃어버렸던 감정의 순수함과 떨림을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되찾아가는 기분마져 들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런 묘사력은 교통사고 당시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순간을 다음과 묘사함으로써 그 극치에 이른다. "운전자의 입장 뇌세포들 사이에서 전기 신호들이 뉴스 통신 본부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처럼 좌충우돌하다 하나의 신호로 수렴돼 터져 나오눈 의지가 척추를 항해 곤두박질치고 가장 짧은 경로를 찾아 건너뛰고 방향을 틀며 길을 잘못 든 자전거 배달부처럼 발목 근육에 도착해서 브레이크를 바닥 끝까지 밟아, 보통의 제어 행위를 벗어나 브레이크 폐달을 너무 세게 밟아서 며칠 후 근육이 노랑과 보랏빛으로 붓게 돼서야 뇌의 작용이 멈춘다" 이렇듯 이 소설은 작가의 이런한 세밀하면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읽는 당시에는 그저 눈요기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뇌리에 오래토록 남아있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린 기적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정형화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러티브 그리고 상상을 초월해 버리는 플롯으로 점철된 현대 소설이라는 아름다운 꽃밭에서 한쪽 구석에 이름모르는 야생화를 발견하고 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야생화의 향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그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지만 야생화가 내뿜는 향은 오래토록 은은하게 우리의 후각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이 바로 이런 야생화 같은 작품이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고 나면 그 파동이 서서히 밀려왔다가 다시 잔잔 해지는것 처럼 이 작품은 이렇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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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에 홀리다 - 조선 민화, 현대의 옷을 입다
이기영 지음, 서공임 그림 / 효형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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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여 생활공간의 장식을 위해, 또는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를 말한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 유행하였으며, 이규경(:1788∼1865)의 《오주연문장전산고(稿)》에는 이를 속화()라 하고, 여염집의 병풍·족자·벽에 붙인다고 하였다. 대부분이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화가나 떠돌이화가들이 그렸으며, 서민들의 일상생활양식과 관습 등의 항상성()에 바탕을 두고 발전하였기 때문에 창의성보다는 되풀이하여 그려져 형식화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에 비해 수준과 시대 차이가 더 심하다. 』인터넷 포탈사이트에서 민화를 검색하면 이와 같이 친절하게 설명되어져 있다. 민화는 이처럼 정통회화의 조류를 모방하였고, 창의성보다는 비전문가에 의해서 되풀이되는 정통 그저 그런 그림이라고 우리는 이때까지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워왔다. 조선의 정통회화는 북송의 영향을 받아 사대부들에 의해서 완성된 문인화를 정통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폭의 화선지위에 담겨져 있는 산수는 일반민중이 인식하는 그냥 산과 물을 표방하지 않고 그 속에 고매하고도 도도한 조선 선비정신이 깃들여져 있는 사상에 가까운 예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겸재나 완당의 그림을 보면서 그림속에 담겨져 있는 그들의 사상을 엿보고 이를 음미하면서 참 예술이라 평한다. 

하지만 약간만 시선을 돌려보면 이런 문인화에 비해 색감이나 피사체의 선택등에서 어이없는 그림들이 지천에 깔려있다. 바로 문인화와 차별짓는 속화라는 이름으로 남겨져 있는 민화들이다. 민화는 작가미상인 작품이 거의 대부분이면서도 대동소이하게 비슷한 플롯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손을 통해 수없이 전사 되면서 하나의 형식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주제나 양은 실로 어마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민화는 조선 계급사회에서 사대부가 아닌 주로 일반민중들의 애환을 담고 있고 그들이 소장하고 그리고 전래되었던 대표적인 민중예술이다. 문인화가 고매한 사상을 내포한 경건한 예술쪽에 가깝다면 민화는 일반민중의 희노애락을 담은 잡학적 성격을 가지면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병풍이나 부채 그리고 창문등에 우리 시선이 와닿는 곳은 어디던지 민화를 대할 수 있다. 이런 노출성에 의해 그동안 민화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왜곡되고 폄하되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국내보다는 오히려 외국에서 우리의 민화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가면서 정작 이제야 우리의 눈에 민화가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년이라는 영겁의 시간을 거슬러 와서 이제 민화를 바라보는 눈이 제대로 열리기 시작했다. 

<민화에 홀리다>는 제목처럼 책을 읽으면서 절로 민화에 홀리게 한다. 그 만큼 민화라는 자체가 우리 일반 민중의 일부였기에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춘향전에서 시작되는 한대목에서 부터 거실의 병풍 그리고 도자기의 도안 의상에 이르기까지 민화는 현대에 와서 제대로 대접받으면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저자는 민화의 역사적 발전과 민화의 특성 그리고 민화와 현대가 한데 어울려져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즉 민화라는 극히 옛스럽고 고정화되어 있는 객체에 현대라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글로벌화를 접목시켜 시대에 맞게 변할 수 있는 민화의 힘을 보여준다. 이런 민화의 힘은 조선 사대부들의 문인화에 비해 민화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민화는 상상과 현실이 공유하는 공간이자 객체의 은유와 직설이 마주하고 있는 장이다. 또한 과장과 생략, 사실과 비사실을 통해서 민화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점은 조선후기 상업자본이 발달하면서 계층간의 경개가 모호해지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고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또한 당시 일반민중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바램이라는 수요가 민화의 공급을 가능케 했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포스터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민화의 특성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민화가 현대로 재 탄생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의 눈에 새롭게 들어오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민화의 대표격인 호랑이의 그림만 보더라도 기존 사대부들의 호랑이 그림에선 전혀 느낄 수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두려움이나 경건함 같은 것은 일체 보이질 않고 심지어 연암의 호질에 나오는 북곽선생을 조롱하는 친근한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미 화가의 눈에는 호랑이가 더이상 호랑이가 아닌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나 아버지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호랑이 뿐 아니라 사슴, 토끼, 꽃, 새등 주요 사물들이 하나같이 과장되고 추상화되면서도 그 본질적인 이미지 전달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 민화와 일반 민중의 삶은 이런면에서 동시대적이고 동공간적이다. 이처럼 민화는 아무런 제약이나 한계, 금기사항도 없는 세계를 만들어 냈고 바로 이점이 당시 민중들의 삶을 그림 한폭에 집대성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00년전 한폭에 민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당시 민중의 삶과 그들이 추구했던 혹은 바램을 잠시라도 엿볼 수 있을까 혹시나 이런 민중의 삶이 지금과는 단절된 삶일까? 아마도 200년전 민화나 현대에 다시 재탄생하는 민화의 주제나 형식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는 지금도 일반민중의 삶과 바램이 지난날 우리선조들의 삶과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의 평화, 입신양명, 무병장수, 부부애, 자식사랑등 우리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극히 소소한 바램들이 수백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바로 민화를 통해서... 

▣ 저자는 자본주의 학문의 꽃이라는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어느날 민화 사랑에 빠져 민화에 대한 각고의 노력으로 이 책이 출간되게 되었다. 그동안 민화에 왜곡된 사실을 올바르게 자리잡게 해줄 좋은 양서라고 해야겠다. 이 책 한권으로 민화에 대한 모든것을 이해한다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나름 민화란 어떤것인가에 대한 작은 대답은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현대와 고대의 민화사진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한층 이해감이 깊어지고 그림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민화에 한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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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경제학 (양장)
누리엘 루비니 & 스티븐 미흠 지음, 허익준 옮김 / 청림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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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습타파주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위험이란 금융시장에서 그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사건의 확률분포가 알려져 있으며 이에 따라 가격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확실성이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역사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통해서 다음에 발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시장관계자들이 준비하여 불확성을 최대한 줄여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통찰은 지난 몇년간에 걸친 세계금융위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위기 경제학>은 미국발 서프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적 금융위기를 일치감치 예견했던 미경제학의 아웃사이더 누리엘 루비니가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상존해 왔던 경제 위기를 역사적으로 통찰하고 그 발생원인과 이에 대한 자신만의 해법을 제시하면서 향후 세계경제에 대한 전망을 내놓은 책이다. 우리는 1930년대 발생했던 대공황과 최근 금융위기이외는 세계경제에 커다란 파급을 미쳤던 또 다른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거나 각종 자료들로 부터 파악한 대표적인 위가만을 인지할 뿐이지만 막상 경제사를 상고해 보면 항상 번영과 위기를 상존하고 있음을 통찰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저주라는 말이 생겨난지도 모른다. 그만큼 호황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 항상 불황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했던 현대인들에게 불황, 위기보다는 호황과 기회에 대한 효용가치가 더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2008년 금융위기를 미국경기의 둔화와 이로 인한 주택수요의 급감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두고 발행된 유동화증권인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불량으로 인해 일파만파 세계로 번져나가고 급기야 대공황에 비견되는 세계적 위기를 맞이했다고 알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시장자유주의의 확대로 인한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글로벌화된 시스템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문제는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음을 저자는 <위기의 경제학>을 통해서 그 실상을 하나 하나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이번에 발생했던 금융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금융시스템의 한곳이 마비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 태생적으로 필연적으로 터질 수 밖에 없는 시한폭판이 때가 되어 폭발했다고 보고 있다. 즉 그동안 세계의 부를 이끌었던 주 원동력은 제조업에 기반을 둔 전형적인 굴뚝산업이었다. 하지만 제조업의 한계가 봉착하면서 새로운 부의 타겟은 그동안 제조업의 보조적인 역활을 수행에 왔던 산업금융을 새로운 부의 메카로 둔갑시면서 금융이 주도하는 부의 레일위로 올려놓게 되었다. 이러한 질주는 월가의 금융전문가도 이해하지 못하는 다양한 유동화 금융 파생상품을 탄생시켜면서 속된말로 돈놓고 돈먹기라는 거품을 조장했고 이러한 거품은 꺼지지 않는 신기루처럼 온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듯이 호황의 축이 높을수록 불황의 골은 깊듯이 거품이 빠지면서 세계는 그야말로 이에 대한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번 금융위기가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때문이 아니라 서브프라임모기지를 탄생시킨 금융 시스템에서 찾고 있다. 건강하지 못한 상품을 끼워 넣어 유동화시킨 상업은행, 투자은행 그리고 이 증권화에 대한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무디스를 비롯한 신용평가기관과 이에 대한 전반적인 규제나 제동을 걸지 못했던 정부조직등이 한박자가 되어 만들어 낸 예견된 사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경제의 대세였던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부추겼고 이에 따라 등장인물들이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충실하게 연기했던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연극 그 자체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뒤의 씁쓸함은 너무나 오래토록 그리고 강하게 그 잔재가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고 세계각국이 경제부양을 통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있지만 그리 녹녹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제도주의적인 견지에서 이번 금융위기의 원인을 연구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금융산업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와 개혁이 없이는 결국 또 다시 이런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1)전문경영인과 트레이더의 자질과 이에 대한 보수에 대한 투명성 확보 2)금융 파생상품의 엄격한 관리와 규제 3)신용평가기관의 신뢰성 회복 4)골드만삭스나 씨티그룹같은 거대공룡금융그룹의 해체 5)사일로방식을 탈피한 글래스 스티걸 법의 부활을 통한 금융에 대한 전반적인 규제을 통해서 금융산업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받아 들이기 힘든 내용이지만 이러한 제도적 대 개혁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단지 한차례의 소나기는 그럭저럭 피할 수 있지만 결국 언제 터지질 모르는 또다른 시한폭탄을 안고 끝까지 가야하는 상황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앞으로의 세계경제에 대한 전망에서도 저자는 이러한 개혁이 뒤받침 되지 않을 경우 미국을 비롯한 선진산업국이 먼저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고 이는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시작된 남유럽의 사태가 자칫하면 전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또다시 확산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번 위기는 다름아닌 세계화의 반발과정으로 파악한 저자는 세계 각국이 동참하는 개혁이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이보다 더 큰 위기를 맞이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경제에 대해서 항상 기회와 호황만을 생각해왔고 위기난 불황을 논하는 것 자체가 터부시 되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위기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결국 이 모든 개혁은 위기의 발생확률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위기를 완전히 근본적으로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이제 경제학의 화두는 어떻게 위기를 관리하는야에 그 촛점이 맞춰져야할 시점인 것이다.  

▣ 이 책은 자본주의 출발과 동시에 나타났던 위기상황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원인을 하나 하나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와 그에 대한 개혁방안을 제시하면서 향후 세계경제가 나아가야할 바를 던져주고 있는 역작이다. 또한 경제학을 바라보았던 그동안의 시각의 방향타를 새롭게 한다. 위기관리와 위기대처방안을 통해서 보다나은 경제성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제도주의적 시각에서 국가의 개입을 적극 강조하는 저자의 관점과 상이한 견해가 많으나 금융산업부분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우리 경제를 뒤돌아보는 충분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세계화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을 거부할 수 없는 현 시점에서 어떻게 슬기롭게 세계화라는 파도를 타고 넘어가야 할지에 대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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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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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꿈(夢)이란 현실과는 정반대의 현상 즉 현실에서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몽짜로 끝나는 구운몽이나 옥루몽같은 작품들을 한번쯤이면 누구나 꿈꾸어왔던 세상을 그리고 있고 우리 인간들은 그러한 꿈을 각자 나름대로 키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은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 아니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유쾌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꿈 이야기와 다른 또 다른 꿈 이야기가 펼쳐진다. 황석영의 <강남夢>은 꿈은 꿈인데 그리 달콤한 꿈이 아니다. 한국 굴곡의 근현대사를 메타포로 다룬 가슴 아픈 꿈 이야기이다. 대한민국 강남특별시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강남은 이미 일반적인 행정구역의 개념을 넘어선지 오래되었다. 각종 인프라와 더불어 경제의 중심이자 대한민국 교육의 선도적인 위치 그리고 부동산시장의 리더라는 거대한 권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누구나 다들 그런 강남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강남 입성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이렇게 거대한 공룡처럼 변해버린 강남의 변화를 우리 근현대사의 왜곡된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서 조명하고 있다. 각종 비리와 금권의 결합이 낳은 기형적인 도시 강남은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일지 모른다. 자본주의시스템을 누구보다도 철처하게 완벽하게 몸에 익힌 우리가 꿈꾸어 왔던 세계가 바로 현실로 재탄생한 곳이 바로 강남인 것이다. 꿈은 잠에서 깨어나는 일장춘몽처럼 느껴져야 하지만 강남이라는 꿈은 사실상 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그만큼 강남은 이미 우리들에게 꿈일수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겉으로 들어난 화련한 스포트라이트는 우리의 진짜꿈을 모두 덮어 버린다. 아니 진짜 자신이 꿈꾸어 왔던 희망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게 잊혀지길 강요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요의 흐름을 마치 하나의 트랜드로 받아 들여 버리고 동상이몽이 아닌 플롯과 내러티브가 동일한 꿈만을 꾸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다. 이런 시니컬한 강남몽는 모두가 인지하면서도 왠지 꿈꾸지 않으면 안될 것 처럼 만들어 버린 그동안의 사회적 분위기가 사뭇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비장감마저도 느껴지게 하는 사회구조가 이제는 왠지 다반사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 강남몽의 힘인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우리 근현대사를 마치 봄날의 꿈속처럼 빠른 속도로 다루고 있다. 비뚤어진 강남의 절정판인 대성백화점(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강남의 인간상을 대표하는 박선녀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지만 나이트메어의 악몽처럼 강남몽은 그자리에 마천루같은 고급주택을 건설하면서 굳건하게 이어가고 있다. 마치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꿈처럼 말이다.

그러나 허물어진 콘크리트 잔해에서 생존한 정아를 통해서 작가는 강남몽이라는 악몽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언제가는는 강남은 한차례 거쳐야하는 호된 악몽으로 기억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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