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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0
존 맥그리거 지음, 이수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산업화이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계는 분명 지금보다는 아주 느리게 돌아같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 보다 더 많은 기이한 일들이 벌어 졌고 그에 대한 반응도 지금의 사람들 보다 훨씬 강도가 큰 놀라움으로 다가같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풀어갈 수 없다고 여겨진 기이하고 놀라운 일에 대해서 기적을 바랬을 것이다. 놀라움이 많고 클수록 기적도 자주 일어나는 것이니까. 이에 반해 현대를 사는 우리는 놀라움이나 기이한 일에 대해서 상당히 무감각해져 있다. 이제 사고로 몇십명 정도 죽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충격으로 와닿지도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기적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난센스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되었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그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혜성처럼 나타난 영국의 신예 작가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 동안 정통 문학에 다소 식상 했던 독자들을 위해서 자구책이든 문학장르의 혁신이든 간에 추리,에로,호러,SF등 다양한 장르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던 문학계나 독자들에게 소설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제 독자들은 왠만히 상큼하고 기발한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러티브로 어필이 되지 않는 이상 작품에 대한 기이함이나 놀라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던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적같은 작품을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 도 없게 되어 버렸다. 너무나 극성스러운 플롯에 중독되어 왠만한 충격은 그저 그렇게 묻혀갈 뿐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는 그동안 스팩타컬한 내러티브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겐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없는 내러티브의 연속뿐이다. 영국의 어느 빈촌의 다세대같은(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집들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발생한 한 소년의 교통사고와 사고 이후 화자이자 3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그날 오후에 있었던 거리 분위기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가면서 현재와 과거를 오고가는 그렇고 그런 내러티브이다. 추리나 반전의 요소도 없고 충격적인 장면 하나 나오질 않는다. 심지어 작가는 독자들의 가독성을 위해서 구어의 표현인 따옴표 조차 생략해 버렸다. 사실 한번 읽어 보다가 턴테이블의 카세트를 되 감듯이 몇 번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고약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영국을 휩쓸고 각종 리뷰어지에서 찬사를 받게 된 계기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조금씩 다가오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뇌리에 깊이 오버랩 되는 작품이다.
흔히 쉽게 잊혀져 가고 지나쳐 버리는 소재를 이토록 유심히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특히 거리의 모습과 다세대 주택에 사는 사람들 하나 하나의 겉 모습과 심리묘사는 마치 CCTV를 통해서 리얼타임으로 현장을 중계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킨다.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에서 소소하면서도 세밀했던 묘사들이 불현듯 생각나는 작품이다. 전혀 생각할 가치 조차 없다고 여겼던 일에 대해서 작가는 시와 같은 문체를 동원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의미는 소설을 읽는 내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그동안 무엇인가에 의해 잃어버렸던 감정의 순수함과 떨림을 책장을 한장씩 넘기면서 되찾아가는 기분마져 들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런 묘사력은 교통사고 당시 운전자가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순간을 다음과 묘사함으로써 그 극치에 이른다. "운전자의 입장 뇌세포들 사이에서 전기 신호들이 뉴스 통신 본부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처럼 좌충우돌하다 하나의 신호로 수렴돼 터져 나오눈 의지가 척추를 항해 곤두박질치고 가장 짧은 경로를 찾아 건너뛰고 방향을 틀며 길을 잘못 든 자전거 배달부처럼 발목 근육에 도착해서 브레이크를 바닥 끝까지 밟아, 보통의 제어 행위를 벗어나 브레이크 폐달을 너무 세게 밟아서 며칠 후 근육이 노랑과 보랏빛으로 붓게 돼서야 뇌의 작용이 멈춘다" 이렇듯 이 소설은 작가의 이런한 세밀하면서 상상을 뛰어 넘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읽는 당시에는 그저 눈요기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뇌리에 오래토록 남아있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기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린 기적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정형화되고 화려한 미사여구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러티브 그리고 상상을 초월해 버리는 플롯으로 점철된 현대 소설이라는 아름다운 꽃밭에서 한쪽 구석에 이름모르는 야생화를 발견하고 절로 고개가 돌아가는 느낌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야생화의 향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그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지만 야생화가 내뿜는 향은 오래토록 은은하게 우리의 후각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이 바로 이런 야생화 같은 작품이다. 마치 연못에 돌을 던지고 나면 그 파동이 서서히 밀려왔다가 다시 잔잔 해지는것 처럼 이 작품은 이렇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