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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이성적 행위라 보고, 모든 인간은 알기 원하고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 수염 텁수룩한 선생님은 ‘원근법’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였다. 검정 일색이었던 옷차림과, 표현주의파의 시를 읽는 것 같은 감흥 운운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전혜린 광신도’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눈치챈 것은 반에서 몇몇 아이들 뿐이었으므로, 그 몇몇이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밀회를 나누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이른 바 ‘문학소녀’들의 얼치기 자긍심이었던 셈이다.
선생님은, 원근법은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변환을 의미하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르네상스의 이념을 예술의 분야에 적용한 가장 뚜렷한 실례라고 하였다. 그러고선 평면적인 중세의 그림과 초기원근법이 사용된 그림 몇 점을 걸어놓으시고는 득의만연한 미소를 지으셨다. 봐라, 새로운 화법을 대면하고 중세인이 겪었을 가치관의 혼란이 느껴지느냐. 1분단에서부터 5분단까지를 느린 화면으로 흐르는 시선이 귀엽기는 하였으나, 아메리카 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들떠있는 선생님의 홍조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치관의 혼란이라니, 내겐 그저 화풍의 변화나 기껏해야 무지의 타파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 이름은 빨강』은 당시 선생의 소년스러운 자부심을 환기시킨다.
오르한 파묵은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시대와 시대의 틈새에서, 새로움에 대한 매혹과 죄의식 사이에서 번민하는 터키인들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세밀화가는 언어의 기록을 그림의 기록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신의 말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인물과 사물을 완전하게 묘사하는 것이 온당했고, 때문에 그들이 묘사하는 것들은 같은 공간에 같은 크기로 놓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공간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갑갑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신의 음성,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어진 상징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원근법)은 두려움을 일으켰다.
원근법은 신이 구축한 평면의 화면에 잃어버린 3차원을 재현하려는 인간의 욕구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본 외적인 실체를 그리는 것은, 인간의 개인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교회의 시녀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으며 신의 불완전함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신에게 속한 만물을 인간의 영토에 끌어들이는 일, 그것은 신의 신성함을 인간의 시간으로 지우는 일이고 인간성마저 종교의 한 속성이라 여기던 그들에게 신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외치는, 우상 숭배의 표징이었으니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문명의 충돌은 가치관의 충돌을 야기한다.
이러한, 세계관과 이념에 고정적 법칙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 오르한 파묵은 진중함과 엄숙함 사이에 살인사건과 로맨스를 배치해 둠으로써 지루함의 혐의에서 벗어난다. 또 챕터마다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의 언어로 자분대게 함으로써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내 이름은 빨강』에 속독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장 좋은 독법은 연상법이다. 화가의 눈으로 보고 화가의 손으로 그려갈 때라야 독서는 완성된다. 그만큼 오르한 파묵의 묘사는 세밀하다. 책을 읽으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 느리게 걸으며 파묵의 풍광을 음미해야 할 일이다.